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차로 25분 정도 가면 도산서원이 있고, 거기서 5분 정도를 가면
도산면 온혜리가 나온다. 온양, 온정이 그렇듯이 온혜 역시 따뜻한 물의 은혜를 받은 땅이었다.
이 지역 고서 『선성지』에 "용두산 아래는 겨울 추위에도 얼지 않는 온천이 있었다(龍頭山下 冬寒不氷 溪山有溫泉)"고 쓰여 있다. 온천이 있었다는 16세기의 이 기록은 신뢰할 만하다. 그런데 왜? 이때 이미 있었다는 과거형이 되었나, 온천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지금 이 수수깨끼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전설만 남아있다.
전설은 이 온천이 나병환자들에게 큰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고, 그 결과 환자들이 몰려오자 주민들이 묻어버렸다는 것, 병든 자식을 위해 용두산 영은암에서 기도하던 어느 아낙이 어느 날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온수를 찾아 자식을 치료하라 해서 실행에 옮긴즉 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 그래서- 따뜻한 물의 은혜,- 온혜溫惠가 되었다고 한다.
有溫泉
이 기록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사람들은 땅을 파고 팠다. 그 끝에 결실을 얻었다. 온수는
기어코 나왔고 목욕탕도 지어졌다. 도산온천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 주차장엔 차량이 빽빽하다. 언제부터 목욕이 생활문화의 일상이 되었다. 온천은 현대의 풍요와 여유가 어우러지는 환락의 현장이다. 이곳도 차츰 그렇게 변모될 모양이다.
노송정
그런데 이 온천의 반대편 산기슭엔 고즈넉한 한 무리의 고가가 석양아래 을씨년스럽다.
차량 한 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고가가 조선조의 정치이데올로기를 완성한 퇴계, 그 퇴계가 태어난 집이다. 1454(단종2)년에 세워졌고, 당호는 노송정老松亭이다. 이 집 한 모퉁이 방에서 퇴계가 태어났기에, 그 방을 퇴계태실退溪胎室이라 한다.
퇴계가 태어난 해가 1501년이니, 지금부터 500여 년 전이다. 퇴계의 조상들은 원래 진보(경북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다. 그래서 진성眞城이씨라 한다. 시조 석碩의 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조선
초기 안동으로 들어왔고, 그 증손에 3형제가 태어나서 풍산, 와룡, 도산으로 분가했다. 도산에 온 분이 이계양李繼陽(1424-1488)으로, 퇴계에게는 조부가 된다. 노송정은 그러니까 이계양의 호이다. 이로부터 진성이씨 온혜파가 그 뿌리를 내렸다.
노송정이 이사를 왔을 때, 온혜는 한 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을 뿐 대부분 지역이 수목 무성한 황무지였었다. 이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었다.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각각 식埴과 우 라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 형제가 당시 지방 향리에 불과한 진성이씨를 굴지의 명문으로 발돋움하게 할 줄이야! 식은 아들을 잘 낳아서, 우는 자신이 잘나서 그 기초를 깔았다. 송재(松齋 李 1469-1517), 퇴계(退溪 李滉1501-1570), 온계(溫溪 李瀣1496-1550)가 바로 이들이다. 이런 결과는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교육으로서 집을 일으키고자 한 노송정의 결실이기도 했다. 퇴계가 쓴
노송정의 사적事跡을 보면 "자손교육을 업으로 하며 세상을 마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敎子孫爲業 有終焉之志)"고 했다.
노송정이 두 아들의 공부를 격려하는 시를 보면, "차가운 절간에서 고생스러이 공부하는 너희를
생각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때로 눈앞에 어린다, 70세를 바라보는 부모는 날마다 너희들의 입신양명을 고대한다"라고 읊고 있다. 자손들은 결국 입신양명을 고대하는 부모의 염원에 부응했다. 노송정은 그런 소박하고 단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노송정의 생애에서 믿기 어려운 일 한 가지가 바로 국망봉國望峯 관련 사적이다. 노송정
고택에서 서북쪽 산꼭대기에 이 봉우리가 있다. 국망봉은 곧 나라를 바라보는 봉우리인데 그 나라는 단종이다. 기록은 이러하다. "훈도訓導 이계양이 벼슬을 버리고 온혜로 들어와 봉우리에 단을
쌓고 항상 단종이 죽은 날 영월을 바라보며 절을 하니 후인들이 그 봉우리를 국망이라 하고 단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미관말직 훈도의 벼슬로 수양대군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조가 별 것인가. 노송정은 바로 생육신이었고, 그런 티 없는 나라사랑이 훌륭한 자손을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시조에서 송재, 퇴계까지의 계보를 간추려 보면,
식埴은 6남 1녀를 두었는데 막내가 퇴계였다. 퇴계가 도산 진성이씨를 굴지의 명문으로 도약시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동생 우 는 어떤 사람인가? 우는 호를 송재松齋라고 했는데, 진성이씨 최초의 문과급제자라 할 수 있다. 퇴계가 지은 2세 송안군 관련 글(傳疑)에 "자방子芳이 백패白牌를 잃어버려 다시 아전이 되었다"고 하고, "송안군에 봉군 된 사실은 믿을 수 없다" 했다.
요컨대 "급제, 봉군 사실이 있었다면 원래 신분인 아전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퇴계의 이런 언급이 아니더라도 송재를 진성이씨 최초 대과급제자라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대과급제는 신분을 수직 승격시키는 보증수표였다. 송재의 대과급제는 진보고을의 보잘 것 없는 아전 진성이씨를 단숨에 양반의 신분으로 전환시켰다. 진성이씨는 그야말로 송재의 발신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송재는 총명하고 청렴했으며 학문과 식견이 빼어났다. 불과 40대에 강원감사, 경상감사, 우부승지, 호조참판, 형조참판, 안동부사를 역임했고,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에 들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송재는 연산군을 모신 승지로서 뜻밖에 정국공신에 포함되었지만 그 영광은 아버지에게까지 돌아갔다. 아버지는 진성군眞城君에 추증되었다. 진성이씨라는 성씨 또한 이 봉군
추증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의 오지 도산에서 태어나 아무런 정치적 배경도 없고 입시성적도 병과丙科에 불과한 송재의 입신과 양명은 그야말로 자수성가였다. 더구나 이런 화려한 정치여정을 50세 이전에 성취했다. 송재는 49세에 타계했다. 50세 전에 이런 관직을 역임한 인물은 흔하지 않다. 퇴계가 49세에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50세에 퇴계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으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상기하면, 송재가 얼마나 빼어난 인물이었는지 증명되고도 남는다.
송재
나는 안동인물 가운데 좀더 수壽 했으면 하는 인물로 두 분이 생각난다. 한 분은 성재(琴蘭秀)의
아들로 18세에 요절한 금각琴恪이고 또 한 분이 송재이다. 금각은 10대에 세상 이치를 알았고,
이태백을 능가하는 시를 썼다고 했다. 천재 중의 천재였다. 송재도 마찬가지다. 송재 후손들이
"선조께서 10년만 더 사셨더라면..."하는 아쉬움은 정말 후손만의 안타까운 감정이 아니다. 송재의 또 다른 공로는 자녀교육이었다. 송재는 아버지 노송정의 뜻을 이어받아 자녀들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조카, 사위들도 아들처럼 교육시켰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퇴계 형제들에게 숙부는 곧 아버지였다. 이마가 넓고 총명했던 퇴계는 더욱 사랑을 더 받았다. 송재는 일찍이
퇴계를 향해 "우리 집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했다.
송재는 이들을 용수사, 봉정사, 청량산 등의 명소로 원족遠足시켜 공부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퇴계와 형 온계(溫溪 李瀣)가 대과에 급제했다. 퇴계는 예조판서, 대제학, 온계는 도승지, 대사헌, 예조참판 등의 관직을 지냈다. 사후에는 인신人臣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문순文純, 정민貞愍이란 시호까지 내려졌다. 말하자면 3숙질이 대통령비서실차장, 재경부차관, 법무부차관, 경상도지사, 서울대총장, 총무처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검찰총장, 총무처차관 등에 해당하는 관직을 역임했고, 사후에도 국가적 인물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한 가문이 탄생했다.
길이 없는 곳에 최초로 길을 낸 사람의 공로를 사람들은 망각하고 산다. 진성이씨에게 송재는 가문의 길을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퇴계 후손들이 더러 퇴계는 스승이 없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송재에게는 미안한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퇴계 자신의 無師友啓發之人이란 고백은 적어도 17세 때 송재가 타계한 이후의 심정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계정사
노송정을 돌아 나와 온혜 어귀로 오면 도산면사무소가 있다. 앞에 퇴계종택, 퇴계묘소, 육사생가, 왕모산성 등의 이정표가 보인다. 옆에 개울이 흐른다. 온계이다. 따뜻한 온천수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온계를 따라 150m정도 내려가면 모퉁이 부근에 정자와 한옥 한 채가 보인다. 정자의
명칭은 도계정사兜溪精舍이다.
들어가 보면 뜻밖에도 이 정자가 송재를 기념하는 정자임을 알게 된다. 1511년, 송재가 강원감사로 잠시 말미를 내어 부모를 뵙고자 내려왔다가 퇴계 형제들과 이 곳에서 함께 했다. 이를 기념해 후손들이 근년에 지었다. 현판에 적힌 송재의 시는 이렇다.
欲得溪山妙 계산의 아름다움 얻고자, 松門獨自回 소나무 문을 홀로 배회한다. 淸吟還敗意 맑은 읊음 사라지게, 誰遣督郵來 누가 관리를 보냈단 말인가!
한옥은 제사이다. 6. 25 전후 잠시 송재종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집 앞에 역시 개울이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은 적어도 여기서는 도계兜溪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청음석
도계에는 잊지 못할 바위 하나가 있다. 청음석. 퇴계가 송재를 기념하게 위해 명명한 바위이다.
필자는 전에 이 바위를 찾기 위해 개울을 오르내린 적이 있다. 고만고만한 여러 개의 바위 가운데 어느 것인지 알 길 없었다. 그래서 이주동李注東 종손께 여쭈니 현장안내를 해주시면서 하나의 바위를 지목해주었다. 그 바위는 내가 마음속에 지목한 바위와 일치했다. 이 바위를 잊지 못할 바위라고 한 연유는 이렇다.
"온계 하류의 개울가에 반석이 있다. 1511년 숙부 송재부군께서 강원감사로 부모를 뵙기 위해 오셨다가 이 반석 위에서 놀았다. 내 그때 아이로서 곁에서 모시었다....그때 숙부께서 欲得溪山妙, 松門獨自回, 淸吟還敗意 誰遣督郵來라는 시를 지으셨다. 이제 여러 형님과 조카들이 이곳에 함께 모여 옛 일을 추억하니 감격함을 가눌 수가 없다. 이윽고 그 돌을 청음석이라 하고 숙부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짓는다."
總角陪游地 어린 시절 모시고 놀던 곳 吟魂去不回 불러보나 오시지 않네 唯餘溪響石 오직 개울가 바위 소리만 似欲慰重來 다시 찾아옴을 위로하네
퇴계의 기록이다. 숙부에 대한 추억과 추모가 서려있다. 나이 11살, 일찍 아버지를 여원 퇴계 형제들에게 강원감사 관복을 입고 개울가로 인도한 숙부는 하늘이었다. 퇴계는 13살, 15살, 16살에도 숙부의 지도를 받아 청량산, 용수사, 봉정사 등에 가서 책을 읽었다. 이 무렵 송재는 3년을 낙향해 있었다. 그리고 퇴계 나이 17세 때 세상을 떠났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퇴계는 그때의 추억을
새삼스럽게 추모했다. 그래서 숙부가 한 것처럼 했다. 그 자리 그 바위에서. 아들, 조카들과 함께
했다.
퇴계는 드디어 감격에 복받쳐 그 바위를 숙부의 시 淸吟還敗意에서 글자를 따서 청음석淸吟石이라 하고 숙부 시를 따라 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 이후, 종질 빙憑에게 송당松堂이란 글씨를 써서
주고 숙부가 거처한 집에 달도록 했다.
옛 송재종택 터전
송당은 송재 당시의 집이었다. 송재 몰후, 오랜 세월 송재종택으로 이어진 집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온혜에 송당은 없다. 잊혀진지도 오래이다. 물어봐도 모두 모른다고 했다.
2003년 1월, 송재 종손을 모시고 온혜에 갔다. 묘소를 우선 참배하고 내려와 송당을 찾으니, 길에서 만난 어느 고로古老께서 노송정 고택 위의 한 지역으로 안내하는데, 문득 크고 잘 다듬은 돌들이 밭가에 나란히 박혀있음이 한눈에 들어왔다. 축대가 완연했다. 참판, 감사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큰 돌들이었다. 축대 주변이 모두 집터였다. 상당한 규모였다. 아, 이곳이 송당 집터였구나!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송재종택 400여년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고로의 설명은 거침없었다. 축대 뒤 산 골을 송당골이라 했고, 내가 궁금해 한 송당못의 존재와
위치도 설명하셨다. 송당못은 최근까지 있었는데 도로포장으로 매몰했다고 했다. 축대 바로 앞
10m 정도의 한 지점이었다.
당시 마당가에 만들어진 식수용 우물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송당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두 분 모두 모른다고 했다. 내가 너무 궁금하여 "그렇다면 종택이 주로 어디에 있었습니까"하니, 종손은 최근 수십여 년 동안은 봉화 서벽과 예천, 도계정사, 그리고 온혜 위 태자동의 또 다른 송당골(松堂谷)이라 하는 한 지역에 얼마간씩 살았다고 했다. 문헌자료가 더 이상 없고 정말
종손의 말씀과 같다면 송당과 송재종택의 300여년의 존재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리는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온혜를 다녀온 얼마 후 우연히 우리 집에 보관되어 있는 1800년대의 일기자료(농암영정개모시일기)를 보니, 1827년 5월 3일조에, "온혜 송당으로 가서 송재 이선생 영정을 첨배瞻拜했다. 이
영정 또한 수년 전 다시 그렸는데, 원본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선조들께서 산을 가로 하여 서로
바라보고 계시니, 후손인 우리들 또한 그 처연함을 깨닫지 못하겠다"는 기록이 보였다.
이로 보면, 적어도 1827년 까지는 송재종택이 온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온혜초등학교 앞에는 근년에 세운 송재신도비가 있고, 묘소는 그 뒤 수곡樹谷이라 불리는
골짜기에 노송정 묘소와 능선을 달리하며 함께 있다. 이런 정황을 유추해보면 송재는 둘째 아들로 큰 집 옆에 분가하여 오랜 세월 큰 집과 함께했다. 궁금한 것은 이 집들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으며, 왜 이곳을 떠나게 되었는가 하는 일이나, 이것 역시 멀지 않은 날 누군가에 의해 곧 밝혀지게 될 것이다.
송당
지금 퇴계가 쓴 그 송당 현판이 걸린 집은 안동시내 옥정동에 있다. 사람들은 이 집을 애련정愛蓮亭이라 한다. 마당에 애련정이라는 집이 있기 때문이다. 애련정은 송재가 안동부사 시절 관아 뒤뜰에 못을 파고 그 위에 지은 정자였다. 부사가 공무 틈틈이 휴식도 취하고 자질子姪들의 공부도
시킨 다목적 관아 부속건물이었다. 송재에 이어 안동부사로 부임한 농암(聾巖 李賢輔1467-1555)이 정亭을 당堂으로 고치고 확장 수리했다. 이후 오랜 세월 관아의 객사로 사용되었다. 송재,
농암, 퇴계, 한강(寒岡 鄭逑)같은 선현들의 시가 남아 있다.
그런 집이 6. 25 전후, 지금의 중앙파출소 부근에 화재로 일부가 탄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있었는데 종택에서 보다 못해 옮겨 놓았다. 송재종택은 이 무렵 도계정사에서 이 곳으로 이사를 왔고, 애련정은 사랑채 겸 별당으로 사용되었다. 종손은 얼마 전 건물을 다시 안동시에 돌려주고자 했다. 그 자리에 종택 사랑채를 지으신다 하셨다. 훌륭하신 결단이다. 외람되게 필자에게 논의를 해 와서 적극 동의했다.
시에서는 지금 이 건물을 안동댐 부근으로 이건하고 있다. 당연히 복원된 안동관아 후원으로 옮김이 이치에 맞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종손과 같이 담당국장을 만나니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송재의 생애와 업적으로 볼 때, 종택이 아직도 온전한 터전을 갖지 못함은 여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아무런 문제없을 송재영정은 그 보관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지난해 국학진흥원의 문중유물전시때의 조사자의 말로는 위험하다고 했다. 습기 때문이라
한다. 송재종택과 유물의 이와 같은 다난한 운명처럼 애련정 또한 기구한 여정이 시작될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이제 우리는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한 공간에서 우연히 송재를 만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