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주의(asceticism)
성서적 계시와의 관계에서 금욕주의를 살펴보자. 'asceticism'(희랍어의
askesis:'행하다'라는 의미의 askein이란 동사에서 유래됨)이란 단어가 종교와
윤리학 분야에서 사용될 때는 고결한 행동을 위한 자기 준비, 즉 헌신적이고 도
덕적인 행위들의 열성적인 실행을 의미한다.
보다 좁고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이와 같은 덕의 실행은 또는 도덕적 훈
련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내적 본질의 실행(마음 속으로 드려진 기도,
양심의 검진,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또는 외면화되고 있는 자기훈련의 행위들
(금식, 자발적인 가난, 성적인 자제 등에 의한 자기 억제)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영적 분야에 속하는 형태의 금욕주의와 신체적이고 외적인 특성을 가지는 금욕
주의는 모두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피타고라스와 소크
라테스로부터 그 이후의 고대 철학자들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스토아주의적 학파들, 퀴니크스 학파, 그리고 플루타크와 더불어 시작되는 후대
의 플라톤주의자들의 금욕적인 생활습관은 특히 높은 가치가 인정되었다. 로마
제국 기간동안 이와같은 학파들의 크고 광범위한 영향력 때문에 '철학'과 '금욕
주의'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금욕주의자'라는 용어와 '철학자'라는 용
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본질적 동일성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순교자 유스티
누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시대로부터 그후의 수많은 기독교 교부들의 저
서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필로 유다이우스(Philo Ju-
daeus)의 저서들에 의해서도 제시된다. 필로가 유대교를 참 철학이라고 부르고
교부들이 기독교를 참 철학이라고 찬양할 때 양자는 모두 그들 각자의 종교에
있는 분명한 금욕주의적 요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양자에게서 모두 발
견된 도덕적 엄격성과 덕에 대한 진지한 요구는 금욕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유
대교적 또는 기독교적 삶의 이념과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지혜'가 조화될 수
있게 하였던 연결고리를 형성하였다.
사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계시 단계들에는 모두 금욕주의적 요소가 내
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같은 사실은 죄에 대한 진지한 투쟁과 하나님의 거
룩한 뜻에의 완전한 의탁을 긴급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의식 법
령에 보면 구약성경도 역시 금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어떤 때에는 엄격하게 의무
적이고 보편적으로 규정하며(특히 대속죄일에 그랬다; 레 16:29, 23:27) 또 다
른 때에는 일시적 또는 개인적인 조건들에 의하여 제한된다(예. 욜 1:14, 2:12,
렘 36:9, 삼상 7:6, 삼하 12:16 이하, 스 8:23). 특히 구약성경은 제사장 계열
마다 어떤 일시적인 형태들의 절제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어
떤 특정한 사람들이 일생동안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 서약 형태가 잘 알려져
있다(민 6:2 이하, 사 13:4, 삼상 1:10 이하, 렘 35장). 그리고 신약성경의 종
교는 이와같은 구약성경의 의식법령들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구약성경
의 계약법령들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상응하는 금욕적 행위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기도 한다. 신약성경은 금식을 의무로서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같은 관습은 때때로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하여 추구될 것이라고 분
명히 주장하고 있다(마 6:16, 9:15, 행 13:2, 14:23, 고후 11:27 등). 신약성
경은 성적인 절제(마 19:12, 고전 7:25) 또는 세상 재물의 포기(마 19:21, 행
2:44, 4:32, 5:4), 또는 서약에 대한 일시적인 복종(행 21:24 이하) 등의 문제
에 있어서도 유사한 태도를 취하여 강요하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금욕적
인 훈련과 덕의 훈련 행위들은 신약성경에서 정당한 것으로서 생각되고 있으며
오히려 기독교의 영역에서는 때와 상황에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라고까지 생각되
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굶주리고, 자지 못하고, 추위
에 떨었고, 벌거벗음을 당했다(고후 6:5, 11:26 이하). 그리고 그는 운동 선수
들처럼 그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있다(고전 9:27). 그리고 바울은 다른 진
지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도 유사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갈 5:24, 롬 13:
14, 골 3:5).
위의 견해와 많은 다른 성서적 표현들에서 볼 때 금욕적 관습들이 계시종
교에 의하여 배제된다고 하는 것은 지지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반면에
금욕적 관습들은 계시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 또는 근본적 의미를 지니는 요소
라고 생각될 수는 없다. 금욕적 관습들이 계시된 진리의 영역에 있어서는 단지
이차적 도는 부가적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의 계시 단계에서조차 분
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금식과 다른 형태의 금욕들에 관한 명령들이 상
당히 적게 나타나고 있으며, 아주 엄격하지도 않다는 것 및 율법과 예언자들은
이방 종교들에 널리 퍼져 있던 지나치게 육체적이고 외적인 고행에 날카롭게 대
립되는 논쟁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다(레 19장과 신 23장에 나타
나는 자상 금지와 바알 선지자들의 광적인 자상에 대한 엘리야의 태도<왕상 18:
28 이하>를 참조하라). 이스라엘의 사회적 윤리적 생활 관습에는 독신 생활에
대한 특혜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에서 볼 때도 역시 금욕생활은 이차적이었음
을 잘 알 수 있다. 결혼하고 자녀들을 갖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 기간을
통하여 국가의 근본적인 미덕으로 남아 있다. 로마시대에 조차도 바리새인들은
독신생활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주의적 대표자들이었으며 금욕적 관습에 관하여는 엄격한 율법주의적 입장을 많
은 다른 점에서 보여주었던 자들이었다. 에세네파의 사람들의 반대되는 태도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파는 수적으로 극히 적었으며 아마도
그들은 외국의 풍습에 의하여 특히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풍습에 의하여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세네종파에서조차도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스도와 초대 기독교인들이 여기서 언급된 모든 점들에 있어서 구약성
경의 계약백성 사이에 유행하였던 전통들로부터 빗나갔다고 하는 것은 금욕적
편견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신약성경 주석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었던 이론
이다. 개인에 관해서이건 사회에 관해서이건, 신약성경의 윤리적 교훈들과 규
정들은 '허락'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겸손의 길로
그를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다는 것을(마 10:38, 16:24,
요 13:13 이하) 생각하면 신약성경은 엄격한 법령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명령
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사도들은 욕망을 억제하고 육체를 억제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롭고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와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엄격한 율법주의자인 사도 야고보보다도 오히려 어느 정도 더 엄격
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갈라디아서 등은 물론이고 고린도전서와 후
서에서 위에 인용된 구절들을 참조하라). 그러나,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세상
으로부터의 수도원적 도피나 광적인 처녀성의 보존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를 오해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복음적 자유의
전파자였으며 계속해서 그러하였다. 그가 복음적 자유의 전파자였다는 것은 개
인적 금욕주의와 집단적 금욕주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모든 경우들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다(참조. 고전 6:12, 9:4 이하, 10:23, 갈 5:1, 롬 14:2 이하). 바
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요구하는 것들에 있어서 예수 자신에 의하여 설정
된 표준을 아무곳에서도 넘어가지 않고 있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를"(갈 5:16
이하) 원하는 사람은 사실 육체의 모든 소욕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골 2:23)이나 천사인 체하는 거짓된 영성에 대한 암시가
없으며 신플라톤주의나 동방의 이원론적 교훈들의 의미에서 "자신의 육체를 미
워하지도" 않으며 일방적인 육체의 훈련과 금욕도 없다. 왜냐하면 바울에 있어
서는 "경건을 향하여 스스로 연습하는 것"이 "신체적 훈련"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4:7 이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에
대하여 askein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구절에서 조차도(가이사랴의 벨릭스
앞에서 행한 그의 연설에서, 행 24:16; asko aproskopon suneidesin echein p-
ros ton Theon) 그가 의도하고 있는 덕의 실행은 그가 여타의 모든 곳에서 옹호
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가 옹호하는 덕의 실행은 독특한 복음의 자유라는 특징
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도의 faqirs(고행자들)이나 이교적인 소아시아의 시리아
제사장들을 본 딴 변태적인 자학과 다르듯이 바리새주의적 편협성과 율법의 노
예와도 전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