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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평판권력 작동으로 인생파탄을 야기하는 어둠의 세계
- 2010년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희대의 성폭력 사건과 그 결과-
이승연(함부르크촛불행동 대표, 독일심리상담사)
이번 주제의 토론에 초대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건이 2010년 독일의 제1공영방송에서 기상예보를 맡았던 카헬만이라는 스위스 출신의 방송인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그는 아나운서가 아니라 기상전문가로서, 저녁의 황금뉴스시간에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조곤조곤 기상변화를 분석, 설명해주면서 ‘사윗감’의 표상으로 사랑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일기예보 방송은 그를 통해 단순한 정보가 아닌, 거의 인터테인먼트 수준으로 올라가 있었지요. 그러던 그가 동거인이었던 클라우디아라는 여인을 성폭행했다고 고소당해서 이후 그는 완전히 화면에서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여친을 성폭행한 몹쓸놈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2011년의 재판에서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언론과 검찰발 발언들은 물론 판사들에게서조차 그의 무죄는 끝없이 의심되었습니다. 그는 진실과 정의를 찾겠다며 항소했고, 판사들은 2010년 클라우디아가 성폭행으로 입었다는 부상을 조사하는 자체 법의학 보고서를 입수하고, 다시 한 번 쌍방의 증언들을 들은 후, 피해자가 “고의적인 거짓으로 카헬만을 강간혐의로 고소”하고, “스스로 자해하여 부상을 입혔다”며, 무죄를 선고합니다. 뒤늦게 ‘진짜’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2011년 형사 재판에 비해 2016년 법정에 취재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의 사생활과 공인으로서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늘 그렇듯 언론이 관심을 갖지도 않고 취재도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결과는 사람들의 기억을 바꾸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도 않고‚ ‚사위로 삼고 싶었던 스마트한‘ 한 남자는 희미하더라도 ‚성폭력범‘으로 기억되고 있지요.
2016년의 재판에서 패소한 카헬만의 전 여친은 무죄선고에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재판관) 남성 중심의 가해자 국가인 독일의 사회적 권력 구조가 위태로워지지 않도록 우리 여성을 침묵시키려 한다.” 지금도 그녀는 언론의 문의를 받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2011년 카헬만을 기소했던 검찰은 2016년에도 조작된 증거물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알리스 슈바르쩌라는 독일의 유명한 페미니스트는 클라우디아에게 유력한 변호사를 추천하는 등, 그녀가 유명인의 성폭력 피해자라는 것을 성공시키기에 적극적이면서도, 마치 정의롭고 진실규명만 이 중요하다는 듯 발언을 하지요.
카헬만은, “실재할 수 있는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무고한 남성을 심판해야 합니까? 그건 이해할 수 없는 냉소주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 사건을 여기에 드는 것은, 한국과 너무나 비슷하게 검찰, 사법부, 언론 그리고 대중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제자께서 예로 드신 안희정 전 지사와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일어난 일과 그 양상이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독일은 마치 한국보다 훨씬 ‘문명된’ 국가이고, 개인의 자유가 잘 보장되어 있고, 성의 평등도 잘 이루어져 있는 ‘모범국가’라는 많은 한국인들의 기이한 편견을 깨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양성의 각기 다름에 대한 이해와 포용, 인정은 동양과 이슬람문화권에서 서양/기독교 문화권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왜 더 억압받았을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여성해방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을까요? 남자처럼 되자는 것이 페미니즘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이 개방되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서양에서 성희롱, 성폭력이 왜 멈추지 않습니까?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아동 성폭력, 성차별 (동성, Queer 포함)적 폭력, 권력형 성희롱등등이 인권이 잘 보장됐다는 독일에서도 끝없이 행해지는 이유는 뭣일까요? ‘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지요? 우리는 서양에서 물밀듯 들어온 그 ‘성’ ‘섹시함’에서 이제 좀 해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토론문> 대한민국의 반인권적 젠더문화
권윤지 작가
1. 성희롱 개념의 오남용 현상과 그 원인, 결과, 해결방안
성희롱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본 발제가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일상 생활 속에서나 언론 보도 등에서나 빈번하게 쓰이지만, 그것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희롱이라는 용어의 오남용은 그 개념의 이해가 잘못된 데에서 출발하는데, 이 ‘오해’는 두 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희롱의 성립 요건에 대해 틀리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둘째로 성희롱이 마치 ‘강간죄’ 나 ‘강제추행죄’처럼, 형법으로 규정된 죄목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또한 대다수입니다.
본 발제문에 따르면, 성희롱의 가장 핵심적인 성립요건은 업무상의 상하관계와,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위에 저항하거나 성적 요구에 불응했을 때에 불이익을 받는 상황임이 자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발제자께서 제시한 올바른 판례에 따르면, 단지 피해를 입었음을 주장하는 자의 주관적 수치심이 아니라, 누가 들어도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다고 생각할 만한 언행만을 성희롱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즉 성희롱이 성립하려면, 그 행위는 업무적 상하관계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행한, 만인에게 지탄받을 만한, 저항하거나 불응할 시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줄 것을 직간접적으로 협박하는 방식으로 대가성이 부여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언행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심각하게 오남용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특정 남성의 언사에 대해, 또는 특정 남성의 특정 행동에 불쾌감을 느꼈을 때, 별다른 자기 성찰 없이 그것을 성희롱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자는 젊은 여성으로서, 같은 세대 여성들의 일상적 대화 속에서, 특히 특정 남성에 대한 뒷담화나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 담화에서 그들이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빈번하게 들었습니다. 미투 고발의 형식을 빌어 별다른 법적 조치 없이도 한 남성을 매장시킬 수 있으며, 어떤 형태의 성 관련 고발(조직 내 성 고충 위원회 등에 고발하거나, 특정 커뮤니티에 고발하거나, 여성 단체에 고발하는 경우 등 경찰에 고발하여 고소를 하지 않고도 그러한 고소 이상으로 구속력.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남성에 대한 제재수단이 많으며, 가장 가까운 죄목을 찾아 고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여성들의 주관적 감정에 따라 어떤 남성이든 성희롱‘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행적 어법과 남성에 대한 인식은 위험한 문제입니다.
상술한, 성희롱 개념의 그릇된 일반명사화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연구원 등에서 전국의 초.중.고교, 공공기관, 공기업, 대기업, 심지어는 문화예술창작 지원사업 선정 당사자들 등 국가 예산을 사용하는 주체들에게까지 실시되는 성교육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교육의 일부로서의 성교육은 성폭력에 세 가지 하위 유형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입니다. 성교육 특성상 미성년자들에게 형사법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지 않고, 교육 대상자들이 피해자의 입장에 놓일 경우를 대비하는 것을 중심으로 성폭력에 대해 가르치므로 ‘성희롱이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명시적으로 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성폭력은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대상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성희롱을 개념화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성희롱이 형사 범죄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교육의 맥락이 학령기 아동. 청소년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됨에 따라 ‘성희롱은 성범죄의 한 종류이며,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위 중 신체 접촉을 수반하지 않는 행위 전체를 성희롱이라고 칭할 수 있고, 여성에게 말로서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모든 이는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일반적 인식이 형성됩니다.
한국의 법 체계에서, 성희롱 규정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법률은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법, 여성발전기본법, 양성평등기본법입니다. 이들 법은 성폭력범죄 등의 처벌을 위한 특례법 등과는 전혀 다른, 형법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법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을 암묵적으로 성범죄-즉 성폭력범죄 등의 처벌을 위한 특례법과 기존 형법상 성범죄로 규정되는 행위들- 의 일부라고 믿을 여지가 다분하게끔 교육하고, 특정 언사를 성희롱으로 규정하는 기준이 여성의 주관적인 느낌을 기준으로 한 성적 수치심의 유무라고 믿게 하며, 성희롱을 한 사람은 형사적 의미의 성범죄자와 같은 사회적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반적 통념을 고착화하는 (즉 성희롱 행위자=성범죄자라는 등식이 이론의 여지 없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성교육 관습이 갈수록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여성주의자들의 문제제기나,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보도준칙, 젠더 데스크 등의 기준에 맞아야 기사를 입력할 수 있는 기자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신세대 여성 기자들과, 진보 매체를 표방하는 매체들의 거의 모든 젊은 기자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2016-17년 이후 대중화된 페미니즘 담론에 의거 성폭력을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닌 남녀간의 구조적 불평등의 산물로 보고, 성인지 감수성, 피해자 중심주의 등에 의해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의 주관성이 범죄 성립, 또는 여러 형태의 고발 성립의 사실상 절대적인 기준이 됨으로써, 성폭력 개념이 무분별하게 확장되며, 여성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남성이든 범죄자(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낙인을 찍음으로서 사회적 지위 상 실제 형사법에 저촉된 범죄자나 다름 없는 사람)로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주체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성을 발현시키는 것으로 오인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여, 성희롱 개념의 오남용은 단지 특정 용어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자들의 권위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며, 여성주의의 광풍화 그리고 몇 년간의 페미니즘 광풍 이후의 상식화 수순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비극적인 무고 사건들의 단초가 됩니다.
이외에도 성희롱 개념의 비이성적인 확장은 그릇된 남성혐오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며, 남성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극단적 페미니즘으로 여성들을 이끄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여성들 간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감정 교류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러한 ‘뒷담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교감’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유발함으로서 일반 여성을 레디컬 페미니스트로 만들고, 자신도 모르게 남성성 자체를 혐오하게 되도록 하여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의 확장 가능성 역시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상술한 문제를 공론화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재의 페미니즘 풍조가 대단히 기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반기를 들게 되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지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희롱 개념의 오남용 현상, 이와 직결된 남성혐오 정서와 왜곡된 페미니즘에의 도취, 양심의 가책 없이 특정 남성을 성범죄자로 몰아 매장하며(부족한 증거와 극대화된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가 가능한 데에 대하여 ‘성인지 감수성’과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고, 일단 여성이 고발 또는 고소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고소. 고발 대상이 된 남성을 성범죄자로 낙인 찍고, 사회인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패널티를 주는 관행 역시 페미니즘 광풍으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현상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상식적인 다수의 사람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그 문제의식이 결코 언론 지면이나 정치권 등에서 공론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범죄 무고 피해자들의 무고함이 소명되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쓴 가짜 성범죄 가해자들이 양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커다란 반동이 없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젠더 문화는 반인권적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젠더 문화는 되려 정말 억울한 성범죄 피해자 여성들을 사회가 불신하게 되어 그들을 더욱 인권 사각지대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 시민인권위원회와 저, 토론자는 어떤 사람에게든,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가난한 이에게든 부자에게든, 배운 사람에게든 못 배운 사람에게든 똑같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룬 문제는, 한 번이라도 ‘양지’에서 공론화될 수 있다면, 쉽게 시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곡된 페미니즘의 권력은 강해 보이더라도 모래 위의 성인 바, 소위 ‘엘리트’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잃을 각오로 진정한 의미의 인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젠더 이슈의 재정립에 투신한다면 머잖아 무너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법조계와 정치권, 언론의 비겁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바입니다.
2.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하는 책임으로서의 ‘저항’행위에 대한 첨언
두 번째 꼭지는 간단하고 짧습니다. 성폭력 고발에 있어서 피해를 주장하는 이의 ‘저항’여부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발제자께서 ‘즉각적인 저항’이 성폭력을 고발하는 자의 책임이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이해했습니다. 특히, 발제자께서는 살해 협박 등이 존재하거나 밀폐된 장소에 있는 등, 저항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을 제외한 일상적 상황에서, 즉각적이고 명확한 저항 없이 상황을 종결한 후 사후에 ‘생각해보니 성희롱. 성추행을 당한 것 같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고소하는 것은 무책임하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저는 이러한 발제자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기습추행의 경우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 속의 경험을 하나 예로 들고자 합니다. 제가 대형 입시학원에서 일할 당시, 어느 한 학생이 여러 학생과 강사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서 모든 사람이 함께 갑작스럽게 사진을 찍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스무 명 가량이 촘촘하게 서서 친근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는데, 제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성 강사가 제게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문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해서 소위 ‘얼어붙었’으며, 채증은 당연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고소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 때 성추행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의 특성상, 밀폐된 장소 또는 증거 채취가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폭력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모든 성폭력을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가벼운 성폭력마저도 원천적으로 ‘척결’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만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피해 당사자 스스로가 아무리 정직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요건이 되지 않는다면 피해자가 될 수 없음이 당연하다는 상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잡기 바랍니다. 물증이나, 대단히 설득력있는 정황증거가 없다면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태여 형사재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입은 피해 때문에 생긴 심리적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폭력 상담기관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성폭력 피해기관이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 성폭력 피해여성에게 극단적 페미니즘을 주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취재하면서 매우 놀랐던 부분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예민한 개인정보가 걸려 있고, 발제문의 주제와도 거리가 있어 토론 시간이 남는다면 구두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토론문> 증거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최봉태 (변호사, 대한변협 전 인권위원)
1. 본 세미나는 2024.10.24. 선고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고합921 강제추행치상과 관련된 1심 판결을 계기로 양성평등인권침해에 관한 법리 문제를 성희롱이나 성인지감수성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취지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본 토론자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지도 않지만, 서울에서 이와 같은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데 토론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지방에 있는 변호사에게 토론자 섭외가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토론자 섭외 과정에서 보듯 남성 혐오를 기반하는 극단적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일정부분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느낌을 가지며 본 토론회에 참석하는 바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 이런 현상이 나오게 된 것에 남성의 한사람으로서 반성을 하면서 토론에 임한다.
2. 발제문에 우리 법제상 성희롱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서 큰 공부가 되었다. 아울러 성인지 감수성과 판사의 주관적 양심에 의한 판단의 문제점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점에서 큰 공부가 되었다. 그런데 토론자는 발제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다소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성인지 감수성 부분과 관련하여 보면 우리 판례가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것은 우리 형사소송법상 자유심증주의와 관련된 부분으로 토론자는 이해를 하고 있다.
즉 재판관이 성관련 사건을 심리를 할 때 가부장적 남성우월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의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를 경계하기 위해 도입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우리 형사소송법의 근본원칙인 증거주의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우선되거나 양립 불가한 개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울러 양심에 따른 판단 역시 우리 헌법에 규정된 것으로 성관련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 양심이 재판관의 자의적인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3.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고합921호 사건은 현재 1심이 나왔고 항소심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 기록을 모두 보지 못한 상황에서 1심 판결의 당부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판결문만을 보았을 때 일반 성추행사건으로 볼 때 이례적으로 추행사실의 강도가 낮다는 것과 아울러 강제추행치상죄중 치상부분이 무죄가 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치상이 무죄라면 피해자의 진술에 상당부분 과장이나 허위가 있거나 혹은 이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다면 그 외 피해자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
보통 성관련 범죄의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고인만이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 범죄의 특성상 피해자의 진술이외에는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는 부득이 피해자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될 수 밖에 없지만 피해자 진술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기 어려운 사정을 들어 무죄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피고인의 주장에 의하면, 가슴을 누른 행위와 허리와 등을 쓰다듬은 행위 자체를 부인하고 있고 동영상에 의해서도 이는 입증이 되지 않고 있다. 동영상에 의하면 가슴을 누른 행위로 오인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과자 부스러기 떼어준 행위에 걸리는 시간이 0.7-0.8초 걸렸다고 하는데 가사 과자 부스러기를 떼어주는 과정에서 가슴이 일부 눌러졌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추행으로 사실 인정되는 것은 경험칙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허리와 등을 쓰다듬은 행위는 대화를 한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장 동영상에 의하면 3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짧은 기간의 행위들에 대해 성추행으로 의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4. 본건은 비록 야간이지만 피고인과 피해자 이외에 제3자가 동석한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럴 경우 더욱 증거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할 사건으로 생각이 된다. 강제추행죄 역시 이 형사소송법의 근본원칙에 예외가 되어서는 아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