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아들
넷플릭스에서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를 다룬 영화를 봤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중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여성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라고 명시된 구절은 3번 등장합니다. 예수 덕분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본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입니다. 예수 부활 승천 이후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베드로와 그녀의 갈등이 많이 제시가 됩니다.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그녀가 성서 이야기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말이 많습니다. 그녀에 대한 오래 된 오해(창녀였다는)가 공식적으로 바로잡힌 것은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부당한 오해가 오래 지속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라는 풀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당시의 남성우월주의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 결과가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성 박탈이나 비하였으리라는 추측입니다. 그녀와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는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주입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와 같은 '반석주의자'(우리는 예수의 교회가 기반할 든든한 반석이 되어야 한다)들에게는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가 눈엣가시였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대체로 그런 맥락 위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를 부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래된 박대와 비하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없었던 탓이라 여깁니다. 모든 아들은 '여자의 아들'인데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부추긴 것은 영화 <글루미선데이>입니다. 모든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작가 자신입니다. 최소한으로 봐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자가 실제적인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야기가 전하는 사실(사물)이나 사건 그 자체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리얼리티를 획득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독자나 청자를 얻지 못해 널리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결국 그것들의 ‘이야기 속 리얼리티’에 따라서 독자(청자)들의 사랑과 증오을 받게 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자들은 어떻게든 그 ‘이야기 속 사건 사물들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씁니다. 온갖 기술과 기교를 다 부립니다. 언필칭 장졸우교(藏拙于巧, 자신의 치졸함을 기교로 감춤) 해서 이야기의 결함을 감쪽같이 감추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솔깃하게 합니다. 대개는 독자가 넘어갑니다. 어떤 판이든 기술을 먼저 거는 쪽이 유리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누가 그 이야기를 전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자야말로 모든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사건을 구성하는 태도에 따라서 과거의 사물과 사건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합니다. 당연히도 어떤 이야기에서든, 소설이든 영화든 신문기사든, 궁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작가(감독, 기자) 자신입니다.
‘이야기의 주인’이 ‘이야기를 전하는 자’라는 것을 알면 ‘이야기 속 주인공’은 그저 인형극의 인형(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뻔히 알면서 꼭두각시에 대해 동정하고 반발하고 일희일비합니다. 누가 인형에 줄을 달아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도통 무감하게 됩니다. 우정 모른 척합니다. 누가 그 무대 위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 이야기할작시면 아예 외면하는 이들도 숱합니다. 내겐 이야기가 필요한데 너 때문에 내가 가진 이야기가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무엇이든 내 삶을 위로해 줄 것이 필요한데 왜 그 일을 방해하느냐고 성을 냅니다. 그럴 때는 속수무책입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공급하는 일 이외에는, ‘꼭두각시놀음’에 취해있는 대중들의 눈과 귀를 다른 곳으로 돌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게 이야기의 힘이고 인간의 한 속성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들과 딸들은 기회만 닿으면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신경숙 작가가 언젠가 『엄마를 부탁해』라는 어머니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누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어머니를 부탁해"라는 제목일까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를 부탁해"라는 소설들을 많이 썼으니까 이번에는 "어머니를 부탁해"를 쓴 것이라고요. <풍금이 있던 자리>나 <베트민턴을 치는 여자>, <깊은 방> 같은 것이 사실은 다 "아버지를 부탁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드러내 놓고 아버지 이야기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나선다고 합니다. 귀추가 주목됩니다.
지금부터는 '여자의 아들'이 화자인,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이야기'인 영화 <글루미선데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 여자(일로나)와 세 남자(자보, 안드라스, 한스)의 애증(愛憎)어린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글루미선데이>의 ‘이야기 주인’은 그들 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원주인은 자보레스토랑의 새 주인, 영화에서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는(영화 속에서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작과 끝에만 등장하는 중년의 남성, 일로나의 독생자, 하나뿐인 혈육, 유복자 아들입니다. 그는 한스가 일로나의 몸을 폭력(위계에 의한 강제 합의)으로 취한 후(일로나는 자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권력을 가진 그를 찾아갑니다) 생긴 아들입니다. 아마 그래서 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의 이름에서 한스와 관련된 어떤 단서라도 노출이 된다면, 이 영화가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이야기라는, 일종의 여백의 미로 남겨둔, 마지막 반전의 묘가 결정적으로 훼손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것은, 혹은 드러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이야기의 원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집, 자보 레스토랑에서 그곳을 거쳐간 젊은 날의 어머니와 세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원래 집주인은 명찰(패찰)을 달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 영화에서 일로나가 일체의 윤리 관념을 뛰어넘어 ‘육화된 천사’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은 이 이야기의 원주인이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사이에 둔 연적 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오기 전’(그는 한스가 자보를 추억하자 그는 자신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대답합니다)에 자보와 안드라스는 이미 세상을 떴습니다. 있다면 자신의 생부 한스가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죽음을 앞둔(그들 모자는 자보가 자살용으로 마련해 두었던 독약으로 한스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팔순의 노인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승천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어머니만 있을 뿐입니다. ‘아들-연인’으로서, ‘아버지의 말’이 애초에 부재하는 우로보로스적 공간(영화에서도 가운데가 움푹 꺼진 자보 레스토랑의 내부 공간은 모태의 이미지를 지닙니다)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아버지들이 정한 윤리나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어머니의 몸’만이 존재합니다. ‘어머니의 몸’은 세상의 모든 갈등과 균열을 하나로 통합하는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파괴와 재생의 블랙홀입니다. 그러므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은 맥락적으로 우문(愚問)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어머니의 몸’, 그 천상의 에로티즘만이 이 세상을 설명하고 또 구하는 유일한 천리(天理)였습니다. 그 천상의 에로티즘을 가로막는 것들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독점과 지배의 남성성은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야 합니다. 천상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자보든 안드라스든 한스든, 아버지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하해 마지 않았던 중세의 종교권력자들처럼, 영화 <글루미선데이>를 보고 기분이 별로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주로 윤리적 감각이 뚜렷한 성인 남자들입니다. 자보와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공유(共有)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저는 이 이야기가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말해 줍니다. 조금 장황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조금은 수그러집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는 <써머스비>와 같은 영화가 있었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여주인공이 나오는 <글루미선데이> 같은 영화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릅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과 ‘어머니의 몸’으로 굴러갑니다. 그 둘은 세상을 실어나르는 수레의 양쪽 바퀴들입니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온전한 운행(運行)이 어렵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느 한 쪽이 힘을 얻는 수는 있어도 하나가 완전히 소거된 인류 사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오래 전 작성. 오늘 아침 일부 수정><사진은 페이스북(고혜련 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