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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2014. 겨울호 동산문학, 마감 11.21(금)
email: dsmunhak@daum.net T:062-233-0803
원고지 (130매)
고독과 모정결핍,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낳았다
1.등단작 山門에 기대어
얼마 만인가, 이 山門 안에 다시 온 것이.... 젊은 날의 한 해를 여기서 보냈다. 중도 아니고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나날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을 추스를 길이 없었을 때 영혼이 울고 거기서 시혼이 솟고 그 끝에 「산문에 기대어」가 있었다.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섭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그리메: 그림자의 옛말
- 산문에 기대어, 전문
山門.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이다. 윤회의 끝없음과 부활(환생)이다. 시력40여 년을 돌아보면 나의 첫 출발은 이 문을 하나 짊어지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엔 한 생명의 부활과 윤회가 끝없이 한(恨)의 가락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 폭설이 내리는데 멀리서 온 독자와 함께 선암사에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다 말고 한 발은 일주문 안에 한 발은 일주문 밖에 두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 이승이 곧 저승이고 저승이 곧 이승인 불이문(不二門)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경계 허물기가 곧 山門이 아닐까. 이승과 저승을 뒤집어 놓는 체험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상처가 없는 행복한 시쓰기로 시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누이야/ 가을산 그리레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산문에 기대어」중의 그 「눈썹」이야말로 한의 끈적끈적한 덩어리인 것이다. 즉, 무주고혼이다. 야산 같은 데서 이장을 하다 보면 뼈는 다 삭아 내렸는데 머리칼과 눈썹만 그 음습한 웅덩이에 고여 있음을 본다. 백발이 아니라 그것이 검은 터럭일 경우 얼마나 섬뜩하고 한에 젖어 있는 터럭들인가?
그래서 이따금 화장실 출입을 하다 수세식 좌변기에 묻어 있는 「털」하나를 보았을 때, 그 터럭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런 날은 오래 잠자던 불면증이 다시 겹친다.
뱃길에서 죽은 자의 혼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식기를 흰 띠에 매달아 물속에 쳐 넣었다 건져 올린 후 열어 보면 거기에 들어 있는 것 역시 터럭이다. 출가할 때에는 머리를 깎는다. 땅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그 원한이 젊은 죽음일 때 이 무주고혼은 가을산 그리메에 떠도는 넋이 아니겠는가? 이 덧없는 죽음 위에 돌로 눌러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부활의지, 그 부활 끝에 누이는 이제 산다화를 꺾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인과법칙과 윤회 속에 환생하여 있음을 본다. 이처럼 「山門에 기대어」에서 유추(analogy)된 눈썹은 「꿈꾸는 섬」이나 「달」에서도 맺힘과 풀림의 한으로 징그럽게 떠오른다. 이는 선험적 이미지로 떠오른 상징의 매개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휴지통에서 나온 시인
이 시는 바람 부는 늦가을, 기러기가 공중에 길을 내는 것만 보아도 누이(자살한 남동생)의 선험적 이미지인 눈썹(동생은 숱이 짙은 눈썹이었음)의 행방을 보게 되고,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란히 따라 놓고 그가 와서 나의 빈 잔을 채워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의 넋두리는 내가 살아서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기다림의 넋풀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체 형식의 독백 속엔 설움이 깊게 배에 있는 재생적 의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곧 넋풀이로서의 해한이며 역동적인 생기로 피는 한의 극복의지이다. 「교과서 시 정본해설」에서 이숭원 교수는 이 시를 ‘절대 최후의 환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山門에 기대어」는 제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인데, 당시 나는 서울을 떠돌며 생존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어느 여관방에서 갱지에 갈겨쓴 채 10 편을 응모했는데, 원고지에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지통에 넣은 것을 심사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어 당선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주간으로부터 자넨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란 우스갯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주소도 이름도 낯설어 그 1년 후에야 수소문 끝에 시인을 찾아내게 되었단다. 1975년 2월에 당선소감을 써서 문학사상사에 들렀더니 이어령 선생은 이렇듯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또 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나의 이 시를 표절했다 하여 취소된 사건은 열병을 앓는 문학도의 주가를 엄청나게 상승시켰다.
이 시는 1966년 봄, 24세 남동생이 제대한 그 다음 날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음독 자살한 사건을 다룬 추모형식의 엘레지다.
3.부카레스트 1934
동생 수종(秀鍾)은 나와는 세 살 터울이다. 정확히 말해서 동생이 죽은 것은 1966년 3월 초순이었다. 제대복을 입고 허무증을 안고 돌아온 그 이튿날로 놈은 한내천 자기 어머니의 무덤이 보이는 언덕 밑에서 자살을 했다. 놈이 먹다 남은 수면제 알약들이 군복 깃을 타고 흘러 들찔레꽃처럼 아침 이슬에 젖어 하얗게 피어 있었다.
그날부터 점을 치면 죽어서도 놈은 입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장가 갈래였다. 동남간 쪽 어느 마을에 색시를 보아 두었다거니, 아무데 마을 색시는 마음에 안 들고 업살이 꼈다거니 제 주제는 생각지도 않고 횡설수설 떠들어 댔다. 그래서 생넋들끼리 결혼도 시켰다.(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만다라의 바다>,<아내의 맨발>에 있는 ‘겨울나비’ 참조)
그러니 시간 망각하는 법을 배우라. 시간이 지닌 의미를 두려워 하지 않는 법도 배우라. 감상적인 기록의 모든 흔적들을 억누르고 곧 사라져 버릴 명상, 어릴적 추억도 가을도 짓밟힌 꽃잎도 향수마저 억누르라
- 부카레스트 1934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니 가슴 속에서 놈의 영원한 무덤을 파내 버리기 위해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짐승처럼 울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1962년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고 곧 공군에 입대. 65년 12월에 제대했다. 놈은 그 이듬해 3월에 재대했다. 놈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나는 중학교 교단에 발령을 받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에게도 큰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부터 미친놈처럼 부카레스트 1934를 즐겨 외고 다녔으리라 싶다.
망각하는 것, 이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는 병으로 비슬거렸고 놈은 한 살바기였다. 그는 젖도 못 먹고 자란 놈이었다. 어머니는 놈이 걸을 때쯤 늘 젖무덤에다 고추가루를 발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곤 했다. 그대신 할머니가 미음을 끓여 먹였다.
전주 예수병원으로 순천 알렉산병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떠돌아 다녔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모성을 잃고 자란 형제였다. 놈은 비슬거리다 중학교 때 어질병이 나더니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할머니도 가고 어찌할 수 없이 서모가 들어왔다. 열 살 때 어머니도 가고 동생은 일곱살이었다. 7년 간을 담괴가 터진 옆구리를 붙들고 고름을 쏟아내던 어머니, 그 무덥던 여름 날 방 안은 고름 냄새로 찌들어 내 코는 마비되었다. 지금도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것은 그 후유증이다. 옆 집 채마밭 가에 핀 치자꽃 봄철에 핀 철쭉(개꽃)꽃을 꺾어다가 병상의 화병에 꽂아 놓았던 일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놈은 시원찮은 몸을 이끌고 올라와 날품을 팔고 애꿎은 일을 하며 학비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치사하게도 그 엽전을 긁어 먹고 시인이 된 놈이다. 그는 군 입대를 했고 나는 학교를 나와서도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섬 중학교로만 10여 년을 떠돌았다.
4. 붉은 황톳길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흘러흘러...
고향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도 못살고 굶주렸던 고향이지만 그러나 마음에 살아 있는 고향은 따뜻하기만 하다. 내 고향은 연산군 때라던가 파발말을 놓는 역이 생겼대서 속성을 역둘리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의 최남단 고흥반도다. 고흥읍에서 서북으로 20리를 더 들어가는 두원반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두원면 학곡리 학림마을 1297번지다. 지금은 폐가가 되어 다 허물어져 가고 있다. 학은 죽실(竹實)을 먹고 사는 영험한 새이다. 바로 이 새가 살았다는 골짜기 그래서 학림(鶴林) 마을이고, 이 마을에는 학산(鶴山)이 우뚝 솟아 있다. 학산을 넘어가면 사적굴이 있고 사적굴이 있는 동산을 넘다 보면 바로 보성만과 득량만이 건너다 보이는 바다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60여 호쯤 그저 고만고만한 집들이 양짝, 음짝, 당산마을을 이루면서 창창한 대숲바람에 잠겨 있다. 나는 양짝마을에서 자랐다. 내 시에 대숲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서모가 지어준 새벽 밥을 먹고 20리 길을 통학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1학년이었다. 아침이 늦으면 많이 굶고 가기도 했는데 놈의 어질병은 거기서 오지 않았나 싶었다. 큰 고갯길만 해도 자시치고갯길과 송치고갯길이 가로 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질컥거리는 황톳길이었고 마차나 소달구지도 이따금 황토수렁길에 쳐박혔고 갖가지의 추억도 많다. 그때는 운동화가 없어 검정 말표 고무신을 끌고다녔는데 어떤 날은 맨발로 이 고갯길을 넘기도 했다. 학교에서 신발 도둑들에게 도둑맞으면 영낙없이 이 꼴이었다. 이 눈물겨운 이야기를 쓴 시가 ‘검정고무신’인데 17시집 《사구시의 노래》(2013)에 실려있다. 사구시의 노래는 내 문학인생 40년 만에 고향 「고흥반도」의 삶을 시로 쓴 것인데 고흥군의 후원으로 낸 시집이다. 이 길은 어두었지만 언제나 신선하게 열려 있었고 무한대의 시간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항상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쳤고 내 유년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따뜻한 신화의 불빛에 젖은 황토를 떠올리게 한다.
읍내에서 두원반도의 끝 대전 해수욕장까지의 50리 길은 아스팔트로 뒤덮여 교통량도 예전 같지가 않다. 마을 뒤의 득량만은 4km의 고흥 방조제가 들어서서 바다를 가르며 녹동항까지 이어져 바다는 죽었다. 훗날 시인이 되어서야 맨 먼저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신화적인 축제 이야기들을 시로 써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골길 또는 술통」이며 작년(2013)도에는 문학인생 40년을 정리하는 고향시집《사구시의 노래》를 고흥군 후원 사업으로 헌정하기도 했다.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시골길 또는 술통, 전문
이 시는 1975년 등단 이후인 1978년쯤 쓴 작품이지 싶다. 제 1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신화의 불빛이 따뜻하게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나의 삶은 이 불빛에서 하나의 상징기호를 얻은 셈이다. 그것은 곡선의 상법이며 황토의 길과 대숲바람 소리, 뻘로 이루어지는 나의 시세계와 일치한다. 치마속으로 들어가는 그 길이 곧 어머니의 자궁이며 나의 시는 이 원형적인 자궁 속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나의 문학은 동생의 자살이 문학적 열병을 다시 솟아나게 했고 근원적으로는 고독과 모성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5. 친구 임홍재 시인
1966년 10월 16일 나는 중등학교 채용 순위고사에 합격되어 고향 언저리에 있는 영주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1년 만에 나주중학교 교사, 그리고 8개월 만에 이 세상 끝섬이 어딘가를 물어 초도중학교로 자원했다. 나는 이 세상 끝까지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동생의 자살은 이렇듯 나를 짓눌렀으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여수항에서 여섯 시간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중학교였다. 무려 6년을 주저않았다. 그리고 상록학원을 열어 간판을 걸고 야학도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무인도를 돌며 낚시하는 재미로 소일했으며 문학 잡지 한 권 읽은 적이 없었다. 31세 때 이 곳에서 결혼을 했으며 아내는 영주중학교 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였다. 그 6년 사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큰애의 교육을 걱정하여 육지로 발령 신청을 했는데 또 다시 고향 언저리 섬이었다. 과감히 사표를 쓰고 1973년 봄부터 아내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맨처음 찾아간 곳이 선암사였고 남명 스님을 만나 중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런데 남명 스님은 괴짜승이었고 밤마다 막걸리를 한 되 이상 들이키고 닭 한 마리를 먹어야 잠을 이루었다. 중이 된다는 것도 쉽잖아 보여 몇 개월 만에 서울로 튀었다. 이때 절방에서 문학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해서 초안을 잡았던 것이 「山門에 기대어」외 몇 편이었는데 2007년 월간조선 2월호 <문학산실>인 ‘벽안당’을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1976년 또다시 순위고사를 보아 합격하고 발령 받은 곳이 지도라는 섬인 지명중학교였으며 이때는 어엿한 시인 교사였다. 1975년 3월경 그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과 함께 문학사상 주최로 ‘YWCA’에서 합평회가 있었는데 그 때 만난 시인이 임홍재 시인이었다. 그는 서울신문에 ‘바느질’이란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 ‘염전에서’가 당선되었었다. 그 인연으로 79년 그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2백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고 방학 때면 서울에 가서 만났는데 박용래 시인과도 친교를 텄다. 그가 청계천 다리에서 실족사로 죽은 후 여성동아에 2회에 걸쳐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가 죽은 2개월 후에서야 사무실에서 되돌아온 편지를 받고서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유일한 친구라면 친구였다. 20 대에 등단을 못하고 30대 중반에 등단을 해서 내 나이 또래의 시인이 없는 터라 60년데 시인들의 모임에 갈 수도 없는 어중간한 처지가 되었다. 안성농고에 세워진 그의 시비를 참배하고 오면서 서럽게 쓴 시가 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
먹뱅이 남사당패 어디 갔나
남사당은 내 고향
내 몸은 아프다
소리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설설 끓는 동지 팥죽
저녁 한 끼 시장한 노을 위에
식어가는 가마솥 뚜껑 위에
안성安城세지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이 내린다
비나리패 고운 날라리 가락 속에
눈물범벅이 진 네 얼굴
곰뱅이 텄다 곰뱅이 텄다
70년대를 한판 걸쭉하게 놀아보자던
네 서러운 음성 위에
동녹이 슬어가는 유기전 놋그릇들 위에
눈이 내린다
어스레기* 황혼을 부른 말뚝 위에
*어스레기: 어린 송아지
-안성장터/ 홍재시인에게
6. 광주시대와 변산시대
섬으로만 떠돌다 1980년 3월에 광주로 입성했다. 광주여고는 5.18이 일어난 도청 옆에 있었다. 입성 2개월 후에 5.18이 일어났고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젋은 광장에서’라는 복간 시를 쓴 것이 계엄당국으로부터 타격을 받은 화근이었다. 이어 광주여고 삐라사건, 홍남순 김지하 시인 석방으로 YWCA 시낭송 사건 등으로 동부(광주)경찰서 형사 박형모 씨와 함께 똑같이 출근을 한 것이 무려 2년, 드디어 하룻밤 새벽에 서광여중으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젊은 광장에서’라는 80여 행의 시(2014.5.18문학총서/시,참조)는 개인 시집에도 넣지 않았다. 이로부터 효광여중, 광주학생교원 연구사 등 광주시대 15년을 마감한 것이 1995년 8.31일이었다. 교장 진급이 되지 않을 바에 명퇴를 서두른 것이다. 어느 날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내 인사기록카드에는 ‘요 감시 인물’의 붉은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다시 방랑끼로 그 떠돌이병이 도진 것이다. 제주도행, 평소부터 절친이었던 현 시인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낸 책이 「남도의 맛과 멋」이었는데 초당대학교 김창진 교수로부터 낯설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남도의 맛과 멋」의 서설을 읽고 감동을 받았는데 대학 교양국어에 한 꼭지를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강의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마침 동해 난바다 서해 뻘바다 제주 바람바다라서 제주 겨울 바람을 피하고 싶어 곧 육지부로 나와 출강을 했다. 이어 광주여대, 그리고 순천대 김길수 교수로부터 문창과가 설립된 초창기라서 출강을 허락해왔다.
서재를 서귀포에서 변산 뻘밭가인 격포로 옮겨왔다. 낙산일출 월명낙조란 말처럼 변산은 노을 속에 핀 연꽃밭이었다. 음식기행을 수년간 하고 다녔던 터라 무작정 이곳이 좋아 찾아든 것이다. 양우아파트 304호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밥을 퍼먹는 수저통에까지 노을이 기어 들어 내가 밥을 먹는지 노을을 퍼먹는지 어리벙하고도 황홀한 순간- 그 낙조란 지는 노을이 아니라 새로운 천지 창조의 시간임을 느꼈다.
이때 낸 시집이 제 9시집인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이었고,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였다. 2014년 여름 신석정 문학관장 소재호 시인의 초청 특강으로 변산에 들러 매창공원엘 갔더니 나의 시비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가 서 있어 퍽이나 감동스러웠다. 격포에서의 3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하던 님......’의 매창과 뒹굴던 그 시절이 결코 무심치 않았음을 알았다. 또한 노을 속에서 뒹굴었던 2-3년의 시간들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 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 올렸다는 채석강의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려
뻘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이곳에서 황혼이야말로 대역사大役事를 이루는 시간
가슴 뜨거운 불꽃을 사방으로 던져
내소사 대웅보전의 넉살문 연꽃 몇 송이도
활짝 만개한다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동까치 한 마리도
만다라와 같은 불립문자로 탄다
곰소의 빨강을 건너 소금을 져나르다 머슴 등허리가 되었다는
저 소요산 질마재도 마지막 술 빛으로 익는다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
해는 수평선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대역사(大役事), 전문
나는 이곳에서 우리 국토 산수정신인 황토와 대(竹)에 이어 뻘의 정신을 마지막 천착하기로 했다. 그래서 격포 뻘밭을 선택했으리라 믿는다. 광주시대까지를 황토와 대(竹)의 정신을 천착했다면 격포시대는 마지막 뻘을 캐기 시작한 뻘짓거리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집 17권은 이 3대 국토 정신에서한 치 반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나는 욕심이 많아 시의 양가정신인 언어와 사상(정신)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7. 지리산 시대
페르몬 냄새 질퍽한 뻘과 노을 속에 눈썹 날리며 살던 격포 바닷가에서 화개장터 건너편 염창 마을로 서재를 옮겨 온 것은 2001년 겨울이었다. 이로부터 순천대학교 문창과 객원교수에서부터 정식교수로 특채 된 행운을 얻어 학교에 상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생 팔자에 없는 교수가 된 것, 그것도 석박사 학위는커녕 학사 졸업장도 없으니 행운일 수밖에.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노상 군소리를 했던 아내도 봉급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니 시도 밥먹여 줄 때가 있네요, 했다. 그것도 국립대학교 특채 1호 교수(해방 후 처음)라고 언론이 떠들어 댔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40분, 격포의 노을과는 달리 섬진강의 강 노을과 지리산의 산노을 또한 유정해서 2005.8.31 정년까지 그리고 2012년까지 무려 15년 간을 이곳에서 환갑을 맞았고 정년 그리고 학교에 남아 있었다.
이로부터 나의 문학적 공간은 광주와 변산시대 18년을 마감하고 지리산과 섬진강 시대 15년으로 확장된다. 1976년도에 섬인 지명중학교에서 육지로 상륙했던 곳이 구례중학교였고, 이곳에서 다시 1978년도 섬학교인 금당중학교로 가기까지 2년을 살며 ‘지리산 뻐꾹새’ 등 많은 작품을 남겼던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뻐꾹새’는 2010년도 대입수학능력 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2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모태신앙과도 같은 제 2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래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쪽 배밭의 배꽃들도 다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같이 뺨 부비는 것, 소곤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내 사랑은, 전문
이 시는 어초장 언덕받이에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 난 다음 5월 쯤에 쓴 시가 아닌가 싶다. 봄이 되면 섬진강 일대의 지리산 밑은 꽃대궐 잔치가 되는데 그 꽃피는 소리가 이처럼도 시끄럽다. 5월이 되어서야 감잎이 피는데 어초장은 열 한 그루의 감나무가 있는 농막으로 그 야들한 잎들이 꽃보다 더 싱그럽게 핀다. 주말이면 어초장에 돌아와《지리산 뻐꾹새》울음을 들으며 지리산을 타고 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달궁길- 이 길은 ‘여순사건과 빨치산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수히 넘나들었던 길이다. 그렇게 해서 써진 것이 서사시집 《달궁아리랑(2010)》이고 그 후속타인《빨치산(2012)》이었다.
‘이 산책로는 1976년에 쓴 <지리산 뻐꾹새.의 울음과 한으로 먹칠된 길이다. 그리고 등단작 <山門에 기대어>는 그 2년 전에 이 길 위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고단-심원 마을(계곡)-달궁 마을(계곡)-반선 마을(뱀사골)-의 기나긴 우렁이 속같은 숲길이다. 1976년 8월 구례 중학교에 부임하면서 산악회의 후원으로 노고단에서 최초의 ‘산상시화전’을 열었는데 그 사진이 지금도 노고산장 벽면에 붙어 있다.
그때는 황톳길이었고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군용도로였다. 근 40년 간 현대사에서 반란의 길. 역적의 길, 반역의 불온한 길을 걸으며 나의 문학도 이 길 위에서 출발된 셈이다. 이 산책로가 없었다면 「달궁아리랑」도 없었을 것이다. 통일이 오고 「빨치산 문학관」이 ‘달궁 마을’에 들어서는 날, 이 시대의 불온문서로 치부된 그 시집도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나의 서재는 화개장터 건너편 섬진강가에 있어 빨치산 오르그가 20여 명이나 나온 간전 모스크바, 산동 모스크바를 넘어 노고할미가 사는 노고단에서 반야봉 밑의 달궁까지 산책길을 밟곤 한다.
이제 나의 ‘어초장 시대’도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삼한 시대부터 있어 왔다는 오래된 달궁마을 ‘섬마 섬마 달궁/ 시상 시상 달궁’이라는 단동치기(檀童治基)의 텃노래와 함께 그 솟대 끝에서 날고 있는 새들을 떠나 나는 새로운 사상의 거처가 될 땅을 찾아 출발한다. 마지막으로 지리산 에움길을 따라 빨치산 루트를 차례로 밟아 보고 싶다.
그리고 거창, 합양, 산청을 돌아 천왕봉 밑 시천강 덕산서원 남명 조식 선생의「溪亭柱의 詩」에 입맞춤하고 뜰에 난분분 참매향을 쓸어보고 싶다.‘
「내 문학의 산책길/ 시인세계 2011. 겨울호」
지금 내 문학적 공간도 저물어 가고 있지만 ‘지리산 시대’야말로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곳에서 환갑을 넘겼고 2005년 8월 정년퇴임을 하고도 2012년까지 7년간이나 연구실을 지키며 후학을 지도하고 광주우거로 돌아왔다. 다음 작품은 《달궁아리랑》과 《빨치산》에서 뽑아본 이현상이 그의 산처(山妻)였던 하수복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순임이*, 당신이 하산한 지도 벌써 한달째 되어 가는군요! 당신이 떠나기 전날 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도 피가 얼어 고름이 흐르는 동상에 걸린 당신의 발가락을 빨며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구나 싶어 짐승처럼 한없이 울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저는 당신의 피고름을 뱉지 못하고 울면서 왈칵, 왈칵 들어마셨지요. 당신은 아서! 아서하고 내 등에 얼글을 묻고 통곡을 했지요!
‘여보, 울지 말아요! 제가 하산을 하면 뱃속의 아이 하나는 잘 키워 북으로 보낼께요’ 하던 당신의 약속을 듣고서야 저는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두 달 후, 아들을 낳으면 이극李克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김일성대학 교수로 취임한다니 이승李勝이라고 부르시오. 그리고 딸을 낳으면 막내딸 이상진의 돌림자로 이강진이라고 지으시오. 무사 하다면 언젠가는 평양에서 만나겠지요. 그리고 그날 화개장터에서 진주행 버스는 무사히 타고 갔는지 모르겠군요. 도당 김삼홍 선생이 지하 당조직을 위해 곧 하산한다 하니 그쪽에 몸을 의탁하기 바라오.
간호사 시절 앳되고 고왔던 당신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소! 당신이 하산하기 전에 돗바늘로 기워낸 누비솜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으니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소!
-순임에게(1953년 초가울, 로상명**)
*순임: 가명(이현상의 산처(山妻), 임신중 하산하다가 화개장터에서 붙잡혔다
**로상명: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별칭
***이 편지글은 서사시집 「달궁아리랑⦁25」에 출처함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보낸 편지글로 두 달 후 빗점골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차일혁 총경(지리산 빨치산 잡는 2대 귀신)에게 수색중 사살되었을 때 지하족에서 나온 편지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지리산의 신빨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빨치산, 서사시에 담았다”
‘달궁 아리랑’을 발표한 송수권 시인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본격화된 지리산 빨치산 투쟁이 장편 서사시로 되살아났다. 이 큰 작업에 달라붙은 이는 전통적 서정의 세계에 뿌리를 두면서도 분단·통일 등 현실 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남도 시인’ 송수권(69)씨다. 지금까지 이병주 장편소설 『지리산』,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등 소설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을 다룬 작품들이 더러 있었지만 시로 표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A4 용지 93쪽 분량 서사시의 제목은 ‘달궁 아리랑’. 제사(題辭·책 내용과 관련 있는 첫 머리 노래나 시)격인 짧은 시 ‘빨치산’(“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과 서시, 연작시인 ‘달궁 아리랑’ 27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송 시인은 6일 전화통화에서 “200자 원고지로 치면 700쪽쯤 된다”고 밝혔다.
서사시는 시의 화자 역할을 하는 가상 인물인 시인이 달궁 에미, 피아골 뱀노인 등 지리산 자락 실존 인물들의 입을 통해 번갈아가며 빨치산 투쟁사를 전하는 형식이다. 송 시인이 꾸며낸 가상 인물인 시인 화자야 논외로 치더라도, 달궁 에미 등 지리산 사람들은 토벌대나 빨치산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이유가 없을 텐데 서사시 속에서는 빨치산에 ‘동정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밤손님’이라 불린 빨치산들이 기껏 소나 돼지를 잡아갔다면 토벌대는 죄 없는 사람을 수 백명씩 학살하곤 했기 때문이다.
달궁 에미 스스로도 빨치산에 연루돼 잃은 게 더 많은 인생이다. 딸 길례를 빨치산에 보쌈당해 잃은 데 이어 빨치산에 의해 ‘혁명군의 아들’이라며 맡겨진 손자 윤판은 연좌제를 피해 집을 나간 후 실종된다. 달궁 에미 본인 역시 빨치산의 에미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양적으로 좌·우 균형을 잃은 듯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시속 화자는 결국 빨치산은 남과 북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존재였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1953년 ‘빗점골 전투’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나서 하동 송림 모래밭에서 그를 추모하는 조포 세 발을 쐈던 토벌대장 차일혁의 사연이 소개된다.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민중적 유대감이다.
송 시인은 연극적 요소, 판소리 가락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 등을 동원해 힘있는 서사시를 만들었다. 또 ‘시상시상, 섬마섬마, 잼잼잼’ 등 단군 조선 때부터 전해내려 왔다는 아이 어르는 노래, ‘단동치기’를 노래의 후렴처럼 서사시 곳곳에 배치한 덕에 읽는 맛이 쏠쏠하다.
송 시인은 “남과 북 사이 경계인이었던 빨치산을 끌어안지 못하는 한, 한국 문학은 반쪽짜리”라며 “50년 후, 100년 후 역사가 빨치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서사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사도 빨치산에 연루돼 있다고 밝혔다. 그런 개인사가 이번 서사시를 쓰게 한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도 4·3 항쟁을 소재로 한 서사시 ‘한라산’을 쓴 이산하 시인은 “송 시인이 빨치산 투쟁사를 소설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생생하게 재현했다”며 “그야말로 발로 쓴 작품”이라고 평했다.
-중앙일보 2009년 5월 7일 신준봉 기자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과 1894년대의 동학혁명사건은 60년의 시차로서 현대사를 열고 닫는 사건에 해당한다. 현대사를 열고 닫는 이 두 사건의 문을 작가나 시인이 못 열어준다면 누가 대체 이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학자들인가? 역사가 산맥을 기록한다면 시인은 분명 산골짜기의 삶을 기록함은 당연하다. 나의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의 서문에는 ‘울어도 참새처럼 울타리 가에서 찔찔거리지 말고 이 시대의 한 복판에서 수천수만의 봉우리를 다 울리고 가는 한 마리 지리산 뻐꾹새처럼 깊이 울어라’고 되어있다. 나는 이 시적인 화두 하나를 1987년 동학혁명 서사시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나남)》에 이어 ‘지리산 시대’에서 비로소 해결한 셈이다. (이 사이 공백을 메꾼 시집이 5.18의 「아도」,「달궁 아리랑」‘「빨치산」그리고 지금 연재중인 제주 4.3항쟁인 「흑룡만리」다.)
시인이 역사의식에 함몰되는 것은 좋지 않겠지만 나는 일찍이 우리 서정시가 원형감각을 떠난 주변감각에 빠지므로 힘이 없고 나약한 감성에 떨어지는 것을 늘 경계해 왔으므로 그 동안 역사의식을 천착해 온 것에 대한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가락과 소리’만 남고 맥빠진 감상만 남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恨)을 극복하는 ‘부활의 힘’이 솟지 않으면 시는 소모전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문학 인생 40년에서 내가 확인한 키워드는 바로 이 부분이 될 것이다.
날아가는 새가 되지 않으려고 밤마다 가슴에 돌을 얹고 잠들었다(빨치산⦁1)
-빨치산⦁1
위의 시 한 줄은 시집 《달궁아리랑》과 《빨치산》을 장식하는 나의 아포리아가 되는 시다. 《달궁아리랑(서사시집)》,《빨치산》에 이어 2014년 가을호 『애지』에는 다시 제주 〈4.3항쟁〉의 대 서사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가 끝나면 2015년 여름에는 제 18시집 《흑룡만리》가 나올 것 같다. 혹은 2016년이 될지도 모른다. 이로서 내가 구상한 현대사의 복원은 끝난 셈이고, 특히 4.3은 여순 병란 사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빈 시적 공간은 5.18사건을 다룬 시집 《아도》의 무등산, 빨치산을 다룬 지리산, 4.3을 다룬 한라산과 함께 삼각벨트를 이룬 셈이다.
8.연재를 시작하며
송수권(宋秀權) 시인의 호는平田이며, 1940.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다. 고흥중학교와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예대를 졸업했으며,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수상작 「山門에 기대어」등). 시집으로는 제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제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 지성), 제3시집 ⌜아도⌟(창작과비평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집 ⌜달궁아리랑⌟(종려나무,2010), 제13시집 ⌜남도의 밤식탁⌟(작가,2012), 제14시집 ⌜빨치산⌟(고요아침,2012), 제15시집 ⌜퉁⌟(서정시학,2013), 제16시집 「사구시의 노래」(고요아침,2013) 제17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2014)등이 있고, 시선집으로는 ⌜시골길 또는 술통⌟(종려나무,2007) 과 그밖에 5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한 바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만해님시인 상(2011), 김삿갓문학상(2012), 구상문학상(2013) 등을 수상했다. 전 순천대 교수이며,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으로 활동하고 있다.
송수권은 1975년 우리 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의 하나로 꼽히는 시 「산문에 기대어」가 『문학사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40년에 육박하는 기간 동안 조금도 쉼 없는 시적 열정을 드러내며 우리 서정시의 진경을 펼쳐 보인 시인이다. 그가 시를 써나간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산업화를 겪어 왔고, 우리 시단 역시 그에 대응하는 현실주의 시와 여러 실험 시들을 쏟아냈지만, 송수권 시인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이 부리던 손때 묻은 전통시의 연장을 들고 우직하게 전통시의 우물을 파고들어가 마침내 가장 깊고 맑은 전통 서정시의 물을 길어 올렸다. 그의 시는 좁게는 소월, 영랑, 백석, 미당으로 이어지는 전통 서정시의 미학과 형식을 잇고 있지만, 넓게는 정지용과 이용악 시의 언어와 심상까지 품고 있어 우리 전통시의 그릇을 크게 확장해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인은 40년에 가까운 오랫동안 여러 시 세계를 탐색해 나갔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놓지 않고 응시했던 하나의 시선은 우리 겨레의 심성이다. 시인은 자서에서 그것을 ‘대숲’과 ‘뻘’과 ‘황토’의 미학으로 요약한 바 있는데, 실제 그의 작품들에서 그것들은 다채로운 이미지들로 형상화되어 우리 겨레의 그윽한 심성을 매우 감각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는 남도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는 이 지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 강산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유람하면서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심어져 있는 진정한 정신세계를 통찰해 내었다. 한과 이별의 미학에 머물렀던 우리 전통시의 미학을 넘어 그것을 묵묵히 껴안으며 형성된 넉넉한 품새의 넓은 도량과 형언할 수 없이 깊은 아름다움을 절절한 언어로 그려내어 우리 겨레의 진정한 혼을 일깨운 것은 송수권 시인이 얻은 득의의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우리 토착어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사전에서 잠자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들, 또 지역에서만 맴돌고 있는 정감 넘치고 감칠맛 나는 우리말들이 그의 시 안에서 더욱 빛나는 언어로 거듭나고 있다.
-고형진, 고려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송수권 시인은 그동안 서정성과 현실성을 고루 갖춘 작품을 창작해 온 남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서정성에 치우치는 시는 대책 없는 순정이 되기 쉽고, 현실성에 치우친 시는 메마른 이념에 불과할 터, 송수권 시인은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서정적 현실, 혹은 현실적 서정의 시학을 추구해왔다. 「달궁 아리랑」도 그러한 조화의 시학이 도달한 큰 봉우리이다. 이 대작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송수권 시인이 사석에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깜냥엔 한국문학 통일시대를 내다보면서 지리산 서사를 써 보았다네. 「태백산맥」도 비껴간 지리산을 정면으로 도전해 본 것이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된 대가급 시인의 건강한 문학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여 「달궁 아리랑」은 한국시가 잃어버렸던 가열찬 역사성, 혹은 오롯한 문학성의 귀한을 의미한다.
-이형권, 충남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제주 43사건이란 무엇인가? 제주 43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사건을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을 하고 미군정 시대에 재등장한 친일세력들이 그들만의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남조선노동당은 그것을 격렬하게 반대를 했던 것이다. 친미, 또는 친일 잔존세려들과 공산주의자들의 그 격렬했던 사상과 이념 투쟁 사이에서, 그 어느 노선도 아니며, 아무것도 모르는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무자비하게 대량학살되었던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는 1987년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동학혁명 서사시집과 2010년 「달궁 아리랑」과 2012년「빨치산」에 이은 네 번째 장편 대서사시집이며, 일제식민시대를 거쳐서, 남북분단과 좌우 이념투쟁에서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가라고 할 수가 있다.
하루바삐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적 상처와 그 아픔을 치유하고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노老 시인의 정신이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기념비적인 대 서사시로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가 있듯이, 우리 한국문학사도 이제는 송수권 시인이라는 대서사시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흑룡만리黑龍萬里」를 연재하게 된 것을 우리 애지 편집위원들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한다.
(애지 편집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 이승희, 안서현 일동)
시인의 말
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어 지면 역사기 된다고 한다. 한바도의 남국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한라 여신들이 빚어낸 신하의 땅에서 벌어진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제주에 와서 신화와 역사가 혼돈되어 현실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분리되고 깨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두려워진다
2014년6월6일 화북 포구에서
송수권
9. 아내의 맨발
내 뒤치다꺼리를 하며 보험 생활 20년 만에 건강했던 아내는 덜컥 백혈병이 났다. 사표를 던지고 내가 떠돌았을 때마다 악착스럽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생활을 꾸려 왔었다. 한 때는 같이 수박농사까지 지으면서 내가 못한 똥장군까지 짊어진 여자였다.
당선작 ‘山門에 기대어’가 발표되기 전 1년간은 그랬다. 행방불명이 된 나를 찾으려고 막내 딸 아이를 포대기에 짊어진 채 서울까지 와서 덜미가 잡혀 집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교수 봉급으로 집 한 채 마련하겠다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아내의 맨발」투병기를 써 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식수술비까지 끌어왔다. 적어도 이 기간은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도하신문에 절필선언을 했고, 그래서 2004년도 나의 연보는 공란으로 남아 있다. 이 사정을 어찌 알았던지 연말에는 안면식도 없는 이창동 문화부장관이 일천 만원을 보내와 이제야 감사의 글을 쓴다. 10년 째인 지금도 아내는 시난고난이다. 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다행히 2013년 겨울에는 집을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재작년도에 김삿갓 문학상, 작년도에는 구상문학상 등 여기저기 특강 원고료 인세 등 행운이 겹쳐 일어난 탓이다. 특히 구상문학상의 적잖은 상금을 받으면서 느낀 점은, 수상소감에서 밝힌 바 있지만 ‘종교는 개벽의 논리고 혁명은 정치의 논리며 시는 교화(깨달음)의 논리’라는 점은 80년대 구상 선생님으로부터 큰 교훈을 얻은 점이다. 전담 형사를 달고다니면서도 혁명투사가 되지 못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와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 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아내의 맨발․3(잡골문자) 전문
한 인간의 발바닥을 들여다 보고 운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부처님이나 예수의 맨발도 저러했을 것이다. 그녀는 성모병원 20층 무균실에서 투병을 끝내고 엘칸토 후원으로 선물받은 환자용 구두를 신고 마침내 맨발을 가린 채 뚜벅뚜벅 지상으로 걸어내려 왔다.
아내는 10년 투병 끝에도 비실거리며 집을 사서 들어간다는 말을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가 집을 사 줄 때도 있네요, 라고. 이제 나의 삶도 저물어간다. 벌써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여름엔 중풍으로 쓰러진 나는 재활훈련을 거쳐 지팡이를 끌고 ‘풍류문학반’ 제자들에 의지하여 여기저기 문학특강을 다니고 있다. 이만한 복이 또 달리 있으랴 싶다. 금년에는「애지」가을호에 <제주 4.3항쟁> 서사시를 완결하기 위하여 자료조사차 이들을 데리고 함께 사건현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문학기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삶도 문학도 팔자련가 싶다. 엊그저께는 학교에서 불러 애들과 이마를 맞대며 특강 마무리를 이렇게 했다. 사랑, 인연, 만남이란 지상에서 태어난 말이 아니라 하늘돌(운석)을 타고 내려온 말이라고, 나의 시 파천무(破天舞)를 들어 설명했다. 그리고 나를 문학으로 살게 해 준 것은 거기 있었던 휴지통과의 만남이었고 나의 삶을 이끌어준 평생의 은인은 질긴 인연의 학과장인 김길수 교수였다고!
사랑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인연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만남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말자
-파천무(破天舞), 첫연과 끝연
10. 자화상
-펜으로 정신이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던 시인
“연산군 때라던가 파발말을 놓는 역이 생겼대서/ 내 고향 속성은 역둘리 1297번지/ 보성만을 굽어보며 우뚝 솟은 매봉 꼭대기/ 봉수대가 허물어진 그 골짜기에는 우리 웃대 先親 한 분 잠/ 들어 계시다/ 한양이라 시구문 밖 소문난 망나니로 씽씽 칼바람을/ 내며 가셨다 하니/ 그 무덤 속엔 당대에서도 잘 들던 칼 몇 자루/ 녹슬어 있지 않았을까.//어느 해 한식날이던가 성묘 길에서 아버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무덤을 비껴가며/ 족보에도 없는 무덤이니라 힘 주어 말씀하시었으니// <중략>그러지 않았을까 이 볼펜이 칼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원고지 한 장이 도모지만 될 수 있다면/ 우리 先親 소문난 칼 솜씨 칠월 장마에/ 풋모과 떨구듯//나도 한평생 뎅겅뎅겅 모가지나 흘리며/ 살다 가지 않았을까. 송수권(1940~) 自畵像'(1980) 부분”
정신분석에서 동일화는 타자를 모방하여 자아의 결함을 보완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다. 이상적인 동일화가 아닌 경우는 금지된 대상과 동일화를 보인다. 예컨대 닮지 않아야 될 인물을 닮는 것인데, 그것은 타자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더라도 일종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소문난 망나니로 씽씽 칼바람을/ 내며 가셨다 하니/ 그 무덤 속엔 당대에서도 잘 들던 칼 몇 자루/ 녹슬어 있지 않았을까"라고 연산군 시대 망나니였던 선친을 불러온다. 아버지는 선친의 무덤을 "족보에도 없는 무덤이니라"고 무시하면서 "산밭뙈기 다 팔아 내 학비를 대어 주시던 아버지"로서 가난하고 무지하지만 일평생 화자를 위해 살아왔다. 아버지가 화자에게 "망나니 새끼보다 못한 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선친과 화자를 분리시키지만 "나도 한평생 뎅겅뎅겅 모가지나 흘리며" 살아야겠다고 선친을 모방한다. 그것은 '칼―펜' '도모지―원고지'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선친은 칼로서 사람들을 죽였지만 시인은 펜으로서 정신이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가족력을 통한 아이러니한 시정신으로 귀결된다.
위의 글은 권성훈(고려대) 교수가 최근 2013년에 썼던 글인데 시인들 자신이 쓴 <자화상詩편>을 모아 연말쯤에 시인들의 시집 <자화상>을 펴낼 글이라면서 보내왔다. 나로서는 섬뜩한 소름이 끼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내 선친 중에는 칼잡이인 망나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친을 망나니로 시인을 칼잡이보다 못한 백정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예술성에서 말한 허구(fiction)다. 허구의 담론이 예술이라면 권성훈 교수가 설명한 대로 ‘펜으로 정신이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던 역설로서의 ‘드라마틱한 텐션’을 구사하기 위한 의장에 불과하다. 시에서는 이 장치를 탈(脫)이라고 한다. 탈은 시속의 화자(話者)를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면 소월시 ‘진달래꽃’의 화자는 어느 여인인 셈이다. ‘애비는 중이었다’는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첫줄에서도 애비는 종이 아니라 서당 훈장이라고 서정주도 고백한 적이 있었다.
내 시 자화상 원제목은 자서전, (제 1시집 ‘산문에 기대어’) 또한 시인이 탈을 쓰고 나온 경우다. 내 시에서도 이렇듯 즐거운 오독을 하기 쉬운 탈론(脫論)으로서는 ‘새가 된 시인’ ‘당신의 즐거운 디저트’ 등을 들 수가 있다. 새삼 탈론을 애기하자니 아버님께 죄송스럽다. 나의 아버지는 고흥 향교의 전교(典敎)를 하신 분이다. 임종시에는 빗돌에다 ‘전교’라는 명함을 박으라는 유언까지 남겼지만 아직까지도 빗돌은커녕 유고시집(한문시집) 한 권을 못 내어 드렸으니 불효가 이만저만 아니다. 다 무너져 폐가가 된 고향집도 복원해야 하는데 나에겐 아직 그럴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집을 헐어버리지 못한 까닭은 일년에 한 두 차례는 잡지사나 신문 또는 방송 기자들이 드나들고 있기에 그렇다. 작년도에는 풀이 지붕을 덮는 폐가의 풍경을 찍을 수 없었던지 안방 문짝만 찍어서 어느 잡지에 나간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이렇듯 생가는 상갓집 같고 고향은 상처로만 남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내 유년의 ‘트라우마’는 지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생긴 트라우마로는 중풍을 앓고 있어 하루 두 갑 이상의 담배를 끊은 점이다. 나에게는 3다3무가 있다. 3다는 끽연, 끽다. 끽조(喫釸, 낚시)가 있고, 3무는 한평생 신문을 안 보는 것, 이메일을 할 줄 모르는 컴맹인 것, 운전을 못하는 길치라는 것, 그 나이에 운전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하고 물으면 이것들 봐라, 선비가 달구지 끌고 다니고 양반이 개헤엄 치는 것 봤느냐고 되려 퉁을 주는 일이다. 끝으로 작년도(2013) 문화관광부 ‘설(구정)’ 특집 책자로 내보내는 ‘고향 가는 길’ 권두시로 이 글을 줄일까 한다. 통일이 되는 날까지 산다면 ‘원산’에서, 통일이 오지 않은 그날까지 산다면 서귀포 바닷가에서 달방이나 얻어들어 낚시질이나 실컷하다 갔으면 한다.
고향은 멀리 있어야 보이고
집은 멀리 갈수록 가까운 것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마을에 가서 비로소 생각키는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 끝에 우리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은 늙고 태어나고
새새끼처럼 조잘댄다
-고향, 전문
송수권 시인 프로필
출생 ; 1940. 3. 15생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림1297), 아호(平田)
데뷔 ; 1975년 문학사상』신인상.「山門에 기대어」등 당선되어 등단
학력 ; 고흥중, 순천사범,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
수상
1975년 문공부 예술상(광복30주년기념 민족장편서사시 부문)
1987년 전라남도 문화상
1988년 소월시문학상
1990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3년 서라벌 문학상
1996년 제 7회 김달진문학상, 광주문학상
1999년 제11회 정지용문학상
2003년 제1회 영랑시문학상
2005년 월간 김동리문학상
2008년 제1회 한민족문화예술대상. 지리산인산문학상
2010년 만해님시인상
2012년 제8회 김삿갓문학상
2013년 순천문학상, 구상문학상 수상
시비
화엄사 경내「시의 동산」에「山門(산문)에 기대어」시비 입비
전북 부안읍 매창공원(기생공원)에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해남군 땅끝 시비공원 시비.
충남 옥천 정지용문학관 공원 앞 수상 시비
강원 영월 김삿갓 문학공원에 김삿갓 문학상 수상 시비 등
건립이 되어있음.
저서
제 1시집 『산문에 기대어』(문학사상사)
제 2시집 『꿈꾸는 섬』(문학과 지성사)
제 3시집 『아도』(창작과 비평사)
제 4시집 동학혁명 서사시집, 『새야새야 파랑새야』(나남)
산문집 『다시 산문에 기대어』(오상사)
제 5시집 『우리들의 땅』(문학사상사)
대표 시선집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산문집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문학사상사)
역사 기행집 『남도 기행』(시민)
한국 현대시 100인 시선집, 『지리산 뻐꾹새』(미래사)
제 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전원)
제 7시집 『별밤지기』(시와 시학사)
제 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문학사상사)
남도 음식문화 기행,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산문집 『쪽빛세상』(토우)
제 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시와시학사)
우리 토속꽃 시집, 『들꽃세상』(혜화당)
『태산 풍류와 섬진강』(토유)
제 10시집 『파천무』(문학과 경계사)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송수권, 나태주, 이성선)』(문학상사)
산문집 『만다라의 바다』(모아드림)
자선시집 『여승』(모아드림)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고요아침)
산문집 『아내의 맨발』(고요아침)
제 11시집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시학사)
시집 『그대, 그리운 날의 시』(고요아침)
비평집 『사랑의 몸 시학』(문학과 경계사)
『송수권 시 깊이 읽기』(나남)
정년퇴임 기념문집 한국 대표시인 101시선집『송수권』(문학사상사)
시 감상집 『상상력의 깊이와 시 읽기의 즐거움』(푸른사상)
『시창작실기론』(문학사상사).
시선집 『시골길 또는 술통』(애지)
산문집 『소리, 가락을 품다』(열음사)
장편 동화 『옹달샘 꽃누름』(문학사상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집, 『달궁아리랑』(종려나무)(2010)
제 13시집 『남도의 밤식탁』(작가)(2012)
제 14시집 『빨치산』(고요아침)(2012)
제 15시집 『퉁』(서정시학)(2013)
제 16시집 『사구시의 노래』(고요아침)(2013)
제 17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2014)
제 18시집 『흑룡만리』(지혜) (4.3 사건 시 , 현재「애지」 집중연재 중, 현재 미간행)
현)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사단법인)으로 재임 중이며
국립 순천대학교 문창과 명예교수
시인님 작품이 대입수학능력시험 및 고등학교 학력평가 등에 출제된 사례
- 2003년 전국 고등학교 학력평가시험 “산문에 기대어“ 등 10여 회.
- 2010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지리산 뻐꾹새”
- 2014년 9월 고등학교 전국연합학력평가문제 시험에 “까치밥”
나미영(경북 성주도서관 ‘문광부 길 위의 인문학’ 특강 초청) 작성(20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