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בלק 발라크" :
샤밧예배
민24:14-25:9(To), 엡6:10-24(신약)
아무리 예쁜
사람도 내 속에 아말렉이 처리되지 않으면, 나한테 준 것이 없다고 생각되고, 관계를 할 수 없고, 미워하게되고, 이혼하려고 하고, 지옥 속에
들어가게 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또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지금 이번 주간에 발락을 배운다. 내 안의 아말렉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생을 For me, 나를 위한 것으로 살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 조차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을 줬어도 말이다.
제가
제 아내를 보고 정말 괴물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없을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면, 저는 발락 토라포션을 강의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어떻게 토라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제가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니라면, 어떻게 토라를 설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정말
위대한 구원의 말씀을 접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이 미치도록 부조리하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버리고, 쓰레기같은 나를 위하는 욕구들을 귀히 여기며, 그게 왕이 되는 그런 삶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
시대 가운데 믿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주님은 너희들이 이 믿음을 가지면, 믿는 즉시 그대로 되는 것을
보리라고 하신다. 이 시대에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한다. 믿음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인 줄 안다. 원수가 하나의 산이다. 그래서 믿는대로 저 원수가 가서
처박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되는 것을 믿음인 줄 안다
그러나
발락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믿음을 알려면 일단 의심을 알아야 한다. 아말렉은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발람과
발락이 합쳐진 빌벨, 혼돈이다. 바벨탑이다. 아말렉의 근본에는 בל 벨 신이 있다. 바벨론 신이다. 바벨론 신이 인류를 혼돈스럽게하고, 커뮤니케이션을 못하게
한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인류는 커뮤니케이션을 못하게 되었다. 한국말을 한다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다. 혼동 가운데 빠져버렸다. 이 בל 벨이라는 말은 לב 레브를 거꾸로 써
놓은 것이다. 레브는 마음이다. 벨이라고 하는 것은 거꾸로된 마음이다. 뒤틀어진
마음이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본다.
우주에서의 생명이라는 것은 다 이타적으로 존재하게 되어있다. 어떤 생명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계에서는 나의 죽음이 곧 다음 생명을 살린다. 죽음을
통해서 생태계가 유지되어진다.
- 풀은 초식동물을 위해서 죽는다. 풀은 왜 열심히 자랄까? 먹히기 위해서이다. 닭은 왜 열심히
꼬꼬댁 거리면서 알을 낳는가? 먹히기 위해서이다. 오늘 샤밧 음식에서 닭봉, 정말 맛있었다. 그 귀여운 닭을 맛있다고 먹었다. 그 닭은 먹히기
위해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먹음으로 닭의 데스티니를 인간의 레벨로 승화시킨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만이 먹히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만이 죽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것을 죽여서 오직 내가 살려고 한다. 이 거꾸로된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존재들 때문이다. 다른 존재가 곧 나이다. 이웃이 곧 나이다. 이것이 우주의 마음이고, 엘로힘의
마음이다. 그런데 거꾸로 된 마음이 벨이다. 이것을 바벨론 신이라고 한다. 벨 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발람, 발락은 다 이 벨 신과
관련되어있다
בלק 발락은 벨
신의 소망(ק)이다. 거꾸로 된 소망이다. 그것은 나를 소망하는 것이다.
나밖에 없다. Ego라고 한다. 평생 에고에고하고 산다. 거꾸로 된 마음이 소망하는 것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거꾸로된 마음이 소망하는 나, 조준호를 이루기 위해서 בלעם 발암이 등장한다. 거꾸로 된 나의
관점(ע), 사상이다. 나를
서포트하고 지지하는 의도, 의지를 만들어낸다. 나의 시각, 눈, View point이다. 내가 모든 선악을 결정하는, 선악과를 따먹은
눈이다. 거꾸로 된 마음이 이 눈을 가지게되면 큰일난다. 그런데 이미 큰일은 벌어졌다. 이미 우리의 마음은 거꾸로 되어졌고, 죄악 중에서
출생했고, 이미 거꾸로 된 마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이루기위한 모든 관점과 사상을 이루어왔다.
그래서 이것을 혼돈이라고 했다. 빌벨이다. 발람과 발락이 결합한다. 벨 신이 결혼을
한다. 발락과 발람은 결혼의 관계이다. 얘들이 결혼하면 빌벨, 혼돈이
온다. 모든 것은 혼돈스럽다. 뭐가 맞는 것인지, 뭐가 틀린 것인지도 모르고, 뭐가 선이고 악인지도 모르고,
혼돈스럽다. 이 혼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나를 살리는 것
밖에 없다. 기준점이 나밖에 없다. 나한테 어떻게 했느냐이다
사람은 혼돈에
빠지면 어떤 일도 못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던, 나한테 어떻게 되었는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만다. 이것을 빌벨, 혼돈이라고 한다. 이 혼돈에서 인간은 의심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다. 혼돈과 공허함이 온 땅을 덮듯이, 어둠이 미래를 덮는다. 미래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주님은
너희들이 믿는다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다. 모든 것을 의심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아말렉의 삶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교회와도 일단 여기가 제대로 된 곳인가, 아닌가, 일단 의심부터하고 본다. 그것이 나를 확실하게 이끌 것 같지만, 점점 더
불확실하게 이끈다.
주님은
바로 이 믿음을 찾는다. 믿는대로 그대로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든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Trust할 분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확실을 다 창조해놓으셨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바타흐라고 한다. 모든 것이 이미 Security하다. 하나님 안에 들어가면,
정말이다. 집에 들어가서 아버지 아래 있으면 모든 것이 Security하지 않은가? 인간의 아버지는 안 그럴 수 있다.
- 하영이가
집에 들어와서 이번 달 월세 어떻게 할꺼야? 내일 먹을게 있을까? 엄마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까? 내일부터 학비 대 주지 않을까? 이 엄마 무슨
말 하는거야? 할까? 아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나는 확신하건데..'라고 한다. 어떤 천사도, 정사와 권세도, 사망조차도, 어떤 권력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고 한다. 바투아.. 확실한 것이 이미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내 안의 아말렉 때문이다. 내 안의 빌벨, 뒤틀어진 마음은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다. 나한테 해준게 뭐냐고 한다.
주님은
니들이 아말렉을 처리하고, 떠오르는 한 별, 나를 따라서 마음을 다시 되돌이키고, 그 속에 토라를 집어넣으면 믿는대로 된다는
것이다. 다시 믿음이 살아나고,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확실을
보게된다. 믿는 그대로 된다. 빌벨이 아니라, 레브, 하나님의 마음, 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되면, 모든 하나님 나라와 모든
우주가 다 너희들의 것이다. 너희들은 그냥 하나, 에하드이다. 여기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게 확실하다.
이번
발락 기간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주어지게 되길 축복한다. 믿으시기 바란다. 믿는 즉시 그대로 되리라..!
이것은 참
재미난 것이다. 그래서 토라를 배우는 것은 이 확실함이 없으면 못 배운다. 믿음이 없으면 못 배운다. 토라는 하나님 나라, 이
세계의 언어이다. 아말렉의 세계에서는 절대 못 배운다.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니다. 이 세계의 언어를 뱀의 언어라고
한다.
말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을 혓바닥이라고 한다. 뱀이 제일로 가지고 싶은게 혀이다. 그래서 뱀하면 혓바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뱀이
제일로 탐내는 것이 혀이다. 이 혀로 악한 말을 하게하고, 혀에서 쓴 말이 나오게 하고, 모국어가 나오게하고, 사연의 말, 의심과
불확실의 말, 어둠의 말을 하게한다. 그래서 악령이 들어도 방언한다는 것을 아는가? 악령의 방언도 있다. 혀를 뱀이 탐내기 때문이다.
모든 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라고, 왕으로 고백하는 때가 올 것이다.
이 뱀의
언어는 의심을 통해서 배운다. 모든 모국어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이것만 배우면 그냥 믿음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이 있으면 정말 놀랍다. 다들
불안해하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우리 다 죽을거라고, 우리는 메뚜기고, 네필림이 다시 살아났다고 다들 이러고있는데, 믿음의 사람, 레브로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갈렙이다. 뒤틀어진 마음이 아니라, 콜레브, 진짜 마음이 일어나버렸다. 진짜 마음이 일어나서 옷을 찢고,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한다. 레헴이다.
לחם 레헴
: 빵
-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 즉시로 환상이 벗겨지고, 믿는 그대로 된다.
결국 한
사람이 일어나서,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한다. 그게 이스라엘을 살리고, 모세를 살린다. 저들이 모세까지 다 죽이려고 한다. 믿음의
사람이 한 사람이 일어나면 전 이스라엘이 다 산다. 결국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게 되는가? 이런 말은 배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토라를 배우는 것이다. 토라를 배우는 것은 결국 말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가 없으면 말을 못 배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신뢰 관계 속에서 배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는 그냥 막 받아들이면서 배운다. 어린아이들은 이해해서 받아들이는게 아니다.
cf ) 지금 우리 하나에게 가르쳤다. 너는 지금 남근기이니까 아빠를 좋아해야되.
그러면 하나에게 물어보라. 뭐해야하지? 아빠 좋아해야되라고 한다. 얘가 이해해서 이것을 받아들인 것일까? 얘가 남근기라는 말을 이해했을까?
아니다. 이게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방법이다. 어린아이들은 다 받아들여서 저장해둔다. 저장해두면 나중에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신다
어른들이
언어를 못 배우는 이유는, 이 순수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기가 일단 의심을 해야한다. 저게 뭔 말이야? 자기가 이해가 되야
받아들인다.
이
하나님 나라의 언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들이 토라를 배울 때 열심히 이해를 하는 사람들은 잘 배우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토라를 제일 못 배우는 사람들이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기가 이해해서
대단하다..! 라고 하면 토라를 배운 줄 아나, 그것은 토라를 배운 것이 아니다. 언어는 신뢰 관계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토라를 하는데, 히브리어를 쓰고 그러면 어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주님이 왜 그렇게 제자삼으라고 하시는가? 제자를 삼아야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다. 제자를 삼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다. 먼저
제자삼는 일이 있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군사부일체이다. 아비와 자녀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되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다.
얘들은
반드시 집에서 말을 배워야 한다. 말을 배울 때 얘들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 세살 때부터,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안 되죠. 저 양반을 내가 믿을만한가? 혹시 이단 아니야? 이런 얘들이 혹시 있는가? 이런 얘들은 정말 심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가 먼저 되야만 말을 배울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뱀들, 사탄이 정말 이 말을 배우기가 어렵게 만들어놨다.
왜냐면 실제로 신뢰 관계를 다 깨버렸다. 여러분 속에 많은 상처, 목회자에 대한 상처, 리더십에 대한 상처, 선생님에 대한 상처들이
있다. 대학교 때 교수들, 교수를 존경해 본 적이 있는가? 맨날 동맹휴업하고, 파쇼 정권의 앞잡이었다. 대학교도 맨날 재단 돈이나 해먹는다.
저희 학교 재단은 돈이 제일 많은데 장학금을 안 주기로 유명해서, 저는 장학금을 안 타기로 결정했다.
제자 하나가 와서 자기 대학교 때 이야기를 하면서, 대학교 때 공부를 너무너무 못했는데, 은혜로
취직했다고 한다. 얼마나 못했냐고 하는데, 말을 못하겠더라고 한다. 그런데 나보다 잘했더라.
사탄이 이미
다 깨어놨다. 목사, 목사를 존경해 본 적이 있는가? 목사가 어떻다느니, 문제라느니, 이런 소리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 있는가?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속에서 신뢰, 스승과 아비와 자녀 관계에 들어가서 말을 배울 수 있을까? 못 배운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 나한테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말을 배우는게 뭔지 모른다. 100% 신뢰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뭔지
모른다. 불안해서 못 한다. 만약 이런 소리를 누군가 한다면, 더 의심이 간다. 네가 예수님이냐? 100% 나를 믿으세요? 네가
신이냐? 이런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이 관계만이 이 말을 배우게 한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한다.
이 시대
발락과 발람의 공격은 이것에 대한 공격이다. 어마어마한 공격이 쏟아진다. 그렇게 언어를 배우지 못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언어는
사라진다.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리고 만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 하나님께로 야싸르엘하는 것, 이런 세상에서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정말 안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왜 안 좋은 일이냐면, 나한테 안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언어로는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너를 새롭게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면, 바로 죽여버린다. 너 무슨 염장지르냐고 한다. 언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용납을 안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우리는 613개의 욕구가 있다고 배웠다. 우리 안의 613개의 욕구 중, 아주 특이한 욕구가 하나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삶이 존재하는데, 육신의 삶과 영의 삶이 존재한다.
육신의
삶은 612개의 욕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파워풀하다. 이것은 절대 멈추질 않는다. 멈추지 않는 욕망의 열차이다. 이 삶은
흥미진진하다. 욕구라는 것이 사라지질 않는다.
가끔
요즘 살 맛이 안 나고, 재미가 없다는 사람이 있다. 마치 이러면서 모든 욕구를 초월하는듯한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토라를
배우니까 욕구들이 사라지고, 초월했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아우슈비츠에 갖다 놔 보아라. 뭘 초월하는가? 밥 좀 달라고 생 난리를 필
것이다. 이 욕구의 삶, 육신의 삶은 굉장하다.
그런데 영의 삶이 존재한다. 놀랍게도 우리 가운데 욕구 중의 딱 하나의 욕구가 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612개는 다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 욕구는 내가 만족해야 끝난다.
Ex ) 내가 배고프다. 내가 배고파도, 남을 줘야지? 그래서 막 준다. 그런데 계속
배고프다. 그래도 주는 사랑을 배웠으니까, 줘야지 하면서 계속 준다. 그런데 계속 배고프다. 못 참겠다.. 하면서 막
먹는다. 결국은 내가 먹어야지 만족이 된다.
얘는 결국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런데 하늘이 준 딱 하나의 욕구 이스라엘이 있다. 얘는 하나님과 하나되야지 이 욕구가 만족이
된다. 하나님에게 가야만 만족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뭔지를 알 길이
없다. 간다는 것은 공간적 개념이다. 물질적 개념이다. 물질에게 가는 것이라면, 중국 교회처럼 백투 예루살렘이라고 계속 서쪽으로 가면
되는데, 하나님께 간다는 것은 어디로 가는가? 교회로 가는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공간적, 물직적 개념이 아니다. 이게
뭘까?
- 하나님의 성품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되버린다. 같은 존재, 같은 형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성품이 같아지는 것이다. 신의 성품이 되는 것이다. 이래야만 만족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먹어야만
만족이 온다.
육신의 삶은
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영의 삶은 딱 하나, 생명나무를 먹어서 하나님과 같아져야 한다. 이 욕구가 딱 하나
존재한다. 이 생명나무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싶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먹으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화들짝 놀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나무로 얻어서, 그분을 먹어서 그분과 같아지는 이 영의 삶에 대한
욕구가 내 마음 속에 딱 하나 존재한다. 이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지금
발락에 와서 접하고 있는 것은, 이 육신의 삶이 영의 삶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육신의 삶은 영의 삶을 저주하려고
하는가? 이것이 너무 황당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영의 욕구는 결국 하나님이 그냥 주는 것 자체, 나탄이신 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되고
싶고, 모든 것을 주는 삶으로 살고자하는 것은 반발에 부딪힌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라도 되는가?
발락
주간이 오면 유난히 제자들에게서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게 가능합니까?이다. 제자 하나가 저에게 와서 통보를 한다. 2년 동안 제가
살아보니까,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애굽에서 하는 일도 쉽지는 않고, 이것도 해보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
일이라 아예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갈랩니다.
- 발락 주간에는 이스라엘을 죽이려는 일이 벌어진다. 이게 뭔 소리냐?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발락은
육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다. 발람을 수단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다 얻는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내 안에 자라도록 허락한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내 안에 있는 것, 이스라엘이 성공하도록 나도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많은 물소리로 몰려오기 시작하면, 발락은 겁을
먹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다.
- 모든 것을 주라..! 그런게 어딨냐는 것이다.
어떤
경우가 와도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실제 이스라엘 이야기도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이야기지만, 실제 이스라엘도 축복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민24:20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다. 민족은 나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세력을 이야기한다. 내 안에 나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모든 세력들의 으뜸이 아말렉이다. 왜 아말렉을 모든 세력의 으뜸이라고
하는가?
사실 가장 낮은 단계는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유치한 것을
말한다. Receive to receive이다. 이런 것은 정말 유치하고, 왕이 될 수가 없다. 으뜸이 될 수가 없다. 우리
가운데도 걔는 정말 지밖에 모르고, 치사빤스라는 얘가 있다. 이것은 절대 으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아말렉은 으뜸이다. 왜냐면 아말렉은 Give to
receive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주는 것이다. 왕이다.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자기가 이스라엘인 줄 착각할 때도 있다. 어쩌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한다.
발람도 보면 하나님과 굉장히 친한 것 같다. 하나님에게 물어본다고 하고, 신앙
생활을 굉장히 잘 한다. 자기가 이스라엘인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렇다. 실제
목적은 To receive이다.
제자 하나가 이번 발락 주간에 깨달은 것을 하나 보내왔는데, 아마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오해를 받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고 나니까, 이게 가족이냐? 이게 도대체 성도들이냐? 그 동안 내가 한 것은 도대체
뭐냐? 그러면서 자기에게 의심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들이 사랑한다고 한 것은 또 뭐냐? 그 동안 정말 성심성의껏 섬기고, 봉사하고, 자기
시간을 다 드렸는데, 엉뚱한 오해로 자기에게 막 뭐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승질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동안 한 것이 너무 억울한
것이다. 빨리 가버리고 싶은 것이다. 속에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발락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결국 내가 받으려고 준 것이구나..! 지금
막 승질이 나는 이유가 뭔가? 그 동안 한게 있어서이다. 이 친구가 그 동안 한게 적으면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게 있다.
조심하시기 바란다. 그 동안 Give한 것이 있다. 자기가 이스라엘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그 동안 Give한 것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받으려고 준 것이었구나. 내가
이스라엘이 아니었고, 발락, 발람이었구나. 이것이 깨달아지니까, 정말 내 인생이 말씀대로 되는 인생인 것이 너무 감사하고, 축복된다는
것이다. 오해받는 상황이 아무 상관없이, 내 인생 자체가 말씀 그대로이구나. 발락 주간에 발락이 드러났구나..! 그러니까 너무 은혜가되고,
지금은 한 별로 오신 예슈아만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평강 가운데 있다. 그러면서 지체들과 이런 토라포션을 나누면서 더 깊은 은혜로 들어가고
있다.
사건이 올 때마다, 내 안의 모국어가 작동되어 사연들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내 안의 주고자하는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깨달아져서 회개했다. 사건이 올 때마다 내 안의 사연, 아말렉, 뱀의 언어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가 쏟아내는 모국어이고,
내 사연의 언어이다.
그래도 천사를 동원해서 막아주셔서, 내 안의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시는 우리
주님 때문에 너무 감사합니다. 하늘의 개입이 있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결국 저주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안의 이스라엘이
살아나게한다. 이게 아말렉이었구나..! 한 별이신 주님을 보자고 한다는
것이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 결혼 후 10년 만에 주님이 내 안의 아말렉을 발견시키는
역사, 경험이 있었다. 저는 전 우주에서 나만큼 멋있는 신랑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게 저의 믿음이었다. 영성이면 영성, 외모면 외모, 사역이면
사역, 나 같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세상적인 지식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왜냐? 그 때는 머리카락도
많았다. 거의 완벽했다. 그런데,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 속에 으뜸 사상이 Give to receive였다는
것이다
나는 생명까지 던져서 선교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아예 Give to receive, 받는 의지가 없는 인간인 줄
알았다. 그래서 늘 증거가 내 앞으로 등기된 것도 없고, 상도 포기하고, 가방 두 개면 이사갔다. 아내에게 이사갈 때도 내일 우리
이사한다고 했었다. 그냥 툭툭 싸서 이사하면 되었다. 그러니 Give to
receive? 목적이 Receive? 나는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이다.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정말 구원하신 것이, 네가 아말렉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내가
원하는 것이 오지 않았을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Give to
receive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인이 불행하다고 하기 시작한다. 이게 뭔 말인가? 나같이 Perfect한 남자 앞에서? 이
여인이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원했던 삶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
존재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 나를 무시한다. 이렇게 Perfect한 남자를 무시하다니? 이게 얼마나 끔찍한 단어인 줄
아는가? 무시무시한 단어이다. 저는 결국 뭔가? 무시는 받고싶지 않고,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나는 아말렉이었던 것이다.
아말렉이었음을 고백하고, 아, 내가 받기 위한 것이었구나. 이러고 아내에게 미안하다라고 했을
때, 저에게는 새로운 삶이 찾아왔다. 저는 그때부터 토라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뱀의 언어가 없어지고, 이스라엘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발락은
사실 다 어둠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감추시고, 어둠을 타고 다니신다. 우리는 보통 어둠이 사탄의 소유인 줄 알지만, 어둠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둠을 주실까?
산술적으로보면
612:1의 투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어둠에 투자하는 것이 더 많다. 아말렉에 투자하는 것이 더 많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이스라엘에 더 많이 투자하신 것 같지만, 여러분들의 아말렉이 더 많이 투자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이스라엘의 삶을 더 많이
살았다? 아니다. 1/613만 이스라엘로 살았다. 하루 중에 1/613이면 몇 시간인가? 왜 하나님은 어둠을 만드시고, 그 속에 별이 떠오르게
하실까?
이스라엘은
어둠이 있어야만 빛을 발하는 별이다. 우리의 모든 어둠이 이제
이스라엘을 찬란하게 빛나게 한다. 내가 아말렉인 것을 깨달으면,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아말렉이다. 내가
받으려는 목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두운가를 깨달은 사람은,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빛나게 한다. 그런데 자기가 아말렉인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이스라엘인 줄 알고, 자기가 Perfect한 남자인 줄 알고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한 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민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 모압을 다 쳐서 무찌르는 것은 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 이 별이 예수님인 것을 알 수 있다. 별은 바로 그분을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야곱으로부터 한 별,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별이 결국 아말렉을 무찌르고
끝장낸다는 것이다. 아말렉은 사실 612개의 욕구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얘를 다 없애 욕구가 다
없어지면, 정말 그 인간하고 살기가 힘들다.
Ex ) 밥 먹어. 교회가자? 다 절레절레이다. 자자? 절레절레. 욕구가 없어진 인간을
상상해봐라. 맛있는 거 사줄께? 절레절레.
이게 가장 치유되야 할 인간의 모습이다. 제 아내와 저는 욕구가 별로 발달을 안 했었다. 그래서 뭐
먹으러 갈래? 라고 하면 뭐 먹으러 갈까? 그것을 그대로 물어본다. 그러면 나도 또 뭐 먹으러 갈래?라고 한다. 결국은 못
간다. 얼마나 재미없나 모른다. 괜히 어디 가자고 했다가, 신경질만 난다. 결국 꼭 이상한데 가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갔다가, 정말
맛없는 것만 먹고 온다.
이
아말렉은 그냥 없어지면 안 된다. 지 역할을 해야한다. 아말렉의 역할은 별이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정말 아름다운게 아니라, 이 상대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제가
이야기할 때, 정말 Perfect한 남자라고 할 때 정말 아름다웠는가? 정말 코미디였다. 우리는 다 그렇게 아말렉으로 코미디하면서 산다. 결국
싸우는게 내가 맞다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게 코미디인지도 모르고 산다.
그런데
아말렉의 역할은, 주님은 아말렉에 612배나 투자하셔서, 우리가 아말렉이 뭔지 철저히 알게 하신다. 평생 그것을 알게하는
것이다. 철저히 알게 한 후에, 그게 이스라엘을 찬란하게 빛나게
한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이 여인이 정말 아름답구나. 정말 놀랍다. 저는 이 여인만 생각하면, 나의 이 깜깜한 중에 찬란히 빛나는 한 빛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여러분도
저에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말렉이 어둠 가운데 별을 빛나게 한다. 이 별은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이 별은 한 백성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이해하겠다. 큰 광명체는 주님이시고, 작은 광명체는 교회, 이스라엘이다. 큰 광명체는 남편이고, 작은 광명체는
아내이다. 그래서 큰 광명체가 빛을 비추면 작은 광명체는 반사한다. 교회는 주님의
빛을 반사한다. 주님이 없으면 우리는 다 허깨비이다. 주님이 있어야지만 빛을 반사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별들은 뭔가?
이
별들은 교회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바드이다. 우리 개인이 별이다.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주님은 이 별이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늘에 있는 뭇별은 곧 네 자손이다. 별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모든 자손을 가르킨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우리가 별이 되는 시점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별이 되야한다. 이 때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기 떄문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별이 되는 타이밍이 있다. 이 때 대적을 이길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별이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를 별이 되게끔 인도하는 인도별을 이 야곱에서 나오는 한 별이라고 한다. 이것을 다라크 코카브라고
한다
דרך
כוכב 다라크 코카브 : 인도별, 야곱으로부터 다라크 코카브가 나온다.
דרך 다라크
: 인도하는 것, 길
כוכב 코카브
: 별
그
별이 동방박사를 인도해온다. 이것은 인도별이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 하나하나가
다 코카브가 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 별이 되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별이 되면 대적의 문을 차지한다. 그래서 더 이상
대적들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코카브가 되는 시점이 있어야 한다
그
동안에는 어둠과 욕망이 우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코카브가 되면,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아름다워진다. 간증을 할 때,
간증이 파워풀하고 놀라운 경우가 베드로 목사님 국빈관에 드나들던 간증이다. 고라야 그만하자? 이게 있을 때, 이 죄가 얼마나 어두웠는가, 왜
새벽 별 뜨는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가? 돌아가면서, 버스 창문 열린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
어둠이 그리스도를 빛나게 한다. 주는 사랑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 이제 그만하자. 이것은 우주의 원리와 어긋난다. 나만 살려고
하는 것은 암세포이다. 이제 그만하자.
이스라엘, 하나님께로 가자. 이것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것이다. 이 때가 별이
되어서 대적의 문을 차지하는 것이다. 대적이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초림으로 오신 메시아는 다라크 코카브로 오셔서
우리를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든다. 어두운 세상의 별처럼 만든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난다. 우리는
별처럼 빛나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뭔가? 어디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인가? 교회로 오게 해야하는 것인가?
저게 무슨 말인가?
많은 영혼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옳은 곳이
어디인가?
- The
Man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다. 우리는 한 이웃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이 이야기, 이 축복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축복의 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축복은 목적을 주는 것, 주는 사랑으로 놓게 하는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을 십자가를 지고, 나는 죽고,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이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하고, 이것을 할 때 축복한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저주의 말을 한다. 저주의 말은 목적을 나에게 두고,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점검한다. 이게 바로
저주이다.
Ex ) 옆 사람에게 가서 너는 바보냐? 너가 뭘 받았는가를 점검해라.
멍청한 것아, 맨날 당하고 사는가? 그게 발람의 저주를 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별이 되어서 온 세상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야한다.
계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 교회의 가장 핵심에, 예수님의 오른손에 왜 일곱
별이 있는가를 아시기 바란다. 주님은 초림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 한 사람을 별로 만드신다. 자기 자신에게 아말렉이 있음을 깨닫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기의 어둠이 있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별, 이스라엘을 떠오르게 하신다. 그때 우리는 메시아 시대를 살고있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는 별이 될까? 이미 별이 된 우리들은 더 이상 별이 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주님이 다시 오시면 밤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가서 주님, 내가 별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코미디 하지 마시기
바란다. 별은 이 초림 시대에, 메시아 시대에, 어두운 시대에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둡다고, 세상을 밝게 하려고 하지 말라. 내가 별이
되면 된다.
여러분 속에 어둠이 있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란다. 주님을 신뢰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고, 한 별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이 여러분들을 별로 이끌 것이다. 그분이 살았던 삶을 그대로
닮아가라. 그분의 삶의 목적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취하라.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라. 그분이 주인이라면,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여러분의 일들이 되게 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 찬란한 별로 빛나고, 영원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받으실 것이다
*
기도
이
발락과 발람이 아니면 사실 주님은 떠오르지 못한다. 우리가 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이 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 들어설 수 있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내가 발람과 발락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받으려고 사는지, 이게
얼마나 극심한 어둠인지..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제가
만약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나는 결혼이 뭔지도 몰랐을테고, 사랑이 뭔지도, 패밀리가 뭔지도, 토라가 뭔지도,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몰랐을 것이다. 약속의 땅 직전에서 침몰했을 것이다.
주님
내가 발람이고 발락입니다. 내가 그렇게 받으려는 것을 최대의 목적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 내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불가능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는 것을
불가능이라고, Nothing, 에페쓰라고 여기지 않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당신만이 찬란한 별이십니다. 나를 별로 인도하여
주십시요. 나의 어둠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별로 떠오르게 하여 주십시요.
주님
내가 얼마나 받으려고 하는 존재인지요. 나의 극심한 어둠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나의 극심한 어둠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이제 나의 안에 이스라엘이 찬란하게 떠오르게 하여 주십시요. 내 안의 발락과 발람이 이 소리를 듣게하여
주십시요. 찬란하게 빛나게 하소서. 주는 사랑이,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그 갈망이 가장 아름답게 떠오르게하여 주십시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모든 토라의 말씀, 주는 사랑, 십자가의 사랑, 나의 존재 이유, 이것만이 별로 떠오르게 하여 주십시요. 주님만이 찬란한
별이십니다.
주님,
아름답고 놀라우신 우리 주님... 나의 모든 이 아말렉, 극심한 어둠으로 인해 내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새벽 별이신지를 고백합니다.
당신의 말씀만이,당신이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만이 가장 아름다운 별빛입니다. 그것만이 이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고, 이 어두운 밤의 삶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이
어두운 때의 유일한 소망이 되며, 그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이제 봅니다.
주님
지금까지는 내가 밤하늘을 없애려고 부던히도 노력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해가 되려고, 내가 위대하다고, 내가 잘났다고, 부던히도
주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주님 이제 밤하늘에 떠오르는 한 별,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웃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제 내가 당신을 따라가려고 할 때, 나 역시도 그런 밤하늘의 별로 빛나게 하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진정한 구원자되신 예슈아,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야곱으로부터 한 별이 되셔서, 우리 모두를 이 어둠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로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별이신, 다라크 코카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
모든 일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십자가 못박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오늘 이 샤밧에 발락과 발람, 아말렉임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앞에 경배함으로 별이 된 모든 성도들
머리머리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실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