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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오래 지난 리뷰입니다.
쉽사리 타이핑을 치지 못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바로
항일운동, 의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정도의
승전한 전투 몇몇만 알뿐,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것은 저조차도 마찬가지기에
선조들에게 이 글이 누가 될까 두려워
쉽사리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공유하고
함께 알아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하에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응답하라 1895
항일의 불씨를 당긴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청일전쟁의 승전에도 불구,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삼국간섭에 위축되어
전쟁으로 차지한 요동반도에서
철수하게 된 일본은
친러파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결국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양력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국내 여론이 분노로 들끓는 가운데,
그 유명한
단.발.령이
시행되죠.
조선의 남자들에게 의관은 곧
그들의 존엄 그 자체였습니다.
선비의 유교 정신과 품격을
나타내는 시각적 정수가
바로 의관을 정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인데요,
일본은
조선의 이러한 전통과 문화를 깨지 않는 한
자신들이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훗날 조선을 침략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인프라를 구축하려 한 "개혁"중의 하나가
단발령이었던 것이죠.
바로 을미개혁이라고 하는데요.
이 개혁은
무엇 하나 조선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침략을 위해 만들어진
강제 조치였기 때문이죠.
경기도 연합의병진 결성
단발령이 발표된 다음날부터
조선의 유생들은
바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광주, 이천의 의병진입니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은
이천의 화포군 도령장 방춘식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이천수창의소>라는
대규모 의병을 조직하게 됩니다.
< 봉기 초기 상황 >
광주, 시흥, 안산, 수원,
용인, 안성, 죽산, 음죽, 지평, 포천등
경기도 전 지역에서 모여들었기에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띠고 있지요
이천수창의소 병사 계층에는
관포수(군인 포수)가 다수 참여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별패진 군관 300여 명을 주축으로
양근, 지평의 군사 300여 명,
음죽, 죽산의 화포군 300여 명,
이천의 화포군 100여 명 등
약 1000여 명의 관포수가 참여했다네요
첫 전투, 승리!
백현 전투
동원대학교가 자리 잡은
광주시와 이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광현 또는 백현이라 하는데요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이
이천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의병은 대부분이 민군(民軍) 임을 감안,
백현을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을 하게 됩니다.
1월 18일 아침
일본군이 접근하자 조성학은
의병들과 두 시간가량 격전을 벌이다가
백현으로 퇴군하며 일본군을
골짜기 아래까지 유인했습니다
이때
구연영과 신용희가 합세하여
일본군을 포위 공격했죠.
김하락의 지휘 아래
다음날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끝내 일본군은 패퇴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광주의 장항 장터
(지금의 노곡리)로 도주했다고 하는데요.
의병들은 그를 밤새 추격해
모두 섬멸했다고 합니다.
이 첫 전투는
의병들의 단합력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되는데요,
나중에는 고종의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비밀조칙
'애통조(哀痛詔)'까지 전달되면서
의병들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패배 그리고 재집결
이현 전투
그러나 이천수창의소는 얼마 후
재차 공격해온 일본군에 패하고 맙니다.
2월 12일 새벽 200여 명의 일본군과
이현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는데요.
김하락의 진중일기를 보면
얼마나 힘든 전투였는지 느껴집니다.
"
새벽녘에 또 적병이 와서 공격하므로
여러 장수 가 힘을 모아 전진하여
두어 시간 동안 큰 싸움을 벌였는데
10시 정각에 이르러 서북풍이 크게 불어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엎으니
이윽고 큰 눈이 내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때 적의 군사는
서북을 등지고 동남을 향하고
우리 군사는
동남을 등지고 서북을 향한 까닭에
풍설이 얼굴에 드려서
사람이 눈을 뜰 수 없게 하므로
여러 군사가 수족을 놀릴 수 없어
다반 빈총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을 유지키로 하니
형세가 매우 창황하여
부득이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
이현전투의 패배 이후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흩어진 의병들을 토벌한다는 명목하에
이현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켰으니까요
1896년..
아직 병탄도 되기 전인데요..
일제는
버젓이 온 마을에 불을 놓아
한 동, 리를 통째로 없앴습니다.
당시엔 곤지암 도자 박물관 뒤쪽에도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마을도 참혹한 학살을
피해 갈 수 없었다고 전해지네요...
이현의 위치를 알아보고 싶어
오랫동안 검색을 했지만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패한 전투였기 때문에
급박하고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추후에 다시 정리하기도
어려웠을 거라 생각됩니다.
웹페이지마다
광주 이현,
이천 이현,
용인 이현,
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천
마장면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남한산성연합의진
패배 후 의병들은 여주의 심상희 의병장을 만나
잔여병+여주의병부대를 합쳐
제2의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남한산성에 입성한
심기원 광주 의병장의 요청으로
함께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게 되죠.
곧이어 양근의
이석용(이승룡) 의병진도 합세해
경기의 세 의병진이 연합한
남한산성의병진이 결성됩니다!
이때부터
일제는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군사기지로 활용되던 곳이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임시수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방비태세를 갖춘 천혜의 요지였기 때문에
군수물자가 충분히 저장되어 있어
의병의 사기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곧이어
안성의 100명, 춘천의 3000명도
남한산성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돌자
일제와 친일인사들은
한성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남한산성 전투
1000여 명의 관포수를 포함해
1600여 명에 달하는 규모를 이룬
남한산성연합의병진에서는
부대를 재편성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장 : 박준영
여주 대장 : 심상희
군사 겸 지휘 : 김하락
도소모 : 전귀석
선봉장 : 김태원 (남문)
중군장 : 구연영 (성 중앙부)
좌익장 : 김귀성 (동문)
우익장 : 김경성 (서문)
후군장 : 신용희 (북문)
로 임명하여
남한산성을 엄중히 지키게 됩니다.
이윽고
3월 5일의 첫 전투를 비롯해
연합의진은 전투 초기
수차례 승리하게 됩니다.
의병의 수가 정토군보다 많기도 했고
산성 주변에서
타 의병진의 공격도 도사리고 있어
남한산성 함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리적 이점을 잘 이용한 의병진은
송파 부근까지 관군과 일본군을 추격,
대포 1문을 빼앗기도 합니다.
서울 진공 작전
상승 기세를 탄 연합의병은
전국 각지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가 있던 고종을
환궁시킬 서울진공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작전은 총 3단계로 나뉘었는데요,
1단계
수원 부근 의병에 의한 수원 점령
(서울 남쪽 안정화)
2단계
수원 + 남한산성 의병진의
남한산성 주변 관군+일본군 격파
(포위 해제)
3단계
삼남 지역 연합의병진과 합세하여
서울 진격, 고종 환궁
입니다.
1단계까지는 잘 추진되었지만
식량배급로가 막히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게 됩니다.
붕괴는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장 김귀성과 대장 박준영이
관군의 회유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들이 귀순하게 되면
박준영은 광주유수로
김귀성은 수원유수로
임명하겠다는 것인데요.
이미 1895년, 칙령에 의해
유수라는 직책이 없어졌는데...
목숨이 달린 위기 앞에
판단이 흐려졌던 것일까요?
두 사람은
의병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여
분위기가 무르익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21일 새벽 3시경,
허술해진 성문으로
들이닥친 관군들로 인해
의병들은 대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날의 전투는
사망한 사람만 800여 명
(의명 500, 관군 300)에 달하는
전기 의병사의 대표적인 격전이 되죠....
"
21일 새벽 3시경에
서, 북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한 진영의 장졸들은 전혀 몰랐었다.
5시가 다 되자
고함소리가 크게 일어나므로
취해 넘어졌던 군졸들이
놀라 일어나 보니
온 성중이 모두 적병이었다.
2천여 장졸은 비로소,
박 적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즉시 박준영 삼부자를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살하고
급히 성 밖으로 나가니
적병(조선 관군)들이
도리어 호송해 주며
"빨리 달아나라
일본 놈들 오면 죽는다"
하였다.
이 무리들이 비록
왜적의 세력에 핍박되었지만
양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모양인데,
저 박 적 놈은
몸이 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과 민족의 급박함을 돌아보지 않고
이 엄청난 죄악을 범하여
스스로 멸문의 화를 취했으니,
하늘의 이치가 밝고 밝아서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장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고
한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김하락 -진중일기中-
"
.
.
.
남한산성연합의진이 결성된 지
20여일만의 일이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이후...
남한산성을 뺏긴 후
경기도 의병들은 큰 손상을 입게 됩니다.
김하락,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이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했지만
이미 내려진 의병 해산령으로 인해
그마저 쉽지 않았죠...
결국 의병들은
가장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자
김하락의 연고지인 영남으로 이동해
전투력을 확충하고
투쟁을 계속하기로 합니다.
< 의병(김하락중심) 이동경로 >
남한산성 패배 이후부터
김하락을 따른 의병들은
대부분이 이천, 광주지역 의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4월 9일 이천을 출발해
여주, 제천, 안동, 의성, 경주 등지를
무대로 항쟁을 계속했고요.
200~300명 정도의 규모였지만
수비대 습격, 전선 파괴와 같은 항전으로
의병의 활동을 끝까지 해 나갑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지요
김하락과 구연영의 이별
경주로 부대 이동을 단행할 무렵
이때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 구연영이 의병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김하락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이날 김하락 대장은
슬퍼하고 탄식하며
오래도록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두 사람의 이별은
김하락에게 큰 충격과 타격이었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구연영이
관군의 위세를 두려워해
의병활동을 중도에서 포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연영은 이천수창의소의
중군장(군영의 대장)으로
김하락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이후
구원영 선생은 기독교로 전향해
비폭력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당시 무장투쟁에
회의를 느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이별로
진중 내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김하락 의병장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답사를 진행하신 리더 선생님도
김하락 의병장의
"오래도록 울었다"
는 문구에서 머물렀다고 말씀하시네요...
김하락과 운명을 함께한 이천수창의소
경주에서 영덕으로 이동 후
7월 13~14일, 이창수창의소는
영덕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폭우와 수적 열세로 인한
매우 힘든 전투였는데요..
결국 김하락 대장이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게됩니다.
"
아, 우리 민족은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망정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
"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고 하네요.
지도자를 잃은 의진은
안동의진과 행동을 함께했던 것으로
한 달 정도의 단편적인 기록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외의 두드러진 활동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다른 의진과 마찬가지로
가중되는 토벌군에 밀려
결국 흩어지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김하락 의병장의 사망으로
이천수창의소가 활동을 시작한 후
7개월에 걸친 격렬한 항쟁이
이렇게 종료됩니다.
의의를 내려본다면
을미의병의 한 줄기인
경기의병 이천수창의소.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으로
'근왕'이라는 왕조 중심적이고
위정척사론 적인 사상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라고만 결론 내리기에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을 점거한
일제에 대항해 일어난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
"
"
서울에서 근접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운동 사상 최초로
대규모 서울진공작전을
계획 실행했다는 점
"
"
이천에서 일어난 후
경북 영덕에 이르기까지
장거리를 이동하며
완전히 힘을 잃을 때까지
끈질기게 항쟁을 계속한 점
"
"
중기(을사), 후기(정미)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진 점
"
등,
경기 의병이 우리에게 남겨준
메세지는 무겁고도 많았습니다...
답사 후 내용을 다시 정리하며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그시대에 살았다면
감히 그분들이 살았던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일제와 남한산성
이후 남한산성에서는
군기고를 저장하고 있는
10개의 사찰이 파괴되고
읍치가 경안동으로 옮겨지며
행궁 앞에 호텔이 지어지면서
예전 도시가 누렸던 영화,
호국에 대한 문화와 의지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우리 선조들이
남한산성에서 남겨준
항일운동의 흔적과 유산들은
우리가 잊지 않는 한
영원히 남겠지요?
정말 긴 포스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생략된 부분이
저~~~엉~~~말 많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너른고을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역량 강화 활동의 일환으로, 해설사들이 직접 찾아간 문화유산 답사 리뷰입니다 :)
답사를 준비하신 선생님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리마인딩용으로 남기고 있는 기록입니다
혹여 잘못된 기억의 기록으로 선생님들께 누를 끼칠까 걱정됩니다
정정, 첨언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세상에나 선생님 이렇게 포스팅을 멋지게 하셔서 알기 쉽게 설명 해 주시어 감솨 하기 그지 없습니다.
수고 많이 많이 하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영샘 덕분에 현장에 다녀온 듯 합니다.
넘 넘 감사해요~^^
해설사의 보물입니다.
아이곱 사랑받아 행복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