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한동일 교수 이야기
인생의 3악장은 고향에서 2005-04-02
피아니스트 한동일. 194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했죠. 피아노가 없어 서울대 의대 자리에 있던 미 5공군 사령부 강당의 피아노로 날마다 연습했습니다.
12살이 되던 1953년, 미 5공군 사령관 앤더슨 중장이 후원자를 자청했습니다. 일본과 한국 전역의 미군 기지를 다니며 공연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철모를 돌려 1달러, 2달러씩 모은 돈이 5천 달러. 이 돈은 그의 유학 자금이 됐습니다.
1954년 6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앤더슨 중장의 미 군용기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륙했습니다. 13살의 소년 한동일도 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부모님은 이별이 아쉬워 눈물 흘렸지만, 어린 그는 마냥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제 풍요롭고 넓은 세상을 보게 된다! 마음껏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다!"
중간 경유지를 몇 군데인가 거쳐 1주일만에 미국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라에서 온 음악신동'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2악장, 세계 무대를 누비며
생전 처음으로 서양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4, 5번. 음 하나하나를 마음 속에 새겼습니다. 앤더슨 중장의 주선으로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입학합니다. 프로코피에프니, 라흐마니노프니, 스크리아빈이니, 하는 작곡가 이름도 뉴욕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1956년,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합니다. 한국에서 온 천재소년은 계속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그가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마다 한국의 이름이 알려졌죠. 그는 오랫동안 유일한 음악 '국가대표'였습니다. 그의 연주회 소식은 대한뉴스의 주요 기사이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심사위원장이었던 24회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습니다. 번스타인으로부터 '동양에서 온 모차르트'라는 극찬을 들었지요. 한국인이 국제적인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이 들썩거렸습니다. 그의 도미 성공담은 가난과 피폐에 찌들었던 시절,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꿈이요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성공 뒤에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헤어져 살았고, 돈을 벌어야 했기에 많은 연주를 했습니다. 낯선 타국 생활의 외로움은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969년 인디애나 주립대 교수가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됩니다. 런던에서 만난 프랑스계 여성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여러 대학을 거쳐 1987년부터는 보스턴 음대에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6월 1일. 그가 미 군용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른 지 꼭 50년이 되는 날.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도미 50주년 기념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봤던 뉴욕 필 연주회 프로그램을 재현해 그 날의 감동을 되살렸습니다.
그를 맨 처음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부친 한인환 옹이 91살의 나이에 팀파니를 연주하며 아들과 한 무대에 섰습니다. 부친은 서울시 교향악단 창립 멤버로 오랫동안 타악기 연주자로 활동하다 은퇴한 지 오래였습니다. 감회 가득한 무대, 지휘를 맡은 이대욱은 오래 전 한국에서 그를 가르쳤던 김성복 선생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연은 그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됐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그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때라고. 철들고 나서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김치 피를 갖고 한 번 태어나면 어디 가도 그 김치 피는 변하지 않는 거예요. 잠깐 잊을 수는 있겠지만, 떠나지 않고 돌아와서, 날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이 김치 피는 강해집니다. 그게 자연인가 봐요. 조국이 그리워지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됩디다."
지난해말, 17년 넘게 재직했던 보스턴 음대에 미련 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고, 일자리도 주고, 50년 동안 나를 키워준 나라. 당신에게 감사한다. Thank you very much. 이제 나는 내 고향 한국으로 돌아간다."
3악장, 다시 돌아온 조국에서
올해 2월, 영구귀국. 50년 8개월의 긴 '외출' 끝에 집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그 동안 연주 때문에 한국을 오가기는 했지만, '내 집'은 미국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울산대 음대 교수가 됐고, 마침 공석이던 학장에도 취임했습니다. 학교에서 마련해준 교수 사택에서 삽니다. 미국에서 일하는 아내는 방학 때를 제외하고는 떨어져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외롭진 않습니다.
"인생, 참 쉽지 않아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어요. 제일 힘든 게 외로움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와 헤어져 미국, 유럽에서 혼자 지냈죠. 상처도 없다고 말 못 해요. 이제는 평화를 찾았어요. 외롭지 않아요. 학생들을 통해 내 가정을 찾았어요. I have a family."
음악과 인생 모두에서 그는 좋은 스승이 되고 싶습니다. 외국에서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을 모조리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화려한 성공 뿐 아니라 뼈저린 실수와 후회까지도.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빨리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홀로 설 수 있도록.
그의 레슨은 항상 열정이 넘칩니다. 조국에 돌아와 가르치는 제자들, 하나하나 소중하고 대견하기만 합니다. 이 학생들을 잘 길러내 세계 무대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외국의 음악가 친구들을 초빙해 마스터 클래스도 열 생각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껏 자신을 성원해준 조국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하필이면 지방대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역사가 짧은 지방 학교에서 더 큰 희망을 봤습니다. 이미 다 갖춰져 있는 학교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젊은 학교, 젊은 학생들이 좋습니다. 외국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봤지만, 이들은 특별합니다. 정이 갑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새 삶을 사는 듯한 활력을 느낍니다.
외국에서 50년을 사느라 잘 모르고 지냈던 한국의 역사와 예술, 전통문화를 이제부터라도 배워나가려 합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그런 면에서 그는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신입생 같다고 느낍니다.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렙니다.
그는 요즘 행복합니다. 평생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남들은 인생의 황혼기라는 이 시기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조국에 돌아와 쓰는 인생 3악장. 어떤 음표들이 3악장을 채울지, 그도 아직은 확실히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3악장은 앞선 그 어느 악장보다도 울림이 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가 빚어내는 '인생의 음악'은 계속될 것입니다. 3악장이 반드시 끝이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4악장도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