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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聖書 現象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성열 50년 기념 김한영 교수저
머리말 : 方法論的 反省
필자는 성서에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필자는 여기서“성서 현상학”(Die Phanomenologie der schrift)이란 고유한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 개념의 뜻은 성서를 성서 그 자체의 모습대로 보자는 것이다.
現象學이란 단어는 現代에 에드문드 훗셀(Edmund Husserl)에 의해서 창안된 哲學的 사유의 태도이다. 필자는 그러나 現象學을 그의 초기 사상과 그리고 하이렉거(M.Heidegger)에 의해서 수납된 의미에서 수용하고자 한다.
現象學이란‘現象의 고유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사유태도이다. 따라서 성서 현상학이란 성서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事象, 곧 계시의 事實을 있는 그대로 해명하는 사유태도를 말한다.
필자가 따라서 현상학이란 말을 쓸 때, 그것은 훗셀이 의도하는 의식의 현상학이나, 하이덱거가 의도하는 존재의 현상학도 아닌, 기독교적 현상학을 말한다. 기독교적 현상학이란 하나님의 계시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 계시 사실에 대한 체험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현상학의 태도는 훗셀이 말하는 선험적 현상학의 태도와 다르다. 선험적 현상학은 主觀主義의 입장에 서나, 기독교적 현상학은 주관주의를 배제하고, 事象 자체의 고유한 기술을 의도한다.
前者는 歷史的 사실을 괄호에 넣으나, 後者는 歷史的 사실과 그 시대사적 전제에 관심을 돌린다. 前者는 事象을 인식하는 意識의 고유한 구조를 밝히려고 하나, 後者는 神啓示의 고유한 事象을 해명하고자 한다.
前者의 대상은 意識의 現象이나, 後者의 대상은 神의 現象이다. 따라서 기독교 현상학은 성서에 나타나는 神 계시의 現象을 그 고유한 기술의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기독교 현상학적 태도가 이 성서 현상학에 주도되고 있다.
성서 현상학은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성서 현상학은 성서 접근에 있어서 인간의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배척하고, 먼저 성서를 성서 텍스트의 고유한 구조 속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성서 현상학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성서 이해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
첫째, 그것은 성서적 실재주의를 표방한다. 성서 현상학이란 성서가 말하는 事象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며, 성서의 고유한 텍스트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내용의 고유한 특성-즉 초자연적 사실:천사, 사단, 천국, 지옥, 죄와 대 속, 성육신과 부활-을 성서가 증언하는 그대로 실재로서 받아들인다.
둘째, 그것은 성서 이해에 있어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역사적 접근이란 문법적 접 근, 문학적 접근, 언어사적 접근, 시대사적 접근, 종교사적 접근을 포괄한다. 그 러므로 성서 현상학은 소위 말하는 성서적 소박주의(a biblical navism)나 성서적 근본주의(a biblical fundamentalism)에 빠지지 않는다.
성서 현상학은 성서의 계시 사실이란 성서의 고유한 내적 지평과 더불어, 텍스트 세계가 함축하고 있는 외적 지평의 맥락을 고려할 때 그 전체적인 유기적 모습으 로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그것은 이러한 역사적 이해를 신학적 이해와 연결시킨다. 신학적 접근이란, 역사 적으로 드러난 성서의 사실이 지니는 의미를 해명한다. 역사적 접근은 성서 事象 의 중립적인 모습만을 확정 짓는데 이르나, 신학적 접근은 이 역사적 사실의 신학 적 의미를 규명한다.
신학적 접근은 성서 事象에 대한 인격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의미는 이 인격적인 만남에서만 드러난다(의미는 곧 말씀의 사건이다. 신학적 접근은 성서 事象을 말 씀의 사건으로 드러낸다).
성서 현상학은 이 역사적 접근과 신학적 접근의 통일을 통해서, 성서가 지니고 있 는 구속의 경륜과 구속의 歷史를 드러내고자 한다.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행하시는 구속의 섭리와 각 시대에 나타나는 구속의 사건들을 증언하고 있다.
성서 구속사는 네 가지 결정적 시기를 가지고 있고, 구약성서는 5가지 주제를, 신 약성서는 2가지 주제를 지니고 있다. 필자는 아래에서 이러한 방법론적 반성르로 써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중요한 내용들, 곧 事象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성서 현상학적 시도는 프랑스의 여류 성서학자 디이뜨리히(Suzanne De Dietrich)의‘성서로 본 성서’(God's unfolding purpose), 미국 루터교 성서학자 죤 브라이트(John Bright)의‘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영국의 신약성서학자 부르스(F.F.Bruce)의‘두 언약-하나의 계시(This is That), 그리고 미국의 성서 신학자 퍼키서(W.T.Purkiser), R.S.테일러 (Taylor), W.H. 테 일러(Taylor)의‘신, 인간과 구원’(God, Man & Salvation) 등에서 비록 방법론적 인 성찰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시도되고 있다.
필자는 이들의 성서 이해로부터 성서의 고유한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
1. 역사적 책- 성서
인류와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성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 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형성 된 역사적 책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각 책들은 저자들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저자 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변천 속에 던져져 있으며, 그 시대의 언어를 말했고, 그 시대의 아들로서 생각했고, 그 시대의 세계상 속에서 살았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이 점을 강조한 나머지 성서의 저자가 그들의 주변 세계에 의 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 성서적 창조기사는 바벨론 창조설화 전승을 야훼 유일신적 사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신약성서의 증언도 그 시대적 유태교적 표 상과 헬라적 표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적 책으로서 성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모습을 갖추기까지 1,500년 이상의 점진적 형성의 역사적 지니고 있으면서 독특한 진리를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 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약성서는 유태인 공동체가 그들의 삶과 종교의 지침서로 읽어 왔으며, 신약성서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삶과 신앙의 지침서로 읽어 왔다. 그 후에 신 구약성서는 서구 민족들의 정신적인 지침서로 읽혀져 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 모든 민족의 양심과 지혜의 지침서로 읽혀지고 있다.
성서는 서구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민족들의 책(das Buck der Volker)이 되어 왔다. 성서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베스트 셀러가 되어 왔다. 어떤 훌륭한 고전-햄 릿, 파우스트, 순수 이성 비판, 논리적 논구(훗셀), 존재와 시간(하이덱거)-도 성서 에 필적할 수 없었다.
성서가 번역되지 아니한 주요 언어가 거의 없다. 성서의 출판과 보급은 매년 수 백만 부수에 이르고, 상승세에 있다. 성서는 오늘날 북한과 중공과 소련에 이르기까지 철 의 장막의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밀반입되고 있으며, 수많은 지하 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공산국가 뿐 아니라 힌두교 및 회교, 불교 등의 나라에서도 성서는 보급되고 있으며, 읽는 자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소망과 활력을 부여하는 내적인 폭파력과 생명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서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책이다. 성서는 현대문명에 주 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서구문명과 정신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성서의 창조신앙은 서 구적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 세계, 인간을 구별하는 세계와 자연의 非 神聖化 및 世 俗化 사상을 부여 했고,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기계기술을 통해서 세계와 자연을 정복 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 현대인이 누리는 고도의 산업화 시대, 다가오는 고도의 정보 산업사회 란 이 성서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창조신앙과 자연과 세계에 관한 관리 사상의 품속에서 양 육되고 있다.
오늘날 이 성서의 사상은 그 世俗化하는 능력으로써 아세아, 아프리카 및 남미에 이 르기까지 전통적인 자연에 안주하려는 존재론적 사고방식을 훼파하고, 近代化 및 現 代化의 문명사회 건설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성서는 그 읽는 독자 개인에게도 그 영향력을 발해왔다. 5세기 밀라노의 수사학자요 사상가였던 어거스틴(Augustin)을 변화시켜서, 마니교와 신 플라톤주의 사상에서 벗 어나게 하여, 인류 역사에 고전이 되는 「고백록」(Confessiones)등 위대한 정신적 유 산을 남기도록 했고,
16세기 뷔텐베르크의 성서신학 교수요 신부였던 루터(Martin Luther)를 중세기 카톨 릭 교회의 성례전 위주의 공로주의적 은혜사상에서 해방시켜, 어거스틴 이래 천년 동 안 잊혀져 왔던 以信得義(Justification through faith)사상을 밝혀 주었고, 성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개신교의 창시자가 되도록 했다.
이처럼 성서는 세계를 움직인 세계사적인 개인 뿐 아니라, 세계사에 나왔다가 다시 되돌아간 모든 개개인의 인격과 영혼에 양식이 되고, 지혜가 되고,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왔다.
성서는 또한 서구의 정신사에 그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 성」(the City of God),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도덕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등의 저서, 쉘링의「계시의 철학」(Philosophie der Offenbarung), 헤겔의 「정신 현상학」(Phanomenologie des Geistes),
쉴라이엘마허의 「종교론」(Uber die Religion),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iet),리꾀르의 「악의 상징론」(Symbolism of Evil),「자유와 본성」(Freedom & Nature) 등 헤아릴 수 없는 인류 역사상의 고전들은 성서의 원리사상 내지 계시사상 내지 신 사상의 영향 아래서 산출된 것이다.
이 성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단지 책 이상으로 간주되어왔다. 성서는“거룩한 책”(Heilige Schrift)으로서 교회의 예배, 설교, 종교적 예식, 등에서 매우 소중히 취급되고, 예배, 설교, 예식의 정신을 형성해 왔다. 성서가 거룩한 책이라는 것은 성 서란 단지 인간이 쓰기는 했으나, 그 원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교회의 전통은 지니고 있다.
성서의 독자는 성서에서 단지 인간의 말로 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 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늘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성서는 역사적 책이기 때문에 우리 현대인은 성서에 관해서 언어학적, 역사적 및 문 학적, 종교 사학적, 시대사적 논구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일반 해석학적 논구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 일어난 역사 적 종교의 모습, 내용, 테두리, 전승, 영향 등을 규명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일반적 역사과학 탐구의 원리-「비판」 「類比」 「相關關係」-가 적용될 수 있 고,인과율의 원리에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의 규명에 이르게 된다.
2. 성서 증언의 중심 :
성서의 신비성과 인류 구속의 경륜
성서의 본질이란, 그러나 그것이 단지 역사학적인 책 이상의 것이라는 데 있다. 성서 는 천 육백년 이상 동안의 시기에 걸쳐 각 시대의 다양한 인물에 의해서 쓰여졌으나 놀랍게도 하나의 내적인 중심, 곧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구약 성서는 옛 언약 (the Old Covenant),곧 율법(law)에 대한 증언이요, 신약 성서 는 새 언약(the New Covenant) 곧 복음(gospel)에 대한 증언이다 이 두 개의 증언은 서로 상이하거나, 모순되지 않고, 구속사라는 하나님의 경륜의 약속과 성취 (promise & fullfilment)의 단계에 상응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수천년 동안 상이한 세계관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았던 다양한 저자 들에 의해 쓰여진 성서가 이러한 내적인 통일성, 그 증언의 중심을 형성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 성서의 신비성이 있다. 이 신비성은 인간지성의 힘을 능가하는 하나의 役事이 다. 이 하나님의 役事가 그의 예언자와 사도를 통해서 증언하신 성령의 役事이다. 성 서의 저자들은 시대의 아들들로서 그 시대적 세계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하나님 의 영원하신 성령은 그들의 지성과 마음을 감동해서,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그의 숨 어 계시는 경륜과 섭리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이 저자들은 각 시대의 종속인들로서 사고하고 통찰했으나, 자기시대의 굴레 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통찰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예언의 두루마리를“여호와의 책”이라고 하였다.“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이처럼 성서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들의 작품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신이 모으 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써 인간적인 오류 가능성과 한계성을 극복하신다. 성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편집된 하나님의 책이다.
이것이 성서가 지닌 신비성이다. 이 성서가 지닌 영감 성 때문에 우리는 성서이해의 특수한 해석학적 문제 에 직면하게 된다. 단지 일반 역사과학적 접근방식으로는 성 서의 신비성을 결단코 드러낼 수 없다.
“성서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자체로 돌아가야 한다.”이 성서는 역 사적 책이기는 하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자체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지 는 않다.
성서는 하나님에 관해서 어떤 이론을 펴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프랑스의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요, 수학자요 과학 자인 빠스깔이 출애굽기 3장 6절 이하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모세가 만나는 하나님 언급에서 보여지는바 같이“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지, 철학자나 학자의 하나님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헬레니즘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os)의 신 처럼 세상에 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 영구적인 비활동 속에 들어가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를 섭리하시며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행적과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분리시킬 수없는 그의 계시의 두가지 양상이 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행적의 책이기도하 다. 성서는 역사적인 책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책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책이며 동시에 신적인 책이며, 그것은 인간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적인 책으로서 성서는 보편역사의 한 부분에 속하며, 신적인 책으로서 성서는 구 속사에 속한다. 구속사는 보편사의 의미이며 목적이요 동시에 구속사는 보편사의 테 두리 안에서 전개된다.
구속사는 소수의 선택을 수단으로 해서 전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구속사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과 함 께, 인간을 위한 심판과 은총의 역사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존귀성을 나타내고 있 으며, 동시에 하나님께 반역 하므로써 죄와 죽음에 던져진 인간의 비참한 운명과 불 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는 인류 최초의 두 형제 카인과 아벨의 갈등과 동시에 형제 살해에 관해서 폭로 하고 있다.(창4:1-16), 시 날 광야에서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자기의 명예와 이름을 내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인간집단의 신격화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인간의 모든 도모를 훼파하시고, 인간 언어를 혼란시키는 하나님 의 열정, 곧 그의 심판과 은총을 보여주고 있다.(창11:1-9). 성서에 나타나는 개인이 나 믿음의, 조상은 우리가 생각 하듯이 결단코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성서는 근친상간을 적나라하게 보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조상인 믿음의 족장들은 거짓말쟁이이며, 에언 자들과 시편기자들도 때때로 대적자 앞에서 약하고 겁 많은 설 교자로 나타나고 있다.
성서는 비윤리적인 면을 폭로 하므로써 결단코 그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서는 그러나 단순히 도덕적인 지침서도 아니다. 성서는 이처럼 비윤리적이고 자기 권력욕 과 불순종 속에 갇혀있는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과 이 자율성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고,[아담!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부르시며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창 3:9).
이역사의 중심에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서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미련하신 사역이며, 인간지성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크나큰 역설이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 의 죄 구속을 위해서, 인간을 데신 해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 는 것도 역설이거,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도 역설이다.
왜냐하면 인간지성에 있어서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구속의 사건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므로 우리 는 신앙을 통해서 비로서 이 십자가 사건의 진면목을 통찰하기에 이른다.
창세기 첫절에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절에 이르는 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구속사건 들 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를 향하여 일어났고(약속), 동시에 십자가로부터 일어났 다.(성취). 십자가는 빠스깔의 말같이 우주의 심장이요, 세계의 중심이요, 역사의 의 미 처이다. 세계, 인류, 우주의 진정한 의미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서, 십자 가로부터 이해되어 진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투쟁의 최고 절정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의 성서학자 디이뜨리히는 십자가를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십자가는 악과 죽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전취한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에 위치하고 있다.
동시에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이 진정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그 투쟁에서 뒷걸음 치 기를 원하셨던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십자가의 신비는 성서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신비들의 촛 점 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골고다에서 만큼 자신을 잘 나타내신 곳도 없었고 공시에 감추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역설이란 높고 영광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낮고 추한 인간이 되시고, 당시 로마시대의 치욕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인간지성에 대 한 넌센스를 말한다.
하나님자신이 그의 좌우편에 같이 못 박힌 두 강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 인처럼 취급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의 지성은 인정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다. 그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똑같이 나타 나쎴기 때문에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존귀성과 위대성을 스치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 다.
그는 인간을 위해서 그 본체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버리고, 철저히 평범한 보통 인간 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모습을 다음같이 묘사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 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 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 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 라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 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달한다 하였노라”(사 53:2~4)
인간의 구속을 위해 그의 영광을 버리고 성육신 하시어, 인간 가운데 거하시고 하나 님의 본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시대의 사가 요셉푸스나 일반종 교가와 세속 정치인들은 그를 단지 정치적인 선동가, 유대교에 대한 신모독자, 율법 훼파자 등으로만 생각했고, 그를 세상적인 법과 종교적인 법에 따라서 처단했던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오해와 정치적인 권력의 집행, 종교주의적인 음모와 이단자 로서의 정죄와 처형의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가 진 십자가는 인간들이 미처 아니 전혀 예기치 않았던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화해섭리를 성취했다는 사실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그 자체 신비성에 감싸있는 성서는 합리적인 인간의 지성으로 보기에는 외견상 모호 성, 애매성, 비윤리성, 모순성, 비과학성, 비 논리성으로 가득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으로 보여 진다.
성서가 지니고 있는 이 신비성은 이러한 인간적인 옷을 입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견상 나타나 보이는 인간적인 의상을 꿰뚫고, 내면적으로 드러나는 성서의 신비성 을 통찰하지 못하는 한, 성서는 우리에게 한갓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에 불과하며, 현대적인 합리적 지성과 논리적 사고에 의해서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신화론적 이거 나, 비합리적인 사실의 다발을 기록한 책으로만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진리에 관해서 순종하고, 경청하는 마음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래 야만 우리는 외견상 나타나는 생소한 종교적인 표상이나 의식을 넘어서서 성서가 우 리 현대인의 지성과 삶과 실존을 향해서 말하는 참된 메세지를 경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신교 장로교회의 창시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이 이해(필자주: 성서이해)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곳에 있는 원천에서 찾아보아 야 한다. 즉 성령의 숨어 있는 증언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 되시는 것과 같이 그의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말미암아 확인되기까지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절대로 신 용을 얻을 수 없다.”
칼빈이 피력하는 바와 같이 성서의 신비성에 접근하는 바른 길은 인간의 합리성이나 논리성이 아니라, 인간의 겸허성과 자기 개방성이요,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증언에 대 한 경청이요 순종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구약성서를 아기 예수가 싸여진 포대기 옷이라고 비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헤롯의 궁중에서 왕자로 탄생하지 않고, 베들레헴의 여인숙 마굿간 에서 태어나셨다는 것도 성서가 지니고 있는 신비성에 속한다.
하나님은 그의 구속의 경륜을 인간의 영광성과 합리성에 따라서 행하지 않으시고, 인 간적인 비천함과 연약함 속에서 행하시고 계신다.“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는 비천함과 겸허함의 신비이다.”
하나님은 그로부터 소외된 인간과 세계와 우주를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창조 본래의 영광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언어를 말씀하 시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는 것 같이 성서 안에서 자신을 인간 에게 부여하셨다.” 성서는 오늘도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서 미로와 방황 속에 있는 인류와 세계를 향해 구속과 영광의 길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이 다. 이 성서는 인류와 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고통과 역사의 짐, 고난, 죄와 사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책이다.
3. 성서증언에 나타난 낙원-실락원-복락원의 사상
구약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낙원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런 광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따라서 창조되었고, 지은바 된 모든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윤리적으로 선하고, 악함이 없는 낙원이었 다.
이 낙원은 곧 하나님의 그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과 더불어 관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낙원은 죄와 죽음과 고통과 더불 어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는 창조본연의 질서 왕국이다.
그러나 성서는 창세기 3장에 이르러 뱀의 꾀임에 의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계명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 을 깨뜨림으로써, 낙원의 주인공이었 던 아담과 이브는 이 낙원에서 쫓김을 당하게 되는 실낙원(失樂園)의 비극에 관해 말 하고 있다.
세계와 인간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 죄, 죽음, 질병 등은 이 실낙원에서 유래 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을 향해서 낙원의 비젼을 먼저 제시하고 있으며, 인류의 조 상이 하나님 계명을 복종했더라면, 이 영원한 천국의 평화와 복지 속에서 영원히 살 게 하시는 하나님 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창세기 3장에서 실낙원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죄, 곧 낙원에서 의 하나님 계명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쫓겨 나가는 인간의 비극과 인간의 저주로 인해서 자연까지도 저주 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 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실낙원의 비극과 인간 원죄에 대한 고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복락 원(復樂園)의 약속과 소망을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3장은 선악과를 따먹고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고 동산나무 사이에 두려워 숨어있는 아담과 이브를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동시에 말하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이브에게 수고와 고 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신다. 그리고 아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신다.
“내가 너(필자 註: 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필자 註:이브) 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니라”(창 3:15)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원수관계란, 사탄과 그리스도의 원수 관계요, 어두움의 자녀와 빛의 자녀의 원수관계를 말한다. 이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은 이브의 후손,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취된 다.
뱀의 후예, 사탄는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와 유태교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도구로 이용하여, 여인의 후예,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므로, 나사렛 예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다. 나사렛 예수는 “主, 그리스도, 하나님”으로서 즉위하시고 인류를 구속하신다.
그러므로 창세기3장 15절은 인류의 구속을 약속하시는“原福音(dasprotoevangelium) 이다. 이 원 복음은 곧 히브리적 기독교적 유산의 소망이 되어 왔다. 美國의성서 신학자 밀튼(John P.Milton)은 창세기 3장 15절을 다음같이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유혹자와 유혹받는 자 사이의 싸움이, 선 과 악간의 투쟁이 인간의 전적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택할 경우 하나님은 인간이 궁극적 승리 의 소망을 가지고 악과 계속해서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힘주시기 위하여 활동하 실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히브리적 기독교적 유산의 소망이다.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 하여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役事하신다.”창세기 3장 15절은 실 낙원한 인간들을 향 한 하나님의 구속 약속이며, 그 구속의 등대로서 인류의 역사를 향해 그 구속의 빛을 밝혀주고 있다.
비록 인간은 실낙원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의 결정적 승리를 확언하고 있다. 역사의 과정과 그 속의 모든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와 부활에 의해서 성취된 그의 승리를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낙원의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 약속 안에서 그 존재의 이유(raison d'etre)와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갖게 된다. 이제 실낙원 세계의 구속 의미를 지닌 특수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역사가 구속사이다.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더불어 실낙원의 불행과 절망 속에 있는 인류의 새로운 세계 - 생명과 성령의 세계 - 속으로 들어갈 약속에 있다. 이 약속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미 이 생명과 성령의 세계 속에서 다가오는 복락원의 평화와 즐거움을 선취 적으로 맛보고 있다.
이제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세계이며, 이 세계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 게 하노라”(계 21:5)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향해 그 확실한 복 낙원의 소망 속 에 있다.
밧모 섬에 귀양 간 예수의 애제자 요한은 다가오는 이 복 낙원의 소망을 환상으로 보 면서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 졌고, 바다도 다시 있 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 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 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 음이러라”(계 21:1~4)
4. 성서적 구속사의 네가지 결정적 시기
성서는 구속사의 네 가지 결정적 시기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사의 예비시기요,
둘째, 신약 복음서의 역사는 구속사의 성취시기요,
세째, 신약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역사는 구속사 완성을 기다림의 시기요,
네째, 그리스도의 재림은 보편사의 마지막 시기요, 구속사의 최종 완성의 시기이다.
(1) 첫째 시기 : 구속사 예비
첫째 시기는 구속사를 예비하는 시기요, 메시야 약속이 주어지고, 메시야를 대망 하는 시기이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이 실 낙원한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을 다시 복 낙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택하시고, 그가 약속하 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1~2절)
아브라함은 혼자 몸이 아니었다. 그에겐 아내, 친척, 종들, 소유가 있었고, 그의 나이는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닌 칠십 오세였다. 아브라함은 당시 갈대아의 발달된 문명권 속에서 살았다.
하나님은 그를 전혀 미지의 곳, 광야를 향해 부르고 계신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말씀을 순종했고, 그 가 의뢰할 수 있었던 모든 가시적인 소유와 친척과 문명의 보호를 버리고, 자녀 도 없었지만 약속의 미지의 땅으로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우르(Ur)도시는 난나(Nanna)라고 불리우는 月神(moon-god)을 섬기는 우상 숭배와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다.20)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으로 택하시기 위해서 옛 풍습과 잘못된 종교를 버리도록 이 우상 숭배의 본 토 친척의 집과 우상 숭배의 문명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만을 따르도록 명령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을 좇는다. 그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후예인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신앙적 모험 은 시작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어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삭을 낳게 되고, 이삭은 그의 부친 을 따라서 믿음과 순종의 조상이 된다. 이삭으로부터 야곱이 출생하게 되고, 야 곱은 이스라엘의 12아들을 낳고, 이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열조의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받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에 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다.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고, 이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나오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장차 세계를 구원하실 예표가 되고, 메시야 도 래의 선포자가 된다. 메시야 사상은 다윗 계열의 한 왕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메시야를 예언한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
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종말론적 소망 (aeschatological hope)을 지녔고, 이소망은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이 종말론적 소망은 아브라함의 후예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깊이 뿌리박 혀 있으며, 이 소망은 이미 창세기 3장 15절 이후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고, 구체적으로는 예언자들의 출현에 의해서, 더욱더 활성화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란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전성기를 제외하곤, 實로 초라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고, 더우기 솔로몬 이후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로 분렬된 후, B.C.722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그후 약 1세기 후 B.C. 598년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비극에 처하게 된다.
메시야 대망사상은 이 민족적인 비극과 시련의 역사를 통해 무르익어 갔 다. 이들은 메시야를 다윗적인 왕권을 지니고 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 속자요 神權的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할 민족의 구세주로 열망해왔 다.
(2) 둘째 시기 : 성육신
둘째 시기는 메시야 대망이 실현되고, 충족되는 구속사의 중심시기이 다.이 시기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들이 성육(Fleischwerdung) 한 때이다.
구약 아브라함의 후예, 이스라엘이 그들의 광야 생활,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된다. 만일 신약 복음서의 증인이 없다면, 곧 나사렛 예수 안에서 메시야적 인격과 권능이 사실적으로 나타나지 아니했다면, 구약성서는 단지 종교적인 환상과 인간 종교적인 상상력을 표현한 책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님 나라 소망은 하나의 실현될 수 없는 인간적 유 토피아 환상에만 머물러 버리고, 그 구체적 내용은 현실적 실현 없는 공 중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복음서에서 증언하는 메시야 도래와 메시야적 권능사역은 비로소 구약성서의 메시야 대망을 현실화시킨다. 그것은 단지 한 민족의 불행과 고민에서 나온 자기위로의 종교적 상상력이나 현실도피적인 이상 향적 충동과 표현이 아니라, 하나임의 구속사적 약속과 은혜가 때가 차 서 성취되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마가는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다 음같이 나사렛 예수의 메사야적 事役을 묘사하고 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적 선포의 주제이다. 여기서 하 나님 나라란 인간 창조시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와 더불어 낙원에서 건설 하기 원했던 창조본연의 왕국이요, 낙원을 의미한다.
“때”란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해 인류조상이 쫓겨 나온 낙원, 곧 失樂園을 회복하시고자 하는 결정적시 이다 구약성서가 대망하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가까이 다가왔 다. 나사렛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다.
그는 이세상의 구세주이다. 그러므로 여태까지 세속적으로 살아온 모든 허위적인 종교 의시과 가상적인 이상향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복음-이 스라엘과 세계의 구세주-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 희들의 인격과 삶 속에서 반영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루터교 성서학자 브라이트(J.Bright)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메시야 약속과 성취의 관점과 관련시켜 다음같이 피력한다.“구 약성서는 말하자면 불완전한 책이었다.
그 책에는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야기의 종 착점을 제시하는 푯말이 되어있다. 그 종착점은 분명히 한 도성이다. 곧 하나님의 도성(히 11:10,16)이다.
그리고 향한 좁은 길이 수 없이 보인다. 실로 그것은 아름다운 건축이 다. 지붕이 없는 건물이다. 신약성서 자체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그 지붕은 신약성서가 제공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선포함으로써, 신약성 서는 구약성서를 완성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신 과 메시야 대망의 실현은 구약성서의 메시야 대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예언 약속 없이는 신약성서의 예언 성취, 메시야 도래는 있을 수 없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에 근거하고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약성서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와 유태교의 전통에 근거 하고 있다. 예수는 레위기 율법에(레 19:18)있는 사랑의 계명을 고차원 적인 내적윤리로 재해석하고 있다. 예수는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 고 가르친다(마 5:44 그리고 눅 6:27).
예수윤리는 본질적으로 유대교으 윤리였다. 다만 기존윤리를 再定向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정의와 진노의 하나님을 계시하고 신약성 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도식화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된 다. 하나님의 두가지 모습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다 같이 나타나고 있으며, 단지 구약성서에서는 정의와 진노의 하나님이 더 강조되고 있으 며, 신약성서에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더 메시야도래와 밀접히 관 련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율법의 옛 계약(the old Covenant)을 복음으 새 계약(the new Covenant)으로 성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야웨 종(the Servant of Jaweh)에 관한 구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 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우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사 61:1-2, 눅 4:18-19) 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라고 그의 메시야 의식(the messianic consciousness)과 메시야 소명이 구약성서 예언의 성취요 현 실화라는 것을 선언하신다.
나사렛 예수는 그의 고난의 생애와 십자가상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악 마의 권세를 정복했고, 구약성서 율법의 심판과 정죄, 그리고 메시야 약 속과 대망의 완성을 가져다주었다.
나사렛 예수는 참 하나님(vere deus)이요 동시에 참 인간(vere homo)애 요, 둘재 아담(the Second Adam)으로서 새로운 인간성과 새로운 하나님 자녀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써, 하나님의 새로운 자녀들 중의 첫 열매, 첫 아들이 되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부 른 자의 공동체(ecclesia)가 곧 신약성서의 교회요, 오늘날에 이르기까 지,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3) 세번째 시기:교회의 때
세번째 시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택하신 성도들을 공동체로 부르신 교회의 시기이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라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승리사실 위에 세워졌다.
신약성서는 이 교회의 실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여기 지금” (here and now)현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메시야의 시대가 동텄다.솔 로몬보다 더 위대하고,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눅 11:31-32), 성전 과 율법보다 더 위대한 이(마 12:6-8)가 여기 지금 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눅4:17-21).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나라는“너희들 데(among you) 곧 교회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질병, 광기와 죽 음과 죄의 사슬로써 인간을 얽매는 악마 세력을 메시야적 권능으로 결박해서 쫓아내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비난하는 바리새인에 대해서 다음같이 말씀하신다.“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 아내는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그리고 마12:28)
예수의 메시야적 권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은 이 세상 안으 로 들어왔으며, 우주적 종말의 투쟁은 시작되었다. 이 하나님 나라 는 예수 선교의 시작인 유대의 비천하고 소외된 지역, 갈릴리에서 자그마한 12제자 모임을 중심으로 전개된었다.
이 나사렛 청년의 복음운동이 새 시대의 여명을 가져온다는 것, 초대교회의 탄생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예수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는 마치 작은 누룩덩이가 작용해서 많은 양의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키는 것(마 13:33)과 같으며, 겨자씨가 자그마한 씨앗이지만,
심으면 그것이 나중에는 아주 큰 나무가 되는 것(마 13:31-32)과 같으며, 농부가 밭에다 씨를 뿌렸다가 가을에 큰 수확을 얻는 것(막 4:26-29)과 같다. 하나님 나 라는 예수안에서 시작되고, 그의 부활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안에서 성장하고 있 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안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 고, 최후의 승리를 향해서 가동된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의 교회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기에 속한다. 교 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영적 이스라엘이요, “종말 때의 거룩한 하나님 백 성”(das heilige Gottesvolk der Endzeit),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택하여 남겨 놓으신 “그루터기요 남은 자 들”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무 가운데 불신앙의 가지는 꺽이고 그대신 새롭게 접붙여진 가지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며, “아브라함 약속의 상속자”(갈 3:29)요, “계약의 백성”이다. 이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 다.
초대교회는 지금 여기서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옛 시대는 지나가고, 새시대가 다가왔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공동체”(die eschatologische Gemeinde)요, “메시 야적 공동체”(die messianische Gemeinde)이다.
이제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에 가져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교회의 사랑 싸움은 선교의 선한 싸움으로 전개된 다.
이제 교회의 선교는 패배로 끝날 운명이 아니라, 확실한 승리에의 선포요 부름이 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쿨만은 이 교회의 승리확신에 입각한 선교의 싸움을 다음 같이 피력하고 있다.
“승리의 날(Victory Day)이 사실에 있어서 전쟁의 어떤 점에 있어서 이미 싸워진 결정 적인 전투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처럼 아직 다가올 종말은 새로운 것은 전적으로 저 결정적인 전투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것 없이는 절 대로 불가능하다.
쿨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부활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서술한다:“승리는 벌써 예수의 십자가사건이라는 결정적 전투에서 획득되었다. 물론 우주적 전투는 외 견상 조금도 약화되지 않고 맹렬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지금은 국부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마지막 소탕전이 진행되고 있다. 원수는 무조건 항복하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승리로 전진하고 그의 통치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회복될 것이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들은 그리 스도의 이름아래 굴복할 것이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승리 군대로서 잔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승리에의 부름이요, 보내심 받은 事役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안 에서 이미 성취된(already accomplished) 승리 위에서 싸우고 있으며, 최후의 승리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는 이미 시작되고 획득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나, 또 오고 있으며, 아직도 완성되지는 않았다. 브라이트는 쿨만의 이러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따르고 있다.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승리하지 못했으며, 승리의 가 능성조차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역설이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 지 않았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성취되었으나, 인간의 편애서 보 면 하나님 나라는 아직더 도래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의 모든 세속적인 군주와 나라 들은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아직도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다. 제국주의 국가 로마는 하니님 나라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은 주리어스 카이저를 신격 화해서, 그를 황제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교회와 로마황제 사이에 심각한 대립은 시작하고, 교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 했기 때문에 화형을 당해야 했다. 신약성서는 로마 폭정이나 제국의 부패에 관해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으며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롬 13:1-4) 고 말하면서 로마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피력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신자 의 대부분은 그 당시 세상 적으로 보잘 것 없고 가련한 무리였다.
교회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지마는 죄인으로 가득차 있 으며 세상권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불완전한 기관이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가 더구나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교회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있다(롬 2:5, 롬14:10, 고전3:13, 고전 4:5, 고후 5:10). 교회는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알곡과 죽정이를 구별 할 수 있다. 교회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고난과 고통, 박해와 시련의 골 짜기를 거쳐야만 한다.
여기서 보면 신약성서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두 가지의 긴장관계 속에서 존 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으며, 지금(now) 현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도 기독교회는 이 두 가지 국면, 이미 옴(旣存)과 아직도 아님(未來) 사이의 역설적 관계 속에 있으며,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최후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구속사의 “이미”는 구속사의 “아직도 아님”보다 더 우위에 있다. 미래 에 대한 기대는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성취의 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신약성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 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도 오지 않았다(“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 서”) 라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행 1:11, 살전 4:15-17, 딤 2:13)과 최후의 승리(고전 15:25, 빌 1:6, 행 3:21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절박한 기대 속에 있었다(벧전 1:5, 벧전 4:7, 히 10:25, 계 1:3, 계 22:6-7, 20).
그러나 초대교인들의 대부분이 기대했던 바같이 종말은 빨리 오지 않았다. 그날은 지 연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종말이 더 지연되자 악마적인 권력을 지닌 로마 황제 아래서 교회는 울부짖는 기도를 드린다.
“주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계 6:10). 교회는 주님이 주시는 조용한 음성 을 듣는다. “인내하라”(약 5:7, 히 10:36, 벧전 3:4, 8). 이 마지막때의 우주적 대 환란과 신앙의 시련과 박해를 견디어 나가면서 교회는 종말론적인 기도를 드린다: “마라나다”(Maranatha)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4) 네번째 시기: 그리스도 재림
네번째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이 시기는 “마라나 다”라는 탄식 속에서 기도하며, 고난과 시련과 박해의 골짜기를 견디어 나가는 때이다. 동시에 이 시 기는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 탄압을 촤후의 소망 안에서 헤치고 나아가는 투쟁하 는 교회의 기구와 소망이 실현되는 종말론적 소망의 성취요, 우주적인 승리와 완 성의 때이다.
우주적 재난을 동반하면서,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 함과 그 후예들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야적 통치를 비로소 실현하실 것이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와 더불어 복락원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 제는 죄와 사망, 고통과 슬픔, 구조적 악과 저주가 다시는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임재에 관해서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 한 계시록은 증언해 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박해의 시기에 요한이 밧모섬에 귀양가서 성령의 인도 속에서 마지막 다가올 종말의 사건을 묵시 속에서 보고 기 록한 책이다.
요한 계시록은 이책이 사용하는 상징적 표현 때문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다. 이 책의 참된 의미는 경고와 위로이다. 우리는 이 책의 해석에 있어서 위험스러 운 문자주의 과오에 빠져서는 안된다.
요한이 본 환상들은 앞으로 닥쳐 올 일에 관한 “표징들”(signs)이다. 표징이란 그것이 지시하는 실체(신의 계시)의 전부가 아닌 한 부분만을 내포하고 있으므 로, 신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주일 날 요한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관식에 참 여한다(계4-5장). 그는 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임할 심판과 영광의 사건을 정 해진 차례로 보게된다.
지상에는 전쟁, 기근, 전염병이 만연하고, 잠시동안 죽음의 권세가 세력을 장악 한다. 요한은 순교자의 호소하는 소리를 듣고, 저울이 곧 기울었다는 약속을 받 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의인 십 사만 사천에게 이마에 인을 친다. 허다한 방언을 하는 무수한 민족들이 모두 어린 양을 찬양한다.“ 구원하심이 보 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 7:10 )
“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 록 있을찌어가 ” ( 계 7:12 ).
요한은 어린 양, 그리스도가 영원한 통치자가 될 하나님 나라를 다음같이 묘사한 다:“ 그들(필자 주:신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 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뜩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찌니,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필자 주:예수 그리스도)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 물을 씻어 ㅓ주실 것임이러라.”( 계 7:15-17 ).
요한 계시록 8 장 -11 장은 승리자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의 새 노래를 부르고 있 다. 12장은 사탄(용)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 은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 전에 교회가 잠시 동안 더 겪어야 하는 시 련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이 기간에 세계는 짐승 곧 적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이 짐승은 세상을 다스리게 되며, 막대한 경제적 권력을 쥐게 된다.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아야 만, 모든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13장)
그러나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 최고 도에 도달한 것처럼 보여지는 순간, 어린 양, 그리스도가 시온산에 나타나 구원받은 백성들을 한데 모으게 된다(계14:1-5). 최 후의 심판 전에 영원한 복음이 여러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파된다(계 14:6-7).일곱 천사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 위에 퍼 붓는다.
그러면 적 그리스도의 통치를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은 마침내 멸망한다(15-18 장).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계19:6-10).옛뱀이요 마귀 요 사단인 용은 1 천년간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진다(계20:1-3).
그리스도는 왕적 통치를 하시며, 그의 교회 성도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린다(계20:6). 여기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왕국은 실현된다.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 지 아니할 것이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요, 사자가 소 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사65:17-25)
천년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탄이 그 결박을 풀고 다시 주의 교회와 더불어 최후 접전을 벌린다. 여기서 사단은 패배하여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고, 세세토록 괴 로움을 받는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이 최후의 심판에 있어서 사망과 움부도 불못에 던지운 다(계20:7-15). 이제는 하나님의 영원한 총치가 실현된다. 하나님의 도성이 그의 찬란한 영광 가운데서 나타난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며 하나님이 모든것이 되신다.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 계21:6)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빛은 “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다 ”(계21:11).
이 성안에 성전은 없다. 왜냐하면, “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 심이라 ”( 계21:22).이 성에는 해와 달의 비췸이 필요없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21:23). 수정 같 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처 흐른다. 이 생명수 강은 생명 나무 실과를 맺히고 만국을 소성케 한다. 주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을 비취 고, 성도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면서 “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 ” (계 22:5)
5. 구약성서
(1) 구약성서 정경
정경(Canon)이란 말은 헬라어 “카논”( kavwv )에서 나왔다.원어 카논은 “자” “척도”“법규”라는 뜻이다. 이 정경이란 단어를 성서에 처음 적용한 자는 아타 나시우스이다.그는 이 단어를 니케아 회의 신조에 사용했다.
그후 라틴교회 교부들이“정경”이라는 말을 성서에 관해서 사용했고, 성서는 교 회의 신앙과 생할의 규범이 되어왔다. 오늘날 구약성서는 39권이다. 그러나 히브 리 성서는 구약성서를 3 부분으로 구분된 24 권으로 갖추었다.
히브리성서는 토라(Torah),네비임(Nebiim),케투빔(Kethubim) 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토라는 율법서(the laws)로서,창세기,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 명기 5권이었다.
그래서 모세 5경(Pentateuch)이라고도 부른다. 네비임은 예언서 (the prophets) 로서 -전기 예언서 4권-여호수아,사사기, 사무엘(상.하를 1권으로 취급),열왕기 (상.하를 1권으로 취급),-후기 예언서 4권-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 (12소선지서를 1권으로 취급)등 8 권이 있다.
케투빔은 성문서(the holy writing)로서, 시편(5부),잠언, 욥기, 아가서, 룻기, 애가서, 전도서, 에스더-느헤미야(두 문서를 1권으로 취급),역대기(상하를 1권으 로 취급), 등 11권이었다.
히브리 성서는 율법서(5권),예언서(5권),성문서(11권)을 모두 합하여 24권으로 되어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구약성서의 순서는 히브리 성서 순서와 다 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구약성서는 70인역(Septuaginta) 헬라어 구약성서의 영 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70인역 헬라어 구약성서는 주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한 구약성서이다. 구약의 정경은 구약시대의 총회나 대회 를 통해서 선포되므로써 그 신적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용되고 있는 전승에 대한 인정에 불과한 것 이 었다.
율법서나 예언서는 이미 전해지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부여되었 다. 구약성서의 각 책은 쓰여진 당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가 부여되었 다.
율법서는 언약의 법궤앞에 놓여져 있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주었 고,백성들은 이 율법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고, 백성들은 그들의 예언 말 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다.
구약성서의 기록은 모세 때 부터 예언자 말라기까지이다. 출애굽기 24장4 절,34장27-28절, 민수기 33장2절, 신명기31장 9절,22절,24절에 의하면 모세가 율 법서와 이스라엘의 광야 이동의 지도와 역사를 기록했다.
모세 후계자 여호수아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새 돌에 새 긴다(수8:31-35). 성경의 각 부분은 쓰여지자마자 곧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그후 하나님은 마지막 예언자들 학개, 말라기, 스가랴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시고, 말라기 때(B.C 453 년경)하난님의 예언 말씀은 끝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은 종결된다. 율법서나 예언서나 역사서나 성문서나 모두 하나 님의 성령의 엉감을 받은 권위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모세,예언자들....)에 의해 서 쓰여져서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폳되고, 읽혀지게 되었다. 주전 1 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세 때부터 아닥사스다왕 ( B.C 464--424) 의 때에 이르기 까지 길록된 5권의 율법서, 13권의 선지서, 그리고 4 권의 찬송책이 있 음을 말하고 있고 아닥사스다 왕 이후에는 이러한 신적 권위가 있는 책이 기록 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에 앞 서 구약의 정경에 들지않는 외경 [예수시락]서의 저자, 예수 뻰시락의 손자가 B.C 132년경에 [예수시락]書(Jesus Sirach 또는 The book of Ecciesiaticus) 서문을 쓰면서, 세번이나 구약성서에 세 구분이 있음을 지적한 다.
그는 서문에서 “ 율법서, 선지서와 열조의 다른 책들” 을 할아버지 예수 벤 시 락 이 열심히 읽도록 했다고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전 190 년경에 쓰 여진 예수시락서의 저자 지저스 벤 시락 때에 이미 구약성서의 세 구분이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정경 39 권은 비평학자 파이퍼(Pfeiffer) 가 주장하는 것 처럼 AD 90 년 경에 잠니아(Jamnia) 에서 열린 유대인 학자들의 회의에서 비로소 결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잠니아뢰의 이전에 구약정경은 유대인 사회속에서 이미 하나 님 말씀의 권위를 지닌 것으로 전해 내려돴다로 보아야 한다.
잠니아 회의는 이미 유대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정경의 책들을 공식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공고히 했다고 볼 수 있겠다. B.C 435 년경 말라기서가 구 약정경 가운데 마지막으로 기록되고, 그 후부터는 이 24 권의 히브리 성서가 오 늘날의 구약성서의 원형태-사무엘 상.하가 1 권으로, 열왕기 상.하가 1 권으로 12 소선지서가 1 권으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1 권으로, 역대기 상. 하가 1 권으 로 간주됨-로서 정경으로 간주되어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전수되어 읽혀져 왔다 고 이해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입장에 선 구약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B.C. 400 년-B.C. 300 년 경 이미 구약정경 집성은 아마도 완성되지 않았나 추정한다.
(2) 구약성서의 여섯 가지 주제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여섯 가지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우주와 세계 역사의 시작- 창조와 타각-( 창세기 1-11 장 ),
둘째는 족장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구원 역사의 시작-( 창 12 - 50 장),
세째는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 신명기),
네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과 왕조 술립(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 다섯째는 예언자들의 울현과 폴로 시대 (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 야, 에스겔 ),
여섯째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포로기 이후의 유대주의 (에스라, 느헤미야, 학 개, 스가랴 ) 이다.
① 우주와 세계 역사의 시작
창세기 1 장에서 11 장은 세계와 인가의 기원, 그리고 죄악과 죽음이 어떻게 세계 속에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창세기는 창세 때부터 존재하는 모 든 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에 의하여 있게 되고,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주 고 있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 1: 1 ).
“ 하나님이말씀하시되....”(창1:3,6,9등).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셨도다 ( 시 33:9 ).
창세기 1 장에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이 말은, 유신론적 창조사상을 알려준다.
우주와 세계는 범신론자들(Plotin,Spinoza)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도 아니고, 철학적 이원론 자들 이 주장하듯이 하나님과 세계가 공 존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세계는 그의 말씀에 의한 창조물이다. 창조적 말씀에 으한 세계 창조 기사에 있어서는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찿아볼 수 있는 바 물질과의 투쟁내지 다른 신들에 대한 싸움은 없고, 하나님은 세계의 주요 주인으로 창조와 더불 어 질서를 부여하고 계신다.
흰두교 사상이나 헬라 사상에 있어서는 이 세계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과 운 명이 있다고 말하는데, 창세기 사상에 의하면, 이 세계는 하나님이 그의 영 광을 위해서 창조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는 인간의 이중적 근원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땅의 티끌로 만들어 지고 그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 넣어졌다 ( 창 2:7 ).
“ 하나님이.....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 하시고” (창 1:27 ).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들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 창 2:7 ).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존귀하며, 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지닐 수 있다. 부버 (M.Buber) 의 말처럼, “ 인간은 나일 뿐 아니 라 항상 너이다.”
하나님이 그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은 남자와 여자라는 한 쌍이다. 이 한 쌍으로 지 음받은 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함축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 은 그의 본성에 있어서 그 자신을 내어 주시는 자유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인간 한 쌍, 가정은 두 사람의 통일성 속에서 자신을 상대방에게 주시는, 사랑 속 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생 물들을 보호, 관리할 책임을 위탁하시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부여해 주신 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물 중에는 가장 높은 지위와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의 말씀에 응답하고, 책임을 지니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거나 거역할 자유를 부여받는다. 창세기 3 장은 하나 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가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과 교만에 의해서 파괴되고, 하나 님으로부터 소외된 죄와 죽음의 세계가 되었다는 비극을 알려준다.
“ 너희가 그것 ( 선악과 ) 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 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 ( 창3:5 ).
아담과 하와가 굴복한 유혹이란 자기의 피조적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 치에 서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Promentheus )적인 유혹이었다. 창세기 3 장은 악 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죄의 현실성과 중대성을 말하고 있다.
이 원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 Eritis sicus deus )하는 교만 ( Superbia )이 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영광을 취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이 한나 님의 선물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곧 원죄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도, 지식의 열매를 따먹기에 이른 다. 여기서 인간은 창조 본연의 순결성 ( 벌거벗음 )을 상실하고 창조주로부터 몸을 피한다. 그리고 또한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변질된다. 인간의 모든 관계도 균열되기에 이른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복종케 하므로써 겸손하게 하시고, 남자는 수고와 고통을 통해서 소산물을 거둘 것을 말씀하신다. 성관계의 즐거움, 자녀를 갖는 기쁨, 노동 의 즐거움이 빼앗긴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댓가로서 주어지며, 그 결실이 항상 좋은 것으로만 보 장되지 않는다. 이들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이제 이들은 흙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서 가죽 옷을 저어 입히시며, 이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주신다.“내가 너 (역자 : 뱀 )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 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 귀절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원복음(Proto evangelium)이다. 뱀의 후손이란 사탄을 말하고,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사탄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예수는 부활하시어, 사탄의 정수리를 깨뜨리실 것 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사탄이 장악하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릴 것을 예언하고 있다. 창세기 4장에서 11장은 죽음의 권세아래서 하나님에 대해 계속 반역하고 저 항하는 인간가족과 인간집단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악마의 권세아래 들어가서, 인류 최초의 형제 사이의 살 인비극이 야기된다. 형가인은 증오와 미움으로써 그의 아우 아벨을 살인한다(창 4:1--20).창세기6장은 이러한 인간들의 죄악이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에 이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창세기 9장에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그 시대에서 서너택하시고, 이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신다. 창세기 11장은 인간 집단이 하늘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신전 을 건립하고자 하므로써 인간 사회을 신격화하고 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 을 면하자“ 창 11:4 ). 이러한 인간의 바벨탑 건축을 하나니은 파괴하시고, 인간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인간들을온 지면에 흩으신다.
2. 구속 역사의 시작
창세기 12장은 구속역사가 시작되는 장이다.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은 계속 그를 반 역하는 인간 사회를 심판하신 후에 그의 선택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창세기 12장에서 50장까지는 족장들의 역사를 알려준다.
12장에서 26장 까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삭에게 주신 약속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고,29장에서 50장 까지는 약속의 상속자 야곱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의 선택으로서 족장들에게 자기 자시니을“살아계신 하나님”(the living God)으로 나타나셨다.
그는“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는 인류 구속의 도구로서 아브라함 을 택하고, 그에게 명령(본토 친척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과 약속(너 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속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약속을 믿는 신앙으로서 자기 부모 형제, 고향, 그의 조상이 섬기던 신들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그네 생 활을 해야만 했다(창12:1-9).
창세기 14장에는“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멜기세덱이 나타나서, 언약의 표 시로서 특이한 방법으로 떡과 포도주를 주며 아브라함을 축복한다(창14:18).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는 법적 언약에 관해서 말한다.
고대 관습에 따르면 어떤 계약에 합의하는 양편은 두 조각낸 동물 사이를 지나가야만 한다. 이것은 만약 합의사항을 깨뜨리는 경우에는 희생자처럼 자기의 몸이 찢기는 것 을 의미한다.
이 법적 언약 제사를 드리는 도중에 아브라함은 깊이 잠든 중“깊은 흑암‘에 둘러 싸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사백년 동안 외국에서 나그네가 되어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을 예언하신다(창 15:13 ).
아브라함이 경험한 이 두려움은 선택된 사람들이 갖는 절망적 갈등이다. 선택된 사람 들은 모두 일단 버림받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만 이 그들을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심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할례”라는 언약의 가시적인 표시를 주신다. 가시적 할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표시이다.“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 약이 되려니와(창 17:13 ).
이방인들도 이 할례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스마엘은 육적 본성에서 났고(하갈이라 는 여주인 몸종의 아들) 이삭은 믿음에서 난 약속의 아들 (부인 사라의 아들)이었 다. 이삭은 아브라함 나이 100세 사라 나이 90세에 하나님의 은혜 선물로 받은 아들 이다(창21:5).
이미 신체적으로는 단산된 사라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셨다(창21:2). 이삭의 잉태와 출생은 우연한 것이 결코 아니다. 구속의 역사에는“우연적”내지“자연적” 이란 사건은 없다.
모든 것은 아끼지 않고 약속의 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세기 22장은 성서 자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보여준다.“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약속으로 주신 아들을 다시 번제로 받으시겠다고 명령하시는 하나님!“하나님에 모 순되는 하나님, 믿음에 모순되는 믿음, 약속에 모순되는 명령”(Chrisostom).
"하나님은 공공연하게 자신에 모순된다. 인간 이성은 이 모순 앞에 망설이지만 신앙 만은 하나님의 유일한 약속을 믿고, 뛰어들 수 있게 만든다.“(Luther)
아브라함은 그 섭리를 이해함 없이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제단에 묶어 칼을 드는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신다. 아브라함은 순종과 믿음 안에서 그의 아들이삭을 다시 선물로 받는다. 비셔어(W.Vischer)는 다음과 같이 피 력한다.
“약속의 말씀이 그를 무에서 생명으로 부르셨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말씀만이 그 의 생명을 보존하신다. 그 이야기에 나타난 족장은 지금도 믿음 안에서만이 그의 아 들을 소유하고 있다.“
출애굽과 시내 산 언약
출애굽기 1장--4장은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 서, 아브라함에게 부여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에집트에서 노예로 부역하는 이스라엘 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종 모세를 바로 왕의 궁중에서 양육하시고, 그를 미디안 광야 호렙 산에서 부르시고 소명을 주심에 관해서 증언하고 있다.
족장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후 400년간 침묵하신다(창15:13,행7:6).야곱의 후 손들은 가나안에 들이 닥친 대 흉년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국 무총리가 된 요셉 덕분으로 에집트에 정착하게 된다(창 50:22--출 1:1-7).
새 바로 왕조가 집권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상 처음으로 박해를 경험한다. 바로왕은 불어나는 외국인,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를 압제하고, 남자 아기를 죽이라 는 명령을 내린다. 나일강에서 갈대 상자 속에 버려진 아기는 역설적으로 바로의 딸 에 의해서 양육되어 진다. 여기에 인간의 모순과 약한 것을 통해서 그의 뜻을 실현 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가 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노예 생활을 하는 그의 백성됨 같이 고난 받는 길을 택한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양치는 목자가 된 다. 출애굽기3장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것을 알려준다. 모세 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여기서 족장들의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본질을 드러 내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 (출 3:14)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 이기 때문에 영원히 활동하는 분이시다.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하여 히브리 인들은 네 자음(YHWH)만을 말하고 모음을 기록치 아니 하므로써 하나님 이름을 발음 함을 금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에 관해 야웨(YAWEH)내지 예호바(jehovah) 등으로 일컬어지고 있 으나, 불분명하며, 이름의 기원에 관해서도 역시 불분명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 이 름을 인간이 감히 부를 수 없다는 제 3 계명에 입각한 유대사상에서 비롯된다.
출애굽기 5 - 18장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강한 손과 펴 신 팔로 인도하심을 보여 준다. 10가지 재앙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며, 모세 와 바로의 투쟁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에집트 신들 간의 결정적인 싸움이었다.
하나님은 유월절 밤에 에집트의 모든 장자들의 심판을 행하시고, 에집트 신들을 징 벌하고 그의 백성을 구출해낸다. 또한 홍해의 사건은 기적을 통한 기적의 사건이다.
19장 이하는 시내산 언약으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다.(출19:5-6) 여기 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가 되며, 정치적, 종교적 공동체가 된다. 이 때의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다.
모세는 언약의 계명을 읽고“언약의 피”를 뿌린다(출24:8).여기서 오실자의 예표와 기대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중보 적 역활을 하며(출19:20,24:1-2,12-18),이스라 엘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앞에 제사장으로 언약을 맺는다.
율법은 언약의 표시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다. 우리가 받은 자유의 감 시자요 경계를 지우는 역활을 한다. 또한 삶이 하나님의 계명 아래서 운행 되어야함 을 가르친다.
하나님, 이웃과의 관계 곧 종교적 생활 및 시민 생활의 측면을 가진다. 율법의 핵심 은 십계명(출20:2-17),네가지 하나님과 인간, 나머지 여섯 이웃관계.
출20-40장, 신5-10장,28-30장 구원 목적 안에 위치한 율법.
제1은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모든 다른 계명의 근본,
제2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 외에 궁극적인 것으로 숭배되는 피조물의 신격화를 허 용치 아니하신다.
제3은 그의 이름으로 경솔히 맹세해서는 않 된다.
제4는 안식일은 성도가 마지막 날 들어갈 영원한 안식의 예표와 기대
제5, 가정은 창조 질서며, 부모 됨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지상적 그림자.
제6, 생명의존중과 생명에 대한 하나님만의 권리.
제7,가정의 신성함, 결혼이란 통일성으로 남녀가 자기에게만 속하지 않고 상대방에 게 속하는 것, 간음은 창조의 조화와 질서를 깨뜨림
제8 모든 재산의 절대적 소유주는 하나님 우리는 청지기, 낭비해서도 않 되며, 사용 함에도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함.
제9 하나님은 진실과 정의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가 되기를 요구 하신다.
제10 탐심은 모든 죄의 원인 이것은 개인 관계 심지어 사회관계 까지도 파괴 십계명 은 율법의 기초, 모세 5경에는 율법의 세 법전이 나온다.
첫째: 언약서(출21-23, 넓게 출20-24)-가장 오래된 법전.
둘째: 성결법(레17-26)-본질적인 법전, 성장하고 발전하는 역사.
셋째: 신명기(신12-26)-율법의 정신을 새 상황에 적용.
이것은 도덕적 행위의 참된 지침을 제시한다. 또한 시민 질서의 지침도 됨(현시대). 율법은 이스라엘의 헌장이지, 인권법은 아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존엄의 참된 보장은 하나님에게 있다.
율법 판은 지성소의 법궤 안에 배치. 이스라엘의 종교법 시민법 不구분 되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며, 그를 영화롭게 하기위한 목적을 지님.
율법은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범죄로 정죄의 도구가 됨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교사이다.(갈3:21-4:7) 율법의 진 정한 기능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취되며, 의식 법으로는 폐지됨. 도덕의 법으 로는 복음 안에서 시민헌장이며, 신자의 지침이 된다.
4) 약속으로 들어감과 왕국의 수립
히브리 성서에서 수, 삿, 삼, 왕은 전기 예언서, 이 것은 일반적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곧 구속사를 취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서 그의 백성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므로, 이 사건들은 승리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통해서 그의 섭리를 실현하신다.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땅으 로 들어감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다. 청년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백 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넘쳐흐르는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고 요단강을 건넌다(수 4:7).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능이 모세에게처럼 여호수아에게도 나타난다(수5:15).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의 힘이 아닌, 야웨의 능력으로 성취된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메고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은 외치므로써 난 공불락의 여리고성도 무너지고, 함락된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대적과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함을 가르친다. 하나님께 일단 바쳐진 물건은 그에게 봉헌된 것이 다. 일단 봉헌된 물건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자기 것으로 취해서 는 안 된다.(수6:18).
이러한 하나님의 규레는 하나님 백성을 가나안 민족의 풍속에의 동화로부터 보존하 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가나안 정복은 일시에 성취되지 않고 몇 세기에 걸 쳐 점진적인 점령에 의해 완성되게 된다.
여호수아는 세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집해서 야웨 신앙을 재확인 한다(수24 장).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사에 관해서 알려준다.
이시기에는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현하며, 심판과 구원의 주기성이 나타 난다.“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나 ....여호와께서.....그 들을 대적의 손에 부치시니....”(삿 3:12, 6:1등).
“이스라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 우셨으니....(삿3:15, 6:1등). 등의 심판과 구원의 주기적 반복의 역사가 사사시대 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사이다.
사사시대는 무정부와 전란의 무질서 시기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사사 를 세우셨다. 사사의 임무는 상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그 수 행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그 시대의 특수한 도덕적 관습과 편견의 제한성을 넘지 못하는 개인들이었으 나,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임재할 때 그들은 능력을 “거룩한 전쟁”(der heilinge krieg)에 출전하여, 그들의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구출했다.
삼손(삿 13-16장)과 기드온(삿6-8장)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무엘서(상.하)는 왕 조수립과 다윗왕가에 대해서 조언하고 있다.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 사무엘은 사사, 제사장, 에언 자의 기능을 조화시키면서, 이스라엘 왕조수립의 길을 열고, 최초의 두 왕, 사울(Saul)과 다윗(David)에게 기름을 붓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방과 같이”(삼상 8:20) 왕을 세우기를 바란다. 이들은 하나 님 보다는 인간적 주일을 섬기기를 바란다. 왕조수립 요구란 이들을 출애굽 시키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야웨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었다(삼상 8:1-6).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신다. 하나님은 왕조 그의 장중에서 은총의 새 수단이 되게 하실 것이다(삼상 12:18-25).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맞는”한 왕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 왕조에서 세상 을 구원할 메시야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준수한 청년 사울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삼상9:17) 사무엘의 기름 부음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다.
그에게 야웨의 신이 임하여 사울은 에언하고 새 마음을 받는다(삼상10:6-9). 그는 40세에 즉위하여 하는 모든 일에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그는 교만하게 된다. 블 레셋과의 전쟁에 있어서 제사장 사무엘이 관례대로 드리게 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있어서 제사장 사무엘이 관례대로 드리는 제사에 늦게 도착하자 사울은 적군과 대진하는 위급한 상황 솟에서 사무엘을 대신해서 번제를 드린다. 이 리하여 그는 왕의 권한을 넘어 제사장의 직책을 빼앗는 일을 하였다(삼상 13:8-15).
사울은 또다시 하나님 명령에 불복종한다. 사울은 아멜렉 왕 아각을 살려주고 아각 의 양과 소와 좋은 물건을 후에 제물로 쓴다는 핑계로 진멸하지 않는다.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 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사무엘은 이후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
이때로부터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게 되고, 그는 정신이상이 되어 마침내 자살하게 된다(삼상 31:4-6). 하나님은 사울을 폐한 뒤 베들레헴 출신의 준수한 목동 다윗을 택하여,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한다. 그는 시와 음악에 능했고, 용감하여,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돌팔매질로써 넘어뜨린다.
그는 친구 요나단에게 깊은 애정을 보여 주었고,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사울 왕을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로 여겨 반기를 들기를 거부하는 고상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 었다(삼상 24장,26장, 삼하1:1-16).
다윗은 그의 지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과, 자기는 한갓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 다는 사실을 아는 겸허한 마음의 소유자였다(삼하7:18). 다윗은 30세에 즉위하여, 초라한 출발을 한다.
그는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 받았으나 처음 7년 6개월 동안은 전 이스라 엘 열 두 지파에 의해서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 후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 여 그곳에서 33년 동안 전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모셨다(삼하6장). 언약궤의 예루살렘 입성이야말로 하나님이 그 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가시적인 표징이 되었다(삼하6:2,12-13). 다윗은 야웨를 위해 또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을 많이 하여 대적의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그의 아들에게 성 전 건축을 위임하라고 말씀하신다. 다웟은 사울과 달리 그의 신앙과 온유와 겸손의 인격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 된다.
다윗은 자기 신하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부인으 로 삼는 실수도 범하나(삼하11장), 그는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 에서 뉘우치고 용서 받는다(삼하12장).
하나님은 다윗가의 왕위가 쇠하지 않고, 영구히 지속할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다윗 왕을 다가올 메시야의 예표로 그리게 된다. 다윗의 왕좌와 성전은 이스라엘의 두 개의 큰 기둥이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 이르러 교회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영광과 융성은 절정에 도달한다. 솔로몬 통치 후기에는 이방여인들이 들여온 우상숭배에 의해서 이스라엘 은 종교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왕상11장).
그리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은 북 왕국(여로보암 통치)과 남 왕국 (르호보암 통치)으로 분열되게 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 들어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주전 722년에 멸망에 이른다.
남 왕국 유다에서는 우상숭배를 철폐하는 요시아 왕(B.C.621년)의 종교개혁이 일어나 (왕하22장) 신명기 법전을 다시 발견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되돌아가는 새로운 신앙 운동이 야기된다.
요시아가 전사한 후, 그의 후예 왕들은 다시 하나님의 법을 떠나 불법을 행합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1세기 반경 B.C.597년에 멸망하게 된다.
5. 예언자들의 출현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시대, 주전 8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예언자 출현의 시대이었다. 예언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 등은 이 예언자들의 활동과 메세지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패역 된 백성 이스라엘에 내리실 임박한 심판과 재난 을 선포한다. 이 심판은 강대국의 침입에 의한 이스라엘의 함락, 추방과 포로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주전 8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은 아모스, 호세아, 예루살렘의 패역으로 인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주전 7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은 나훔, 스바냐, 예레미 아, 하박국이다.
이들은 바벨론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주전 6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활동한 에스겔과 바벨론의 이사야 이다.
그의 예언 전반기에 에스겔은 임박한 심판에 관해서 선포하고, 예언 후반기의 에스겔 과 바벨론의 이사야(사 40-66장)는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메시야 소망과 관련해서 선포하고 있다.
이 예언자들은“하나님의 대리자”(렘 1:9, 렘 15:16, 겔 2:8-3, 사 6:8), 그의 백성 을 “지키는 자”(겔 33장)으로서 왕과 제사장과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의 을 해석하 고 각성시켰다.
이들은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부름을 받는다. 예언자 들은 그들의 관념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불”과 같이,“바윗돌을 산산히 부수는 망치”같이 임했고(렘 23:29), 이 들은“중심이 불붙는 것”같이 침묵할 수 없는 선포의 내적 책임에 사로잡혔다(렘 20:9).
주전 8세기와 주전 7세기의 예언자들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었던 거짓 된 안정과 선민의식을 들추어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한 후 그들의 삷 과 생활에 안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나안의 잡신종교, 풍속, 행동방식에 물들어 가게 되었다. 이스라 엘은 하나님 아닌 운명의 신을 믿게 되었고, 조상들이 전해준 야웨 신앙을 잃어버리 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대신 병거 수에 의존하여 군사적 안정을 추구했고, 이방 과의 동뱅을 맺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고, 이방신과 야웨신께 희생의 제물을 동시에 드리면서 영적 안정을 얻고자 했다.
예언자들은 무두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 악기 위해서는, 이제 그들이 운명의 주로서 생각하는 모든 소유-왕국과 성전-를 포기하고, 옛 광야생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그 백성을 죽음 골짜기로 인도하여, 연단하신 후에 소망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호 2:14-15).예언자들은 그 시대의 사조에 역행하면서,다가 오는 시대를 예언한다.
모든 자들이“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낙관적인 시대 관에 의해 지배되었을 때, 예 언자들은 어두운 운명과 파멸과 재난과 불행을 예언 하엿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이 폐허와 파멸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예언자들은 소망과 하나님의 위로를 선포하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 밭을 산다. 그는 이것으로써 예루살렘 회복의 표 징을 보여주고 있다(렘 32:15). 에스겔은 포로 된 몸으로서 앞으로 예루살렘에 세워 질 성전을 설계한다.
바벨론의 이사야는 포로 신세중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다(사 40장).예 언자들은 야웨는 역사의 통치자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를 그의 절대 주권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다. 야웨에 대한 언약을 저버 린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하신다(암 3:2).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하는 자로부터 배반당하고, 속임을 당한 것에 대해 질투하시는 사랑의 진노이다(렘 2:32,호 11:1-2,8-9). 예언자들은 사회적 부패상을 폭로한다. 사회적 부패사의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이 존중되지 않는 곳에서 실제적인 무신론(a practical atheism) 사상이 지배한다. 집권층의 부패현상, 뇌물을 받고 판결하는 법관들, 대지 주의 가난한 자 수탈, 야웨 경외 없는 희생제물 헌납과 각종 절기 제사 등은 재난의 전령이요 사회도덕 파괴의 전조였다.
그러므로 야웨의 이스라엘 심판은 불가항력이다. 아모스는“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 의를 하수같이 흘릴 찌로다”(암 5:24)라고 외친다. 예언자들의 메세지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나라와 강대국에 대해서도 선포되었다.
이방 통치자는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야웨는 앗수르를 이스라엘 심판의 막대기 로, 바빌로니아를 유다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 역할이 끝나면 하나님은 이들 이방국가의 자기 신격화하는 교만과 우상숭배를 심판하실 것이다(사 10:15, 사33:1, 사 14:9-11, 16-20).
이들 강대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예컨데 페르시아는 선택된 백성을 바벨론에서 귀향하게 하는 구원의 막대기 역할도 한다. 야웨는 바벨 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나의 종”이라 명하시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나의 기름 부음받은 자”(사 45:1)라고 명하신다.
야웨는 이들 통치자가 모르고 있을찌라도, 그의 역사 섭리와 경륜에 따라서 이들을 사용하셨다. 야웨는 그의 구원의 막대기, 고레스에 대해 다음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 를 알지 못 하였을 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 을 행하는 자니라”(사 45:4-7).
물론 이들은 자율적으로 계획하고, 자기의 권력의지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은 종국에 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들 이방국가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사 19:19-25).
이 이사야는 마지막 때 세계 열방들이 하나님의 를 듣기 위해서“야웨의 전의산”으 로 모이는 환상을 말하고(사 2:2-4), 마지막 때 야웨께서 에집트와 앗수르를“나의 백성 에집트,“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라고 부르시며, 축복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 다.
예언자들은 포로생활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용광로에서 금과 은을 단련하는 것같이 그의 백성을 연단시키고, 신실한 남은 자를 명목적인 이스라엘에서 분리해 내는 하나 님의 부르심, 새로운 출애굽(the new Exodus)으로 이해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노래를 선포하며, 이 일을 성취할 메 시아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예언적 영의 감동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이 주어진 절망적 현실을 초월해서 다가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소망으로 예언한다.
이 왕국의 회복은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사9:6, 사 11:2, 미5:3, 렘23:5-6, 겔34:23-24). 주전 8세기, 이사야는 메시야 왕에 관해서 예 언하고 있다.
이 왕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것이다.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어깨에 지 니고,“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 (사 9:6이라”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는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사11:3-5). 주전 7세기 예레 미야는 구원할“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실 것이며, 그는“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렘23:4-5).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하나님의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될 것이다(렘31:31-3). 주전 6세기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목자 다윗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그들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겔 34:23-24).
바벨론의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야웨의 종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 고난의 종은 이스라엘이 당해야 할 형벌과 고통과 재난을 대신 당하였으나, 그 시 대 누구도 이 사실을 아는 자 없었다(사 53:1-6). 이 고난의 종이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다.
6. 이스라엘의 남은 자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국가 형태에서부터 종교적 공동체 로 변모했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 삶의 중심은 성전과 율법에 집중된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포로 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과 성전재건을 허 락한다.
70여 년간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하나 님의 성전으로부터 단절되는 영적 고통을 쓰디쓰게 맛보게 했다.
시편 137편과 42편, 예레미야 애가(애 2:1, 6-7)는 포로시기의 심각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들에게는 성전파괴가 야웨 진노의 상징이라면, 성전재건이란 하나님 은총으 로 되돌아가는 상징이었다.
이미 포로시기에 제사장이요 예언자인 에스겔은 미래 성전의 구체적 계획을 도안 헀 으며, 성전 안에서 드리는 예배규칙을 창안했다(겔 40-46장).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돌아온 자들의 첫째의 과제는 성전재건이었다.
그러나 성전재건은 어려운 장애에 부딧친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제의 규칙을 강조하 고 순수한 예배회복을 원하셨고, 그 땅에 남아있는 자들, 곧 사마리아인들의 재건 작 업 참여를 배제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에서 배척당하였다고 느끼자, 고 레스 후예인 다리오 왕에게 글을 써 올려 성전재건 사업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이 모함은 실패로 돌아간다(스5-6장). 그리고 또 하나의 장애는 귀환자들이 귀향 하자마자 그들의 생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예언자 학개와 스 가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
학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성전재건 보다는 자기 생계를 일차적인 관심으로 가졌기 때문에 이들의 경작소출은 줄어들고 번영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학 1:4-6). 그래서 남은 모든 백성들은 야웨의 성전건축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학1:14).
스가랴도 이스라엘의 불행이 야웨에 대한 불신실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야웨에게 로 되돌아 갈 것을 선포하고 있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다윗의 왕권을 이어갈 스룹 바벨을 환상 속에서 보고 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선, 기름부음 받은 두 사람”(슥 4:14)이다. 이 양자는 예시되는 메시야 이며, 왕과 제사장 두 직능을 그의 인격과 사 역 속에서 연합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 된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후 1 세기가 지나서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허락으로 에스라와 느에미야가 귀향한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야웨의 율법을 회복하고, 느헤미야는 평민으로서 성전재건 방 해자들에 대해서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연장을 들고 예루살렘 도성의 성벽을 수축한다.
그는 모세 율법을 이스라엘가운데 확립한다.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부자들이 엄청난 고리대금 놀이를 하고, 채무자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경제적 부조리를 바로 잡고, 이 방여인과 결혼한 자들에 대한 강력한 법적 규제를 적용하여 귀환한 이스라엘의 종교 공동체가 이방 종교의 오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제 성전과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그것은 옛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왕 국 회복에 대한 희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주전 2세기에는 마카비 반란이 일어난다. 이 마카비 시대에 이스라엘은 80년이란 기간 동안 정치적 자유를 누린다.
마카비(Macabee) 형제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통치하에 시행된 유대종교의 말살 정책과 헬라문화에의 동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하나의 독립된 국가 및 종교적 공동체 를 수립하고자 했다 (마카비1서 1:25-28, 마카비2서 7장, 마카비1서 1:11).
마카비 반란의 정신은 하나님 백성이 당하는 시련과 재난과 형벌은“진멸하려 함이 아니라 단련하기 위해 미리 계획된 것”이다(마카비2서 6:12-16).“비록 재난으로 우 리를 단련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는 결코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상동).
이 마카비 반란에는 하시딤(Hasidim: 경건한자, 충성된다)이라는 그룹이 중심이 되었 고, 이 그룹에서 바리새파가 유래한다. 마카비 반란은 80년 동안 헤스모니안 왕국을 건설하기는 하나, 결국 하나님 나라를 건설치 못하고 실패한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 앙적 그룹은 바리새파, 사두개파와 에센파로 나누어진다.
바리새파는 더럽히게 될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별 하고자 하였다. 바리새파는 처 음에는 정통신앙의 수로자로 출발했으나 율법에 관한 주석을 부치면서 율법 정신에서 벗어나‘사람의 유전(막7:8)’을 좆는 율법주의로 변질되어갔다.
이에 반해 사두게 파는 문서화된 율법만을 엄격히 지키고자 했고, 義의 율법적 개념 을 주장하려 했다. 이 사두개파의 구성원은 제사장들이었고 이들은 현실정치의 권력 장악에 순응하며, 현 시대의 유행에 민감하여, 물질주의 및 기회주의에 빠졌다.
에쎈파는 광야에서 분리된 생활을 하며 금욕주의를 표방했고, 메시야 기대를 하였고, 종말론적 의식에 사로잡혔다. 이들에 대한 논구는 1947년 쿰란 사해사본이 발견된 후 활발해졌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독신을 강조했고, 수도원적 생활을 영위했으며, 바리새인 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준행했고, 철저한 분리주의적 의식에서 비롯되어 다른 사회에서 들어온 음식은 먹지 않았다.
손 씻는 결례(Reinigung)는 부정으로부터의 깨끗함을 얻는 의식이었고, 세례는 회개 의 표시로서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이었다.
후기 유대교의 어떤 종파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실상이나 구현이 되지 못 했다. 따라서 다가오는 다윗 왕국의 회복과 성전 회복을 소망한 예언 장르의 메세지 곧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역사적인 성격이기 보다는 종말론적 성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성서는 지붕 없는 집과 같이 열려 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 으나 아직도 그 실현을 말하지 않고 끝난다. 그것은 불완전한 책이다. 그것은 아름다 운 그 자체 아름다운 건축이나 지붕 없는 건축이다. 구약성서의 소망은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6. 신 약 성 서
1) 신약성서 정경
신약이란 말은 고전11장25절과 고후 3장6절의“새 언약”(a New Covenant = ή χαι γή διαθήχη)에서 비롯된다. 신약이란 새 언약으로서 모세를 중심한 율법의 옛 언약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새 계약을 의미한다.
이 새 계약 사상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 (렘31:31-34), 겔37:23-28, 겔 11:19-20)에 의해 약속되었다. 이 새 언약의 약속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거행된 예수 의 성만찬에서 성취된다.“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11:25,눅22:20).
지붕 없는 집인 옛 계약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 안에서 성취된다.
구약성서가 지붕 없는 집이라면 신약은 집이 없는 지붕과 같다. 신약이 증거 하는 새 언약은 구약이 증거 하는 옛 언약에 근거하며, 이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구약 없는 신약이란 기둥 없는 지붕과 같아서 결코 지탱될 수 없다.
그러면 신약 정경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예수님 자신은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들 에게 복음전파를 명령하셨을 뿐 복음을 기록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이는 그의 메시 야 비밀과도 관련된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초대교회는 건립되었다. 12사도 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전수했다.
바울이나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은 초대 교회를 향한 서신을 남겼고 요한과 마태 그리고 제 2 세대들, 곧 이 사도들의 제자들, 마가, 누가 등이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예수 승천 이후 약 20년 동안은 口傳(oral tradition)으로 케리그마는 전해졌다. 주 후 50년경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야기된 주의 재림시기와 이에 대한 성도의 태 도에 대한 오해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된다.
바울은“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깨어 근신하고 피차 권면하라고 가르친다. 그 후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은 더욱 악화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가 밤중에 도적같이 오시는 것은 사실이 나 몇 가지 징조가 있을 것을 말한다.
신약성서 가운데 이처럼 제일 먼저 쓰여 진 바울의 서신들은 당시 초대교회의 실제적 필요성에 의해서 쓰여 졌다. 이보다 20년 후에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저서로서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교훈을 직접 받은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자 주님에 대한 생생한 교훈을 남겨 놓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때문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고 누가는 바울 선교의 동반자였다. 교회가 융성해지고 복음에 관한 여러 가지 문서들이 생기게 되자, 어느 문서가 사도 적 권위를 지닌 것 인가라는 문제가 대두 되었다.
주후 140년경 마르시온(Marcion) 의 경전채택은 교회에 정경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충격을 받아 구약의 신을 공의의 神으로 신약의 神을 善의 神으로 二元論的으로 대립시키고 구약의 신을 거부한다. 마르시온은 구약 성서를 부인하고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권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신약 정경화 시도의 효시였으나, 교회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 시켰고 그의 시도는 주후 144 년경 교회로부터 정치된다.
이리하여 정경 제정의 필요성이 가중되게 된다. 주후 17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 되는 무라토리 정경 목록은 가장 오래된 신약목록이다. 이 무라토리 정경목록은 당시 교회가 정경으로 취급했던 신약성서의 목록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이 목록은 베드로 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서를 정경에서 빠뜨리고 있다.
주후 189년 라틴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는 당시 문헌을 세 범주로 분리했다.
첫째 완전히 경전으로 인정하는 책으로서는 4복음서와 13권의 바울서신, 요한1서와 베드로전서이다.
둘째 경전의 성격이 의심나는 책으로서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2,3 서, 유다서와 계시록이다. 세 번째, 경전으로 전혀 인정될 수 없는 책은 바나바 서신, 헬마스의 목자서,12사도 교훈 집(Didache)솔로몬의 지혜서이다.
신약 정경이 결정의 결정적 시기는 367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의해 이루어진 다. 그는 부활절 기념 설교에서 신약전서 27권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외의 솔로몬 지혜서, 예수 시락, 에스더 단편, 유디트, 토비아스, 12사도 교훈 집과 헬마스의 목자서 등은 경전은 아니나 읽어서 도움이 되는 외경(the Apocrypha)이라고 하였다.
397년 카르타고회의(The Council of Carthago)의 제3차 회의 때 성 어거스틴(st. Augustin)이 참석한 회의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형태의 27권의 신약성서만이 정경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정경 결정의 원리는 세 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첫째, 使徒性(Apostoliciry)이다.
신약성서는 사도들과 또는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적 권위가 규범적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통역관 마가나 바울 의 의사 누가의 저술은 사도적인 권위로 인정함을 받았다.
둘째, 敎會의 증언(Witness of the Church)이다.
정경은 당시 교회에서 실제로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되고 통용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 중심성(Christ centricity)이다.
다른 시기, 여러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진 성서의 책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일관성 있는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을 말해주고 있다.
루터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계시록에 대해서 二次的 권위밖에 인정치 않았 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 증언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 빈은 신약성서 전체의 정경 성을 말하고 이 정경성에 대한 확신은 성령의 내적 증언 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신약성서의 정경성은 카토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가 결정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내적 권위성이 다만 교회 회의에 의해서 追認된 데 불과 한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의 정경성과 그 권위의 원천은 신적영감에 있다. 영 감이란 테오프뉴토스 곧 하나님이 불어내셨다.(God breathed) 라는 뜻을 지닌다. 모든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권위를 지닌다.(딤 후 3:16)
2) 신약성서의 두 가지 주제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야 예수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둘째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와 교회의 시대 (사도행전, 21서신, 요한계시록)이다.
(1) 시야 예수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
네 복음서가 선포하는“복된 소식”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고발해서 유대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는 바로 율법서와 예언서와 지 혜문서가 예언하고, 거대한 메시야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유형론적 특성은 다음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 한 복음이다. 마태는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다윗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를 구약성서의 예언과 연결시키고, 역사적 예수의 족보를 열거하여 율법과 예언이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성취하였다고 말하며 천국의 복음을 증거하 고 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위한 복음서이다. 마가는 나사렛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과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메시야 비밀에 관해서 말하며 권 능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위한 복음이다. 누가는 이방인이요 의사이다. 그는 나사렛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고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들에게 이해되도록 人子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교회를 위한 복음서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며 말씀의 성육신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메시야 사역의 영적인 의미와 진리를 말하고 있으 며 신령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네 복음서는 한결 같이 메시야 출현을 예비하고 증거 한 세례요한의 使役에 관해 서 증언하고 있다.(막 1:1-8,마 3장, 눅 3장, 요 1:18-3). 세례요한의 출현은 구 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3백 년 동안 예언자 부재 후에 나타난 하나 님 구원의 종말론적 사건이요, 구속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 가까이 옴을 알리는 것 이었다.
세례요한은 에센파 운동(the Essenic Movement)의 영적 훈련에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광야에서의 금욕생활, 메시야 기대에 의해서 고조되는 생생한 위기 의식, 성령에 대한 강한 기대 등을 이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ity)와 공통적 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셰례 요한은 이 율법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그의 사명을 메시야 예비와 증거로서 이해하고, 심판 날의 도래와 메시야 도래를 선포하면서, 극단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회개하는 표로서, 당시 개종자에게 행하였던 유대교의 관례를 따라 물세례를 준다.
요한은 바야흐로 오게 될 하나님 통치의 문턱에 서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서 두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가는 그의 서두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요한은 “태초에 밀씀이 계시니 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로써 시작히 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출현이 구약 예언자들의 대망의 실현이 요, 세례요한의 메시야 선포의 지평위에 있으며, 약속의 성취요, 때의 충족이요, 왕의 오심이요, 하나님 통치의 표징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요단강으로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회개의 물세례를 받는다. 이 세례를 통 해서 예수는 그 자신을 그의 백성과 동일시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의를 성취 하신다”(마3:15). 하나님은 예수의 자발적 겸손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막1:11)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간다. 광야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만나서 그의 신앙을 시험하는 곳 이다.
광야에서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면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친다. 예수가 세상 에 오신 목적은“이 세상의 통치자”의 권세를 분쇄하려는 데 있다.(요12:31, 요 14:30, 요일3:8).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복음전파의 사역을 하시기 이전에 먼저,“강한 자를 결 박”해야만 했다(막3:24). 이 강한 자의 결박이란 공중의 권세잡은 사탄세력의 정복이었다.
사탄은“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명하여...”라고 의혹의 독약을 예수에 게 먹도록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하나님께서는...”라는 말씀에 대한 신앙과 순종으로 대항하고, 사탄의 유혹에 승리한다. 이 둘째 아담인 예수의 하 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첫째 아담의 불순종, 원리를 극복하는 구속적인 대리행 위요, 모범행위이다.
예수의 선교 사역은 요한이 잡힌 후에서부터 시작된다(막1:14). 그의 使者 요한 의 사명은 이제 왕의 오심으로 끝나고, 이제부터 메시야의 활동이 시작된다. 세 례요한의 설교와 예수의 설교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점에 있어서 공통적이었으나, 하나님 나라의 時制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현실 사이의 차이요, 기대와 성취 사이의 차 이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은 선포했지만,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 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예수는 이사야 61장에 예언된 말씀, 곧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며, 갇힌 자를 해방하는 메시야적 사역에 관한 말씀을 읽으시고“오늘날 이 성 경이 너희 듣는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눅4:21)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이란 갈릴리에서 권능의 복음 선포와 복음사역을 행하는 예수의 메시야 적 사역이 진행되는 하나님 왕국의 현실적 실재를 말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이란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능력 있는 새 교훈이요, 권위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닌가! 권위로써 무서운 귀신을 명하신즉 순종 하는도다”(막1:27). 산상설교(마5-7장)는 예수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 의 헌장이다. 산상설교는 마리아 찬가의 메아리이다. 하나님은 힘쎈 자를 낮추시 고, 낮고 천한 자들을 들어 올리신다(눅1:50-52).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정직하고, 온유한 자들의 소유이다. 예수는 옛 율법 위 에 그의 새로운 율법을 올려놓는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는 들었거니 와...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마5:21,27,38,43).
모세의 권위 위에 자신의 권위를 올려놓는 예수는“해방과 사랑의 계명”을 선포 하신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새 술(복음)이 유대 율법주의의 낡은 부대(의식과 제도의 속박)을 깨뜨릴 것을 말씀하신다.
바리새적 율법주의는 단지“회칠한 무덤”만을 만들 수 있으나, 예수의 복음은 병들고, 잃어버린 죄인들 (이방인, 세리, 창녀)을 고치고, 구원한다. 예수 안에 현재하는 하나님 통치의 현실은 질병의 치유와 사탄의 쫓아냄에서 표징으로 나타 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메시야 되심을 침묵하신다. 그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야 아닌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신다. 예수 안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세속적인 눈에 는 은폐되어 있으며, 오로지 겸손과 경청이 수반되는 신앙의 눈에만 계시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막 8:31). 사탄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총 집결시키고, 양 세력이 공모해서, 예수 그 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한다.
사탄과 세상의 권력들이 승리한 것 같았으나,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보다 더 높으신 인류 대속의 섭리를 이루는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메시야적 의식 속에서 예수는 자신이 고난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인식과 제 삼일에 부활한다는 확신과 영광스런 재림의 확신을 균형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막8:31,38).
인류를 구속하시는 메시야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말 하는 바 같이 세상 권력의 영화 속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이 말하는 자 같이, 고난의 십자가 속에서 오시는 분이다(막9:1-9).
제자들은 예수 고난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막9:30-32). 예수 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작정 하신다”(눅:51). 그곳은 선지자가 죽게 되는 처소이다(눅13:31-33). 예수가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에 제자들은 오게 될 왕국에서 차지할 자리다툼만 하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
새로운 탄생과 고귀한 열매는 사람이 되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하나님과 이 웃을 위해 바칠 때에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설교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처형하 는 예루살렘의 운명을 포도원 비유(마21:33-43)와 혼인 잔치 비유(마22:1-10)로 써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포도원(예루살렘)이 훼파될 것과, 하나님 나라에 청 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버림받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미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은 예루살렘의 멸망(A.D.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함락)과 종말의 때에 있을 주의 재림과 최후 심판을 기술하 고 있다.
예수는 그의 십자가 죽음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은 대속적인 기능을 성 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 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왔노 라”(막10:45)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그의 죽음의 속죄 적 가치와 도래될 왕국에 대한 확신을 표명한다.“이것(필자註:떡)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이것(필자註:잔)을 가져다 너희끼리 나누라...내가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가 임 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7-18,비교 막
14:25)
예수의 만찬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념”(...을 기념하여) 및 “종말론적인”(...내가 올 때까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땀이 핏방울로 변하기 까지 그는 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아버지여, 만일 당신이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 하 나이다”(눅22:39-46)
예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고발당한다. 공관복음서의 의하면 성전에서 행 한 설교와 성전 자체에 관한 설교 때문에 예수는 사형선고를 받는다(막 12:12, 참고: 마 21:15, 45-46;마 26:3-5,60-61).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이 백성에게 미친 영향 때문에, 예수는 산헤드린의 십자 가처럼 결정을 받기에 이른다(요11:47-57). 예수는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운명하신다. 그의 최후의 외침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부르짖음이었다.
희랍의 이교신앙은 죽음을 숭고하게 생각했다. 이 이교신앙은“고요히 죽어가 는”토아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죽음은“무서움의 왕”(욥18:14) 이요,“죄의 삯”이요,“저주의 결과”이다(창3:19, 22, 창22:6, 3).
죽음은 하나님이 떠나 계시는 스올(지옥)의 문턱이요, 진정한 암흑과 어두움의 처소이다. 예수의 최후의 외침은 그가 인류 구속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당 하고, 내려가신 스올의 한 복판에서의 부르짖음이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29:50).예수께서 음부 의 어두움 속으로 내려가신 때에는 세상의 밤, 죄악의 밤, 죽음의 밤, 무덤의 냉 혹한 밤이었다. 죽음이야말로 현세에 대한 심판이요, 현세의 멸망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 때문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 졌다. 그의 죽음은 동시에 죄와 사망의 극복이다. 그러므로“무덤들이 열리고 자 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마27:51-54).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제자들은 절망과 좌절에 빠진다.
예수는 이제 과거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예수는 예언자였고 이스라엘 회복자 로 소망되었다(눅24:19, 21). 그러나 이제 모든 소망은 과거시제가 되고, 물거품 으로 화했다.
제자들은 일상 生業으로 돌아간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끝났고, 그의 십자가 죽음은 한 갖 순교적 義人의 죽음에 불과할 것이다. 바울은 증언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 운데 있었을 것이요⋯모든 사람 중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고전 15:14-19).
예수는 그의 예언대로 삼일 만에 부활했다. 부활절 아침 그는 무덤을 찾는 여인 막달라 리아에게 나타나셨다(요20:16), 그는 베드로(요21:6-7), 다락방의 열 한 제자(요20:19),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눅24:30-31), 디베랴 바다의 어부들, 500 명 이상의 형제들(고전15:6), 마지막으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행9:5).
그의 부활은 육신적 부활이었다. 그러므로 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의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거두신 승리를 들추어내는 사건이었 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가 이미 생명의 왕이셨음을 보여준다. 그는 부활로 말미 암아 죄와 사망을 정복하셨다.
디이뜨리히(Dietrich)는 다음과 같이 부활의 의미를 묘사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무덤에서만 돌을 굴러 낸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무덤으로 부 터 돌을 굴러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다가오는 모든 세대가 그들이 나왔던 흙으로 되돌아가는 거대한 무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창3:19).
예수그리스도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신다. 바울은 사 망이 부활의 승리 속에서 삼킨바 된 이 사실을 다음같이 기술한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부활 아침 이래로 사망에 대한 승리는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죄와 사망에 대한 결정적 전투는 이미 끝나고, 국부전만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 도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한다.
그의 승천은 그의 통치의 시작이라는 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동시에 교회시대를 시작케 한다. 그는 역사의 마지막 때에 권세와 영광 속에서 다시 오셔서, 십자가 와 부활에서 이미 결정적으로 이룬 승리를 완성하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왕적통치와 교회시대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통치시작과 교회의 탄생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고 21사도 서신들은 교회의 영적인 의미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 에 관하여 예언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통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의 승천은 세계역사의 마지 막 때가 되는 교회의 시대를 열어 놓는다. 세계사가 종말을 고하게 될 때 화해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활은 끝나고 “하나님은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될 것이다.”그리스도의 구속과 화해의 중보적 과업은 성육신과 재림이라는 그의 구속사역의 두 계기로써 설명되어 진다.
첫째, 성육신이란 그리스도가 겸허 속에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와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대속적인 事役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승천하시므로 그의 우주적 통치를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의 초림 속에서 이미 임재한 하나님 나라와 마지막으 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완성사이에 있는 과도기적 시기이다.
둘째, 재림이란 그리스도가 초림 때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事役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영광과 권세 속에서 이 세 상을 심판하시고 메시야 왕국, 곧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
그리스도가 승천 하시고“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은 승리자요 통치자로서의 메 시야의 대관식이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 품으로 되돌아가심은 구원된 모든 사람 들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영광으로 되돌아감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들리 우심은 모두 구원받은 자가 받을 영광의 첫 열매(고전15:20, 엡 4:8-10, 롬8:15-17, 갈4:6-7, 히2:10-13, 요17:22-23)이다.
누가복음의 승천기사(눅20:50-53)는 부활 후에 예수와 제자간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제자들은 확실히 부활한 예수를“주요, 하나 님”(요20:28)으로 고백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아직도 이 세계에는 숨겨져 있으나 그의 교회에는 알려 져 있고, 경배되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지만 신앙을 통 하여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 우편에 들리 우셨다.”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권능이 예수에게 위임되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담대히 나사렛 예수의 신성을 증언 한 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 라”(행2:36).“主”(Kyrios)란 명칭은 희랍에 있어서 神的인 존재들에게 부여된 이름이었고, 로마 황제에게 아첨하는 호칭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초대교회는“예수는 주 그리스도”(Christos Kyrios)라고 고백했다.“ 이 것은 예수의 신성(Divinty)을 고백하며, 또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행사한 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만유의 통치자인 그리스도의 몸이요“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엡1:23)이다.
만유의 통치자인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승천의 날에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 가셨다. 이제 지상의 예루살렘 성전은 상징에 불과하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지시해 준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속죄 제물이 되신 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전능하신 대제사장이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역사의 마지막에는 세상의 심판자 가 되신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통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이 때 그리스도는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게 된다(마25:31-45).
그리스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며, 감옥에 있는 자를 찾아보는 자는 곧 자기 에게 善을 행한 것이라고 선언하시고, 이들에게 행하지 아니한 자는 자기에게 행하지 않은 것과 동일시하신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와 그의 재림을 선포하는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교회의 실존은 곧 마지막 때의 실존이다. 초대교회는 자기 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유하는 참된 인격적 공동체를 이룩 했다. (행2:37-41,행2:44-45,행4:23-27).
초대교회는 옛 사람의 모습을 벗고 새로운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에 들어가는 표시인 세례(행 2:38,롬 6:3-7,갈 3:26-27)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떡 과 포도주의 나눔에 참여하는 성만찬을 통해서(고전11:23-29)영적 공동체를 이룩 했다.
이러한 인격적이고 영적인 공동체는 인간적인 사회주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 라, 성령의 연합시키는 役事에서 나온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강성해 갔 다. 회개한 자의 숫자는 놀라운 비율로 증가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능력과 이적을 행한다. 유대종교 지도 자들은“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라고 제자들을 심문한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나타난 제자들은 과거의 비겁했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하나의 특권(a previlige)으로 여긴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19-20,행5:29).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에 관해서 보고하고 있다. 그는 공궤를 맡 는 집사로 입명되었으며, 헬라계의 유대인이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성전과 율법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설교하고, 율법과 성령을 거슬린 이스 라엘의 죄상을 고발한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받고,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다. 죽는 순간 성령이 충만하여 스데반은“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 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행7:56).
처음에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성전 참예에 충실하였고, 율법을 그대로 준수함으로 써, 나사렜 예수의 복음을 다시 좁은 유대주의의 테두리 안에 제한시키고자하는 경향을 지녔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한 일로 베드로를 책망한다.
“왜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가서 그들과 같이 식사했는가?”(행11:2).
유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이 모든 율법 요구를 준행하려고 한다면, 그 들을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러한 유대주의의 한 분파가 되어버릴 위험 서를 지니고 있 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가 당하는 박해를 통해서 초대교회 신자들 을 이방으로 흩으며, 초대교회를 유대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이 박해에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테두리를 벗어나 안디옥에 새 공동체를 만든다(행11:12).하나님은 이방 선교를 위해서 스 데반 박해자, 다소 사람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시키고, 이방인 사도, 바울 이 되게 하고,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신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해외 선교사로 파송한다. 바 울의 선교 여행에 대한 기사는 사도행전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행13-28장). 사도 바울은 3차의 선교 여행을 하면서 소아시아 지방과 헬라지방을 두루 다녔다.
그는 선교 여행에 있어서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도 복음을 전파했다. 이방선교와 더불어 초대교회는 유대인과 더불어 많은 이방 인을 포함하는 혼합 공동체를 이룩하게 되었고,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된다.
유대인이 지켜온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부과되어야 하는 가? 유대 적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도 유대인의 모든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반대한다.
이 의견충돌은 초대교회의 영적 통일성을 위협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된다. 이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회의(행15장, 갈2장)이다.
이 회의에서는 ”우상숭배, 음행, 목매어 죽은 것과 피 마시는 것을 삼가 할 것 만을 결정한다(행15:20).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자마자 소아시아 교회에 서는 유대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역 사적 배경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강한 어조로 설교한다.
“우리나 또는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 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갈1:8).
유대 주의적 율법주의자에 대해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전개한 다. 이 바울의 사상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명료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 초대교회 안에서는 기독교를 인간 철학이나 지혜 및 사변으로 변모 시킬려는 헬라주의자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철학과 헛된 속임 수”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라고 경고한다.(골2:8-15).
바울은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복음의 능력을 수호한다.“유대인 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 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
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 나님의 지혜이다”(고전1:22-24).
신약서신에 나타난 사도들의 복음은 은혜에 의한 구원을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은혜의 복음을 강조한 사도이다. 바울은 인간의 義의 파멸과 더 불어 그리스도 義의 구속과 승리를 증언한다.
바울은 이러한 敎義를 그의 개인적 신앙 경험에서 증거 한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19-20).
바울은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와 더불어 부활한 자로서 규정한다.“이 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 이니라”
(골3:3)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代贖안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연합되었다고 말한 다. 이제 신약의 교회는 새 언약의 이스라엘이다. 옛 언약은 할례로써 행해졌고 한 民族과 한 姓에만 해당하나, 새 언약은 세례로써 행해지며, 종족과 姓의 구별 없이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여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이제 그리스 도 안에서 평등한 지위에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 도안에서 하나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 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7-29 참조. 고전12:13).
로마서 9장-11장은 선민 이스라엘의 잠정적 유기와 종국적 선택에 관해서 말해주 고 있다.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배척하고, 불순종함은 이방민족 구원의 도구가 되고, 이방인들의 일정수가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온 후 이스라엘의 회심의 때가 오게 된다. 바울은 증언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롬11:29). 신약의 교회는 그 속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에 거룩하고 보편적인 공동체이나, 동시에 아직도 이 세 속 속에 있는 죄인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각 지체가 상호 관계하는 유기적 통일체이다(고전12:12-27, 엡4:4,11-16, 골2:9). 교회는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향해 구속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입이요 손이요 발이다(롬12:5, 엡 7:23,골1:18).동시에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신자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아직도 죄와 더불어 투쟁하고, 획득된 승리를 성취해 야하는 과정 속에 있다. 신자들의 삶도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안에 있으며, 더 이상 죄와 사망과 정사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지 않다.
신자의 삶은 비록 죄와 권세와의 투쟁 속에 있으나, 이 투쟁은 이미 획득된 승리 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세속적 권력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질서유지를 위해 잠정적으로 위임된 권력일 뿐 이다.
국가 권력이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위배될 때는 교회는 공적으로 이에 대항해야 한다. 모든 가정은 교회의“세포”이며, 축소된 교회이다. 부모는“주 안에서”명 령하고, 자녀들은“주 안에서”순종해야 한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主 안”이란 단서는 양자보다 더 크 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말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종국에는 그리스도 관계 로 되돌아간다.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트는 새 시대, 하나님 나라의 여명 속에 있 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적 보수주의나 과격 적 혁명주의가 아닌, 신본 주의적 종말론을 선포한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이미 새롭게 창 조되었고, 이 새 창조(화해)는 그리스도의 재림 속에서 완성된다.
바울은 여기서 세속적 신률 사상(the secular theonomy)을 선포한다.“만물은 다 너희 것이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 이니라”(고3:21-23)
초대교회의 첫 세대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었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세 대에 재림할 것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완적 통치를 확신했고, 이 승리와 통치는 이제 모든 세계에 드러날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대교회의 기대대로 오지는 않았고, 지연되는 것으로 보여졌다. 베드로 후서는 이러한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교회의 동요를 막기 위해 서 쓰여 졌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 그리고 인간의 조급성을 비교하면서 재 림에 관해서 답하고 이다. 시련의 기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모든 사람들이 회 개하고 구원을 얻기 위함”이다(벧후3:3-10).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같지 않다.“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3:8). 성서는 이세계의 경박한 낙관적 진보사상에 제동을 걸고, 이 세계는 더욱 더 도덕적인 부패와 전락으로 나아갈 걸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는 그러므로“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는 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눅 18:8) 라고 말씀하신다. 사도와 예수는 끝까지 인내하는 자, 곧 남은 자들(remants)만 이 구원 얻을 것을 말하고 있다(마 24:10-13,벧후 3:15).
요한 계시록은 승리자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왕국의 완성과 새 하늘과 새 땅 에 관한 예언을 들려주고 있다. 요한은 묵시 속에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궁극적 승리를 환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의 심판자로 오셔서 세상의 도성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사탄을 천년동안 결박하고, 남은 자들, 곧 신신한 그의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동 안 통치하신다.
천년 후 사탄은 음부에서 다시 놓여나와서 주의 백성들을 대적하게 된다. 사탄과 그리스도 사이에 최후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승리하 고, 마귀와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유황불에 던지 움을 받는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로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죽은 자들이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사망과 음부 도 불 못에 던져지게 된다. 이 불 못은 둘째 사망이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는 실현된다. 이제 비로서 창세기 3장에서 잃어버린 실낙원의 비극은 극복되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이 기대하고 소망 하였고,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왕국이 비로서 실현되고, 완성된다.
교회가 기대했던“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 살렘 안에서 실현된다. 흑암은 이제 광명에 의해서 삼킴을 당한다. 이제 더 이상 밤이 없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21:23). 생명나무를 향한 문들이 성도들을 위해서 다시 열 린다(계22:1-1 참고, 창 3:22).
이제 실락원의 비극이 완전히 극복되고, 복 낙원의 평화와 영광이 나타난다. 하 나님 나라의 빛은“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다(벧전 1:19-20).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이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실재로서 구현된다. 이제 성도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의 구속하심과 영광을 찬 양 하면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향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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