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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꼭 들어주세요)
“안녕하세요. 국내사업팀 이번년도 신입 도경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격이 원체 활발하고 넉살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딱딱한 내 인사에도 사무실 사람들은 웃음 지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래서 이 팀의 첫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더 이상 무슨 말과 행동을 취해야할지 몰라 멀뚱히 서있는데, 내 옆에서 ‘안녕하세요!’하고 밝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놀라서 옆을 쳐다 보니 목소리에 어울리게 발랄하게 생긴 여자가 허리가 꺾이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몸을 반으로 접어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 엄청난 반동에 여자의 머리칼이 정신없이 펄럭댔다. 좀.. 어수선하다.
“국내사업팀에 새로 들어온 이유비라고 합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잘 할 자신 있고요! 회식 정말 좋아하고, 분위기 띄우는 것도 잘합니다. 아직 서투르고 모자라겠지만, 가르쳐주시기만 하면 척척 해낼 거니까 걱정 마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어수선한 여자가 바로 내 동기 유비였다. 그리고 유비는 또 처음처럼 척추가 부러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몸을 접어 꾸벅 인사를 했다. 유비의 밝은 인사에 사무실 사람들은 아까 내 인사를 받아줄 때보다 조금 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목청 좋네.’ ‘귀엽다.’하는 목소리들도 간간히 섞여 들려왔다. 나를 환영할 때와 분위기가 다른 건 당연했다. 나와 유비의 인사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랐으니까. 그래서 서운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살갑거나 한 성격이 아니었다. 회사 일은 척척 잘 해냈지만,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조금 어려웠다. 이런 나와 다르게 동기인 유비는 사무실 사람들과 사적으로도 잘 만나고 연락하고 1년차 선배와는 언니동생 할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좀 겉도는 날 사람들과 잘 친해지게 도와주기도 했고, 여러모로 참 괜찮은 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잠깐이라도 유비에게 좋은 호감을 가졌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오래 옆에 두는 게 좋다는 생각에 금방 마음을 접었었지만. 친화력이 너무나도 좋았던 유비는 본인의 사수인 서팀장님과 친해지다 못해, 사내연애를 시작했다. 처음엔 그들도 나름 연애를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 꿀 떨어지는 눈빛들과 조금씩 다른 태도에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경수야.”
“네. 팀장님.”
“사내연애란 게,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아. 그렇습니까?”
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원과 얘기중인 유비를 보며 서팀장님은 내게 넌지시 그렇게 말했었다. 서팀장님이 그렇게 얘기하실 땐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들이 이별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느 연인들도 그렇듯 두 사람도 역시 이별을 겪었다. 딱히 둘 사이에 트러블이 생겨서 헤어진 건 아니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그치만, 자연스럽고 별 문제 없는 이별을 했어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을 자주 마주친다는 것이 힘든 일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던 이유가, 이별 뒤에는 지독한 고문처럼 느껴지는 시간으로 뒤바뀐 것이다. 결국 유비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적으로는 계속 연락을 이어갔었는데, 유비는 회사를 나간 뒤에도 굉장히 많이 힘들어했었다. 아, 유비가 힘들어했던 걸 생각해보니까 트러블이 아예 없었다고 말하는 건 내 섣부른 판단 같기도 하다. 유비가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뒤, 팀장님도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서. 그 때 즈음 유비의 몸이 안 좋아졌다. 그 원인에 팀장님과의 이별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그 때 악화된 몸이 지금까지 계속 안 좋은 걸 생각하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도 같다.
“그때 서팀장님이랑 사귀지 않았으면, 아직 그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까? 너처럼, 팀장이란 이름을 달고 말이야.”
이따금씩 만나는 유비는 저런 이야기를 종종 하고는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유비의 표정은 그리움도 묻어났고, 아쉬움도 묻어났고, 슬픔도 묻어났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이었다. 가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나는 두 사람을 계속해서 지켜봐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내연애라는 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참 못할 짓이라고. 그 생각은 사내연애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뭐, 사내연애를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뿐이었지 굳이 연애를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며 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만 하다 보니 자연스레 연애라는 것은 내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별 다른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도 내 인생은 그렇게 굴러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을 이렇게 지내온 거 굳이 더 이렇게 살아도 다를 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팀장님. 신입사원들이래요.”
“신입?”
그리고 너를 만났다. 처음엔 단순히 뭐 이런 미친 여자가 있나 싶었었다. 연구 대상이라고까지 여겼었으니까. 나한테 자꾸 민폐를 끼치는 것도 짜증나기도 했고, 술에 취해 나에게 입을 맞췄을 때는 진짜 이런 답 없는 사람이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났을까 싶기도 했었다. 그치만 자꾸만 너에게 눈이 가는 이유를, 정말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정신을 차리면 내가 널 보고 있더라고.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이 피어오르려고 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사내연애 같은 건 할 짓이 못되는 걸 알면서 왜 자꾸 이러냐, 도경수. 하고 내 자신을 자책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그 때 뿐이었고, 막상 또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나면 나는 널 보며 낯선 감정을 느끼며 낯선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날 왜 찾아.”
“보고싶으니까.”
누군가가 널 특별한 눈으로 보는 게 싫었다. 이건,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내가 널? 애써 다른 일을 찾았다. 너 말고 시선을 둘 다른 것을.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거라면 세상 살기가 좀 편했을까. 내가 어쩌다가 너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운 시간들만 더해졌다.
“아뇨. 전혀요. 김종인씨가 왜,”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남자의 이름에 온 신경이 날카롭게 서는 것 같았다. 이 낯선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나가는 곳조차 모르는 내 마음 깊은 곳 한 가운데에 멈춰 서있었다. 나는 마치 갓 걸음마를 떼는 갓난아기 같았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느낀다는 게 이렇게 여러 가지로 괴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이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도.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김여주씨랑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남아서 회사로 가야합니다.”
나는 너 때문에 거짓말도 해보고, 의미 없는 것들을 검색해보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너의 취향을 묻기도 했고, 은근슬쩍 내가 원하는 것을 흘리기도 했다. 너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이토록 별다른 이변이 없을 줄 알았던 내 인생에, 너는 이변이었다. 알면 알수록 너는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어서 이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노력했다. 정말 많이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숨길 수가 없었다. 너에게 느끼는 낯선 감정을, 재채기를 하듯 나오려는 간지러운 말들을 참을 수가 없다. 너를 향한 내 감정을 알아가는 것이 마치 열병을 앓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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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아닌 이상 팀장님이 그날 밤 내게 했던 말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팀장님은, 내가 김종인이랑 있는 게 신경 쓰이고 질투가 난다고 말을 한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질투라는 게 혼자 독점하고 싶은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팀장님은 날 왜 독점하고 싶을까. 내가 본인의 부사수라서? 아니면 김종인을 싫어하나? 그것도 아니면, 팀장님이 날 좋아하는 건가. 어떤 생각을 하듯 그 생각의 끝은 계속 같았다. 팀장님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의심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바보 같은 생각일 뿐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 그치만, 팀장님이 날 대체 왜? 언제부터? 저 결론 하나에 붙는 물음표는 셀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질문이 하나가 있다.
“팀장님의 차를 오늘도 타고 갈 수 있을까..”
머릿속에 이상한 의심들이 가득 찬 지금 이 시점에 팀장님을 옆에 뒀다가는 이 질문들을 그대로 다 내뱉을지도 모른다. 매우 위험한 상태. 팀장님은 어제의 일을 기억하실까? 대충 얼버무리고 얼른 올라가자고 하고 먼저 자리를 떠서 팀장님이 따라오시긴 했었지만. 그게 또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차라리 기억을 못하시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출근시간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만 복잡하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핸드폰으로 시간만 자꾸 확인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몸을 작게 떨고 숨을 죽였다. 그러자 곧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김여주씨. 자요? 지각할 거예요?”
팀장님의 목소리였다. 발끝부터 온 몸이 빠릿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피한다고 해도 그때뿐이고, 별 다른 해결방안이라고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한 번 슥슥 빗고는 현관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린 문틈으로 보인 팀장님의 모습에 괜히 침을 한 번 삼켰다.
“늦잠 잤어요?”
“네? 네..”
“나와요. 지금 가도 빠듯해.”
그렇게 말하고 팀장님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팀장님의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는데 괜히 분위기가 숨이 막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와 다를 게 없을 게 분명하지만, 그냥 나에게 만이라도 그렇게 느껴졌다. 회사로 향하는 길 차 안도 어색하기는 똑같았다. 괜히 자꾸 팀장님을 힐끗힐끗 보게 된다. 나는 팀장님을 좋아하는데 팀장님이 날 질투한다면 좋아 죽어야할 텐데 뭐가 이렇게 어색한 걸까.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아서 그런가? 팀장님은 진짜 왜 나한ㅌ,
“억!”
“운전을 무슨 저딴 식으로 해. 아침부터 술을 쳐 먹었나.”
“....”
“괜찮아?”
눈 깜짝할 사이에 끼익 하며 차가 멈춰 섰다. 앞에서 어떤 차가 갑자기 끼어든 모양이다. 팀장님이 인상을 쓴 채로 앞으로 지나가는 차를 향해 쓴 소리를 했고, 날 돌아보며 괜찮냐고 물으신다.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라도 흐트러졌을까 고개를 숙였다가 멈칫했다. 아, 근데 저..
“팀장님..”
“네. 어디 다쳤어요?”
“아니요. 이거.. 손...”
“아.”
나를 보호하겠다고 막은 손이, 애매하게 가슴 언저리에 있었다. 내 말에 팀장님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금방 손을 떼셨다. 차 안은 아까보다 더 정적으로 휩싸였고, 팀장님은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쩌지. 팀장님과 내 사이가,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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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팀장님이 뭔지 모르게 좀 달라지신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고 말로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달라졌다.
“마셔요.”
“네..? 이게 뭐..”
“내꺼 사면서 하나 더 샀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일을 하는 와중에 대뜸 내 자리에 커피를 놓아주시며 저렇게 말하곤 휙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신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팀장님이 나름 내게 베푸시는 호의인지, 아니면 관심의 표현인지 모르겠다. 이게 관심의 표현이라면 약간의 의심이 든다. 팀장님이 연애고자라는. 이 밖에도 함께 출근할 때 밥은 먹었냐는 둥 전에는 없던 끼니 질문을 하시고, 나를 대하는 말투들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등 크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변화들이 생겼다.
“이 영화 제작으로 얻은 이윤이 얼마큼인지 수치화해야한다니까요. 이렇게 말로 구구절절 할 게 아니라.”
..물론, 일을 못 했을 때 혼내는 건 당연한 거니 그 점은 달라지진 않았다. 평소에는 잡일만 맡아서 하다가, 상반기 영화에 대한 투자보고서를 작성하게 됐는데, 처음 쓰다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팀장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팀장님의 집에서 작성중인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내가 답답하신가보다. 팀장님의 말대로 한참을 타자를 두드리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왔다. 멈칫하고 팀장님의 눈치를 슥 봤다.
“위 활동이 활발한가봐요. 저녁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꺼진 거 보니까.”
“....”
눈은 여전히 책을 읽으며 그렇게 말하시길래 민망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가 ‘팀장님.’하고 불렀다. 내 부름에 팀장님이 책에 꽂혀있던 시선을 내게 돌리신다.
“우리 치맥해요.”
“..뭐라고요?”
“치킨에 맥주..”
“지금 일 그렇게 하면서 치맥같은 소리가 나와요?”
“회사도 아니고 팀장님 집에서 그냥.. 도움 받으면서 하는 것뿐인데. 쉬엄쉬엄 하죠?”
“회사도 아니고 내 집이니까 그럼 김여주씨 집 가서 드세요.”
요새 나한테 좀 유해지셨나 했더니, 또 까칠하게 나오신다. 아무래도 방금 전까지 일 얘기를 해서 그런가보다. 술 좀 마시면서 팀장님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 게 진짜 내 속 마음인데.. 내가 김종인이랑 만나는데 왜 질투를 느꼈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일을 하던 노트북을 잠시 한 편으로 밀어두고 팀장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다시 날 쳐다보시는 팀장님. 나는 팀장님과 눈을 맞추며 잠시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팀장님과 김여주가 치맥을 해야 하는 이유 1.”
“?”
“김여주가 배가 고프다.”
“....”
“팀장님과 김여주가 치맥을 해야 하는 이유 2.”
“....”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하면 일의 능률이 높아진다.”
“....”
“팀장님과 김여주가 치맥을 해야 하는 이유 3.”
“....”
“팀장님도 솔직히 지금 치맥이 조금 당긴다.”
“....”
“어때요?”
“..시켜요.”
예에. 신나서 두 팔을 뻗어들었다가 잽싸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지만, 아무렴 좋았다. 치킨을 주문하고 잠시 밀린 카톡을 보고 있는데, 팀장님이 치킨이 올 때까지만 마저 하자고 말씀하셔서 시무룩한 채로 노트북 앞으로 갔다. 치맥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셨는데, 더 이상 팀장님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팀장님께 잔소리만 열댓번 들었을까, 어느새 시간이 흘렀는지 치킨이 배달 왔다. 팀장님이 가셔서 계산을 하시는 틈을 타 노트북을 접어 관련 자료들과 함께 테이블 아래로 치워뒀다. 치킨을 세팅할 자리는 마련해놔야지. 계산을 끝마치고 뒤로 돌아보신 팀장님이 말끔해진 테이블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날 쳐다보셨고, 나는 능청스레 팀장님께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잠깐 쉬는 타임이니까 TV 틀어도 돼요?”
“내가 틀지 말라고 해서 안 틀 사람도 아니잖아요.”
“틀지 말라고 하면 안 틀게요.”
“틀지마요.”
“네. 제가 안 틀게요. 팀장님이 틀어주세요.”
최대한 빙썅같은 표정으로 팀장님께 두 손으로 리모컨을 건네 드리자 팀장님이 허탈하다는 듯 날 보시다가 리모컨을 건네받으시고 TV를 켜신다. 팀장님이 채널을 돌리시다가 멈춘 곳은 저번 주에 나왔던 주말 예능프로그램의 재방송이었다.
“팀장님도 이거 보세요?”
“네.”
“의외네요.”
“왜 의외인데요?”
“그냥.. 찔러서 피 한 방울도 안 나올 것 같은 팀장님이 예능프로그램 보면서 웃으시는 거 생각하니까 매치가 잘 안돼요.”
“웃지는 않고 그냥 보는 거지.”
예능프로그램 하나 보는 게 뭐라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걸까. 맥주를 얼만큼 마셨을까, 술을 마셨다고 인지를 해서 그런지 괜히 더워지는 것 같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 취했을리는 없고. 예능프로그램도 끝났고, 광고가 나오는 화면만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팀장님.”
“네.”
“유비가 누구에요?”
“...누구요?”
“유비..”
내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팀장님은 조금 당황한 낯빛이었다. 내가 그 분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놀라우신 건가? 팀장님은 입가에 대고 있던 맥주캔을 살짝 내려두시고 날 쳐다보셨다.
“김여주씨가 유비를 어떻게 알아요?”
“아뇨.. 아는 건 아니고, 팀장님 그 때 김종인씨한테 저 혼자 보낸 날 그 분 때문에 못 간다고 그러셨잖아요. 팀장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일까지 빼먹을 정도로 만나실 분이면 뭐 소중한 분인가 해서..”
내 말에 팀장님은 날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다 대 한 모금 들이키셨다. 그의 입에서 무슨 단어로 그 여자와 엮인 대답이 나올지 괜히 목이 바짝 탔다.
“그냥 내 입사 동기에요.”
“아... 입사 동기. 엄청 각별하신가봐요. 동기랑..”
“뭐. 유비한테는 좀 잘해줘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리고 팀장님은 말을 아끼셨다. 어쨌든 그냥 입사 동기라는 대답에 한 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관계를 정의하기 힘든 애매한 대답이 나올까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팀장님도 맥주를 거의 다 마셔가는 것 같았다. 저걸 다 마시면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자고 하시겠지. 잠깐 쉬자고 한 치맥인데, 한 번 술을 들이키고 나니 몸이 축 늘어지고 다 하기 싫어진다. 우선 재미없는 광고만 나오는 채널을 좀 돌려서 계속 TV나 보게 해야겠다.
“왜 채널 돌려요. 일 안 해요?”
“네? 아. 해야죠..”
“마신 거나 치우고,”
-“하응.. 하앗.. 하아..!”
“아!”
시발. 깜짝이야. 갑자기 튀어나온 살색 화면과 귀를 자극하는 높은 신음에 깜짝 놀라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아. 채널을 빨리.. 허둥지둥 떨어진 리모컨을 주워들고 리모컨을 TV쪽으로 뻗었는데도 아른거리는 살색에 자꾸만 손이 어긋났다. 그 와중에 TV에서는 계속 자극적인 신음들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늦은 만큼 TV에서 이런 게 많이 나온다는 걸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나 혼자였으면 아싸리하고 봤을 텐데,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전원버튼을 눌렀고, TV에 까만 화면으로 가득참과 동시에 온 집안도 정적으로 가득 찼다. 숨소리조차 한숨처럼 크게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내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얼어붙은 채로 그제서야 눈을 살살 굴려 팀장님을 힐끗 봤다.
“.....”
팀장님은 손에 빈 맥주캔을 쥔 채로 가만히 꺼진 TV를 쳐다보고 계셨다. 빈 맥주캔인 걸 어떻게 알았냐면, 팀장님의 손에 쥐어진 맥주캔이 눈으로 구분이 될 정도로 약간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팀장님도 당황스러우신 걸까..
“저.. 팀ㅈ,”
“가요.”
“..네?”
“가라고.”
조심스럽게 팀장님을 다 부르기도 전에 팀장님은 날 보지도 않고 내게 가라고 말하셨다. 화나셨나..? 하긴, 부사수가 먼저 치맥하자고 졸라대서 같이 술 마신 것도 모자라서 일하자니까 야동이나 트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어떤 상사가 짜증이 안 나겠어. 넋이라도 나간 건지 팀장님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려고 몸을 조금 가까이 대는데 팀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신다. 내가 팀장님을 만난 이래로 가장 빠르게 움직이신 것 같다. 멍하게 팀장님을 쳐다봤다.
“어딜 와.”
“..네?”
“가라고 빨리.”
“아니.. 팀장님.”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말고 가요 빨리.”
“......”
“지금 정신 나갈 것 같으니까.”
머리를 짚으며 팀장님이 작게 말하셨다. 정신이 왜? 취하셔서 그런가? 자리에서 주춤대며 일어나 걱정스런 목소리로 ‘정신이 왜요..?’ 하며 팀장님께 한 발자국 다가가기가 무섭게 팀장님이 두어발 더 뒤로 물러나신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팀장님..”
“몰라서 물어?”
“......”
“지금 네가 내 앞에 있잖아.”
“.....”
“술도 마셨고, 저딴 게 눈에 들어오고, 너는 내 앞에 있고.”
“.....”
“심장 터질 것 같다고.”
팀장님이 열을 토하듯 하시는 말에 나는 팔을 허공으로 떨구었다. 팀장님의 얼굴이 붉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팀장님의 얼굴이 붉은 게 술 때문인지, 방금 내가 잘못 틀었던 TV채널 때문인지, 아니면..
“팀장님.”
“.....”
“저 좋아해요?”
나도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내 입은 평소라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질문을 잘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
“......”
“좋아해요.”
팀장님은 생각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너 좋아해.”
널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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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세상에..... 으어아어 좋아한대ㅠㅜㅠㅜㅠㅜㅠㅜ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1.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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