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伽倻山)의 칠불봉(七佛峯)
5시에 출발해서 일사천리로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던 버스가 군위를 지나게 되니 도로 옆 논에서는 벌써 아낙네들이 모여서 모내기 준비를 하고 있다.
농사꾼의 출근 시간이 해뜨기 전이라고 하지만 참으로 많이 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옛날의 풍습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을 먹기 위해 군위 휴게소에 들리니 식전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러한 곳에 와보면 그러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인 것 같기도 하다.
3시간 반 만에 대구를 지나 해인사 반대편인 백운계곡주차장에 차가 닿으니 백운 2 리였다.
오늘 우리는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을 거쳐 해인사까지 6시간코스의 산행을 위해 춘천을 출발했다.
어제의 일기예보대로라면 비가 내려야 하는데 구름만 약간 끼어서 산행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날씨였다.
매표소를 지나 잘 다듬어진 숲길을 오르자니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은 도시에서 찌들었던 마음을 한결 상쾌하게 한다.
구들장만한 바윗돌이 깔린 길을 사뭇 오르다 보니 바위틈 계곡으로는 약수 물이 흘러내리고 응달에서 다소곳이 피어있는 함박꽃의 짙은 향기는 온산에 퍼져 있다.
자연이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항상 사로잡는 것이긴 하지만 때가 되면 잎을 틔우고 꽃을피우며 열매를 맺는 과정이야말로 참으로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없다.
햇빛을 볼 수가 없는 숲길이지만 오래 걷다보니 윗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길은 사뭇 유하다싶을 정도로 급경사가 진 곳은 드물었으나 둥근 나무로 만들어 놓은 층계를 오르는데는 힘이 들었고 그때까지 수십 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바위자락을 껴안고 내려가거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쇠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없어 힘은 사뭇 덜 들었는데 웬걸 칠불 봉이 보인다는 지점에 이르러 그 쪽을 바라보니 아득히 하늘과 맞닿은 곳에 철제로 만든 사다리가 보이는데 그 때 “ 아이고 나 죽네”하는 한 여자의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산이 높아 비가 자주 뿌리는지 응달진 곳의 흙은 촉촉이 젖어 숲의 향긋함을 뿜어내는가 하면 안개구름은 저녁 늦게 시골집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산꼭대기를 휘감아 올라간다.
칠불 봉까지 가려면 적어도 30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아 거북이가 토끼를 뒤쫓듯이 온힘을 다해 오르다 보니 첫째 철사다리가 눈앞에 다가왔는데 되돌아보니 일행들은 다 떨어지고 한사람만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파르게 놓여져 있는 사다리 난간을 잡으며 오르는데 좀처럼 발이 무거워 제대로 올라가지를 못한다.
그런데 나를 앞서가던 젊은이가 갑자기 ”어“ 하면서 걸음을 멈춰 선다.
얼굴색이 노래지며 한참동안 철사다리를 붙들고 있던 그는 겨우 말을 하는데 얼마 전에 갈비뼈를 다쳐 치료를 받던 중에 낳은 줄 알고 떠난 것이 출발할 때부터 좋지 않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앞뒤를 살펴봐도 사람이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가방을 이리 주는 게 좋겠소. ”
그런데 가방에는 무엇을 그리도 많이 넣었는지. 내 가방에는 도시락 한 개를 달랑 넣어 가벼웠는데 이 사람 가방을 메어보니 마치 수석을 줍고 다니는 사람들이 돌이란 돌은 다 주워서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첫날밤에 된서방을 만난다더니 가파른 철 사다리를 올라가다 말고 환자의 가방까지 짊어져야 하다니 이거야 원?
어쨌거나 가방 두개를 메고 기를 쓰고 오르다 보니 『칠불봉 七佛峯 1433m』 이란 흰 색깔의 화강석 비석이 서 있다.
환자도 한참 후에 올라왔는데 된 불은 껐다는 것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칠불 봉을 한 바퀴 돌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칠불 봉에서 내려다 본 가야산은 녹색의 융단을 펼쳐 놓은 듯이 그 결이 섬세한가 하면 마치 신라의 향기가 듬뿍 배고 있는 경주의 왕릉 한 기(基)를 옮겨다 놓은 듯이 가운데가 봉긋한 모양으로 솟구쳐 있었다.
사시사철 가야산의 풍광이 변한다고 하겠지만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현혹케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산들의 정상에 올랐을 때 산의 정경을 살펴보면 대부분 바위 억설이거나 수해로 인한 피해의 흔적이 남아 볼품이 없었는데 가야산에서는 그러한 피해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그것은 그동안 산을 관리하는 관청이거나 담당공무원이 제 역할을 다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칠불 봉 꼭대기에 정상의 얼굴이랄 수 있는 비석만 보아도 얼마나 깔끔하게 다듬어 세운 것인가.
게다가 오석에는 가야산의 유래까지 새겨놓았다.
「가야산은 해동팔경 또는 영남지방의 영산으로 이름이 있으며 예부터 정견모주( 正見母主)라는 산신이 신령 소모 산에 살았는데 산신은 천신 이질하 (夷毗詞)에 감응되어 두 아들을 출생하였고 그 중에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 시조가 되고 뇌질정예(惱窒正裔)는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칠불 봉은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김해 김씨 시조가 되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는데 그들은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7명의 왕자는 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 높은 칠불 봉 밑에서 수도를 하다가 생불(生佛)이 되었는데 칠불암자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안개구름이 아니었다면 해인사의 수려한 절경을 하늘에서 내려다 볼 수가 있었을 텐데 좀처럼 구름이 거치질 않아 그냥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던 길에 배가 고파 시원한 그늘을 찾아서 도시락을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었다.
조금 전 까지 상을 찌푸리던 환자도 아침을 걸렀다면서 게 눈 감추듯 도시락을 비운다.
그의 환부가 낳아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오늘 나의 어깨 반쪽 가량은 멍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이미 3시를 지나고 있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4시까지 주차장에 도착하자면 걸음을 빨리 해도 바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왼쪽으로는 계곡 물이 흘러내려 몇 번이나 수건을 적셔 땀을 닦으면서 마침내 해인사 가까이 당도하였는데 마지막 구비를 돌다보니 앞서가던 그 사람이 걸음을 멈추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걸 좀 보라는 것이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의 뿌리였는데 얼른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눈을 좀 크게 뜨고 보세요. 부처님도 보시면 미소를 지으시며 저와 꼭 같은 생각을 하실 걸요.”
그가 희열에 찬 가운데 설명하는 것을 들은 후에야 과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새 내 미간에도 미소의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삼처럼 생긴 두 개의 뿌리가 양쪽으로 쭉 뻗어나간 것이 마치 여자의 불두덩처럼 생겼는데 뿌리 한가운데에는 시골집 울타리에 길쭉하게 매달린 호박크기의 반지르르하게 생긴 돌이 묘하게도 오뚝하게 박혀 있었다.
느티나무가 자랄 때부터 이 돌은 숙명적으로 뿌리 가운데에 놓여 있다가 뿌리에 말려 들어간 모양이다.
“ 안 그렇습니까. 천연스럽지요 ?”
‘오늘 이 사람이 아니면 천연스럽게 생긴 이 보물을 그냥 지나칠 뻔한 생각을 하니 운이 된통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다음에 가야산에서 다시 만날 기회를 가져야겠네요. 하하하.”
그 사람도 웃었지만 나도 웃고 있었다. 황소가 웃듯이….
해인사를 돌아볼 시간도 없어「伽倻山 海印寺」라는 현판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하니 어느새 석양은 앞사람의 목덜미를 붉게 물 드리고 있었다. ( 21. 문예시대)
金 斗 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