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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후예’ 주장하는 전원철 변호사
전원철
1963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아이오와대 로스쿨 법학박사(JD),
뉴욕주립대 법학박사 후 과정 /
외무부 유엔국제인권사회과 유네스코 자문관, UNHCR 체첸전쟁 현장주재관 /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 출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칭기즈 칸의 조상은 추마나 콘, 곧 고주몽”
⊙ “몽골-튀르크계 통칭하는 ‘타타르’는 고구려 ‘대대로’에서 나온 말”
⊙ “터키인의 조상 오구즈 칸은 고구려의 후예”
⊙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 몽골·만주·튀르크·아랍어 등 29개국어 해독…, UNHCR 주재관으로 체첸에서 근무
〈고구려 고(高)씨 왕가의 방계(傍系)인 대(大)씨가 세운 발해는 732년 당(唐)-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일한, 즉 발해 무왕 대무예의 사촌형 대일하(대조영의 동생 야발의 아들)가 이끌던 발해(말갈/모굴/모골)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 결과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에 이르는 땅을 신라에 빼앗긴다. 일한은 전사하고 그의 아들 키얀(칸)과 그의 7촌 조카 네쿠즈(니쿠즈·임금)는 아르카나 쿤(에르게네 쿤·압록군)이라고 하는 오지(奧地)로 들어간다.
훗날 ‘황금항아리’라고 불리는 영웅이 일족(콩크라트족)을 이끌고 아르카나 쿤에서 탈출, 신라군을 물리치고 평주(平州)에 정착한다.
‘황금항아리’는 바로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금(金)나라를 개창한 완안아골타의 선조 함보의 아버지 금행(金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이라고 하는 ‘서해용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후일 율두즈 콘(바르카 타이상 노욘=발해 대상랑)이라는 손자를 두게 되는데, 그가 아버지는 신라왕, 어머니는 고구려계 여인인 궁예다.
궁예와 왕건은 같은 핏줄인 셈이다.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이 아르카나 쿤으로 들어가 발해의 지파(支派)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캐)와 합류한다.
발해가 멸망한 후 이들은 오늘날의 내몽고를 거쳐 러시아 땅 부랴티아로 떠난다. 발해가 멸망한 지 235년 후 이들의 후예들 가운데서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한다. 그가 바로 칭기즈 칸이다.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자, 궁예의 후예인 것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아들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다. 그중 한 갈래가 지금의 이란을 비롯한 중동 지역을 침공해 일한국을 건국한다.
일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들의 조상인 대일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일한국의 가잔 칸은 재상 라시드 웃딘에게 몽골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게 한다. 그 책이 《집사》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칭기즈 칸 일족의 역사는 《집사》 외에도 《몽골비사》, 티무르 왕조의 《사국사(四國史)》 등의 사서에 비밀 코드의 형태로 숨어 있다.
서양에서 몽골-튀르크계 종족을 일컫는 말인 ‘타타르’라는 말은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몽골-튀르크계 민족이 세운 왕조는 몽골제국, 일한국(이란), 테무르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맘루크 왕조(이집트),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20여 개에 달한다.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의 서재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튀르크어·몽골어 등으로 되어 있는 다양한 사서들이 있다.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1·2)》(비봉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낸 전원철(全原徹·53) 변호사의 주장이다.
기분 좋은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지는 않는다. 이런 소리 하면 “국뽕 맞았다”거나 “당신 ‘환빠’냐?”는 얘길 듣기 십상이다. ‘국뽕’이니 ‘환빠’니 하는 얘기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류의 주장을 하는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이력이 흥미롭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미(美) 아이오와대 법학박사(JD),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근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체첸전쟁 현장 주재관, 아주 ‘글로벌’한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다니
《고구려-발해인 칭기스칸》을 펴낸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이 작년 봄 “29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라고 한 것도 흥미를 돋웠다. ‘1980년대 이래 《국부론》 《도덕감정론》 《자본론》 등 묵직한 책들을 펴낸 출판계의 원로가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 원고를 청탁했다.
《월간조선》 작년 6월호에 ‘역사탐험/한 고대사 연구가의 도발적 문제제기 -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다’가 실렸다. 이때 그는 주몽예(朱蒙裔)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글자 그대로 ‘고주몽의 후예’라는 의미였다. ‘칭기즈 칸’과 ‘고구려-발해’가 만났기 때문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pub(pub.chosun.com)에 실린 이 기사의 조회 수는 6만8967회였다. 이후 조선pub에 나간 ‘1300년 동안 숨겨진 칭기즈 칸 가계의 비밀’이라는 기사의 조회 수는 15만9261회. 총 5번에 걸쳐 나간 글은 모두 합쳐 28만4943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조선pub의 기사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였다. 그의 글이 《월간조선》에 나간 후 어떤 지인(知人)이 물었다.
“그 주몽예라는 사람, 혹시 본명이 전원철 아니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몽골어·터키어 공부한다고 하던 인간이야. 한여름에도 외투 입고 다니던 괴짜….”
체첸 갈 때도 《몽골비사》 챙겨
지난 2월 전원철 변호사가 원고를 보내왔다. 이번에 보내온 글은 〈투르크족의 선조 ‘오구즈 칸’은 ‘고구려 칸’〉이라는 제목이었다. 터키인들이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여기고 있는 《집사》 속의 인물 오구즈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예라는 내용이었다.
문득 ‘전원철’이라는 인간에 대해 궁금해졌다.
“역사 얘기는 책을 보면 되는 거고, 당신 살아온 인생 얘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의 집 문을 열었을 때, 묘한 냄새가 확 풍겼다. 바나나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베란다에서는 뭔가 퍼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꿩이었다. “웬 꿩이냐?”고 묻자, “잡아먹을까 하다가 그냥 기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7평짜리 아파트 거실에는 요가 깔려 있고, 한쪽에는 아랍어·영어·몽골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작은 방에 있는 책장에도 다양한 외국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전 변호사가 말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어, 이 책들은 몽골어, 이건 튀르크어, 이건 우즈벡어…” 전 변호사는 책을 펼쳐들면서 설명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 이력을 보니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일했다.
“1993년 3월 유엔국제공무원시험 정무관(사무관)급 시험에 합격했다. 임용을 기다리는 동안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국제협력관, 외무부 인권사회과 유네스코담당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체첸 주재관도 지냈다.
“1996년 3월 UNHCR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짜고짜 ‘미스터 원철 전이냐’고 묻더니 ‘선불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 놓았으니, 내일 제네바로 오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불타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했더니, ‘체체냐(체첸)’라고 했다. 준비할 게 뭐냐고 물었더니 ‘롱부츠와 여권’이라고 했다. 《몽골비사》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제네바에서 계약서와 유언장을 쓰고 체첸 인근 다게스탄으로 갔다. 체첸에 도착해 보니, 온통 진흙탕이었다. 왜 롱부츠를 준비하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 무슨 일을 했나?
“전쟁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난민들에게 의약품과 식량, 천막, 구호물자 등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다.”
“체첸어 익힌 덕에 위기 모면”
체첸어를 익힌 덕분에 현지인들과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 유엔기구에서 나갔다고 해도, 러시아군이나 체첸반군의 위협에서 자유로웠을 것 같지는 않다.
“밤 12시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조수인 샤미르와 함께 무전기와 보드카,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챙겨서 차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갔다. 현장 사무소로 포탄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 들으면서 새벽 4시경까지 있다 보면 상황이 끝나고, 그러고 나면 아침부터 난민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나?
“해발 5000미터가 넘는 카프카스 산악 지역 마을들에 구호물자를 배급하러 갈 때였다. 유엔 표식이 달린 차량을 타고 가는 데도, ‘전투행위자들’이 유엔 차량이라는 걸 알면서도 총격을 가해왔다. 헬기나 초소에서 총격을 가한 일도 있었다. 적십자사 간호원 5명이 사살된 적도 있다. UNHCR 직원도 나를 제외하고는 한 번씩은 납치당하는 경험을 했다.”
전 변호사는 “나는 체첸어를 익힌 덕에 그런 위험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체첸어로 현지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되자, 현지인들이 나를 자기들 편이라고 여기게 됐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주민들이 먼저 알려줬다.”
— 체첸 사람들은 어떠했나?
“친절했다. 손님을 환대하는 풍속이 있다. 한번은 해발 3000미터쯤 되는 산길에서 차가 고장 나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됐다. 갑자기 군복을 입은 체첸전사(아팔첸시·향토수호자라는 뜻)들이 나타났다. 누구냐고 묻기에 ‘유엔이다’라고 했더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총을 내렸다. 동료에게 내 차를 고쳐주라고 하더니, 양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중에서 어떤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라고 하기에 ‘고동색에 검은 점이 박힌 양’이라고 했더니 그 양을 잡아주었다. 동네 남자 10여 명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 체첸 그 지역도 칭기즈 칸의 서방 원정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아무르 티무르의 원정 루트다. 체첸인은 유럽인도, 동양인도 아닌 모습을 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먼 옛날에 동쪽에서 온 눈이 찢어진 남자와 아랍 여인이 카프카스산에서 만나 결혼, 체첸인들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이 조선의 속국이었다”
체첸에서 근무를 마친 전원철 변호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이오와대학 로스쿨에서 인도법(人道法)·전쟁범죄법 등 국제법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대로 나갔으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길이 달라졌다. 왜일까? “아이오와대학에는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 우리 조공국(朝貢國)에서 왔구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왜 너희 속국(屬國)이냐?’고 하면 ‘당(唐)나라 이래 원(元)·명(明)·청(淸) 등을 거치면서 내내 조공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너희가 우리의 속국이었다’고 했다.”
— 무슨 논리인가?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6대조 멍케티무르(孟可帖木兒)는 이성계의 지방장관이었다. 너희는 우리 함경도 사람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자금성을 지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는 고려 여인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인 후예의 정권이었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나 명나라를 조선의 속국이라고 하는 건, 역사를 과도하게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리를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다. 중국인들은 ‘조선은 기자·위만 등 중국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조선은 중국의 고지(故地)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언젠가는 지금의 한국 땅도 되찾아야 할 중국의 영역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 주장은 ‘역(逆)동북공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부 한국인의 선조가 중국에 건너가서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걸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나?
“일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 황족에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피가 섞였다는 건, 일본인들도 인정하고 있지 않나?”
— 설사 그렇다고 해도 한국, 중국, 일본은 이미 수백,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나? 몽골인들이 이란에 가서 일한국을,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를, 인도에서 무갈제국을 세웠다고 해서, 그 역사가 몽골의 역사가 되나?
“국가, 땅을 중심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피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얘기가 다르다. 맘루크 왕조는 땅을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역사이지만, 몽골 사람이 이집트로 들어가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만든 몽골 종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화 속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여”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국사》. 티무르제국의 황제 미르조 올룩벡이 서술한 사서이다. — 칭기즈 칸이 고구려-발해인의 후예라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는 얘기인가?
“《몽골비사》를 수없이 읽으면서 나는 칭기즈 칸의 선조인 부르테 치노(푸른 이리·蒼狼)와 코아이 마랄(흰 암사슴·慘白色鹿)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들 신화(神話)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것이 실존인물이며, 고구려-말갈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티무르 왕조의 역사책인 《사국사》에서 칭기즈 칸의 10대모(代母)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코와(알란 고와)의 아버지 이름이 추마나 콘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추마나 콘은 곧 주몽 칸(朱夢 可汗)이다. 추마나 콘의 형은 이름이 위마나 콘, 즉 위만 칸(衛滿 可汗)이다. 주몽과 위만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누가 있겠나?”
— 그것만으로 고주몽이 칭기즈 칸의 선조라는 건 약하지 않나?
“《몽골비사》에 보면, 알란 코와의 아버지가 ‘코리투마드’ 부족의 부족장 코리라르다이 메르겐이라고 나온다. ‘코리’는 말갈어로 《요사(遼史)》 속의 ‘고리(稿離)’ 즉 ‘고려(高麗)’라는 말이고, ‘투마드’는 ‘투만-씨’, 곧 ‘도모(都牟)-씨’ ‘동명(東明)-씨’ ‘주몽-씨’라는 말과 같다. 결국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과 추마나 콘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사국사》에 의하면, 알란 코와는 4촌 오빠인 도분(디븐) 바얀(도본 메르겐·위마나 콘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분 바얀은 결혼 3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알란 코와는 빛 속의 신비의 인물을 통해 ‘보잔자르 콘(《몽골비사》의 보돈자르)’을 낳는데, 이가 곧 칭기즈 칸의 9대조다.”
— 신화를 역사로 보는 건 무리 아닌가?
“고대 우리 민족은 역사를 비밀 코드로 썼다. 그 코드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를 풀면 역사가 보인다.”
“타타르족은 대대로 연개소문의 후예”
전원철 변호사는 칭기즈 칸 이전에 몽골(모굴)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오늘날 서양에서 몽골이나 튀르크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인 타타르(Tatar)족은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타타르 종족의 시조 타타르 칸과 몽골 종족의 시조 모골 칸은 알무잔나 칸의 두 쌍둥이 아들이다. 《사국사》와 《투르크의 계보》에 기록된 ‘타타르 칸’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淵子遊)이다. 타타르는 곧 고구려의 관직인 대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히바 칸국(1511~192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던 몽골계 나라)의 칸이자 역사학자인 아불가지 칸은 ‘타타르라는 말은 원래 인명으로 쓰였으나, 나중에는 종족 칭호의 형태를 띠게 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대대로 연개소문 가문’을 지칭하다가 나중에 이 가문이 이끄는 백성과 속민을 일컫는 말이 되어 타타르로 변화한 것이다.”
— 그것만으로 타타르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 ‘달단(韃靼·타타르)은 말갈의 남은 씨앗(遺種)이다’라고 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말갈은 곧 고구려이다. 이 책에 의하면 〈원래 해(奚), 거란의 동북에 있었다. 나중에 거란에 공격당해 부족이 나뉘어 흩어졌다. 어떤 것은 거란에 속하고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는데, 갈린 부락이 음산에 흩어져 살면서 스스로 부르기를 달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끝 무렵에 그 이름을 가지고 중국에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 역사책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교묘하게 꿰맞추는 건 아닌가? 다른 증거는 없나?
“옛 돌궐(튀르크) 지역인 카자흐스탄 서쪽 러시아 땅에는 하카스공화국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타다르(Tadar)족, 혹은 코오라이, 콩구레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리 민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수레, 순대 만들기, 보쌈과 같은 약탈혼 풍속 등도 흡사하다. 귀틀집과 같은 집을 입(Yip)이라고 한다. 아마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돌궐족의 땅에 들어간 고구려의 후예일 것이다. ‘코오라이’는 ‘고려’, ‘콩구레이’는 ‘큰 고려’라는 의미다.”
전원철 변호사는 “터키인들도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한다.
“칭기즈 칸의 조상인 모골 칸에게는 카라(高麗) 칸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튀르크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 오구즈 칸이다. 오구즈 튀르크인들은 서방의 튀르크 지역으로 간 고구려 백성의 무리이다. 그들 중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코로 호자라는 사람인데, ‘코로’란 ‘고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6·25 때 터키군이 참전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터키는 이렇게 혈연적으로 고구려와 형제국이다.”
“오롱키(오랑캐)어도 공부”
전원철 변호사가 칭기즈 칸의 계보를 밝히는 데 활용한 역사서들.
왼쪽부터 《몽골비사》 《승리의 서》 《집사》 《행운의 정원》. 전원철 변호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몽골비사》나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요사》 《금사(金史)》처럼 이름만 들어본 중국 역사책(전원철 변호사는 ‘동방사서’라고 함)에서부터 일한국의 《집사》, 티무르제국의 《사국사》 《승리의 서(書)》(티무르에 대한 기록), 우즈베키스탄 콩그라트 왕조에서 나온 튀르크어 역사서 《행운의 정원》 등(전원철 변호사는 ‘서방사서’라고 함)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역사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그의 책장에는 아랍어·페르시아어·몽골어·튀르크어·러시아어·스페인어 등으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설사 그의 주장이 ‘말장난’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된 책들을 넘나들면서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 박기봉 비봉출판사 사장이 ‘언어의 천재’라고 하던데, 몇 개 국어나 하나?
“영어는 기본이고, 고교 때 2외국어로 일본어를 했다. 언젠가는 소련과 관계 개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1 때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독어는 대학교 다닐 때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기 위해 공부했고, 카뮈와 콩트를 읽기 위해 불어를, 《군주론》을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세네카의 《성서》를 읽으려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스페인어도 했고… 그러다가 ‘서구(西歐)문명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에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알아야겠다’고 반성하게 되면서 동양어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전 변호사가 꼽은 언어들은 이랬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몽골어, 중세 튀르크어, 터키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오랑캐어), 어웡키어, 중국어, 티베트어, 만주어, 다와르어, 거란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모두 29개다.
— 만주어, 몽골어 같은 것은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우리 역사로 관심을 돌리면서 전씨 집안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 전씨의 조상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고구려를 떠날 때 데리고 온 10명의 신하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만주어, 몽골어는 기본으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중국어도 배웠다.”
— 몽골어 같은 건 어디서 배웠나?
“대학교 도서관에서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대출해 간 적이 없는 독일어로 된 몽골어 문법서 한 권을 발견했다. 우리말과 몽골어 문법이 매우 비슷해서 기본 문법 공부는 2~3주 내에 마쳤다. 마침 우연히 알게 된 몽골인 친구가 몽골에 간다기에 《몽골비사》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독본 삼아서 몽골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만주어 같은 건 지금도 쓰는 사람이 있나?
“책으로 공부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해 버렸다. 나도 만주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는 게 아쉽다. 만주어의 먼 방언인 시보(錫伯)어를 쓰는 사람이 한 10만명 정도 된다.”
— 한 가지 언어를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됐나?
“대학 시절에는 한 학기 이상 안 걸렸다.”
“우리 역사 바로 알려면 중국사서(史書) 외에 다른 사서도 보아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찔러보았다.
— 아무래도 말장난 같다.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계보를 기반으로 그것을 ‘동방사서’의 기록들과 철저히 대조했다. ‘서방사서’에 나오는 사람들이 ‘동방사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 계보의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방 이름의 뜻과 그 위치를 역사언어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밝혔다. 문헌사, 역사언어학, 역사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자신만만했다.
— 역사학자들이 그런 주장들을 받아들이겠나?
“주류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내 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다. 중국 사료(史料)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튀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으로 되어 있는 사서들도 보아야 한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물론, 중국, 몽골, 터키 등 유라시아의 역사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게 된다. 지나친 국수주의 아닌가?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오늘날 터키공화국 영토 내에서 있었던 역사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국 역사서에 유연(柔然), 돌궐부터 오구즈 튀르크,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등 아시아 대륙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활동했던 튀르크계 종족들의 역사를 모두 자기들의 역사로 기술(記述)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의 역사마저 말갈족의 역사라면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고 있다. 이제는 한반도 밖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닌 걸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나라 밖에서 행해진 우리 민족의 행위는 우리 역사가 아닌가? 지금의 나라나 영토가 아니라 민족의 활동 범위를 가지고 역사를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