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무소, ‘인민군’이 접수
1950년 6월 28일 아침 형무소 감방문을 열고 인민군 장교가 들어왔다.
“동무들 고생 하였소!”하면서 죄수 한사람씩 일일이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감방복도로 나와서 정렬을 하게한 후 인민군 장교가 연설을 했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이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너희들은 잘 들어라. 절도범 외에 제주, 여수, 순천 동무들 중 사상범으로 감방에 들어온 죄수들은 모두 나와라.”고 한다.
그리고 절도범과 기타죄수들은 감방에 그대로 남아있으라고 하였다.
인민군장교의 지시에 따라 사상범들이 2열종대로 집합한 후 형무소정문을 나서서 1시간쯤 걸어 인천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젊은 사람들이 꽉차있었는데 인민군의용군에 입대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점심에는 주먹밥 1개씩을 나눠주었는데 이를 먹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고향출신 강세호가 보였다.
반갑게 손을 잡고 “이게 웬일이냐?”고 하며 고향소식을 주고받았다.
강세호의 말도 형무소에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면서 고향에 있는 청년들은 재작년(1948년) 겨울부터 작년(1949년) 봄까지 전부 죽었다고 하였다.
양원옥형도 인천에 와 있는데 최근에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 전원원위치로 모이라는 지시가 있어서 강세호와 헤어졌다.
강세호를 그곳 인천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그때 의용군으로 들어간 뒤로 현재까지 그의 생사를 알 길이 없어 섭섭하다.
인민군 뒤를 따라 서울로 가기에 앞서 백두산빨치산부대 기마병들이 검도를 가지고 사람 목 베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걸어서 서울로 가는 도중에는 몸이 약한 사람은 병원에 갈수도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약조차도 없어서 아무런 처방도 없이 그저 길에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우리는 이틀간 행군하여 한강다리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한강다리는 폭격으로 부서져 건널 수 없었고 한강에서는 작은 배로 사람을 운반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갔는데 이때 강에 빠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
우리일행이 전원 강 건너서 백사장에 집합하고 보니 출발할 때 인원의 절반은 수영미숙으로 한강물에 빠져 죽거나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줄도 모르고 그 다리를 지나려고 달리던 차가 강물에 수 없이 떨어져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육군본부가 폭파한 인도교 모습
이로써 그 뒤를 따라가던 차가 계속 이어져서 서울시청 앞까지 열을 지어있었는데 그 차들은 모두 불에 타고 형체를 알아볼 수없이 부서졌다.
그리고 서울시내 주요건물과 서울시청 중앙청에는 김일성 사진은 좌측, 스탈린 사진은 우측에 붙여져 있었고, 거리 요소요소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고 국기게양대에는 인민공화국기가 게양되어 펄럭이고 있었다.
서울시내의 건물대부분은 불에 타거나 부서져 폐허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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