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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도취 문화, 기술은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나? / 테크심리학 ]
현대인의 정서를 허영과 자아도취, 외로움, 지루함과 벗어나기, 주의 분산, 경외감의 상실, 분노의 증가라는 6가지 주제로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특히 19세기 이후 2백년간의 기술 발전과 이로 인한 사회 변화가 감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관심시장에서 자아를 위한 기술의 발달 양상에 따라서 형성된 자아 의식과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연구 방법론으로서 문헌에 나타난 정서적 표현의 변화를 추적하고 인터뷰를 통해서 직접 자신의 감정 표현을 들어보는 부분이 흥미롭다. 분노의 물결같은 오늘의 감정 토로의 양상을 인터뷰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어보게 된다.
근대 개인의 발견 이후의 자아를 고취하는 경향이 경외감을 상실하게 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아도취로 나아가고 그 결과 증가하는 분노라는 현상에 이르는 것을 발견한다. 온라인상에서의 분노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자아도취라는 현대적 자아의 위상을 살펴보게 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대의 자신의 감정 변화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감정과 오늘의 감정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기술과 사회 변화가 바꾼 마음의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이전 세대들이 세상을 경험했던 방식은 현대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인간은 필시 고독을 마주해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삶은 유한하여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성직자들은 인생은 덧없고, 헛되며, 찰나와도 같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이슬처럼 덧없는 존재인 자신에게 지나치게 빠져들면 안 된다고 여겼고, 아울러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한계도 명확히 인식했다. 19세기 의학 전문가와 종교 지도자들은 두뇌와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위험할뿐더러 비도덕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인생이 고되고 단조로운 것이라 생각했고, 지루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때때로 분노를 표현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런 태도는 20세기 초까지 일반적 정서였다.” p9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아도취’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의 모습에 도취돼 매일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나르시스 말이다. 이 행동의 부차적 특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보였지만,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가 자아도취의 고유한 본성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또 사람들은 자아도취의 핵심적 특 성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중략) 현대 디지털 시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소셜 미디어 콘텐츠에 독자들이 보내주는 '좋아요' 및 여러 댓글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즉, 현대의 자아도취는 예전과 개념이 달라진 것이 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가 되었으며, 뜻밖에도 좀 더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자기 자랑은 타인과 연결되어야 하는 필요에서 나온 공동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표현하느라 애를 먹는다. 그런데 자신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다듬고 드러내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게 처음은 아니다. 이전 세대도 그랬다. 현대인들은 이전과 다른 도덕적 배경에서 나온 전혀 다른 언어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중략)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문화적 변혁에 편지의 유행, 사진의 발달, 거울의 대량 생산, 인간은 원래 흠이 있는 존재라는 종교적 가르침의 퇴조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데 익숙해져 갔고, 자신을 드러내는 습관은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확산되고 당연시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겸손함은 잃어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랑이 유행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타인과의 유대를 향한 현대인의 갈망을 보여준다. (중략) 현대인들의 자기표현에 대한 관심은 이전 세대와 뚜렷한 차이가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사람들은 지나친 자존감에 대해 언급할 때 '자아도취'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용어는 1998년 의사이자 사회 개혁가였던 해브록 엘리스가 창안한 이후,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심리학 용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인들은 높은 자존감을 죄라고 여겼고 이런 성격적 특성을 ‘허영심’, ‘자만심’ 때로는 ‘이기심’이란 말로 표현했다. 특정 행동을 죄로 설명하는 일이 드물어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이런 단어들의 뜻이 변했으며, 도덕적 관점의 언어를 심리학 용어가 대신하게 되었다.”p37-39
“실제로 미국인들은 사진을 통해 서로 연락했다. 사진이 개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공동체를 세우고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데 쓰인 것이다. 우편이 빠르고 저렴해지자, 많은 사람이 사진을 우편으로 보냈다. 헨킨은 19세기 당시 우편물에 가장 많이 들어 있던 물건이 사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들이 사진을 자주 찍었던 것은 허영심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거나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추억을 간직했고, 사방에 흩어진 친척들의 출생, 결혼, 사망 소식을 새롭게 얻었다. 또 19세기 미국인들은 사진을,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맞서는 일종의 무기로 사용했다. 이는 매우 독특한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는 것으로 죽음을 극복했다. 앞서 설명한 허영심과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려볼 때, 하나의 순간을 포착해 시간을 멈춰 인생의 덧없음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려 했던 듯하다. 어떤 면에서 사진은 전통적 의미의 허영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했다.”p65
“‘코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죽음이 사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코닥 광고가 가정 사진에서 슬픔이나 죽음의 흔적을 말끔히 몰아냈다. 대중의 손에 들린 도구, 카메라는 슬픔보다는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20세기에 사람들의 감정적 일상을 형성했던 새로운 문화적 명제와 맞아떨어졌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활기넘쳐야 한다는 필요말이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미국 사람들은 활기찬 모습을 통해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 결정권을 쥐는 경쟁사회에서, 행복한 모습이야말로 문제없이 잘살고 있다는 표시였다. 특히 미소는 성공과 자제력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신호로, 1940년대까지 인물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사람들이 미소를 꺼렸다. ‘미소는 농부나 주정뱅이, 아동, 얼간이에게나 어울리는 것으로, 하층민이나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라는 관념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웃음은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상징하는 힘이 되었다.”p70
“20세기 초, 허영심과 자기애, 자기몰두는 조금도 해롭지 않다는 관점이 정착되었고, 심지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한때 이런 생각은 헛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간주되었지만(자아는 죽을 수밖에 없고 유한하며, 자기에는 신성을 깨닫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가치가 된 것이다. 런던 미러지의 특파원으로 미국 신문에도 기사가 자주 인용되었던 한 기자는 1913년 ‘자부심은 후세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인 것 같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하거나 자기 확신이 부족한 사람에 비해 더 훌륭하고 사려 깊은 부모가 된다.’고 선언했다. 오랫동안 죄악이었던 허영심이 사회적 선행이 된 것이다.”p76
“신상품 빨간 모자가 영적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허영심에 가해졌던 오랜 경고에 대한 직접적인 화해였다. 구매를 즐기고, 외모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것은 해로운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 되었다. 허영심은 이전 세대에게는 죽음 앞에서 결국 헛될 수밖에 없는 결함이자 죄였지만, 20세기 중후반의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인생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권장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이어진다.”p82
“자아의 정량화와 라이프로그 사이에서, 울프와 벨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법을 현대인들에게 제시했다. 그것이 사회 진보와 자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의미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블로거로 활동하는 린지 레인워터가 말했듯, 새로운 방법이 ‘자기인식’ 보다 ‘자기몰두’를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레인워터가 자기인식과 자기몰두를 구분한 것은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문제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알고 싶지만, 그러다 오직 자신만 아는 사람이 될까, 관점이 협소해져서 핸드폰이나 컴퓨터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들여다보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한다. 허영심과 자아도취, 심리학, 경제학에 대한 관점 변화는 사람들의 시야가 좁아지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고, 이런 변화는 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내면의 자아, 그리고 자신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p114
“사람들은 점점 더 ‘자아를 위한 기술’에 적응하면서 이른바 ‘나르시스시스템(narcissystem)’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세상이 되자, 자아도취가 문을 두드리며 나타났다. 그리하여 디지털시대에 우리 모두는 자아도취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원래의 나르시스와 달리 우리는 공동체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 또 그것이 반영된 기술에 몰두한다. 이 몰두는 다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불안감 때문에 자만심보다는 겸손이 자라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중요성은(그리고 그 중요성을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리려는 우리의 열망은) 계속 성장해왔다.”p118
“한때 공동체에 활력을 제공했던 교회는 더이상 인적 교류에 기여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교회의 오래된 신학에 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칼뱅주의가 외로움이 필수적이라는 암시를 던져준 반면,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는 다른 내용을 주장했다. 고난과 외로움이 신의 뜻이니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은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많은 교회와 평신도들은 ‘신사고(New Thought)운동’의 부상에 영향을 받았다. 누구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고 주변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운동의 메시지였다. 세기의 전환기에 불붙기 시작한 이 운동은 점점 영향력을 키워갔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노만 빈센트 목사의 ‘긍정적 사고방식’과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긍정적인 관점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는 더 확산되었다. 필 목사가 말했듯, ‘인기라는 것은 몇 가지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일반적이고, 쉽게 익힐 수 있는 기법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방법을 부지런히 연습하기만 하면 누구나 대중적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외로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외로움을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취해야 했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박약한 의지력과 부족한 진취성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p146-147
“이런 관점이 확산되면서 1940년대 말 새로운 단어가 자리를 잡게 되는데, 바로 ‘loner(외톨이)'다. 이 말은 고독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몰아붙이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은 행복하고 사교성이 풍부하며, 친구를 쉽게 만든다. 반면 홀로 있기 좋아하고 주변부에 머무는 사람은 남들에게 걱정과 불안감을 안겨준다. 19세기 미국인들은 외톨이의 심경을 이해했지만, 20세기 미국인들의 눈에 외톨이는 사교성과 활기찬 우정을 공공연히 드러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었다.”p153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회적 성공과 적응에 대한 걱정과 의심, 두려움이 커졌다. 이 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징표가 1950년 데이비드 리스먼이 네이선 글레이저, 루엘 데니와 함께 쓴 ’고독한 군중‘의 출간이다. 전후 미국의 외로움에 관한 역사는 이 책을 논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책의 제목은 출판사가 지은 것이지만, 외로움에 대한 언급이야말로 핵심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중반 미국인들은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민감하고 집단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집단화는 외로움을 오히려 심화시켰다. ’고독한 군중‘은 이웃과 동료의 의견에 민감한, 즉 리스먼이 말하는 '타인 지향적 인간'으로 대표되는 20세 중반 중산층의 피상적인 태도를 고발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랄한 여러 비판과 달리,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태도에서 일정한 덕목을 찾아냈고, 이를 내면 지향적 성격과 융합해 새로운 미국인의 전형, 즉 타인에게 민감하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는 인간형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p154
“페플로와 펄먼은 이런 분위기(고독학회의 창설과 고독을 치유하는 방법 연구) 덕분에 인류가 생긴 이래 존재해 온 고독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데 한줄기 희망을 찾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20세기 소비문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단독주택과 자동차, 텔레비전 등의 이면에는 풍족한 생활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미국인들에게 어떻게든 상품을 팔려고 하는 건설업자, 자동차 딜러, 텔레비전 세일즈맨 등이 있었다. 이들이 부추긴 소비문화에 부응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운 측면이 드러나자, 심리학자(페플로와 펄먼)나 사회학자(와이즈와 슬레이터), 교육자(스턴)가 제공하는 지적치료제에 관심을 돌렸다. 이른바 ’고독 산업‘이라 불리는 처방전 외에, 사람들은 ’고독의 치료제‘라고 선전되는 기술들에 관심을 기울일수도 있었다. 통신회사들은 사람들이 가진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관계를 향한 소망에 호소했다. 1958년 AT&T사의 광고에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여성이 거실에서 전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광고는 ’시외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한밤의 쓸쓸함을 잊게 해줍니다.‘라고 약속했다. 1966년의 벨 전화회사 광고는 활짝 웃는 신부의 얼굴과 함께 그 부모를 겨냥해 이런 표제를 내걸었다. ’아이들이 자라 집을 떠나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늘 연락하세요. 이젠 그렇게라도 힘이 되어주는 것이 제일이랍니다.‘ 또 1979년 AT&T사는 ’손을 내밀어 연락하세요‘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런 사례들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점점 희석되는 모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 그의 주장처럼, 미국인들은 사생활을 즐길 여유가 많아졌지만, 그럴수록 홀로 사는 쪽을 택했다.”p164-165
“고독은 친분 관계의 결핍과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페플로와 펄먼에 따르면, 친분 관계에 있어 실제로 가진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해소하지 못하면 고독이라는 감정은 결코 떨쳐버릴 수 없다. 현대들이 고독한 이유가 이것이라면, 다양한 형태의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지인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경제가 출현한 이래 이른바 고독 산업이 사람들의 기대 수준을 계속 높이고 쾌락에 대한 면역을 가속화하는 바람에 이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p168
“외로움이라는 경험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비록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라디오에서 전화에 이르는 신기술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고독을 즐기는 법을 망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친분 관계의 수와 거주하는 지리적 범위 또한 급격히, 나아가 비현실적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아울러 성장일로에 있는 ‘고독 산업’으로 인해 사람들은 외로움을 바로잡아야 할 감정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행복하고 사교적인 삶을 성취하는 것이 쉽고, 언제나 가능하며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외로운 계곡을 걸어왔고, 고독한 군중을 견뎌냈다. ‘외로움을 덜어주는 모임’을 만들었고 디지털 클라우드에서 외로움 을 몰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월든 호숫가에서 고독을 만끽했지만, 새로운 세기가 되자 고독한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고독에 대한 연구를 과학으로 치환시키고자 했다. 한때는 외로움을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고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감정으로 생각 했지만, 이제 위험한 감정이며 당혹스러운 결핍의 징후로 여기게 되었다. 현대 과학기술로 우정과 사랑, 친분 관계 등은 그 어느 때 보다 손쉬운 것이 되었고, 따라서 그런 관계가 사라진 상태는 더욱 견디기 힘들게 되었다.”p198
“막스 베버가 주장했듯, 종교개혁 이전에는 노동에 영적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일이란 그저 먹고사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 자체로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활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등장과 함께 노동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다. 일을 생존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일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서 19세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미국에서, 근면은 그것이 아무리 지루하다 해도 일종의 도덕의 표시였다. 반면 일하지 않는 사람, 권태에 사로잡힌 사람은 의심스럽고 별난, 정신적 무기력과 무의미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안일한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으로 여겨졌다.”p214
“지루함을 못 참는 마음은 20세기 내내 커져만 갔고, 그 마음은 현대성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바바라 달 페즈와 카를로 살자니는 ‘지루함과 현대성에 관한 소고’라는 책에서 ‘현대성과 지루함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정치적 현실이 새로운 심리 상황을 불러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루함에 대한 반항과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산업혁명의 부산물이다. 산업혁명이야 말로 시간을 방직 공장과 조립라인에 포함된 기계화의 한요소로 만들었다. 미국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노동의 의미는 세속화 되었다. 과거 도덕적 구원의 바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이제는 지루한 고생으로 전락했다. 직장에서 느끼는 이 감정은 대중이 즐기는 여가의 발달로 더욱 증폭되었고, 여기에 상업적 오락과 소비문화가 가세했다. 물론 퇴근 후에 이루어지는 이런 활동 때문에 공장 노동이 참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많은 사람이 세상일에 항상 몰두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신기술로 무장한 오락거리, 즉 핸드폰,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런 바람을 충족하고자 한다. 그런 기대가 실현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지루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루함은 옛날부터 늘 우리 곁에 있지는 않았다. 그 단어 자체나 실제 경험이나 마찬가지다. 끝없는 흥분과 변화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된 이 감정은, 인간의 본성이 끊임없는 자극에 좌우된다는 새로운 관점을 드러낸다. 이전 세대는 비록 지루하고 단조로우며 힘든 노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일을 앞에 두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변화와 흥분, 끊임없는 활동을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자, 인생의 충족감을 얻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분전환과 오락거리라면 무한히 누리기를 원하고, 따라서 지루함은 위험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핸드폰만 손에 들면, 언제든지 그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p268-269
“기계와 그것을 소유한 기업들은 더욱 강한 집중력이라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내놓았는데, 19세기와 20세기에 등장한 많은 발명품은 집중력을 허물어뜨리는 새로운 방해거리도 함께 만 들어냈다. 그런 기술은 사용자들에게 보다 집중력 있는 지적 활동을 요구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자체가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전화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안겨다 주었지만, 전화벨 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집중에 방해된 것도 사실이었다.”p307
“주의분산에 대한 이런 관점은 지난 2세기에 걸쳐 주목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다. 사람들은 곧잘 이런 점을 망각한 채, 오늘날 미국인들이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쏟는 특수한 방법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본성으로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이는 역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주의집중에 관한 규범과 실제로 주의를 집중하는 정도는, 과거 미국 사회에서의 그것들과 다르다. 주의집중에 거는 희망과 걱정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신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은 고결한 자제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신호였다. 즉, 한 사람의 도덕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19세기에 미국 사회가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고도 집중에 점점 더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경제구조의 특성상 생산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상호 연결된 대규모 경제가 발달하면서, 미국인들(특히 열정적인 전문직 종사자들)은 한 가지 일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새로운 요구를 자신의 지적 능력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는, 자신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런 믿음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군수산업 체제의 영향을 받아,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도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다. 심리학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집중력과 두뇌 능력을 최대한 높일 방법을 찾았고, 의약품과 훈련의 힘으로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21세기에도 이런 필요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기에 다른 요소가 개입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자극과 멀티태스킹에도 신경을 써야 하며, 다른 사람의 관심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주의를 집중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두뇌가 가진 무한한 능력과 잠재력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두뇌개발 게임, 스마트폰, 사물인터넷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인지 강화 수단 덕분에, 우리 지능의 실체와 가능성,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 수준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p350-351
“예전에는 미국인들 역시 우주와 신의 장대함에 관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서로 연관된 몇 가지 단어를 함께 사용했다. ‘경이(wonder)’는 놀라운 행동이나 사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에도 사용되었다. 이 말이 약 700년에 처음 사용되었을 때에는, ‘깜짝 놀랄 만한 어떤 일이나 믿기 어려운 대상’을 의미했다. 또 다른 의미로 ‘기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일어난 행동이나 사건’도 있었다. 경이로운 사물이나 놀라운 일은 거꾸로 경이의 감정을 자아냈다. 그 사전적 정의는 ‘신기하면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일, 또는 불가사의한 것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흥분된 감정, 즉 당혹감과 호기심이 섞인 놀라움’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연이나 예술 위력이 가득할 때, 또는 경외감과 장엄한 숭배, 아름다움이나 광대의 어떤 측면 때문에 마음속에 압도적인 장엄함이나 불가항력적인 함, 위대함으로 인해 고상한 감정’을 느낄 때 ‘숭고한’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와 연관된 감정인 ‘놀라움(astonishment)’ 역시, 외부에서 오는 광대한 힘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것의 정의는 ‘예상을 뛰어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갑자기 발생하여 마음이 흔들리거나 흥분된 상태, 또는 마음이 일순간 놀라움에 압도된 상태’이며, 아울러 ‘냉정과 확신을 잃고 실망과 고통에 사로잡힌 상태’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 기원은 ‘벼락을 맞는다’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모든 감정은 인간이 자신보다 더 크고 강력한 힘과 만나는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앞선 세기에는 경외감과 놀라움을 입에 올리는 일이 무척 많았다. 특히 미국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목격했을 때 이런 말을 많이 썼다. 1858년, 장로교 목사 윌리엄 스프레이그는 대서양 횡단 전보 가설을 축하하는 설교에서 전선을 ‘세계 최고의 불가사의’라고 칭하면서, ‘사람의 생각이 깊은 바다를 뚫고 번개처럼 전달된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이웃집에 사는 것처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스프레이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전신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에 대한 더욱 큰 숭배와 독실한 사랑이 차오를 것’이라 여겼다. 또한 모든 인류가 ‘자신이 가진 능력이 보잘것없고, 지식의 한계가 너무나 명백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겸손한 정신을 되찾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2015년, 호놀룰루에 사는 앨런 리 디는 이 시대의 기술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바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저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때마다 경외감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상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말더군요.’ 그는 ‘경외 지수가 줄어드는 이유는 신기술이 통합되는 속도가 너무 빠를 뿐 아니라, 너무 빨리 흔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술에 대해 미국인들이 보이는 반응은 극심한 차이가 있었다. 스프레이그가 설명한 경외감에는 기계에도 정신이 깃들어 있고, 그것이 기적과도 같다는 믿음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 태도가 당연 하기도 했던 것이, 19세기에는 많은 사람이 새로운 방식의 통신기술을 놀라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것이 우주를 다스리는 신의 신비한 힘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막스 베버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정신세계는 점차 ’신비로부터 깨어나게 되었거나, 적어도 그 신비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계와 장치를 접했을 때 놀라움을 표현하는데, 그 놀라움은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가진다. 종교적이거나 공동체적 요소는 줄어들었고, 훨씬 더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 자만심과 자아도취를 잠재울 능력도 약해졌다. 그 단어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와 마주칠 때의 감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p356-358
“ ‘우리 자신에 대한 경탄’이야말로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경외감이다. 오늘날보다 겸손한 자세를 지녔던 과거의 사람들이 가진 감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기술이 내세우는 경외감은 포괄성과 웅장함 면에서 과거에 비해 부족하다. 기술이 삶과 죽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커즈와일과 실바가 황홀경에 빠졌다고는 해도, 그들의 시각은 19세기 미국인들만큼 신비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의 관점에는 전능한 신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도, 죽은 친구나 가족과의 완전한 재결합도 없다. 영적 초월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은 생물학적 소재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하여 자아를 영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p406
“심오하고 오래된 형태의 경외감이 쇠퇴하고 세속적인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아도취가 부상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세상 속의 조그만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죽음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엄청나게 강력하고 중요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최신 기기 덕분에 오래 살 수 있게 되었고, 이동, 대화, 창조의 능력이 강화된 것을 생각하면, 과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힘의 한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그런 힘을 광고하기를 꺼리는 사회적 관습도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p420
“오늘날 미국인들은 온라인에서 발생한 분노의 물결에 직면하고 있으며, 자신도 분노를 표현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 언론 매체들은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수없이 내보낸다.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도덕적 분노를 유발하는가’, ‘분노에 찬 소셜 미디어 게시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인터넷은 우리 를 바보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도 온라인상에 나타나는 분노를 매우 걱정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이런 현상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며, 베트남 전쟁 때도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분노가 들끓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 다. 어쨌든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사람들이 분노의 사회적 평판과 그것이 미덕인지 부도덕인지 여부를 대단히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터뷰 대상자 중 어떤 사람은 계속 분노 일지를 쓰다가도 꼬박꼬박 그 일기를 불태워버리곤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정치인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거짓말에 정당한 분노를 표하고 있다고 인정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분노의 표상으로 그려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공화당 지지 성향이 오랜 정치적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지 분노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p434
“분노의 적절성에 관한 이런 논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감정에 대한 현대적 관점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분노를 억제해야 하는지, 관리해야 하는지, 또는 부추겨야 하는지에 관해 수세기 동안 논쟁을 이어왔다. 그 결과 이 감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철저하게 검증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개념이 바로 ‘한계’다. 유럽과 미국사회가 오래도록 던져온 질문이 바로 분노를 어느 정도까지 드러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해당 단어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분노(anger)의 어원은 원시 게르만어의 ‘좁은’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라는 말에 있다. 아마도 사람들이 미칠 것 같은 일을 당할 때 터져 나오는 감정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렇게 폭발하는 감정은 격분과 연결되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원래 의미가 되었다. 즉,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분출되어 한계를 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가 된 것이다.”p435
“(1980년대 라디오 전화 토론) 그런 토론이 ‘정치가와 정당, 거대 기업과 노동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방송을 듣는 청취자는 주로 남성이었기에, 이들 프로그램 은 남성 특유의 분노를 부추겼다. 러시 림보(Rush Limbaugh), 돈 아이머(Don Imus), 하워드 스턴스(Howard Sterns) 같은 진행자들이 가장 유명했는데, 이들은 직장과 공공장소에서 분노를 몰아낸 현세대의 지배적 감정코드에 대척점을 제공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들의 방송은 분노와 공격의 언사로 가득 찼고, 더글러스가 지적한 대로, ‘보수적인 중상류 계급과 기업에서 구현된 남성성’에 도전했다. 어떻게 보면 라디오 전화 토론의 부상은 보수 유권자층의 성장세에서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이너 언론’이라고 놀리는 매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회학자 제프리 베리와 사라 소비어라이는 라디오 전화 토론은 레이건 대통령의 규제 철폐 정책을 계기로 등장해 판도라를 비롯한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라디오 음악방송의 수익성을 잠식한 덕분에 확장되어갔다고 주장했다. 즉, 수익성 문제와 ‘정치적 분노 팔이’야말로 라디오 전화 토론의 득세를 이끈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분노가 전에 없던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처럼 광범위하게’ 퍼진 적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베리와 소비어라이가 이를 심각한 문제로 보는 이유는, 오늘날 라디오 해설 대부분이 ‘분노와 두려움을 한껏 이끌어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p468
“그리하여 온라인 공간에 분노가 새롭게 재등장했다. 오늘날 분노의 감정은 ‘민주화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분노가 하나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이 사회적 엘리트 계층에게도 허락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19세기에는 계충과 상관없이 백인들은 모두 이 감정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성과 흑인은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야 했다. 20세기에 들어 모든 노동자는 인종과 성별에 상관없이 분노에 관한 새로운 제한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 선택권을 다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결과, 오늘날 분노는 옛날보다 훨씬 더 뚜렷하고 공공연해졌다. 몇몇 사람은, 19세기 선조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분노가 사회와 도덕의 변화를 앞당기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를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또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자극제로 삼는다. 그들은 화를 내지만, 분노가 불러올 결과를 생각하며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 물론 분노를 표현하는데 제약이나 한계를 느끼지도 않고, 결과를 걱정하지도 않은 채, 마음껏 공공연히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p477-478
“웨일러는 사람들이 ‘직접 만나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소셜 미디어에서는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상대방이 눈에 안 보이니까요.’ 그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그 점을 강조했다. ‘식당에서는 맛있는 디저트가 보인다고 새치기를 하진 않죠. 그러나 고속도로 진입로에 차가 막혀 있을 때는 기회만 생기면 끼어들 수 있습니다. 도로에서 새치기를 할 때 상대방이 나를 알 수 없거든요.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고요. 사실 저는 그리 못된 운전자는 아니지만, 저 역시 앞에 차가 틈을 보이면 틀림없이 그 틈을 파고들 거예요. 그게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저한테 하는 행동이에요. 제가 사람들 한테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자동차가 사람들로 하여금 숨겨두었던 분노를 꺼내게 했듯이, 소셜 미디어도 똑같은 역할을 했다. 익명이기 때문이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든, 웨일러를 비롯한 많은 이가 직면한 결과는 사람들이 고삐 풀린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웨일러가 트위터의 자신의 이름란에 ‘트위터에서는 비난, 만나면 친절’이고 적어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p487
“2016 대선 이전에도 미국인들은 온라인에서 화를 냈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은 이제 그것이 더욱 일상화되었고, 게다가 새로 등장한 표현들이 파괴적인 것뿐이라며 걱정했다. 제니퍼는 적지 않은 사람이 도발적인 태도를 즐기면서, 그저 재미로 못된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소셜 미디어가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준 것이다. ‘제 눈에는 사람들이 전부 방구석에 틀어박혀 싸울 거리만 찾아 헤매는 것 같아요.’”p489
“정치 문제에 적극적이고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23세 아이오와 출신 대학생 필 역시, 소셜 미디어가 품은 동기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는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어 광고와 가짜뉴스를 보여줌으로써 그 사이트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분노는 아주 돈이 됩니다. 전쟁이 그런 것처럼요. 따라서 우리가 하는 행동은 시장을 더욱 양극화하여 그들에게 더 많은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돈이 흘러가는 길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p492
“필터 버블을 통해 사람들이 보고, 듣고, 읽고 싶은 것만 제공하는 것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의 의견을 강화하고, 관점을 확고하게 하며, 가치와 시비를 정당화시켜 준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와 자아도취, 자아의식의 부상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플로리다에서 온 31세 간호사 에리카는 자신이 갈등이 없는 인생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성장한 세대였다고 믿었다. 소셜 미디어의 필터 버블이 제공하는 차단효과와 끊임없는 ‘좋아요’로부터 얻는 확신이 그녀의 이런 기대를 더욱 강화해주었다. 단기적으로는 그런 것들이 분노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어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과 마주칠 경우, 분노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차이를 수용할 역량도, 자신의 관점만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지력도 없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이렇게 말했다. ‘갈등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갈등상황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극도의 분노와 대결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지요. 거기서부터 자아도취가 일어납니다. 조금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그것을 자신의 인격에 대한 모욕이자 공격으로 여깁니다. 자신은 갈등을 겪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누군가가 훌륭한 사람인 동시에 자신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지요. 결국 이런 과민 증상은 분노로 이어지고, 분노가 심해질수록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죠. 이로써 상대방이 느끼는 분노도 심해지고요.’ 갈등 없이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화를 전혀 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에리카가 설명하듯이,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즉, 항상 화를 낸다는 뜻입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니, 어떻게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있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전형적인 자아도취적 발상입니다. 나한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요. 그래서 아주 민감해지는거죠.’ 에리카의 통찰은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도 같다. 심리학자들은 자아도취 증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비판이나 패배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비판이나 거절이라는 ’상처‘를 받았을 때 모욕감이나 공허함을 겪는다.’고 말한다. 자신을 중시하는 태도와 인정받기 좋아하는 마음이 자존심뿐만 아니라 분노까지 고조시켜온 것이다.”p493-494
“비록 분노로 인해 일시적으로나마 무한한 힘을 얻은 듯하더라도, 결국 그 감정은 한계를 의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지어 그런 느낌을 강화한다. 분노는 제한과 한계, 불공평에서 비롯된 힘의 부족을 극복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다. 그레그 베일스는 이 점에 주목하여 ‘분노는 우리 자신이 생각보다 왜소한 존재였으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오는 결과’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레온 셀 처 역시 ‘분노는 언제나 왜소해진 개인의 힘을 북돋우려는 의도로 발휘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한다. 특히 그 분노가 온라인에서 발휘될 때는, 자아의식의 고취가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는다. 2013년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고함을 지르면 처음에는 속이 뻥 뚫리지만, 그 기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분노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분노가 더 크게 쌓인다고 한다. 분노를 터뜨리는 행동은 자신의 강한 힘을 느끼려는 열망과 온라인에서는 아무런 제한 없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좌절과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p512-513
“현대 기술은 오래된 분노에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즉, 새로운 형태를 제공하기도 했다. 19세기 항의 운동이 시위자들에게 실질적인 연합과 모임, 결사, 조직 구성의 기회를 제공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보다 독립적인 공간에서 분노를 표현한다. 공적 영역에서도 핸드폰이나 사무실의 컴퓨터를 통해 분노가 드러난다.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 거의 제한이 없지만, 동시에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결국 서로 떨어진 채 혼자 앉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분노는 직접적인 만남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과거 유례가 없을 정도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개별적으로 표현되는 분노는 과거에 비해 더 뚜렷하다. 하지만 변화를 이루어내는 동력은 훨씬 약한 것도 사실이다.”p515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온라인에서 분노를 표현하면서,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그동안 감정생활을 규정해왔던 전통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경험한다. 19세기 미국인들은 특정 상황에서는 자신의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분노가 변화를 불러오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분노가 공공의 담론에서 최소한의 정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노동 불안이 고조되고, 서비스 산업에 활기찬 종업원이 필요하게 되면서 분노라는 감정은 근무 현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미국인은 자신의 감정을 사적인 공간에서만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집에 앉아 TV와 라디오에 대고 말하거나, 운전중 다른 자동차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등, 창문을 꽁꽁 닫은 안전한 곳에서만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다가 온라인 미디어의 출현으로 분노를 쏟아낼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 결과 21세기의 분노는 여러 가지 면에서 20세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늘 생산적인 결과만 낳았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뒤얽힌 역사들을 하나로 합쳐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우주의 힘에 경외감을 보내며 스스로를 고독과 지루함, 무기력 속에서 살아가는 제한된 존재로 인식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날 때부터 불행한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p522
[출처] 자아도취 문화, 기술은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나? / 테크심리학|작성자 이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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