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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대웅전 | 두물머리 | 들꽃수목원 |
1) <용문산...> 이정작(李庭綽)
용문산 백운봉에 높이 떴는 저 구름아
세상 영욕을 아는다 모른는다
저 구름 나와 같아서 대면무심(對面無心)하도다
=> 영조 때 참판을 역임한 문신이며 소설 <<옥린몽>>(玉麟夢)을 지은 이정작이 용문산을 바라보면서 무심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2) 용문사
용문사 입구에 용문사에 관한 한시를 여럿 돌에다 새겨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든다.
還途入龍門山 돌아가는 길에 용문산에 들어가다
白沙 李恒福 백사 이항복
寺古僧稀少 절은 오래 되었으나 중은 적으며
臺傾樹老蒼 축대는 기울고 나무는 늙어 푸르렀네
水聲喧下磵 요란한 물소리 산골짝에 흐르고
人語靜回廊 고요한 말소리는 회랑에서 들러오네
北望群山隔 북쪽을 바라보니 산들이 막히었고
西歸一影凉 서쪽으로 돌아드니 그림자 서늘하네
悲歌爲何事 구슬픈 저 노래는 무슨 사연일까
悽斷不成章 처량한 생각에 한 수도 못하겠네
절에 올라가면 오래 되고 큰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의 내력을 설명한 말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 재위)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뿌리가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며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리우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으며,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으로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불어져 떨어졌다고 한다.
=> 용문사는 유형의 유산이면서 무형의 자산이다. 양면에 대한 고찰을 관련시켜 확대해야 하겠다.
3) 두물머리 이무기
두물머리 족자섬(떠드렁산) 앞에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이무기가 살고 있어 무고한 목숨을 많이 앗아갔다고 한다. 옛날 팔당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고운 백사장과 얕은 물이 흘러 서울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러왔다. 그런데 일년에 한 두 사람씩 서울 사람들이 죽었다. 얕은 강물 가운데 명주실을 한 꾸러미 풀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이곳은 옛날 두멍(솥)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있었다. 두물머리 떠드렁산 앞에 와서 배가 내려가지도 않고 올라가지도 않았다. 두멍(솥)하나를 물에 떨어뜨렸더니 배가 움직였다. 이무기가 두멍(솥)이 왜 필요했을까마는, 어쨌든 마을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요구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니 이무기 심술이랄 수밖에 없다.
=> 앞 대목에서 한 말은 납득할 수 있고, 뒷 대목에서 한 말은 납득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전설이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무기 심술이라고 이야기에서 말했다. 이무기 같은 것이 없으면 전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자료를 이용해 전설 이해를 위한 서론을 마련할 수 있다.
용문사 입구 이항복 <還途入龍門山> 시비 | 용문사 은행나무 대재(大齋) | 정선 두물머리 그림 <독백탄> 소개 |
4) 효부
옥천면 옥천리에는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가난한 허씨댁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애쓴 사연이 전한다. 항상 끼니거리를 걱정할 만큼 가난한 집에서 며느리가 방아를 찧어주고 쌀을 얻어 아침밥을 해드리려고 일을 나가다가 개의 변으로 나온 보리쌀을 보고 우선 가져다가 씻어 밥을 해드렸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벼락을 치고 비가 쏟아지므로 며느리가 죄책감으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는데, 벼락 서슬에 그 언저리가 모두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부자가 된 허씨네는 그 일대를 모두 사들여 들판을 허문앞이라 부르게 되었고,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며느리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한다.
=> 지나친 악조건에서 무리한 효행을 하니 뜻밖의 행운이 생겼다고 했다. 효행 찬양이 지나치다고 나무랄 것인가? 불운의 극단에서 행운의 극단으로 전환되는 원리를 말해주었다고 할 것인가?
5) 가혹한 처사
강하면 동오리에는 장사복이라는 하는 무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이 무관은 서울에서 말단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천기를 볼 줄 알아 어느 날 본가에 도둑이 드는 것을 알았다. 축지법을 써서 본가에 도착한 장사복은 소외양간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도둑을 향해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
분이 안 풀려 도둑의 시신을 끌고 가 한강물에 던져버렸다. 그 도둑은 장씨 집안의 충직한 머슴으로 해산한 아내에게 끓여줄 미역과 식량이 떨어져 주인 몰래 얼마간의 쌀을 가져다 아내에게 해산 뒷바라지를 하려던 참이었다. 너무나 가혹한 장사복의 처사에 하늘이 노했음인지, 차츰 가세가 기울어 후손마저 사방으로 흩어져 망했다고 한다.
=> 장사복은 위세가 지나쳐 망했다. 극단에서 극단으로의 전환이 장사복에게서만 진행되고, 피살된 도적에게 살 수 있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하지는 않았다. 전설의 구조가 한쪽에서만 갖추어져 미완성인 채로 현실이 각박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6) 인색한 주인
김씨라는 사람의 집에 승려가 찾아와 시주를 하라고 하자, 일을 하지 않고 얻어먹는다며 바가지를 깨뜨려버렸다. 승려는 절로 돌아가 풍수에 대한 공부를 하고, 김씨네가 원퉁이 골짜기에 산소를 잘 써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다시 김씨에게 온 승려는 산소를 이장하여야 더욱 번성한다고 일러주었더니, 곧 바위를 깨고 이장준비를 했다. 그러나 깨어진 바위에서는 피가 솟았고 파헤쳐진 산소에서는 학이 날았다. 그 뒤로 집안은 점차 기울었고 당시의 일이 원통하다 하여 골짜기를 원퉁이라 했다.
=> 승려가 풍수 공부를 하고 되돌아가 복수를 했다는 것은 어색하고 상례에 어긋난다. 승려는 인식한 장자의 집이 함몰되고 못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예사이다. 풍수 공부를 하고 되돌아가서 복수하는 사람은 피살당한 종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통상적인 전개 방식이다.
한국, 신명나라
韓國, 別有天地
Korea, Wonderland
* 겸제 정선(1676~1759)의 <독백탄>(獨栢灘)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 용문사 입구에 세워진 김시습 시 등 여러 시비 중 이항복의 <還途入龍門山> 시비
* 동양 최대라는 용문사의 은행나무. 용문사에서는 은행나무 대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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