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화상(懶翁大師) 혜근 1320-1376
[ 나옹화상(懶翁大師) 혜근 진영 ]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
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 석옹화상(石翁
和尙) 회상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24세 때(1344년)이다. 선사는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선사
(指空禪師)의 지도를 받고 자선사 처림(處林)의 법을 잇는다. 광활한 중국을 주유하
고는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한다,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청이 하도 곡진
하여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 지도에 나선 곳이 황해도 신광사이다. 이 무렵 중국의
홍건적은 쇠퇴해가던 고려를 향해 개경까지 침입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공민왕은
한때 노략질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천도한 일이 있을 지경이었다.
나옹선사는 홍건적이 쳐들어와도 오직 설법과 참선 지도에만 전념하니 선사의 위엄
에 눌린 도적떼는 저도 모르게 부처님께 향까지 사르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중들은 술렁였다. 홍건적은 내일 또 다시 침입해올 것이니 어서 피하자는 것이었
다.
나옹선사는 혼자라도 절을 지키겠다 다짐하고 있는데 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선사에게 절을 지켜달라 이른다. 과연 선사가 있는 신광사엔 홍건적이 나타나지 못
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홍건적의 난이 진압되자 왕은 선사에게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
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내렸고, 왕은 또다시 불교계의 중흥을 부탁한다.
이때 선사가 불교 중흥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순천 송광사였고, 마지막 원력을 펼치
는 장으로 화암사를 찾았다.
나옹선사의 지도력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참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편력의 도정에서 중생을 만나고 제도
했다. 염불은 곧 참선이라 하였으니 『가사문학총람』에 수록되어 있는 지침으로 여
겨진다.
선사의 행법은 곧 혼침되어가던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
다. 이로써 화암사는 지공․나옹에 의해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을 이루었을 만
큼 위풍이 당당하고 면모가 수려한 대찰이 된다. 이곳에 머문 승려 수만도 3천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이땅의 중세 불교사에서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대중교화에 힘썻던 분이 나
옹이었던지 모른다. 선사의 마지막 법회가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혹여 정권과의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4년에 걸친 화암사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낙성법회. 귀천을
따질 수 없는 부녀자들이 회암사로 오는데 감당키 어려웠다. 마침내 나라의 관리가
나와 산문을 닫고 왕래를 금하기에 이른다.
임금은 나옹에게 떠날 것을 날벼락처럼 명령했다. 선사의 나이 57세. 그 나이에 벌
써 병이 들었던가. 명령이 떨어진 그날을 못 넘기고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겨우
신륵사에 당도해 열반을 맞을 만큼 중병이 들었던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 이래, 이런
경우 흔히 사용되었던 타살(他殺)설을 가정해보게 된다.
신륵사 법상(法床) 위에 앉은 나옹선사가 일렀다.
“너희들의 위하여 열반불사를 마치겠노라.”
봉미산 봉우리엔 오색구름이 덮었고, 선사를 태우고 가던 말은 먹기를 그치고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우왕 2년(1375년) 5월 15일, 스님이 된지 37년 만이었다.
나옹화상의 법맥은 무학대사가 이었고, 목은 이색은 위와 같은 일들을 비문에 적었
다. 나옹선사 비와 부도는 화암사터와 신륵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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