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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 기념관, 개설 일주년을 맞이해..
언제 어느 시대든지 타국을 침략 또는 지배하는 행위는 용서되지 않는다. 20세기까지는, 식민지 지배가 버젓이 활개치고 있었다. 지배당하는 국가들은 국가의 주권과 국민들의 일상과 인권이 유린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런 식민 지배는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지배 종언 이후에도, 식민 지배를 하던 구 종주국들은, 구 특권, 그리고 구 특권과 결합된 인맥의 온존을 도모하면서, 식민 지배 당시의 이권 수맥 유지에 노력해 왔다.
민중에 의한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식민 지배 당시의 이권 수맥은, 해방 또는 패전 이후에도 서로 상극을 이루어 아직도 살아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구 종주국 내에서, 식민 지배를 통해 단물을 빨아먹던 이른바 특권층이 이제는 여러 영역과 부서에서, 지배를 통해 얻은 이권과 인맥을 온존시키면서 자국에서의 권력 유지를 도모해 왔다.
전쟁 전, 또는 전후에는 해방 또는 패전에 의해 개혁된 부분과, 온존된 어두운 부분들이 겹치게 되면서 전후를 형성해 왔다. 특히 일본은 전쟁 전에 존재하던 권력기구 위에, 민주주의라는 법치의 옷을 덧입힌 채 전쟁책임을 회피해 왔다. 그것을 지지하는 구조가 동서냉전 구조였다. 또한 전후의 동서냉전 구조와 함께 거기에 기초한 해상교통로와 국경 주변의 지뢰밭에 해당하는 암초등이 분쟁의 요인이 되어 전후 체제가 시작되었으며, 일본도 그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전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에 의한 38도선의 분단이 있었다.
한반도가 38도선으로 분단된 이후 38도선 남쪽의 대한민국과,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본은 동서냉전 이후, 방파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어 군사 경계선의 서쪽 요새로 되어갔다.
그로인해, 일본에서는 1948년 무렵 부터 전쟁 전의 전쟁 수행자들이 서서히 옥중에서 풀려 나오고 재벌해체 역시 중도에서 해제되었으며 관료들 역시 소생하게 되었다. 국수적인 전범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합리적 반공주의자는 출옥해 정계와 재계로 진출, GHQ의 뜻에 따라 「정(政)・관(官)・재(財)」의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물론 그 목줄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전쟁 전의 역사를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고 소홀히 하게 된 주 요인이다.
한편 해방된 한반도에서는, 동일 민족이 400만 명 이상 전사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휴전협정 이후에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긴장이 강요되고 있다. 휴전선 사이의 모순된 긴장 애초에는 부차적이어야 했지만, 주된 모순으로 변하면서, 식민 지배에 대한 역사는 애매하게 변해 갔다.
한․일 쌍방에게, 전후의 출발 지점에서부터 안고 있던 모순은, 당시의 세계정세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모든 과제들이 어정쩡하고 애매한 범위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신의를 생각한다면, 전후 체제의 모순은 중대한 사태이며, 전후의 정치형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일 양쪽 모두 미래지향을 향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양국의 저변에 흐르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 규범의 지혜로 화해와 상호호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박열・가네코 후미코 두 분 의사에게 귀를 귀울여 20 세기가 남긴 불씨를 극복하는 단서로 삼고 싶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요코하마시(横浜市)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호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초등학교 입학이 거부되었다. 따라서 그녀 마음속의 절규는 학교 교육에도 향하고 있다. 「초등학교는 가능했다. 중학교나 여학교도 전문학교나 대학도 학습원도 가능했다. 부르조아의 아가씨나 도련님이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게다가 자동차를 타고 그 문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뭐란 말인가. 그것이 나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했는지. (중략) 아!, 지상에 학교라는 것이 없었다면, 나는 그렇게까지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 「무엇이 나를 이렇게 시켰는지」26-27 p)
가네코 후미코의 향학심에 반해,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는 부조리가 존재했다. 공립과 사립학교가 세워지고 학교 교육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는 아이나, 특히 여성의 진학률은 극소수에 머물렀다. 물론 가네코 후미코는 그 소수파에서 소외되었다. 그녀처럼 교육받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입장에서 학교 교육을 생각한다면, 학교가 사회의 「선별기」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선거제도라는 요망도, 관동대지진으로부터 2년 후에 시행되었으나,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탁금」제도를 도입하면서, 무산정당이나 민중은 입후보 할 수 없게 만든 형태만의 민주제도로 민중의 반항에 대응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런 불평등한 시대에 국가 권력과 같은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합의를 기초로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박열과 행동을 함께 했다.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에 의해,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끊어졌다. 9월 3일 치안 유지법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관동 대지진은 관헌이 관여한 조선인 학살의 인신 공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조선인을 선동한」대역죄가 적용되어 두 사람은 관헌의 관여책임을 지게 된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제 일선 경찰서장과 오늘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 내막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타국을 침략 혹은 식민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국내 반대세력의 일소와 민중의 회유는 필수적이다.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죄 적용 이후, 일본 내의 저항세력은 일소 되어 간다. 그 정황은, 침략과 표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도쿠가와막부(徳川幕府)를 비롯해 상당수의 일본인은, 「중국을 스승으로 조선을 형으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스승인 중국이 아편전쟁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기 직전이었다. 미국의 페리제독 내항과 불평등 조약, 이후 일본은 식민 지배 직전의 혼란상태에 빠진다. 이와함께 메이지 신정권 이후, 동아시아와 함께 근대화를 추구하던 유능한 지도자들이 차례차례로 암살되었다.
이웃나라의 근대화를 바라던 지도자들을 암살 한 후, 메이지 신정권은 조선에 대해 강압 외교를 실시한다. 그 한편에서는, 초슈(長州)의 파벌을 축으로 해서 정책을 농단하고, 「지연(地緣)+학벌」을 형성해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해 아래서 부터 솟구치는 민중의 소리를 압살해 갔다.
그것은 구미화=근대화를 향한 광란이며, 중국 그리고 조선과 일의대수로 쌓아온 생활규범의 파괴로,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과 조선에서 전해져서 일반서민들 사이에 뿌리 내린 불교, 폐불훼석(廢佛毁釋)이 거칠게 몰아쳤다. 생활규범의 파괴는 유럽을 향한 순화(純化)인 동시에 이웃나라에 대한 멸시의 포석이기도 했다.
그러한 근대화를 향한 광란의 과정 속에서 1901년 가타야마 센(片山潜),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등에 의해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다. 노동자의 권리・보통선거 제도, 교육의 국비부담을 내걸었지만 메이지 신정부는 이를 즉각 금지했다. 그러나 고토쿠 슈스이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을 지지하는 열기가 전국에 충만했던 것이다. 그들은 1906년 다시 일본 사회당을 결성한다.
이 해 아오모리현(青森県) 오미나토(大湊)의 해군 수리공장에서 스트라이크가 발생하고, 나아가 이듬 해 도쿄의 이시카와지마(石川島) 포병공창을 시작으로, 군사 공장등에서 스트라이크가 연이어 발생한다. 또한 다음 해 홋카이도(北海道)유바리(夕張)탄광과 아시오(足尾)광산 그리고 나가사키(長崎) 미츠비시(三菱)조선소 등에서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 그 결과 1910년 5월 25일 고후시(甲府市)출신인 미야시타 다키치(宮下太吉)등이 구속되고 그 주범격으로 고토쿠 슈스이등이 체포되어 대역죄가 적용,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역죄로부터 3개월 후 일본은 강제적으로 「한국병합」을 실시한다.
당시 민중은 자유민권운동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전야 처럼 반정부 운동을 펼쳤다. 그것은 아나키즘적 경향이 지식계층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내에서의 탄압과 인접국으로의 침략은 짝을 이루는 것이다. 탄압을 받아도 일어서는 민중이 존재하는 한, 권력은 민중을 회유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반항세력이 일소되자, 곧바로 민중은 솔선해 권력의 한쪽 팔이 되어 탄압에 가담하고 권력과 일체화한다.
일본의 침로에 있어서, 청일, 러일 전쟁은 분기점이었으며, 관동대지진 이후는 새로운 분기점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일 전쟁의 배상금(당시 일본 국가예산의 4년분에 상당)의 63%가 근대병기 조달에 소비되었으며 이 근대병기는 그 이후의 중국 침략에 사용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이웃나라의 모멸과 침략이 그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식민 지배에 광란하던 구미와 제정러시아에게 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는 최후의 수탈지였던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후원자로하고 제정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맥을 함께 하면서 이 땅에서 패권을 겨루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첨병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 두 나라로 부터 암묵적인 이해를 얻어 1905년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청일・러일전쟁 종결 후 일본은 구미와의 불평등 조약을 해소하고 구미에 준한 근대화를 갖추고, 다른 한편으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으면서 식민 지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 후 조선반도를 병참기지로 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1923년 9월 3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의 대역죄 발동 후 국내의 반대파 일소를 위해, 국내의 치안 유지법을 시작으로 조직의 내부재편에 착수한다.
박열・가네코 후미코에게 가해진 대역죄로부터 6년 후, 1929년 10월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한 세계공황은 순식간에 일본을 덮치고, 여기에 산리쿠(三陸)앞바다의 지진과 해일, 기후 불순은 일본의 민중을 도탄의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불황과 실업자의 증대 그리고 밀폐감이 일본열도를 덮쳤다. 한편 저항의 힘도 조직적인 힘에 의해 압살되어 갔다. 나아가 점점 더 심해지는 국수적 경향이 일본국내에 충만하기 시작했다. 밀폐감의 배출구는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하여 새로이 구만주에 대한 침략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중국,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전쟁 전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관동대지진 이후의 역사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오오카와 츠네키치 (大川常吉)에 대해-
오오카와 츠네키치는 관동대지진 때 가나가와현경(神奈川県警) 츠루미(鶴見)경찰서장이었다. 가나가와현 경찰사 상권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후, 자경단과 일반인들에 의해 잇달아 조선인들이 끌려왔다. 그 중에는 울면서 경찰에게 구제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장은 이들 조선인들을 한 때, 소지지(総持寺)경내에 수용하고 순경을 파견해 경계하게 하면서 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3일이 되자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이 비정상적으로 까지 높아져서, 「찾아내는 대로 때려 죽이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현지의 유력자들 조차 끊임없이 「일각이라도 빨리 소지지에 보호하고 있는 조선인을 내쫒아 주기 바라다.」는 요구가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서장은 적절한 판단에 따른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보호에 만전을 도모하기 위해 소지지 경내에 보호 중이던 조선인을 모두 경찰서로 옮겼다. 이것을 알게 된 민중들이 「조선인을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경찰서로 몰려들었다. 군중은 어느새 천명을 넘었다. 그들은 경찰서를 포위하고 「조선인을 편드는 경찰을 때려잡자」고 소리치면서 점점 더 심하게 폭도로 변해 갔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각오한 서장은, 「좋다, 너희들이 그렇게 까지 이 오오카와를 신뢰하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조선인들을 죽이기 전에 먼저 이 오오카와를 죽여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군중들 앞에서 팔을 벌리고 가로막아 섰다. 목숨을 건 오오카와 서장의 태도에 흥분해있던 군중들도 위압을 느끼면서 겨우 잠잠해 졌다. 그 후 9월 9일 301명 전원을 기선 「가잔마루(華山丸)」로 옮겨, 그 일부를 고베에 보내는 등 무사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나가와 경찰사에 그 기록이 보존된 것 뿐 만이 아니다. 1953년 3월 21일 재일조선 통일 민주전선 츠루미(鶴見)위원회의 유지에 의해 오오카와 츠네키치가 잠들어 있는 츠루미의 도센지(東斬寺)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오오카와 츠네키치는 현장을 직접 다녀보는 것을 근본 취지로 삼고 있었기에 조선에서 건너 온 노동자들의 평소 태도가 온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의 패닉과 그런 상황 하에서 민중이 「유언비어」에 선동된 것은 끔찍했다.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자경단 등등에 의해, 무차별하게 학살된 것이다. 제 일선 경찰서장의 행동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당시 직무에 충실했던 모습이었다. 또한 많은 지식인들 역시 그런「유언비어」가 권력에 의해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매스컴등을 통해 그 「유언비어」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조선인 학살이나 나라시노(習志野)연대에 의한 노동운동 지도자 학살이 대지진의 소란을 틈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 국내 전체적으로 보면 학살을 비난 하는 소리 역시 사라지지 않았으며, 자제력 역시 숨을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의 진두지휘자-
관동대지진 당시 경시청 본부에서 진두지휘를 하던 자는 경무부장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였다. 1944년 경시청 내에서 쇼리키 마츠타로는 강연을 통해, 관동대지진 때에 「조선인 폭동 소문을 조직적으로 유포로 인해 세정이 혼란에 빠지고 자경단에 의한 학살과 가메이도(亀戸)사건 그리고 아마카스(甘粕)사건의 요인이 되었던 사실에 대해 “유언비어 유포는 실패였다.”고 했다.」
제54대 중의원 의장이었던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는 쇼리키 마츠타로의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회상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쇼리키 마츠타로에 대해서는 와세다 대학의 아리마 테츠로(有馬鉄郎)의 노작 「일본텔레비전과 CIA・발굴된 「쇼리키 파일」」(新潮社刊)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미국의 공문서를 조사한 끝에 얻어낸 자료로, 한일 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분쟁을 풀어주는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쇼리키 마츠타로는 2년 후 좌천되어 그 후 요미우리 신문사의 사장이 된다. 이후「유언비어 유포」 선동의 한계를 절감한 경시청은 조직적인 장치를 준비한다. 특별경찰부이다. 특고(特高)라고 하며 공포의 조직이다. 그 초대부장(공안부장)으로 취임한 자는, 중국의 광저우(廣州)에서 중국 공산당의 조사임무를 맡고 있던 아베 겐키(安部源基)였다.
아베 겐키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동향에다 함께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들이 도쿄대학에 입학할 당시, 학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미노베 타츠키치(美濃部達吉)등에 의한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미노베 타츠키치에 대립하던 헌법학자로는,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가 있었다. 그는 도쿄대학 내에 국수적인 써클인 「목크요카이(木曜會)」를 조직 하고 있었다. 도쿄대학에 입학한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겐키는 입학과 동시에 이 모임에 참가한다.
원래부터 초슈(長州)의 무리는 국수적 경향이 강해, 우에스기 신키치의 생각에 호응했을 것이다. 이 써클은 학교 밖의 국수적 사상가인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기타 잇키(北一輝)등과 교류를 통해서, 미노베의 「천황기관설」공격의 논진을 펼쳐간다. 한편 육군대학 내에도 1927년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를 중심으로 「후타바카이(二葉会)」가 결성되고, 2년 후인 1929년 도쿄대학의 「목크요카이(木曜會)」와「후타바카이(二葉会)」가 통합해 「잇세키카이(一夕会)」를 결성한다. 이렇게 학내외 국수파의 거점을 통해 젊은이들이 물들어 갔다.
도쿄대학과 육군대학 내의 국수적인 써클은 제휴와 무대를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 경향은 구축되어갔으며, 기시 노부스케・아베 겐키 그리고 도조 히데키등은 그 인맥을 통해 국수주의를 넓혀 갔다. 아베 겐키는 38세에 초대 특별경찰부장으로 취임해서 43세에 경시총감으로까지 승진한다.
쇼리키 마츠타로와 달리 「유언비어 유포」와 같은 수법이 아니라, 내부고발 수단을 구사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을 찾아내고 치안유지법등을 개정하여 사형등을 통해 조직의 괴멸을 기도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사상경향은, 아나키즘의 시대에서 러시아혁명으로 촉발되어 사회주의가 침투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마르크시즘은 아나키즘과는 달리 조직론을 갖추고 있었다. 아베 겐키는 그 조직 내에 스파이를 침투시켜 과격한 행동을 지시하고 스파이에 의한 내부고발을 통해 철저한 조직해체를 도모해 갔다.
「적색 갱사건」, 「공산당 스파이 사문사건」등등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적색사냥꾼 아베」라고 두려워했으며,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도 그의 지휘권 하에서 고문으로 옥사했다. 전후에 미야모토 유리꼬(宮本百合子)가 「파시즘은 살아 있다」(靑空文庫)등에서 아베 겐키에 대해 밝혔다. 아베 겐키는 전쟁 말기 스즈키 간타로 내각(鈴木貫太郎 内閣)에서, 내무대신과 기획원 총재를 맡았으며, 포츠담 선언 거부로 일관했다. 이 거부로 인해 전쟁 종결은 늦쳐지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관동대지진 이후 조직적 탄압의 구조가 경시청 내에서 준비되었으며 그와 함께 지역의 공적조직이나, 인보제도(隣保制度), 매스컴, 학교 등을 통해 대정익찬회적(大政翼賛会的)인 교육이 시행되었다. 국가권력에 반대 혹은 이의를 품고 있는 개인 또는 조직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치안유지와 국가에 의한 폭력이 일반화 되었다.
1923년까지는 「유언비어」와 「여론」을 통해 민중을 지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민중의 입은 막히고, 대신에 국수적 색채가 모든 분야로까지 물들어 갔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의 요괴」라 불렸다. 그 이유는 구 만주, 한반도의 이권과 깊게 결합되어 있어, 그 자금이 전쟁수행 뿐만 아니라 일본 내의 반대파 탄압의 자금으로 쓰였던 것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전범이 된 우익의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는 그의 회상에서 구 만주와 조선에서 거둔 이익의 일부가 우익의 자금이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요즈음의 혐오발언(hate speech)을 생각할 때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아베 겐키, 기시 노부스케, 쇼리키 마츠타로, 도조 히데키 모두, 전범으로 스가모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가 교수형에 처해진 다음날 기시 노부스케가 출옥하고, 이어 아베 겐키와 쇼리키 마츠타로 등은 동서냉전의 구조 하에서 출옥해 이후 전후 일본의 중추를 담당하게 된다. 관동대지진 때의 「유언비어 유포」의 원흉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에게 초점을 맞춰 출옥한 세 명에 대해 전후의 동향을 쫓아가 본다.
쇼리키 마츠타로(1885—1969): 그의 전후는 화려해, 프로야구의 아버지, 텔레비전 방송의 아버지,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등등 칭찬이 거듭되고 매스컴계의 배후 실력자, 프로야구나 연예계의 배후 실력자로 활약하고, 정계에서도 1957년 7월 제1차 기시내각에서 국무대신(국가공안위원회위원장, 과학기술 장관, 원자력위원회위원장)등에 취임해, 일본 원자력 발전의 실력자로 솜씨를 발휘했다. 물론 기시 노부스케와 하나가 되어 원자력 발전에 손을 뻗은 그 이면에는, 일본의 핵개발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전후, 아베 겐키는, 스가모에서 출옥하자마자,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신일본 협의회(新日本協議會)를 결성한다. 그러나 「적색 사냥꾼 아베」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민의의 이반을 겪으면서 결국 정계로 진출하지 못하고 막후 배후자로 남게 된다. 전후 일본은, GHQ의 민생부(民生部)와 전쟁 전 탄압을 받던 사람들 즉, 노동자, 제자를 전쟁터로 보낸 교사, 청년회, 부인단체 등등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서냉전이 시작되자마자, 민생부는 본국에 귀국하고, 거기에 대신해 실권을 잡은 것이 군정부(軍政部)다. 이 군정부에 호응한 것이, 「정(政), 관(官), 재(財)」로 상호 공동이익에 따라 전후를 형성하며 갔다. 그러나 외교에 있어서는 미국과의 이해 일치가 계속 요구되어 왔다.
그런 어둡고 감춰진 역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것은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 터부시 되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열린 나라다. 미국의 공문서는 30년이 경과하면 열람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미국의 공문서를 통해 알아 낼 수 있는 그것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의사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다.
「대역죄」로부터 9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우리들은 그 두 사람이 바라던 시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두 사람이 대역죄로 구속된 1923년부터 일본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자국민을 압살하는 국가에는, 타민족을 억압하는 구조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전쟁 전의 전쟁 수행자, 그리고・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장본인이,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그리고 매스컴계의 아버지로서 칭찬받고 나아가 그들이 국권을 잡고 있는 한 역사인식은 불행할 것이다.
역사인식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일본의 국민에게 불행하며, 긍지와 품격을 해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같은 정황을 허락하는 것은 전쟁 전의 국수적인 색으로 물들 위험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음모와 모략 그리고 가상적으로서, 나라와 나라, 국민과 국민이 서로 싸우고 서로를 증오하는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진지하게 과거를 되돌아보고, 또 과거를 전신거울로 비추어 보아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역사는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비뚤어진 모습을 바로잡고, 새로운 신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번 세미나의 인사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2013년 7월 20일
야마나시현 「가네코후미코연구회」회원 오자와 류이치(小澤竜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