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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정 왕 후 (文定王后 )~
사신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
윤비(尹妃)는 사직(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 명종실록 31권, 20년(1565 을축) 4월 6일(임신) ]
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왕비이자 13대 왕 명종의 모후로서
명종대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1501~1565)에 대해
훗날 실록을 편찬한 사신이 덧붙인 평가의 일부이다.
명종실록은
홍섬을 총재관으로 하여
선조 때에 대거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파들에 의해 편찬되었으니
이 문정왕후에 대한 평가는 바로 사림파들의 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림파는 조선중기 이후부터 중앙 정치무대의 주인공이 된 세력으로
조선초기에는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학자층이었다.
이들은 성종대부터 중앙으로 진출을 꾸준히 꾀하다가 훈구세력과 갈등을 빚고
4번의 사화를 겪기도 하였다.
사림파는 선조 대 이후에는 완전히 중앙 정치 무대에 정착하였고 이후 변신을 거듭하며
조선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문정왕후의 무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해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문정왕후는 그녀 이후 조선왕조 내내 왕비가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여하려 하거나,
처신에 문제가 있을 때면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남성 관료들을 호령했고 조선의 국시이던 억불정책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호불했으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외면하고
강력한 독재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선시대 내내 남성 지배층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편,
문정왕후는 남존여비가 세상의 정당한 가치관이라고 굳게 믿어지던 시대에
비록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누구보다 지적(
발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오로지[오직 한 곬으로 하다] 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 될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고
지성과 지성의 대격돌장이던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시켰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지적(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조선왕실에는 몇차례 왕비들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남성 관료들을 쥐락펴락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종종 부정적인 의미로
중국의 측천무후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역발상을 해보면 그것은 그만큼 문정왕후의 정치능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정왕후에 대해 이후 남성 지배층들이 보여준 것은
불평이나 비난의 수준이었을 뿐,
그녀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한 것을 보면~
문정왕후는 조선 전시대를 통해 매우 강렬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나 짐작하게 한다.
그녀의 능호를 여느 왕비들의 능호에 주로 붙는 여성적인 글자가 아니라
‘태(泰)’자를 붙여 태릉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정왕후가 가진 탁월함과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주는 한 부분이다.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反政)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신씨였는데
연산군 때의 권신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신하들이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결국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이 되는 꼴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중종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여동생
장경왕후윤씨였는데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장경왕후 사후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잠시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반정(反政)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경왕후의 복위논란은 곧 잦아들었다.
당시 반정(反政)공신 세력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서로 분열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잃은 세자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 박씨같은
후궁의 자식들에게 치이지 않게 하기위해
세자(훗날 인종)의 외삼촌 윤임은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 가문의 처녀를 왕비 후보로 밀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되는 이 윤씨 처녀는 당시 17세였으며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앞서 실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던 당시 소녀들과 달리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윤임 덕에 국모라고 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궁들의 등쌀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못했다.
신하들의 입김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힘없는 왕,
중종의 왕비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 같아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세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돌며 자신의 안위를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녀는 중종이 사랑해 마지않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이
정쟁에 휘말려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그녀가 아들을 낳아 세자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윤임의 견제도 호시탐탐 당해야만 했다.
말만 국모였지 바늘방석같은 왕비의 자리에서 젊은 시절 문정왕후는
정치의 쓴 맛을 골고루 맛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의 비참함과 굴욕을 흘려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앞날을 위한 경험으로 체화(
왕비지만 왕비같지 않은 눈물의 세월을 보내던 문정왕후에게 기회가 왔다.
그녀가 왕비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은 것이다.
내리 딸을 낳고 당시로서는 노산인 30대 후반 나이에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의 기쁨도 잠시
그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지난 긴 세월동안 방패막이 삼아 끼고 돌며 키워 온 세자(훗날 인종)였지만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정왕후에게 세자는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위해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되었다.
세자를 끌어내리고 경원대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문정왕후는 적극적으로 정쟁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와 그를 보호하는 윤임세력과 맞섰다.
두 윤씨의 대립을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하고, 윤임을 대윤이라고 하여 소윤 대윤의 대립이라고 하기도 한다.
야사에 의하면 문정왕후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세자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한 세자를 독한 말로 구박해 병들게 하고,
때로는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 실록에 남은 기록을 보면 문정왕후는 세자에게
장차 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자신을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품고 있던
인종을 근심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문정왕후의 이러한 세자측에 대한 날카로운 대응은
단지 경원대군에 대한 그녀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윤임이 김안로등을 내세워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획책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안로의 음모는 결국 이를 빨리 알아챈 문정왕후가 중종을 움직임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문정왕후는
실제 권력이 없는 허울 좋은 자리가 얼마나 소용이 없는지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병약한 세자를 내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중종 사후
인종이 다음 왕위를 이어받았고
문정왕후의 정적이던 대윤 윤임은 권력의 핵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문정왕후는 여러 면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윤임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못했다.
대신 몸이 약한 인종을 몰아붙여 힘들게 하였다.
결국 인종은 문정왕후가 바라마지 않게 즉위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중종의 유일한 적자로 남은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12살 나이에 조선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하였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정치에 대해 듣는다’
란 뜻으로 동양에서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면서
차마 여성으로써 남성 관료들과 직접 대면하지 못해 왕의 뒤나 옆에 발을 드리우고
국사를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것이 처음이었고
그 다음이 바로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는 12살 명종을 대신하여 8년간 수렴청정을 했는데
수렴청정을 그만 둔 뒤에도 아들 명종을 휘두르며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정치를 일일이 지시했으며 왕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가 왕이 된 것은 모두 나의 힘이다’며 윽박지르고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틀어쥔 뒤 일단 자신을 핍박했던 대윤파를 일소하였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은 이전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세력과
이를 개혁하려는 사림세력 간의 갈등이었다.
을사사화는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훈구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의 대세는 사림에게 있었다.
사림들은 훗날 선조대에 가면
대거 중앙에 진출하여 이후 조선의 지배층으로 입지를 확보하였다.
선조대에 정권을 잡은 사림들은 명종 때에 을사사화를 일으킨 문정왕후와 그 일파를
좋게 평가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 문정왕후는 명실상부 조선의 제1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의 동생 윤원형이 꾸민 양재벽서 사건에 쓰여진 문구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에서 처럼
실질적으로 그녀는 여왕과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재난이 일어나면 중론을 모으게 하고 대신들과 몇 시간씩 토론을 하는 등
남성학자 관료군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치를 해나갔다.
그녀에게 오점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이 그녀를 도와 정치의 어두운 부분을 도맡아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이었고
문정왕후 또한 그들을 눈감아주고 함께 일정 정도 부정부패에 일조하였다는 데 있다.
‘숭유억불’이 국시인 조선이었지만
왕실에서 조차 알게 모르게 불교를 통해 기복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 중에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천년을 넘게 지배이데올로기로 군림했던 불교를
조선에 들어와 아무리 핍박한다 하여도 뿌리깊은 신앙심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정치상황을 헤쳐나온 문정왕후 또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어차피 성리학를 신봉하는 남성학자 관료군들과는 그 출발이 달랐던
문정왕후는
국시(國是)인 ‘숭유억불(崇儒抑佛)’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앞서의~
성군(聖君) 세종도,
엄군(嚴君) 세조도 차마 해내지 못한 일을 기어이 해냈다.
밖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종과 세조도 신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한 불교 부흥책을 떳떳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녀는 강원 감사 정만종의 추천으로 승려 보우를 데려와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자들인 관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개 절을 공인하였다.
전국의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때 아닌 불교 부흥책에 아연실색하여
반대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지만 문정왕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의 불교 부흥책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보우를 인생의 스승으로 신뢰했던 문정왕후는
그의 건의에 따라 죽은 남편인 중종의 묘를
봉은사 옆으로 이장해오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그녀는 봉은사를 크게 일으켰으며 갖가지 불교 행사를 연이어 열었다.
도처에서 유학자들이 문정왕후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였지만
그녀는 앞서의 그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독단으로 생전에 불교 진흥을 이루어냈고
죽으면서 유언에서까지 불교의 미래를 걱정했다.
명종이 즉위하고 20년,
즉 실질적 제 1권력자로 조선을 20년 간 통치한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열
큰 재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죽자 염려대로 보우는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고
불교는 다시 핍박받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곁에서 전횡을 휘둘렀던 동생 윤원형과 정난정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중종 옆에 묻히기 위해 무리하게 남편의 능을 이장했던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장한 중종의 묘에서 물이 나오고
지관이 서울 북쪽에 태산을 봉하면 나라가 안정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자
아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능을 지금의 서울 공릉동에 조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태릉이다.
비록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명종은 문정왕후의 정책 중 많은 부분은 폐기하였지만
명종에게 있어서
어머니 문정왕후는 나라를 지켜줄 태산과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긴 하였던 듯하다.
그러기에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 북쪽 태산을 봉하는 위치에
태릉이라는 능호를 달고 조성되었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동안에는 의붓아들을 죽이고
참람하게도
여자면서 정권을 휘두른 악후라는 평가를 천편일률적으로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정권을 오로지[오직 한 곬으로 하다]한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하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글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