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통로 (마태 1;18-25)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착한 사람이라도 얄미운 구석이 있고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한 구석은 여리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섬김의 이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방탕함과 그의 애처로움
성난 군종의 순수한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먼저 죄 있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하신 장면
- 내가 지은 죄는 저 여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죄가 없어 라고 생각하며 돌을 던졌다면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신다.
순수하고 밝은 사람도
누구나 마음 한쪽에 그늘이 있고 악이 있음을 아셨다.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그레이 존” 으로의 인간관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사람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나 좀 도와줘” 하신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위해주는데 대체 왜 이러느냐? 나 좀
도와 달라.“ 는 뜻입니다.
부모님으로 생각해보면 쉽다.
못된 아이들, 부모 말 안 듣고 멋대로 하는 자녀
“얘 엄마 한 번만 봐 줘라, 한 번만 도와줘라”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 공간을 보는 것이 긍휼이고
채워가는 하나님의 선물이 은혜이다.
이런 관점, 즉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체험을 하는 것을 통해
마음과 눈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움을 볼 수 없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빛과 소금을 이야기합니다.
소금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우린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한 시선이 열려지고
생각이 열려져야 합니다.
빛과 소금이 됨의 모습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자신을 태우거나 녹여서만 제 기능을
합니다.
목표가 무엇인가?
왜 내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가?
나 아니어도 할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가져야 합니다.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게 주어졌을 때 감당하는 것입니다.
살게 하는 것이다.
좌우편을 어우르는 눈을 가지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기능 이전에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어떤 열매 이전에 내가 어떤 자세로 가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
목자들
요셉의 헌신의 모습
자신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모습
마리아
당신의 몸을 인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
만일 내가 이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물음이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원하지 않는 임신도 힘이 든다.
그런데 그 사회는 처녀의 임신은 죽음이다. 비참한 죽음
억울하다.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고
그리고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억울하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면 우리는 답이 없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다.
이것이 답이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개입되어 있다면
오늘의 괴로움은 오늘로 족하다.
내일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던지
아니면 남의 손에 죽던지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예) 연예인들의 댓글에 의한 자살
이해는 한다. 나도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그런 경우 아닌가?
그 계획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보호 하신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요셉을 설득하고 그의 마음을 돌려
그를 활용하신다.
예) 만일 마리아가 요셉을 설득했다면 듣겠는가?
오히려 더 어려워 질 것이다.
아니 오해는 더 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의 열쇠를 하나님이 쥐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계획이 그 분으로 부터 시작 되었고
그것이 인류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신다.
큰 것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더라도 말입니다.
인류 전체를 위해 나를 사용하시겠다고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부탁하십니다.
우리가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왜곡된 생각을 하지 않을 분명한 지침
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동방박사들 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을 통해 변화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이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별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적합니다.
연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방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나 보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이 연구에 몰두해야 보입니다.
예) 이어령 교수의 모습
그가 신학을 배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압니다.
학문의 전문성을 통해 넓은 존재를 보았고
그 학문의 깊이가 그를 하나님을 소개 받았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갔지만 아기 예수의 오심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이미 믿음이 있다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서기관들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