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화면
김형진
요즘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소방헬기가, 나무를 휘감으며 하늘로 치솟는 산불을 향해 물 폭탄을 쏟아 붓거나, 소방 호스가 화염에 휩싸인 공장이나 가정집에 물대포를 쏘아대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가 많다. 커다란 붉은 혀가 산이나 집을 날름날름 삼키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으면 내 안에 잠들었던 하나의 화면이 또렷이 떠오른다.
동네 옆 야산 기슭에 있는 줄포국민학교 신리 분교分校 3힉년 때였다. 종례를 마치고 막 교실에서 나왔는데 동네 북동쪽 고개 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무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어서 울려퍼지는 징소리. 이제 막 피어난 화단의 봄꽃들에 눈길을 줄 겨를도 없이 동네를 향해 달렸다. 허리에 동여맨 책보 속 필갑에서 연필들이 숨가쁘게 달그락거렸지만 그냥 달렸다.
아래뜸 당산거리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많은 어른들이 손마다 질통과 양동이를 들고 모여 있었다. 앞에 선 구장이 무어라곤가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고개 너머 '난산리'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당산마당에 닿았을 때는 노인들 몇 분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산거리를 지나 집으로 달렸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장에 괭이랑 낫을 사러간 영덕이 형이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영덕이 형은 올해 열일곱 살 된 우리 집 농사일을 도와주는 일꾼이었지난 내게는 형처럼 든든했고 형도 나를 친동생처럼 대하는 사이었다. 내가 원하면 팽이도 깎아주고, 제기도 만들어주고, 내가 좋아하는 연날리기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방패연을 붙이는 법에서 연실에 부레를 먹이는 법, 연을 날려 재주를 부리는 법, 연싸움을 위해 사개를 먹이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올 정월 대보름에 '난산리'로 가는 고개에서 치열했던 연싸움에서 영덕이 형의 활약은 나뿐 아니라 내 또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언제나 싸움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고 패자의 감정이 달아오르면 싸움이 이는 법. 마지막으로 동네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대장 연끼리 연실을 걸어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는 신경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난산리' 연이 두레질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 싸움꾼들의 환성도 잠시, '팍' 하는 소리에 이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연싸움에서 진 '난산리' 대장이 얼레로 영덕이 형의 이마를 치고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영덕이 형 이마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삽짝을 밀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형은 부엌에서 양동이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나는 얼른 허리에 책보를 끌러 마루에 동댕이치고 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배고픔은 잊은 채였다.
고갯마루에 이르자 검은 연기가 무섭게 서북쪽을 향해 휘몰아가는 게 가까이 보였다. 고갯마루까지 올 때에는 뒤떨어진 나 때문에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던 형이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며 "먼저 가께." 한 마디를 남기고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동네 앞에 이르렀을 때 남정네들이 텃논 방죽에서 불난 집까지 한 줄로 늘어서 쉼 없이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동네 앞 공동우물에서도 아주머니들의 두레박질이 섞여 있었다. 동네 앞 공동우물에서도 아주머니들의 두레박질이 숨가빴다. 처음에 불이 난 집은 이미 초가지붕이 까맣고 그 옆집에 불이 옮겨 붙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제법 거센 불길은 그 붉은 혀를 사납게 날름거렸다. 그러나 장정들이 연이어 쏟아 붓는 물에 막혀 불길은 더 번져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람들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물 담긴 질통이며 양동이에 떨어져 어우러졌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나는 대열을 죽 훑으며 영덕이 형을 찾앗으나 보이지 않았다, 불 가까이에는 무서워 가지 못하고 힘껏 물을 쏟아 붓는 장정 몇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나 돌아보니 면소재지에서 의용소방대원들이 끌고 온 소방 수레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이 어꺠에 맨 호스가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옆집 지붕을 핥으려 애를 쓰던 불길이 물대포의 위력 앞에 힘을 잃어갔다. 그때에야 대열의 맨 앞에서 물을 쏟아 붓던 장정들 중에 영덕이 형의 얼굴이 보였다. 형의 얼굴은 땀과 재가 범벅이 되어 얼룩덜룩했다. 그러나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형과 손늘 맞잡고 함께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 그는 정월 대보름 연싸움에서 얼레로 형의 이마를 친 그 청년이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형과 그 청념을 번갈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옆으로 다가온 형은 "다 껐다. 이제 집에 가자." 하며 청년을 잡았던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청년은 "너도 왔구나. 고맙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보냈다. 나는 형의 이마에 난 상처자국을 올려다보았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형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아, 시원하다. 너도 기분 좋지?"하며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의 이마에 난 상처자국이 눈앞에 두렷했다. 얼레를 맞고 피를 흘리며 집에 온 형은 근 열흘 동안 한지에 싸 이마에 붙인 된장을 머리띠로 묶고 지냈다.
"형은 이마를 때린 사람이 안 미워?"
"그때는 잡으면 다리몽댕이를 분질러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연싸움과 불난 것은 다르단다."
그때 나는 무엇이 다른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으나 형의 딱부러진 말투에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남쪽 저 멀리 방장산 머리에서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에 안겨왔다.
다시 텔레비전 화면을 본다. 소방 헬기에서 물 폭탄을 쏟아 붓고 소방차에서 물대포를 쏘아대는 텔레비전 화면이 웬일인지 오래된 풍경처럼 흐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