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
역사에는 위대한 여성이 많이 존재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걸출한 여성으로 인해 인류는 더욱 풍족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조르주 상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이사도라 덩컨」, 「페기 구겐하임」 등은 그 삶이 보통 여성을 뛰어 넘는 재기와 지성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앗아간 여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상드(George Sand, 1804~1876)는 여성을 속박하는 당시 사회를 비웃었다. 2,000명이 넘는 이들과 애정을 나누었고, 천재 시인 「뮈세」, 작곡가 「쇼팽」, 조각가 「알렉상드르 망소」 등과는 오랜 시간 연애 감정을 이어갔다. 어려서부터 「루소」의 책을 즐겨 읽으면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사회 속에서 부자유하게 되었다’는 그의 사상을 탐닉하게 되었다. 사냥과 승마를 즐기고 예술, 정치, 상식 등 사회 전반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세에 남작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지만 지적으로 우월한 아내에게 열등감을 느낀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매질까지 가하자 집을 나와 그림 그리기와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24살의 천재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를 만나 서로의 작품을 함께 읽고 비평해주며 정이 든다. 이태리 여행을 하는 등 행복했지만 사랑의 지향점이 달랐던 두 사람은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다. 「뮈세」와의 이별에 고통스럽던 「상드」는 파리를 떠나 고향인 『노앙』의 영지에 살롱을 연다. 이 숲속의 살롱은 수많은 작가의 사랑방이 되었으며, 「보들레르」, 「발자크」, 「빅토르 위고」, 「프란츠 리스트」, 「하이네」, 「앙드레 지드」 등이 이곳을 찾는다. 「상드」는 「리스트」를 마음에 담아 두었으나, 「상드」에게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리스트」는 「쇼팽」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쇼팽」이 결핵을 앓게 되면서 그 치료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했다. 영지에 작업실을 만들어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고, 많은 문화, 예술인 들이 찾아와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10년을 함께 살면서 「상드」는 「쇼팽」의 연인이면서 간호사였고, 누이였으며 어머니였다. 「상드」 자신도 한 여자로서 남자에게 기대보고 싶었으나 「쇼팽」은 돌보아 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드」의 자녀 문제 등으로 심하게 다투고 이별을 하게 된다. 이별 후 1년이 지나 잠간 파리에서 만났으나 그 무렵 지병이 악화된 「쇼팽」과는 끝내 재회하지 못했다.
「쇼팽」이 사망하고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상드」는 조각가인 「알렉상드르 망소」를 만나 연인이 된다. 「상드」는 그렇게 바라던 모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처럼 모든 남자들이 「상드」에게 굴복하였다. 그리고 모두 그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Lou Andres Salome, 1861 ~1937)는 누구와 교제를 나누든 곧 불후의 명저를 쓰게 된다는 영감이 넘치는 여인이다. 작가이며 탁월한 정신 분석가로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녀와 사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살로메」의 연애 방정식은 ‘사랑은 하되 육체는 허용하지 않는다’였다.
러시아 장군의 막내딸로 태어났으나,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걸치고 파티를 즐기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외적 허영심이 전혀 없었고, 내면적인 지식 탐구에 관심이 많았다, 일찍이 종교학, 심리학, 종교사를 배웠고, 취리히 대학에서는 예술사, 신학, 철학 등을 배웠다. 공부에 열중하여 건강을 잃을까 걱정이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로마로 휴양을 떠난다.
그곳에서 「파울 레」를 만나 신과 철학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이때 박식한 「살로메」에게 반한 「레」는 이렇게 해박하고 멋진 여인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프러포즈를 하지만 거절당한다. 상처받은 「레」에게 ‘우리 두 사람만 살기 뭐하니 한 남자를 데려와 세 사람이 함께 살아보면 어떨까’라고 제안을 한다. 이때 「레」는 친구인 「니체」를 불러들였다. 「살로메」는 21살, 「레」는 33세, 「니체」는 38세였다. 이들은 밤마다 지적 향연을 벌렸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니체」는 「레」가 없을 때면 끊임없이 구애를 해 왔지만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살로메」는 두 남자의 청혼이 집요해지자 로마에서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도 많은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동양학 교수와 결혼한 것은 청혼을 거절하자 가방에서 칼을 꺼내 자기 가슴을 찌르게 되자 목숨하나 살리는 심산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 이였다. 대신 성생활이 없이 우정관계로 지내며, 누구를 만나든 서로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37살에 23살의 「릴케」를 만났다. 「릴케」 역시 기혼녀인 「살로메」에게 반해 그녀를 연모하면 죽거나, 미치거나, 큰일을 당한다며 주변의 만류에도 소용이 없었다. 「살로메」 부부와 러시아 여행을 두 차례 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릴케」와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살로메」는 그때까지도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 「릴케」와는 4년을 사귀었으나 지나치게 자신만을 의지하자 더 이상 만나주지 않았다.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려 사망하는 「릴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살로메에게 물어봐 주오. 내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라는 말을 남겼다.
「살로메」는 「릴케」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인간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프로이트」의 연구실에서 인간 내면의 감춰진 무의식을 연상하는 최면치료 과정을 보면서 독자적 임상 분석법을 개발했다. 「프로이트」도 「살로메」를 사랑했으나 서재에 그녀의 사진을 걸어 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좋은 동료관계를 유지하였다. 탁월한 근대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을 마음껏 휘둘렀던 그녀는 상대방의 잠재력을 최고로 발현시키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1877~1927)은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해변에서 태어나 가정에 무심한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쳐주며 음악과 시, 고전을 읽어 주었다. 그녀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 감각은 그렇게 익혀졌다. 그녀의 삶을 변화시킨 「월트 휘트먼」의 시집과 「로버트 그린 잉거솔」의 『왜 나는 무신론자 인가』였다. 스스로 그녀의 정신적인 아버지는 「휘트먼」이며, 스승은 「잉거솔」이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공립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도서관에 가지 않는 날은 숲이나 바닷가를 찾아 나무와 물결과 혼연일체가 되어 춤을 추며 보냈다.
청소년이 되어 술집에서 캉캉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건 춤이 아니라며 사표를 던지고,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으로 이동하며 극단에서 춤을 추었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춤을 춰 좋은 평가를 받아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화재로 모든 것을 다 잃은 뒤 런던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도 성공적인 공연으로 ‘그리스 예술의 르네상스’라는 찬사를 받으며, 파리, 부다페스트, 베를린, 아테네, 러시아 등 가는 곳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진다.
28살 때 무대 감독이던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났으니 평범한 주부가 되어 자신을 내조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덩컨」은 결혼 없는 사랑, 결혼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를 권리를 원해 두 사람은 헤어졌다. 파리에서 억만장자인 「패리스 싱어(Paris Singer)」가 베르사이유에 ‘덩컨스쿨’을 열러주며 구애를 해와 아들을 낳았다. 그도 역시 결혼을 주장했으나 거절하고 「싱어」의 저택을 나와 다시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를 태운 차가 시동이 꺼지는 사고로 이를 확인 하던 중 언덕 아래 센 강에 굴러 들어가 두 아이와 보모가 다 익사하였다.
상심한 「덩컨」은 러시아 정부의 설득으로 그곳으로 간다. 마중을 나온 25살의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Sergei Yesenin)」을 만났는데 죽은 아들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결국 두 사람은 18살 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으며, 폭언을 일삼고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덩컨」은 그의 곁을 지켰으나 「예세닌」은 자살을 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50살이 되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와 드라이브를 나선 「덩컨」은 목을 감은 붉은 스카프 자락이 자동차 바퀴에 휘감기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은 베네치아에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 걸작이 상시 전시되고 있어 살아 있는 도시가 되었다. 대 부호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각각 엄청난 유산을 상속 받았다. 고전 작품들과 르네상스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런던에 화랑을 열고 기존 화가들 이외에 많은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였다. 러시아 출신 추상주의 작가 「칸딘스키」를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하였으며, 루마니아 출신의 「콩스탕탱 브랑쿠시」와 독일의 「장 아르프」의 조각 작품을 전시하여 영국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미술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했던 「허버트 리드(Hebert Read)」가 「페기」의 대표적인 개인 선생이었다. 하버드의 미술사 교수이자 예술사 분야 최고의 권위를 지닌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페기」에게 현대 작품을 식별하는 눈을 길러 주었고, 박물관을 열기 위해 작품을 반드시 소장해야 할 작가들의 목록까지 적어 주었다. 「허버트 리드」의 추천작가 목록을 들고 2차 대전 당시에 파리로 넘어가 많은 작품을 헐값에 구매하였다.
1941년 「페기」는 뉴욕에 현대 미술 전시관을 열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마크 로스코(Mark Rothko)」같은 추상주의 화가를 발굴하였다. 1947년에 뉴욕의 미술관을 닫고 베네치아로 건너와 거주하며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의 문을 열었다. 시에서는 그녀에게 명예 시민권을 증정했다. 그녀는 “나는 예술품 수집가가 아닙니다. 나는 박물관 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현대 미술 전용 미술관은 큐비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명작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다. 이곳에는 시대를 앞서갔던 100여 명의 현대 작가들의 걸작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사망 후에 그녀의 무덤은 미술관 속, 숲으로 우거진 정원 한쪽 구석에 안치되어 있다. 사후 소장품들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되었고, 베네치아는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6년에 출간된 자서전에 의하면 「페기」는 유럽에 거주하는 동안 약 1,000명 이상의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술회하였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그렇게 하면 작품 가격을 깎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자술하였다.
소개한 여성은 하나 같이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불꽃처럼 살다갔다. 주변의 남성들을 매혹하고 자극하여 시대를 뛰어 넘은 위대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위주의 어려운 시대상황을 극복하고 역사에 기억되게 된 것이다. 하긴 태반의 남성들 역시 그럭저럭 운명의 흐름에 자족하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신은 소수의 여성들에게나마 남성들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지혜와 매력을 주어 그나마 여성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신 듯하다. (2022. 9. 6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