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는 544년(백제 성왕 22)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창룡사(蒼龍寺)라 칭했다고 한다.이에 관한 문헌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백제 때부터 철천리로 이름난 야철산지의 큰절로 알려져 있다.
이곳 철야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0 「민애왕편」과 『삼국사기열전』제4 「김양」편에 민애왕과 신무왕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나주는 영암 구림, 나주 회진, 영산포 등 영산강 뱃길을 통한 해상무역의 거점지로서,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라의 왕위 찬탈을 노린 신무왕 김우징과 민애왕 김명의 결전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미륵불상의 조성과 함께 왕건과 견휜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는데, 나주의 해상력과 경제력을 얻으려는 왕건과 견휜이 이곳 덕룡산 자락을 배경으로 대치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창건 이후 미륵사에 대한 연혁은 찾을 수 없으며, 현재의 미륵사는 6.25 이후 거의 폐사되어 인법당의 모습으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부터 30~40년 전에는 미륵당이라 불리면서 무속인(巫俗人)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주지 원일(圓日) 스님이 부임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삼성전ㆍ요사채를 건립하여 가람을 정비하면서 전남의 용화도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미륵사 안내석
미륵사 요사채
미륵사 수조
미륵사 포대화상
미륵사 대웅전 오르는 길
미륵사 관음전
미륵사 대웅전에서 바라다본 전경
미륵사 요사채
미륵사 대웅전
대웅전내 삼존불
미륵사 대웅전 벽화
미륵사 삼성각
미륵사 나주 철천리 석불입상
보물 제462호
덕룡산의 창룡 아래 칠불석상 뒤편에 자리한 석불입상은 높이 5.38m의 거불로, 광배와 불상과 대좌가 한 몸인 고려시대 불상이다. 불상이 자리한 이 곳은 산세가 연꽃의 봉우리 같이 아늑한 곳으로, 불상은 연꽃의 중심인 화심(花心)에 자리한 형태이다. 상호는 뺨에 살집이 두둑한 네모진 얼굴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를 표현하였고, 이목구비는 가늘고 긴 눈, 펑퍼짐한 코, 두툼한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감추고 있다. 신체와 연결되는 굵은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표현되어 있으며,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에는 양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U자형의 통견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수인은 두 손을 들어 시무외(施無畏)ㆍ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지만, 오른손을 여원인하고 왼손을 시무외인한 특이한 모습이다.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2조의 신광과 두광이 결합되어 있다. 두 줄의 선으로 테두리 지은 두광 내부에는 단촐한 연화문과 당초문이 새겨져 있으며, 외부의 신광에는 역시 두 줄의 선 안에 도식화된 구름문양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석불은 얼굴의 비만감 또는 괴체화(塊體化)되어 가는 신체적인 모습에서 고려초기 거불의 조형적 특징이 엿보이나, 대칭적이고 규칙적인 당당한 어깨, 촘촘하게 주름진 생동감 있는 의습, 당찬 상호의 표현 등에서 전대의 뛰어난 조각수법을 살필 수 있다.
보물 제462호로서 언덕 아래 칠불석상과 함께 미륵사의 미륵부처님으로 칭해지며, 이웃의 만봉리 석가여래입상 및 운흥사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나주지역의 특이한 미륵부처님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 산황대신지위비
덕룡산 창룡 아래 자리한 이 비는 용의 가피를 입은 미륵사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비문은 오석(烏石)에 음각되어 있으며, 아치형의 귀부에는 창룡출운(蒼龍出雲)이라는 글귀와 산황대신지위(山皇大神之位)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는 미륵사가 용의 가피를 입은 절로써 용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창룡이 덕용산의 산신으로서 이 비가 산신각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용의 가피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난 무렵에 일어났는데, 마을사람들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을을 비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며칠 후 왜군이 마을에 들이닥쳤을 무렵 철천리 마을민들은 현몽을 믿고 그대로 마을에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구름이 일어나 3일간 마을을 감싸는 바람에 왜군은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지나치게 되어 난을 면하게 된 것이다.
비석은 높이 110㎝, 폭 37㎝의 아담한 크기로 귀부에는 음각으로 장식된 쌍룡문이 새겨져 있으며, 배면에는 비를 세운 시주자들의 명호(名號)가 새겨져 있다.
나주 철천리 칠불석상
보물 제461호
이 불상은 대웅전을 끼고 돌면 나타나는 편편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깔을 엎어 놓은 듯한 95cm 높이의 원추형 바위에, 표면을 돌아가며 여섯 기의 부처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매우 희귀한 형태의 조각상이다.
동쪽과 북쪽에 두 기의 좌상과 남쪽 면에 4기의 입상 등 모두 6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서쪽에도 2기의 불상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제강점기에 광부들이 떼어냈다고 전한다. 실제로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좌상 한 분과 거친 정자국이 보인다. 이외에 바위 맨윗부분에도 석동자상(石童子像)이 있었다고 전하여 원래는 9불(佛)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석동자상이 있던 옛날에는 미륵사를 찾은 아낙네들이 칠불석상의 동자불상을 밀어서 스스로 잘 돌아가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으며, 동자상이 사라진 뒤부터는 이곳에 둥근 돌을 올려놓고 굴리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6기의 불상들은 야외에 노출되어 있는 관계로 풍파에 닳아 그 모습이 자세하지 않으나, 모두 육계와 얼굴 윤곽만은 분명한 부처의 모습이다. 얼굴은 갸름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호를 지녔으며, 몸에 비해 도드라진 조각수법을 보인다. 얼굴에 비해 체구는 작은 편이고, 팔과 다리를 제외한 몸의 굴곡은 표현되지 않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석불과 칠불석상
미륵사 찾아가는 길
나주시에서 영암방면 1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영산대교를 지나 외국어고등학교 삼거리에서 23번 봉황방면 지방도로 접어든다. 봉황면 못 미쳐 와우리 삼거리에 철천리 철불좌상의 입간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봉황농공단지를 지나 819번 세지방면으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덕룡산 중턱에 미륵사가 보인다. 불회사와 운흥사 방면에서 미륵사로 가려면, 나주방면으로 진입하여 송현리에서 좌회전한 뒤 819번 지방도를 따라 세지방면으로 6㎞쯤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