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의 정치∙군사 지도자인 올리버 크롬웰 측근의 목사와 청교도 개혁주의 지도자를 말하면 보통 '존 오웬‘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토머스 굿윈도 바로 그런 위치에 있던 걸출한 청교도 위인입니다. 한국에서 오웬의 서적은 무척 많이 번역되어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돼 있는데 비하여 굿윈은 양적으로나 지명도에서 훨씬 적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황태자로 별명 되는 오웬 못지 않은 청교도 개혁주의의 위인이 굿윈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청교도 연구의 전문가인 조엘 비키 목사님이 요약하여 기술한 토머스 굿윈의 인생을 살펴보고 관심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토머스 굿윈
굿윈은 1600년 10월 5일, 노퍽(Norfolk) 주의 야머스(Yarmouth) 근처에 있는 롤즈비 (Rollesby)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정부의 박해에 저항하는 청교도 세력의 영향 아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하나님을 경외했던 굿윈의 부모, 리처드 굿윈과 캐서린 굿윈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굿윈을 장차 목회자로 양육하려고 최선을 다해 인격적인 본을 보였으며, 굿윈으로 하여금 당시 그 지역의 학교들에서 시행되었던 최상의 고전 교육을 받게 했다. 한편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관해 샘솟는 기쁨을 체험했다.
열세 살이 된 굿윈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윌리엄 퍼킨스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그 대학 안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리처드 십스가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굿윈의 지도 교수는 그가 성찬을 받기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고 여겨, 그로 하여금 성찬 예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반감을 느낀 굿윈은 십스의 설교와 강의에 참석하는 것을 중단하고 기도를 그쳤으며, 성경과 청교도들의 글을 읽는 것도 그만두었다. 오히려 그는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어, 청교도들의 설교를 하찮게 여겼던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데 목표를 두게 되었다.
굿윈은 1617년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619년부터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세인트 캐서린 홀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1620년 그곳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선임 연구원과 강사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사역한 다른 연구원들로는 존 애로스미스와 윌리엄 스퍼스토우, 윌리엄 스트롱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들은 모두 굿윈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여했다. 당시 이들은 모두 십스와 존 프레스턴의 설교를 통해 힘을 얻고 있었다. 이들은 굿윈의 양심을 자극하면서, 강단에서 공허한 수사적 기교를 과시하는 데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을 조금 앞둔 1620년 10월 2일, 굿윈은 회개에 관한 토머스 베인브리지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 당시 그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에스겔 16:6의 말씀은 굿윈의 심령에 영적인 생명력을 심어 주었다.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 살아 있으라." 그는 1620년부터 1627년까지 계속 의심과 씨름했지만, 마침내 한 경건한 목회자의 조언을 통해 굳건한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이 확신을 얻기 얼마 전인 1625년, 굿윈은 설교자의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십스가 세인트 캐서린 홈의 학장으로 취임하는 일을 도왔다. 1628년 굿윈은 십스와 프레스턴의 뒤를 이어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강사가 되었다. 이어 1632년부터 1634년까지는 이 교회의 교구 목사로 사역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케임브리지에서 행한 굿윈의 설교와 강의를 듣고 회심했으며, 그중에는 이후 영향력 있는 청교도 목회자가 된 자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굿윈은 자신의 직무를 내려놓아야 했는데, 이는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로드가 내린 순응령9articles of conformity)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굿윈은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1630년대 중반에 굿윈은 독립파의 교회 정치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존 코턴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1634년부터 1639년까지, 굿윈은 런던에서 분리파의 설교자로 사역했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규제가 점점 강화되고 벌금과 투옥의 위협도 더욱 커졌으며, 1639년에 그는 네덜란드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유명한 독립파 목회자들과 함께 아른험(Arnhem)에서 사역했으며, 로드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온 백 명 이상의 잉글랜드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1641년에는 로드가 탄핵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비국교도(Nonconformist)들에게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굿윈은 이 부름에 응답했고, 1642년 4월 27일 의회 앞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이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총회에서는 장로교와 구별되는 독립파의 대변자로서 자주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1650년에 굿윈은 옥스퍼드 대학에 있는 모들린 칼리지의 총장이 되었으며, 존 오웬은 같은 대학에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 국교회 측에 속했던 클래런던 경까지도, 당시 옥스퍼드 대학이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비범할 정도로 우수하고 건전한 지식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매튜 헨리의 아버지였던 필립 헨리(Philip Henry, 1631-1696)는 과거 이곳에서 수학했던 시절을 돌아보면서, 굿윈의 재임 당시 모들린 칼리지에 진지한 경건과 기도에 전념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회상했다. 굿원에게 1650년대는 분주하면서도 열매가 풍성했던 시기였다. 그는 한 독립파 교회를 개척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목회자 후보생들을 심사하는 여러 위원회에 관여했다. 또 사보이 신앙 선언문(Savoy Declaration of Faith, 1658)의 편집을 도왔는데, 이는 회중주의의 관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한 문서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호국경(Lord Protector)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개인 목사로도 사역했다.
그러나 1660년에 찰스 2세가 즉위하고 청교도 세력이 힘을 잃으면서, 굿윈은 옥스퍼드를 떠나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섬기던 독립파 교회의 교인 대다수와 함께 런던으로 옮겨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새로 즉위한 찰스 2세는 앞서 했던 약속과는 달리, 엄격한 순응령을 시행하도록 승인했다. 그로 인해 1662년, 이천 명 가량의 경건한 목회자들이 국교회에서 추방되었다. 다만 굿윈 자신은 독립파 교회 소속이었고 정부에서 임명한 직책을 맡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 '대추방'(Great Ejectio)n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찰스 2세의 통치 아래서 여러 해에 걸쳐 탄압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설교 사역을 감당해 나갔다. 또한 그는 무서운 전염병이 런던에 퍼졌을 때에도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회중을 돌보았는데, 당시 국교회 측의 성직자 대다수는 이미 런던을 버리고 떠난 상태였다. 생애 말년에 굿윈은 설교와 저술,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굿윈은 런던에서 여든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은 자신의 경건한 아버지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아버지는 이제 곧 자신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과 온전하고 다함이 없는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기뻐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나는 세 위격이 계신 곳으로 간다. 그분들은 이제껏 내가 늘 교제해 왔던 분들이지.’"
조엘 비키, 『설교에 관하여』, pp. 299~302.
첫댓글 토머스 굿윈의 업적 중 핫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수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Apologetical Narration으로 독립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
-1650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산위원으로 설교자들을 평가하였다.
-1650년대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매튜 헨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1653년 존 오언과 함께 6명의 위원회를 결성하여 사보이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1658)
존 오언이 오웬일 텐데요. 함께 사보이 신앙고백을 작성한 실력자이군요.
@노베 네, 알겠습니다.
토머스 굿윈 신학 중 중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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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조의 영원 생성설
삼위의 각 위격이 온전한 하나님이며, 같은 본성을 공유하고 온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로부터 유일하게 나신(begotten) 분이며, 이것이 영원 생성설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굿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영원 생성설과 연관을 시키는 데, 이것을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소통함으로 보았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8%B8%EC%8A%A4_%EA%B5%BF%EC%9C%88#cite_note-3
심오한 내용 같아 보입니다. 성부와 성자 위격 간의 관계를 잘 설명한 것 같습니다.
@노베 조금 어렵지만 잘 읽어 보겠습니다.
토마스 굿윈: 독립교회의 대들보(Thomas Goodwin: 'The Atlas of Independency')
ian Hamilton / 최승락 역
... 크롬웰의 집권기 동안에 굿윈이 존 오웬(John Owen)과 더불어서 이룬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1658년에 호국경을 설득해서 사보이 궁에서 회중교회들의 회합을 후원하도록 한 일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로 나타난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기본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내용을 가지나 교회 정치의 면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은 영국과 미국의 회중교회의 정신을 표방하는 하나의 기초문서가 되었다. ...
독서를 통해서 굿윈이 추구했던 것은 단순히 학문적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값없이 주시는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영광, 이것이 그의 정신이 가장 깊이 즐거워하고 있던 진리였다. 이 즐거움은 단순히 사변적 즐거움이 아니었고, 이 진리는 그의 영혼의 생명이요 양식이 되던 진리였다. 그의 마음이 이런 것들로 감화될 때마다
그는 이를 영적 따뜻함이 깃들인 필체로 글로 옮기곤 했다. 이 따뜻함은 그의 글들 속에 단순히 표현되어 있기 보다 오히려 느껴지고 있다."
@장코뱅 정확한 신학과 따듯한 설교를 함께 갖고 있던 훌륭한 분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잉태하도록 마리아에게 임해 삼위 가운데 두번째 위격과 우리의 본성이 전혀 나눠지지 않는 하나가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마음 역시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한량없이 임하사 온유한 마음으로 중보의 역사를 이루기에 합당하게 하신 분도 성령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특별히 더 임하신 것은 바로 이 온유함의 은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과 함께 중보를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이 세례를 통해 가시적이고 공개적으로 중보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임하셨습니까? 비둘기와 같은 모양으로 임하셨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한결같이 이 사실을 그렇게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비둘기의 모양으로 임하신 것입니까? 어느 때나 하나님의 가시적인 현현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실 것을 보여주고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이루실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리스도 위에 임하신 것은 성령께서 그런 특별한 은혜로운 성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합당하게 예비시키시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비둘기는 자기 짝에게 탐욕이나 사나움, 성냄이 없이 탐욕스럽지 않고 힘들 때 곁에서 함께 우는 것과 같이 사랑과 우정만을 보여주는 가장 순결하고 온유한 피조물로 통합니다. 비둘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위에 임하심으로 그에게 어떤 마음과 성정을 만드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합당한 상징이었습니다. 비둘기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면서 다정한 대화로 달콤한 시간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를 누리도록 성령께서 한량없이 임하사 그의 마음을 채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과연 우리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에게는 그전부터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후로는 그 어느 때보다 탁월하고 한량없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셔서 온유함으로 중보자의 직분을 능히 감당하도록 예비되었습니다.
토머스 굿윈, <마음<(복 있는 사람), pp.91-92.
@장코뱅 굿윈의 책도 한번 사서 읽으면 은혜가 많이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토머스 굿윈이라는 훌륭한 청교도 위인을 더 알게 되어서 유익하고 감사합니다.
매튜 헨리
매튜 헨리 ( Matthew Henry; 1662년 10월 18일 - 1714년 6월 22일 )는 비국교회 목사이며 웨일스 출생으로, 대부분의 인생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 그는 《신구약 주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찰스 해돈 스펄전, 조지 휫필드가 그의 강해서를 애용하였다.
이하 아래 위키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D%8A%9C_%ED%97%A8%EB%A6%AC
한참 예민하고 까칠할 나이에 성찬 참석을 못하게 하니 시험이 들었었나 보네요.
경건한 부모 밑에서 청교도로서 좋은 영향을 받아 청교도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옥스퍼드 내 칼리지의 총장, 독립파 교회의 대변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원으로, 사보이 선언서 편집을 돕고, 크롬웰의 개인 목사로도 활동하는 등 80까지 장수하면서 청교도운동의 산 증인으로 살았군요.
매튜 헨리가 굿윈의 영향을 받은 것도 큰 열매인 것 같습니다.
글을 세밀하게 읽으셨네요.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