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fe.daum.net/kicha/32L7/13?q=%BB%F3%C8%C4%BF%F8&re=1
한남대교가 놓여지기 전 용산구 한남동에서 대안(對岸)인 신사 · 논현 · 역삼 · 양재 등의 마을들 즉 광주군 언주면 · 시흥군 신동면 지역과의 교류가 나룻배에 의해서 이루어졌듯이, 영동대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광주군 언주(彦州), 대왕(大旺) · 중부(中部) · 중대(中垈)의 각 면, 그리고 용인군 동부일대와 서울간의 교류는 뚝섬에서 나룻배를 이용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한 광나루는 광주 · 양평 그리고 강원도 원주를 연결하는 큰 길목이었으니 일찍이 광진교가 개설되었다.
이들 서울동교(東郊)의 교통편의를 위해 경전(주)에서 을지로∼왕십리까지의 단선전차를 놓은 것은 이미 1914년이었지만 이것으로 동부 주민의 교통수요가 충족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라는 것이 왕십리∼뚝섬 4.3㎞의 궤도 부설허가를 받고 1930년 11월에 개업하였으나 1932년 4월에 신설된 경성궤도(주)의 경영으로 인계되었으며, 그 해(1932년) 10월부터는 동대문∼왕십리에도 궤도가 부설되어 결국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연결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승객영업 노선의 연장이 7.2㎞, 이 밖에 자갈채취 운반노선 2㎞가 있었으며 정류장은 9개였다고 한다. [註9]
**
[註9]경성부 『경성부행정구역확장조사서』 1934년 p. 118 및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 중 제4 조선경제발달사 p. 138
상후원역(上後原驛)에서 분기되어 광장리까지의 궤도가 부설됨으로써 동대문∼광나루간 궤도차가 하루 14왕복으로 운행 개시된 것은 1934년 12월 25일이었으며, [註10] 이것이 개통됨으로써 영업노선 합계가 14.4㎞로 되었다. [註11]
[註10]동아일보 1934년 12월 25일자 조간 2면 3단. 매일신보 1934년 12월 27일자 7면 7단 기사
[註11]철도청『한국철도40년략사』 p. 500
경성궤도(주)의 동대문∼뚝섬선, 동대문∼광나루선은 그 연선(沿線) 일대와 대안(對岸)으로부터의 승객수송, 땔감, 채소 등의 물자수송, 자갈채취와 그 운반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서울시민의 주말 교외 나들이에 불가결한 교통시설이었고 한강변 군자동 골프장, 뚝섬∼구의리 일대에 펼쳐있는 과수원지대를 산책하는 시민들로 사계절 내내 붐볐다고 한다.
8 · 15광복이 되자 경성궤도(주)도 1945년 12월 6일자 군정법령 제33호「재조선일본인재산(在朝鮮日本人財産)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당연히 귀속재산이 되었으며 1945년 12월 8일자로 한인종업원 대표였던 강석기(姜錫麒)라는 자가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운영되게 되었다. [註12]
[註12]강석기라는 사람이 8 · 15광복 당시 이 회사 한인 종업원 중에서 가장 고참이고 또 계급도 가장 높았다는 것이 전해지는 것 밖에는 아무런 인적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한해의 이 궤도 여객수는 519만명을 넘었고 연간 여객운임은 5,383만 5천원이었다고 한다. [註13]
[註13]서울특별시 『시세일람(市勢一覽)』 1950 p. 97
그런데 이상과 같이 비록 성업 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맥만은 유지해 오고 있던 경성궤도(주) 뚝섬 · 광나루선은 6 · 25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즉 시설전체의 85%가 피해를 입어 이로 인한 복구는 민간업체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버린다. [註14]
[註14]청계천철교가 파괴되었고 차량 11대 중 5대가 가동불능되었기 때문에 동대문∼광장리간은 운행할 수 없었으며 6대의 차량으로 겨우 동대문∼뚝섬 간 7.1㎞만 운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설이 시민의 일상생활과 직결된 교통시설이었기에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 없어 「귀속재산처리법」제6조의 규정에 의하여 [註15] 1953년 10월 28일 서울특별시에서 인수 · 경영하기로 결정, 시장 김태선(金泰善)이 관리인으로 취임하였다. 이어서 1954년 4월 1일부터는 그 명칭도「서울특별시궤도사업관리청」으로 변경하여 서울특별시가 정식 운영주체가 되었으며 서울시는「궤도사업조례」와 특별회계 설치조례 및「궤도사업관리청직제규칙」등을 마련하여 이 궤도(軌道)를 운영하게 된다.
[註15]1949년 12월 19일자 법률 제74호 귀속재산처리법. 이 법 제6조는 「귀속기업체중 대한민국 헌법 제87조에 열거된 기업체와 중요한 광산 · 제철소 · 기계공장 · 기타 공공성을 가진 기업체는 이를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고 또 당시의 헌법 제87조 제1항은 「주요한 운수 · 통신 · 금융 · 보험 · 전기 · 수리(水利) · 수도 ·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청계천철교가 복구 가설되어 전쟁 후 계속 운휴(運休) 중이던 광장동까지의 노선이 개통된 것은 1957년 3월부터의 일이다. [註16] 1958년 5월 1일에 발행된『교통총람』은 1957년 말경의 이 회사상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註16]행정신문사 『교통총람』 1958 p. 347
「※ 수송상황 및 전력소비량
현재 서울특별시 운수사업청의 보유차량은 전차 10대에 버스 14대로서 그 수송인원은 일일 평균 전차가 13,000명이며 버스의 수송인원은 5,200명 정도인 바 이는 1957년 4월 중의 실적이다. 또한 전력소비량은 1957년 4월, 1개월분인 43,780kW를 나타내고 있다. ※ 수입액
1954년도 44,334,917환
1955년도 38,768,170환
1956년도 83,904,313환
이는 1954년 4월 1일 시영으로 발족한 이후 분을 표시하였음.
※ 종업원수
1957년 6월 현재 종업원 총수는 180명이며 전차 종사원은 132명이고 버스종사인원은 48명이다.
※ 노선과 운임
<표 : 노선과 운임>
궤도운임의 변천은 서울특별시영으로 발족 당시에는 10원 균일(동대문∼유원지간)이던 바 광장선은 미개통 중이었으며 그후 1954년 12월 1일부터 구간제를 채택하여 1구간 10원씩으로 변경 실시하였다.」
버스가 승객의 수송수단으로 일반화되고 그 수가 점점 늘어가자 운행간격이 길 뿐 아니라 고르지도 못했던 궤도차(軌道車)는 더 존속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채산성에서도 크게 적자경영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철거는 시간문제였지만 그래도 막상 철거해 버리자니 그동안 이용해 왔던 동부지역 주민들의 저항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서울시의 숙제처럼 되어있던 이 궤도차의 운행이 정지되고 궤도철거가 단행된 것은 5 · 16군사정변이 있은 지 두달 후인 1961년 7월 11일자 서울시 조례 제206호「운수사업조례 폐지에 관한 조례」의 발포에서 였다.
1950년대 이 궤도차를 탔던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 이 차의 승객은 주로 천호동, 잠실동 등지로부터 서울시내로 가는 채소장수 아주머니들이었고 아침의 객차는 채소장수들의 채소짐과 약간의 통학생들로 만원이 되었으며 화차는 그때까지만 해도 뚝섬에서 시내로 운반되는 땔감과 모래 · 자갈 등 골재수송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출처 :PRDB 라이브러리 원문보기▶ 글쓴이 : Techno_Holic
http://cafe.daum.net/kicha/32L7/13?q=%BB%F3%C8%C4%BF%F8&re=1
[스크랩] [뚝섬기동차] 자세한 설명 (광진구향토사료집)| ⓓ 철도 역사 (History)
Techno_Holic | 조회 219 |추천 0 | 2005.12.29. 13:47 http://cafe.daum.net/kicha/2sD0/24
뚝섬 전차역
조선 말부터 광복전후 서울의 교통을 담당하던 것은 전차이다. 1899년에 9대의 전차로 출발, 1930년대에는 전차교통망이 구성되어 1950년대까지 서울 시민의 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광복 당시 서울에는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영업선 35.9km와 경성궤도주식회사의 광장선 14.4km에 150대가 운행되었다.
광복 후 환희와 흥분 속에 전차는 운임도 받지못하고 운행되었는데 무질서 속에 마구 파괴되어 9월에는 겨우 59대만이 운행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사회적 혼란과 자재・기술의 부족으로 운전대수는 계속 줄어 1946년에 1일 평균 80여대가 운행되더니 1947년에 들어 50여대로 줄고 1947년 7월에는 겨우 27대가 운행되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하였다. 반면에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광복 당시 90만명에서 다음 해인 1946년에는 126만명, 1947년에는 164만명이 되고, 광복된 서울을 구경하려는 지방인파로 전차는 초만원이었다. 정비불량인 노후 전차의 무리한 운행과 회사원의 좌우 사상갈등으로 사고가 빈발하였다. 1946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825건이 발생하였으니 월평균 138건인데 그 가운데 101건이 인사사고였다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96
.
뚝섬역 자리・영동대교 북단 동쪽・2002
서울에는초기 서울의 전차모습 ・ 한국전력주식회사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시내전차 외에 경성궤도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뚝도선(동대문~뚝섬) 13.6km의 궤도가 있었다. 이 선은 시내와 뚝섬을 잇는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인데 당시는 뚝섬유원지와 수영장이 서울시민의 가장 큰 위락시설이었으므로 여객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동대문에서 출발한 열차는 상원(당시 상후원)에서 갈라지는데 화양동을 경유하여 광나루역으로 가는 선로와 뚝섬 유원지로 가는 선로로 나뉘어 졌다. 뚝도선이 생긴 것은 유원지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운송수단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노유 지역일대는 서울의 채소공급지인 동시에 한강 상류에서 서울로 수운(水運)되는 신탄(薪炭)을 비롯한 곡물의 집산지여서 화물수송도 필요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열차를 이용했던 어른들에 의하면 궤도사업은 여객운송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 같았지만 여객수송의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화물수송을 부업으로 삼는 것 같았다고 한다. 유원지를 운행하는 열차는 5-6냥으로 되어있으며, 열차 안은 한측으로 3명씩 6명이 앉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고 한다.
“당시 피서철이되면 사대문 안의 많은 인파가 궤도열차를 타고 우리 마을의 유원지로 놀러왔지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도 창경원에 소풍을 갈 때 그 열차를 타고 갔어”
토박이 김필수님의 열차 이용의 회고 말에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열차에 대한 동경을 느낄 수 있었다.
1956년 6월부터 궤도운수사업 외에 무궤도전차와 여객자동차의 운수사업이 개시되었다. 서울시는 궤도사업을 인수한 후 청계천 철교를 가설하는 등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여 1957년 3월에는 운휴중이던 광장선을 개통시키게 되었다. 동대문에서 광장간의 선로에는 동묘・용두・마장・왕십리・성동・상후원・서뚝도・동뚝도・유원지・화양・모진・구의의 정류장이 있었고 3구간으로 나누어 1구간에 10환의 운임을 받았다. 정기여객인 통학생은 1구(區) 1개월에 300환, 통근자는 360환을 받았으며 화물은 화차당 600환, 소화물은 개당 30환이었다 위 각주와 동일
.
출처 :PRDB 라이브러리 원문보기▶ 글쓴이 : Techno_Ho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