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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庵公墓碣銘 - 諱奎鉉 禮安之汾川里聾巖李先生孝節公之舊居也余曾訪問其里多得與其後人者交游而有曰裕民君亦嘗 亟過余偏陬見委以先籍之役今又以其曾王考慕庵公之題墓爲屬則余前所叙敬謨堂公之孫也顧此 病廢年久何敢復議於文字之域而感其專懇不可以循例辭謹按其狀公諱奎鉉字德章後改象應慕庵 其號李氏本貫永川自聾巖先生歷十一代而及於公高祖馧曾祖廷楫祖祥흡卽敬謨堂考時養壽僉樞 以行誼重於士林妣淑夫人豊山金氏外祖亨源純廟戊辰公生于汾川世第幼而穎悟每以奇才爲先公 所期愛長而性度剛方好直斥人過惡鄕里多敬憚之早廢擧業博涉經子兼治史學其於歷代治亂沿革 與夫山川人物儒賢故事靡不淹貫而詳說之其諸一生用工皆從實際而不以徇俗低昴嬰懷所居里於 陶山爲近時出而留連吟咏以寫其景慕之忱家有伯兄蚤喪獨侍大人公享壽耄耋愉婉洞屬昕夕不離 左右及其遭憂則公年亦已過不致毁而猶能遵禮不從權制蔬素衰絰月再省墓纔經練朞而病終于堊 次是五十五歲之哲廟壬戌正月三十日也方革顧謂諸子曰人心不可無主着書冊者不可一日而不親 也仍申戒以承先啓後之軌塗可見精爽之由於素養也其纂修聾巖先生年譜及編次敬謨堂公遺稿今 皆具有徵案公又有詩文論著卷成而將謀傳後余猶得涉閱而窺其一斑矣獨惜其厄於年命終未免乎 不勝喪之名而止也玆豈非斯文之一不幸耶公前後二配冶城宋氏學程女禮安金氏養老女三男景淵 昺淵昌淵公之葬始厝于里近愚谷後移窆小川飛龍洞負癸之原近聞禮安一鄕方有水渰之慮而公之 墓尙保不騫于以知其名跡之且可永久也幷附見于銘銘曰 慕之以心爲誠爲德禮之在躬卽名卽實 惟其有之是以順寧陵夷谷遷尙視玆銘 歲丁巳白露節聞韶金榥撰
모암공 묘갈명 - 휘 규현 예안의 부내는 농암(聾巖) 이(李)선생 효절공(孝節公)의 옛 거처이다. 내가 방문했을 적에 그 마을에서 그의 후손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것을 알았는데 말하자면 유민(裕民)군 역시 자주 외진 곳의 나를 보려고 지날 적에 선대(先代)를 기록할 일을 맡겼었는데 지금 또 그의 증조부 모암공(慕庵公)의 묘비문(墓碑文)을 부탁하는데 바로 내가 전에 서술(敍述)했던 경모당(敬謨堂)공의 손자였다. 나를 돌아보니 이렇게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서 어찌 감히 문장으로 다시 설명할까 마는 그의 전념(專念)하는 간절함에 감동하여 예(例)를 따라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가장(家狀)을 살피니 공의 휘는 규현(奎鉉)이고 자는 덕장(德章)인데 뒤에 상응(象應)으로 고쳤고 모암(慕庵)은 호이고 이씨(李氏)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농암(聾巖)선생으로부터 十一대를 지나서 공에게 미쳤고, 고조부는 온(?)이고 증조부는 정즙(廷楫)이고 조부 상흡(祥흡)은 곧 경모당(敬謨堂)이고 아버지 시양(時養)은 수직(壽職)이 첨추(僉樞)인데 행의(行誼-옳은 행실)로 사림(士林-선비들)에서 소중히 여겼고, 어머니는 숙부인 풍산 김씨(豊山金氏)이고 외조부는 형원(亨源)이다. 순조 무진년(一八○八년)에 공이 부내의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는 총명해서 항상 기특한 재주로 부친을 섬기니 부친이 기대(期待)하고 사랑했고, 장성(長成-어른이 됨)해서는 성품과 도량이 굳세고 반듯하며 정직함을 좋아했고 사람들의 허물과 악(惡)을 물리치니 향리(鄕里-마을)에서 많이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일찍부터 과거(科擧)공부를 그만두고 경전과 아울러 정치와 역사학을 널리 섭렵(涉獵-널리 읽음)한 것은 역대의 정치와 변란(變亂)의 연혁(沿革-내력)과 더불어 산천과 인물의 대강과 어진 선비의 고사(故事-옛날 있었던 일)에 골고루 적지 않게 관통(貫通)하여 자세하게 설명했고, 그런 여러 가지를 한 평생 공부로 사용하여 모두 실지로 따랐으며 세속(世俗-세상 풍속)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행동에 매우 조심했다. 살고 있는 마을이 도산(陶山) 근처인데 집을 외출할 대나 집에 머무를 때는 연달아 시가(詩歌-시와 노래)를 읊으면서 경모(景慕-존경하고 사모함)하는 정성을 묘사했고, 집에서는 맏형이 일찍 돌아가서 홀로 부친을 모셔서 九十살을 향수(享壽-천수를 누림)하였는데 즐겁게 따르고 밝게 살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하니 공의 나이 또한 이미 五十이 지났으나 오히려 예법(禮法)을 지키면서 권제(權制-적당히 하는 제도)를 따르지 않았고 소식(蔬食)했으며 상복을 갖추고 한 달에 두 번씩 성묘했고, 겨우 소상(小祥)이 지나서 병으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서 돌아가니 곧 五十五세로 철종 임술년(一八六二년) 정월 三十일이였다. 돌아갈 즈음에 여러 자제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주착(主着-주장)이 없을 수 없고, 서책(書冊)은 하루도 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거듭 훈계(訓戒)함으로 인하여 조상을 계승하여 후손에게 궤도(軌塗-바른 길)를 열어 주었으니 소양(素養-교양)에서 말미암은 밝은 정신을 살필 수 있다. 농암(聾巖)선생의 연보(年譜)를 닦아서 편찬했고, 다음에는 경모당(敬謨堂)공의 유고(遺稿)를 편집했는데 지금도 모두 책상에 갖추어져서 징험(徵驗-증거로 확인함)할 수 있다. 공의 시문(詩文)과 논저(論著-저술)가 책으로 메어져 있어서 장차 후세에 전할 계획인데 내가 얻어서 두루두루 살피고 엿본 것은 오히려 그 일부분이었고, 연명(年命-수명)의 운수가 사나운 것이 오직 애석할 뿐이며 끝까지 면치 못한 것은 명성을 잃고 그치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함이니 이것이 어찌 사문(斯文-유학)의 일대(一大) 불행이 아니겠는가? 공의 배위(配位)는 전후(前後) 두 분인데 야성 송씨(冶城宋氏)는 학정(學程)의 따님이고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양노(養老)의 따님이다. 아들 셋은 경연(景淵)과 병연(昺淵)과 창연(昌淵)이다. 공의 묘소는 처음에 마을 근처 우곡(愚谷)에 모셨다가 뒤에 소천(小川) 비룡동(飛龍洞) 계좌의 언덕에 이장했는데 근래에 들으니 예안의 온 고을이 바야흐로 물이 들 염려가 있다는데 공의 묘소는 오히려 손상되지 않게 보호됐으니 자취가 유명함을 알 것이고 또한 영원할 것이다. 아울러 명(銘)을 덧 붙여서 나타내며 명(銘)을 이르니 마음으로 사모하고 정성과 덕을 위했으며 몸소 예의를 실천하니 진실로 이름났도다. 오직 가진 것은 정녕한 순종이요 묘소를 이장한 골짜기에 이 명(銘)이 높이 보이리라.
정사년(一九七一년) 백로절(九월八일경)에 문소인 김황은 짓다.
註 ①소식(蔬食) : 변변치 못한 음식 ②악차(堊次) : 상중에 무덤 옆에서 상제가 거처하는 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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