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콘서트 특집] 이순신의 생애와 노량해전 주제 북콘서트 남해군청 주관 성황리에 끝남
지난 12월 16일 남해 관음포 소재 이순신영상관에서 진행된 <이순신의 생애와 노량해전> 북콘서트가 성황리에 끝났다.
남해군청 주관으로 노승석 박사와 이제이작가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장충남 군수님을 비롯하여 남해군의장, 문화관광국장, 남해군의장 등이 참석했고 청중석에는 백여명의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1부는 난중일기 소개와 함께 이순신의 생애와 노량해전에 대한 노승석 박사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10여년 동안 노승석박사가 발굴한 자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최초로 번역한 홍기문의 한글판 난중일기 번역본, 2007년 문화재청주관으로 발표한 새로운 일기 32일치내용, 이순신관련한 문헌을 총정리한 난중일기교주본 등을 소개하였다.
2부는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노승석박사가 그동한 발굴한 내용과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내용 등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청중석에 앉아 있는 남해군청 공무원, 남해주민, 문화관광해설사 등 다양한 분들이 질문을 해주었다. 이애 대헤 노승석박사가 명쾌하게 즉석으로 답변을 하였다.
남해는 이순신이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왜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최대의 전공을 새우고 전사한 곳이다.
이순신 한분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조선민중과 나라에 평화를 찾게 해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번에 처음으로 진행된 이순신북콘서트는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노량해전 당일의 상황>
1598년 11월 18일 조선수군은 남해 노량의 우측인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나라 군사는 노량의 왼쪽인 곤양 죽도에 주둔했다. 이때 왜군은 사천 남해 수로를 경유하여 순천 왜교를 향하고 있었다.
이날 자정 이순신은 배위에서 하늘에 기도하기를, “만약 이 원수를 제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홀연히 큰 별이 하늘에 떨어졌다. 이윽고 새벽 2시경 조명군과 일본군과의 해상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만약 적의 머리를 베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하였다.(섬호집) 이는 적을 죽이는 전면전에 힘쓰되 전공을 탐하여 전쟁은 안하고 적의 머리를 베는데 빠지는 것을 경계한 최후의 고인이다.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장작불을 왜선에 던져 불이 붙게 하자, 왜선들이 관음포로 후퇴했으나 뱃길이 막혀 왜군들이 반격을 하여 조명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이때는 날이 샐 무렵였는데, 이순신이 북채를 쥐고 먼저 올라갔다가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마지막으로 부하들에게, “전쟁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운명하였다. …….
남해군, 12월16일 이순신의 생애와 노량해전 주제 토크콘서트 (daum.net)
북콘서트 후기 내용(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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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군과 일본군의 최후 교전>(노승석 논문)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조선최대의 순천왜교성 전투>논문 참고,
17일 초저녘 사천의 적장 요시히로와 남해의 적장 야나가와 시게노부(平調信, 柳川調信) 등이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받고 백 척으로 밤의 조수를 타고 나왔다. 이들이 노량(露梁)에 가까워지자, 유키나가가 횃불을 들어 호응했다. 이순신과 진린은 야간공격을 계획했다. 18일 유시(酉時)에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와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 등이 연합한 일본선 500여 척이 노량과 남해일대에 집결하였다. 명나라의 전선 백여 척(130)이 진영에 도착했는데, 이를 포함한 진린의 휘하는 3백 여척이었다.
이날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일 안에 적의 구원병이 온다며 먼저 요격하겠다고 했으나 진린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듣지 않고 배를 출동시키자, 진린은 어쩔수 없이 뒤를 따라 이경(二更)에 묘도를 출발했다. 진린과 이순신이 좌우협(左右協)이 되어 조선수군은 노량해협 우측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주둔하고, 명군은 해협 좌측에 있는 곤양의 죽도(竹島)에 주둔하고 사변에 대비했는데, 한밤중에 적선이 광주(光洲) 산도(山濤)[사천 남해 수로]로부터 운집하여 노량을 지나 한창 왜교를 향했다.
19일 삼경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에 빌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자, 홀연히 바다 가운데로 큰 별이 떨어졌다. 조명군이 몰래 출발했는데, 동쪽의 적들은 이미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 관음포에서 조총을 정비하여 조명군대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진린이 계금(季金)과 함께 나아가고 여러 장수들이 뒤를 따랐는데 이순신이 앞장서서 나가 진을 쳤다.
그후 4경(更, 새벽 2시경)에 적이 일시에 발포하여 먼저 나갔던 배에 사망자가 많았는데, 이때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선 5백 여척을 만나 아침까지 싸우게 되는데, 이때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명하기를 “일본군의 머리를 베는 자가 있으면 군령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여, 전공보다 전면전에 힘쓰도록 독려했다.
조명군이 좌우에서 장작불(柴火)을 마구 던지니 일본선이 연소되었다. 적이 불리해지자 관음포 항구로 후퇴하여 들어가니 날이 이미 새었다. 적은 뒤로 돌아갈 길이 없어 마침내 반격했는데 조명군들이 승세를 타서 육박전을 벌였다. 이때 부총병 등자룡의 배에 불이 났는데 적들은 그 배가 기울어진 것을 틈타 자룡을 죽였다. 진린이 위급할 때 이순신의 정병이 왜장 1명을 쏘아 죽여 구출하고, 진린은 이순신의 군대와 함께 호준포로 적선을 연속으로 쳐부수었다.
이때 이순신은 직접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일본군을 추격하며 죽였는데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려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발사하여 이순신이 탄환을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순신의 사망시간은 여명(黎明) 또는 오전 중으로 본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분전한 결과 일본군의 머리 9백급을 베고 일본선 2백 여척을 분멸하고 순국(殉國)했다.
한낮이 되기 전에 일본은 전선이 거의 다 침몰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이고, 시마즈 요시히로 등은 50척으로 도주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유키나가는 몰래 예교에서 배를 띄워 묘도의 서량(西梁)과 남해의 평산보(平山保)를 거쳐 (부산)바다로 달아났다. 수군이 쫓아가니 적은 돌아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곧장 대마도를 향해 잠깐 사이에 다 건너갔다. 남해에 남은 일본군들이 노량의 패보를 듣고 섬 가운데의 육로를 거쳐 미조항(彌助項)으로 빠져 나갔고, 유정은 왜교성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덮은 것을 보고, 대군을 거느리고 뒤 따라 갔으나 얻은 것은 빈 성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