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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호흡 대신 하나님을 호흡하라>의 줄거리 :
오늘 본문은 호흡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격적 호흡입니다. 하나님을 호흡하는 요나단과 세상의 왕위를 호흡하는 사울 왕이 다윗에 대해서 어떤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지를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호흡하고 있는 상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제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자와 끊고 제거하려는 자가 각자의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
세상 호흡 대신 하나님을 호흡하라
(사무엘상 18:1~30)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2.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라는 말은 결국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한 기회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실행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중심으로 <세상 호흡 대신 하나님을 호흡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목과 연관하여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힘든 게 제목을 정하는 것입니다. 제목을 정하려면 본문 말씀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완전히 정리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제목을 어렵사리 정해놓고 말씀을 전하고 나면 ‘제목을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좋겠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느낌이 좀 클 때는 설교 중에 알려드린 제목과는 다르게 영상을 올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상은 지속하여 계속 있는 것인데 설교의 내용을 가장 잘 담는다고 여겨지는 제목으로 바꾸어서 올려놓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서 설교 중에 말씀드린 제목과 나중에 영상을 올려놓고 기록하는 제목이 간혹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이후 사울 왕의 최대 과제는 다윗을 죽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참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다윗이라는 존재가 눈엣가시가 되었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결국 사울 왕은 다윗을 10년 동안이나 추격하였고, 다윗은 10년 동안이나 도망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이어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세자인 요나단은 다윗에 대해 전혀 반대의 태도를 보입니다.
1절을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는 참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공백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영인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을 공백의 마음 안으로 모셔 들여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다만, 1절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네페쉬(נֶפֶשׁ)로써 호흡을 의미합니다. 네페쉬가 쓰인 대표적 구절이 창세기 2장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생령으로 번역된 것이 네페쉬로써 혼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호흡하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살아있음의 핵심은 호흡입니다. 다만, 네페쉬라는 단어는 생물학적인 목숨보다는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 작동하고 있는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네페쉬는 인격적인 호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라는 부분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인격적 호흡과 다윗의 인격적 호흡이 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호흡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인격적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지정의언행이 움직여야 할 이유가 생명입니다. 인격적 호흡이란 결국 생명을 호흡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부분도 네페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호흡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호흡은 생명현상입니다. 네페쉬가 의미하는 호흡은 인격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호흡하느냐는 것입니다. 육체는 공기를 호흡하는데 인격은 무엇을 호흡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은 살아있는 이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살아있는 이유가 의식되는 것이 인격의 호흡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적 보이그룹인 BTS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BTS의 구성원들에게 왜 살아있는지를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노래와 공연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이유를 의식하는 상태가 인격적 호흡입니다. 손흥민 선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면 축구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축구가 생명이고 손흥민을 살게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축구 때문에 살고 있다.’라는 의식이 돌아가는 것이 손흥민 선수의 인격적 호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기업의 총수에게는 기업이 생명입니다. ‘나는 기업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산다.’라는 것이 대기업 총수의 인격적 호흡의 내용입니다.
한편, 성경에서는 어떠한 예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유대 나라의 기득권을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이유를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며 누리는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에 도전한다고 여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 나인성 과부를 생각해 봅니다. 나인성 과부에게는 아들이 생명이고 호흡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들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였습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을 봐서라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네페쉬가 의미하는 인격적 호흡이 돌아가는 예입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라는 말은 요나단도 다윗도 하나님을 호흡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호흡하고 있음을 알고 기쁨이 폭발합니다. 요나단 주위에는 아버지 사울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15살 어린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하는 행동을 보며 전율합니다. ‘저 어린 소년이 하나님을 호흡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우정이라고 생각해서 요나단과 다윗이 비슷한 연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에서 이들의 나이를 추정해 보면 요나단과 다윗은 최소한 20살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삼촌뻘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학자들이 성경의 데이터를 면밀히 조사해서 나온 결과이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서는 나이 차이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요나단은 다윗이라는 어린 소년 안에서 하나님을 호흡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4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의 겉옷은 왕세자의 신분을 상징하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는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호흡함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요나단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요나단은 마음속에서 왕세자의 자리를 아직 20살도 안 되는 어린 다윗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하나님을 호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상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제일 처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고, 22절에서는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숨을 내쉬셨을까요?
제자들은 이제까지 세상을 호흡하는 리듬 안에서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의 인생을 다 걸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것을 이룰 것이다.’라고 예수님의 능력 위에 인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세상에 대한 제자들의 호흡은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때때로 천식이 발동할 때면 기도가 바늘구멍처럼 좁아지면서 숨을 쉴 수 없게 되는데, 제자들의 마음이 이와 같은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의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기운으로 인공호흡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공호흡으로 다시 살아난 제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세상을 호흡하던 자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호흡하는 자들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본문에서 요나단과 다윗이 하나님을 호흡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도 다윗도 하나님을 호흡하던 중 위기 상황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주변 환경이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호흡함이 가빠지기 시작합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이 마음속으로 치고 들어오자마자 내 지정의언행에서 하나님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심호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게 들이마십니다.
요나단의 경우 다윗을 만나기 전에 무기를 든 소년 하나를 데리고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고 모래알같이 많은 블레셋 진영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요나단이 무기를 든 소년에게 한 말을 떠올려 봅니다. 14장 6절을 보면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 창조주 되심, 주권자 되심, 전지전능하심이라는 하나님 관련 사실을 깊이 심호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상시에 하나님을 호흡하던 요나단도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니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호흡을 가다듬기에 잠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다가 태풍 전야처럼 정적이 흐르는 상태에서, 요나단은 주변 상황들에 대해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하여 의식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심호흡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무기를 준비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특별한 전략을 짰던 것도 아닙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이룬 것처럼 어떻게 해야 블레셋 대군을 격파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심호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심호흡하자마자 담대함과 용기가 생기면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상식 수준의 이야기였으나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누구나 기초적으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호흡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삶에서 조그마한 문제만 생겨도 하나님 호흡은 질식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숨이 가빠져서 위급함과 초조함에 쫓깁니다. 요나단도 우리와 같은 성정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으로 심호흡함으로써 질식 상태를 벗어납니다. 다윗도 골리앗 앞에 설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17장 47절을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 창조주 되심, 전지전능하심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호흡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이고, 창조주 되심과 주권자 되심을 압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호흡하는 자들이 없습니다. 전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호흡합니다. 주변 상황에 의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 마음에 밀고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을 호흡하면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 그에 따라 나타납니다. 그 결과 요나단과 다윗처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말과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호흡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호흡이란 공기를 흡입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온 산소는 혈관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혈관을 타고 들어온 산소는 실핏줄까지 퍼져가면서 전신의 세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세포 속에 있던 이산화탄소를 배출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쉴 때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하나님 호흡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주변 상황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과 창조주 되심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을 호흡함이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주권자 되심에 내 의식이 항상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내 생각에도 들어가고, 내 감정에도 들어가고, 내 의지에도 들어가고, 말과 행동에도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과 창조주 되심이 나의 생각, 감정, 의식, 말, 행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상태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고,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호흡하는 모습입니다.
호흡을 통해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이 일어나듯, 하나님을 호흡할 때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호흡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며 상황은 또 바뀝니다. 그 바뀐 상황 속에서도 나는 지금 또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럴 때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은 이산화탄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의식하기는 항상 지금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1시간 전에 하나님을 의식했습니다. 그런데 1시간 전에 의식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 회장님이 직원들 앞에 서 있다고 해봅니다. 직원들은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계속 말씀하고 있는데 ‘제가 10분 전에 하신 말씀을 이해 못했으니 잠깐 기다려보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포 속으로 산소가 들어가듯이 나의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 속에 하나님 관련 사실들이 담길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은 지금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지금 또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할 일은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 관련 사실들이 계속해서 호흡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할 때마다 매번 산소가 들어가고 들어간 산소는 이산화탄소가 되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하나님 호흡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호흡하는 인격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처럼 여겼다는 것은 다윗이라는 어린 소년이 하나님을 호흡하고 있는 이 상황을 보존하여 지켜내는 일을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 말씀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라는 기능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전함으로써 듣는 여러분들이 세상을 호흡하던 상태를 멈추고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로 바뀌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만 말씀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요나단과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를 보존하는 일을 유일한 생의 이유로 삼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제게 다윗이고 저는 여러분의 요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를 보존하고 지켜내는 일을 위해서 저는 여생을 다 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가 좀 더 뚜렷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인격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깊이 호흡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요나단은 왕세자의 자리를 다윗에게 넘겨버립니다. 물론 이것은 요나단의 개인적인 일이었지 공식적인 국가 행사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나단의 마음에서 왕세자의 자리를 다윗에게 넘겨버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심호흡하는 자들의 특징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원활하면 할수록 세상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붙잡는 삶의 이유를 버리게 됩니다. 이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호흡의 근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이라고 부를 정도의 좋음과 가치들입니다. 하나님으로 호흡하는 자는 이것들을 쉽게 내버릴 수 있는 놀라운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의 성격이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호흡하되 깊게 호흡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호흡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들이 요나단의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흡입한 산소가 실핏줄을 타고 전신의 세포로 옮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들이 요나단의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을 이루는 세포들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호흡하는 기운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좋아하는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을 호흡함에서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묻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할 때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된다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유쾌하게 된다는 뜻의 아나프시크시스(ἀνάψυξις)로써 위를 향한 호흡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위를 향한 호흡을 한 초대 교인들의 삶은 유무상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호흡하면 세상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반면에 사울을 보면 요나단과는 반대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호흡하는 다윗의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 여생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호흡하는 다윗을 죽이는 것이 여생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단순히 다윗에게 왕위를 뺏길 위협을 느껴서, 개인적인 질투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혔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울의 개인적 특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의 영적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호흡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하나님과의 호흡의 숨통을 끊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생명인 엄마가 있습니다. 자녀를 호흡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번영과 성공에 대한 바람이 엄마의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 속으로 들어옵니다. 번영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으로 자녀를 대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자녀와 하나님 사이의 숨통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내가 요나단처럼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가 되면 설령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호흡하지 않더라도 인공호흡의 계기가 되어줍니다.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호흡하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는 식으로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호흡하지 못하고 세상을 호흡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의 인공호흡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사울처럼 세상을 호흡하면서 말하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람조차도 그 호흡을 끊는 방식으로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본문은 단순히 사울의 개인적인 인격이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세상을 호흡하는 자였습니다. 왕위를 호흡하고 있었고, 왕위가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서 누리는 좋음과 권세가 사울의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였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세상을 호흡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호흡하는 자와 상극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호흡하면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상대방에게 칼로 작용합니다. 하나님과 그 사람의 숨통을 끊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가 하나님을 호흡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을 호흡하였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을 호흡하게 하는 인공호흡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호흡함이란 인공호흡기가 되는 기회를 스스로 말살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마음으로는 전적으로 세상만을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도 사울처럼 살았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호흡하게 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호흡하게 된 이유는 제가 말씀을 통해서 계속 인공호흡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산소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와 똑같습니다. 제가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저에게 다윗의 입장입니다.
여러분도 요나단의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호흡하는 사람을 반가움과 기쁨으로 지켜냅니다. 하나님을 호흡하지 않고 세상을 호흡하는 사람들에게는 인공호흡의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되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내가 세상을 호흡하게 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늘의 산소를 호흡할 인공호흡의 기회가 차단됩니다. 오히려 나로 인해서 더욱더 확고한 멸망의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호흡하는 동안에는 겨우겨우 하나님 호흡의 문을 열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사울처럼 대하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처럼 하나님과 연결된 숨통을 끊는 식으로 생각, 감정, 의지, 말, 행동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취지임을 분명히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호흡함이 깊어지고 원활해질수록 세상의 모든 좋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 호흡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공호흡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반면, 내가 세상을 호흡하면 사울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시기심이 발동하게 된 것은 왕의 자리를 호흡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처럼 세상을 호흡하면 호흡할수록 점점 더 세상에 말려들고, 엉키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 벌려놓는 말과 행동만을 하게 되는 존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호흡 대신 하나님을 호흡하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나단 같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사울 같은 존재인 것을 깨닫고, 사울과 동일시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어 반드시 요나단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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