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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 땅끝을 날다 - 해남 주작산 산행기
삶이 무거울수록 그리워지는 곳, 해남(海南).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대합실에 점령군처럼 어스름이 몰려드는 시간이면 무작정 해남행 버스에 몸을 싣고 싶을 때가 있다. 나희덕 시인이 ‘땅끝’에서 노래한 것처럼, 젊은 날 나비를 좇듯 그곳에 가서 끝내 어둠에 잡아먹히는 노을을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 우리는 더 물러설 곳 없는 막바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고, 문득 세상이 견딜만 하다고, 던지고 싶은 그곳이 새삼 그리워진다며 돌아온다. 그렇다. 늘 젖어 있는 땅끝을 보고,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음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땅끝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아니, 이 땅의 중년들은 소리나지 않는 큰 울음을 울기 위해 땅의 끝까지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3년 4월 9일, 해남 주작산(朱雀山)에 간다. 산우회 제 44차 산행이다. 주작산(429)에서 덕룡산(432.9m)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산줄기는 강진군 북일면, 신전면, 도암면과 해남군 옥천면을 가르고 있다. 주작이 하늘로 비상하려 날개를 펴고 있는 형국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그래서 해남의 첨봉(354m) 아래에는 백호(白虎) 마을도 있고, 덕룡산은 청룡(靑龍)이 되고 있는 듯하다. 오늘 산행 코스로 잡은 오소재~주작산 정상을 거쳐 수양관광농원으로 하산하는 구간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362봉, 401.5봉, 427봉을 오르내리는 용아릉 암릉구간은 덕룡산을 거쳐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소석문에 이르는 구간 못지 않게 산악인들 사이에 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전주에서 해남에 이르는 길은 백두산에서 땅끝에 이르는 마지막 산줄기를 보여준다. 백두대간은 ㄷ자 모양의 호남정맥을 이루면서 호남평야의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그 아래에는 동쪽으로 섬진강, 서쪽으로 영산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전남 땅으로 편입된 호남정맥은 ‘등급이 없는 평등 무비의 산’ 무등산(無等山)으로 솟구치면서 남도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화순으로 동남진하여 장흥 땅에서 제암산(807m), 사자산(666m), 일림산(626.8m)를 세운 후 조계산(884.3m), 백운산(1,217m)을 빚은 뒤 지리산을 마주하면서 섬진강 하구로 잦아든다.
땅끝기맥은 호남정맥 화순 깃대봉 분기점에서 갈라져 월출산 - 두륜산 - 달마산 - 해남 땅끝탑까지 약 117km를 달려간다. 장성 IC를 빠져 나온 버스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나주 들판을 지난다. 영산강 젖줄기를 따라 벚꽃은 이미 화사하게 피어 있고, 황토에 뿌리내리고 있는 배나무들도 다투어 하얀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
신북을 지나 덕진면으로 접어들자 푸르른 보리밭 위로 쟁반 위에 달 뜨듯, 두둥실 월출산(808.7m)이 떠오른다. 절대적 지평선 위에 한점 수직으로 솟아오른 화강암 덩어리다. 처절히 몸에 배인 고독을 홀로 떨쳐 일어선 아름다움일까, ‘남도의 수석’이란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모두들 일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월출산의 자태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왕인박사의 학문와 도선국사의 지혜가 서린 곳에서 그들을 떠올려 본다. 천황봉에 보름달이 살포시 걸리는 날, 영암에서 도갑사로 이어지는 황홀한 벚꽃길을 걸어 해탈문에 이르리라. 벚꽃 꽃비가 하롱하롱 내리는 날, 사랑하는 이와 이승의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리라.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월남사지가 있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3층석탑(보물 제298호)이 월출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귤동리 다산 초당,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 뒤를 지난다.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도암만 구강포를 바라보았던 천일각, 동백이 눈물겹게 쏟아져 있는 만덕산 숲을 그려본다.
강진 흥촌리에서 해남 삼산면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버스가 잠시 길을 잃고 뒷걸음질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실 나는 관광버스가 그 고개를 조금 더 넘어가기를 바랐다. 그곳에 내가 사랑하는 두 시인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김남주(1946~1994) 생가가 있고, 지척인 삼산면 송정마을에 고정희(1948~1991)의 생가와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간 시인들이다. 망월동 민주열사들의 묘역에 잠들어 있는 김남주는 이렇게 노래한다. “감옥이 열리고 / 길도 따라 내 앞에 열려 있다 / 세 갈래 네 갈래로 // 어느길로 들어설 것인가 / 불혹의 나이에 / 나는 어느 길로도 선뜻 첫발을 내딛지 못한다”(‘길’) 그런가 하면 고정희는 “내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 그대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 우리가 불을 붙이지 않는다면 / 이 어둠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노래한다. 김남주의 민주화운동, 고정희의 통일운동과 여성운동은 땅끝지맥이 백두산으로 이어지듯, 힘찬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해남군 오소재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362봉을 향한다. 남도 사람들을 키운 건 8할이 바람, 아니 남도 사람들을 키운 건 8할이 호남정맥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산을 오른다. 그들은 폭풍에도 끄덕없는 산줄기를 보며 인고의 미덕을 익혀왔고, 비 그친 첩첩 산줄기에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살가운 마음씨를 잃지 않고 살아왔다. 거친 산능선에서 피어나는 진달래, 강 언덕에 혁명의 들불처럼 번지는 들풀에서 삶의 아픔을 풍류로 승화시키는 멋을 배웠다.
362봉을 지나 401.5봉, 427봉을 오르내리는 용아릉 구간은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바위와 암벽을 더듬어 내려오기도 하고 로프에 의지하여 내려오기도 했다. 기기묘묘, 천태만상의 형상을 한 바위들은 금강산의 만물상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한 고비를 겨우 넘기면 아름다운 경치가 고난의 벽으로 기다리고 있다. ‘사철나무님’은 연신 힘들어 하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돌파해 낸다. 모두들 생애의 중량, 가장 철저한 믿음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혼신의 힘으로 암벽을 넘고 있었다. 생활과 구도가 둘이되 둘이 아니다. 암벽 산행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발붙일 곳을 찾으며 나무 줄기에 의지하여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심검당(心劍堂)이란 당호를 사용했던 선사처럼, 번뇌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마음의 칼을 품고 암릉을 오른다.
안산에서 온 산악회원 한 분이 부지런히 우리를 앞질러 간다. 이정표가 잘못 되어 엉뚱한 능선으로 접어들었다가 되짚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후미에서 동행하던 우리 일행 5분도 이정표를 따라 C코스(?)로 하산을 하고 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허나 헤맴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수양리재 갈림길에서 정상을 향해 접어든다. 이젠 가파른 암릉도 없다. 후미가 선두와 많이 떨어져 있어 빠른 걸음으로 정상에 올라 일행의 일부와 합류했다. 실상, 주작산 정상은 땅끝지맥 본류에서 조금 비껴나 있을뿐더러 별로 볼품이 없다. 그래서 두륜산에서 덕룡산을 거쳐 땅끝지맥을 종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지나친다. 우리와 잠시 산행을 함께 한 안산의 산악회원들도 오소재에서 작천소령 삼거리를 거쳐 곧장 덕룡산으로 간 듯하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주작산의 풍광은 참으로 아름답다. 정면으로 완도의 여러 섬들이 보이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탐진강을 끌어안아 넉넉해진 가슴으로 남도의 바다와 섬을 이루는 강진만(도암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황홀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숨가쁘게 걸어왔던 길들을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이 참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의 슬픔을 떨치고 하늘로 비상하려는 주작처럼, 우리네 인생도 삶의 깊이와 폭을 높이로 승화시켜야 하리라. 넘지 못할 산은 없고, 건너지 못할 강은 없다. 외물(外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두려움도 없으리라.
주작산 정상에서 탐진강물을 받아서 남해의 섬과 바다를 이루는 강진만을 바라본다. ‘하늘빛’님의 고향 마을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햇살처럼, 마음의 눈으로 본 강과 바다는 아름다웠다. ‘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眞光不輝)’는 말처럼 번뇌와 고통을 다 이겨내고 깨달음의 바다에 이른 강은 저토록 기품이 있다. 주작산 산마루에서, 땅끝지맥의 산하에서 살다 간 선비들을 생각한다. 역사에서 지고, 삶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조선시대 국내 유배자 700명 중 129명이 남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는 통계가 있다. 또 '유배'의 저자 김만선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 408곳 중 전라도는 74곳으로 경상도 81곳보다 적지만, 유배 횟수는 915회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듯 남도는 함경북도와 더불어 유배지로 손꼽혔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남도 사람들과 어울리며 남도인의 문화와 예술에 영향을 끼쳤고, 남도인들은 이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어류백과사전인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썼고,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은 만덕산 자락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겨 실학을 집대성하기도 했다. 또한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로 일컬어지는, 당대 명필 이광사(李匡師)는 진도에 귀양 와서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펴서 제자를 가르쳤다.
동백숲이 우거진 길로 하산한다. 눈뜨고 누워 있는 동백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정호승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그리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부하다가 죽어 버려라.’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걷다가 길에서 죽게 하소서. 대자연과 교감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 당신을 깨닫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나무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되게 하소서. 바라건대 나의 영혼 조금만 더 가난해져 마침내 하늘과 땅이 맞닿은 땅끝에서 잠들게 하소서. 지상의 걸음이 다한 그곳에서 한 송이 원추리꽃으로 다시 피어나게 하소서. 전생애를 바쳐 들꽃 한 송이 피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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