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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안머리의 글을 읽으며 어느덧 그의 관점이 확연히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관점이 모두 나의 것이 되어버린것처럼 나의 관점이 그와 같음을 알게 된다. 시대를 이해하고 시대의 특성을 이해하는것은 성도에게 중요하다. 그럼, 내겐 무엇이 필요해서 현재가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보게 하는가? 그건 바른신학과 믿음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일것이다. 바른신학과 믿음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것이 가상과 악세사리 수준에 머물게 만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안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는 그의 입장과 생각을 분명히 했다고 할수 있다. 분열된 복음주의는 이안머리의 색깔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두세가지가 논의의 대상이 된다. 교회는 무엇인가?와 성경은 축자영감설에 의해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인과 연관되며 성경의 무오성은 진리의 체계를 지키는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된 가르침으로 세워갈때 역사는 그것이 어떤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안머리는 이 책에서 그것을(20세기 중후반) 증명해간다. 책의 시작은 복음자와 복음주의에 대한 개념부터 시작한다. 종교개혁당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개신교는 모두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오래된 복음주의에서 보듯 웨슬리 시대에도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적음을 알수 있다. 이 책에서도 웨슬리와 휘필드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당시의 교회는 그들을 비난했다. 이유는 복음을 증거한다는것이며, 그 자체를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복음주의란 복음을 근거로 세워가는 교회이다. 종교개혁당시 지킨 복음을 지켜가는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이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 교회의 양상이 변화되어지는것을 보여준다. 그 핵심의 시작은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는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계몽주의 시대에 태어나 계몽주의 산물로 물들어 정통적 신학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 믿음은 내용이 없는 종교적 감정만 가지면 되었다. 그래서 정통적 기독교의 틀은 말하지만 실제는 없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초가 된다. 이런 영향은 독일과 유럽 그리고 영어권 교회들에게 영향이 파고들었다. 그 영향은 아마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것 같다. 빌리그레이엄은 전도집회를 시작했는데 그는 찰스피니의 구도좌석 부흥을 모방하여 숫자의 증가와 확실한 증거를 구원의 결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성공과 사람들의 운집은 자유주의, 근본주의, 가톨릭, 복음주의, 몰몬교등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끼쳤는데 그가 더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게 한 인물은 풀러신학교를 창설한 오켄카이다. 오켄가와 카넬은 근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풀러신학교도 그 입장에 있었다. 이들과 빌리 그레이엄의 연합은 크리스챠니투데이 잡지를 만들고 대규모 집회를 형성해간다. 빌리 그레이엄은 헤링게이 집회를 통해 영국에 파장을 이끌었고 영국은 이런 영향에 의해 1967 키엘 대회를 향해 나아갔다. 키엘대회를 통해 복음주의는 분열 양상에 있었고 로이드 존스를 오해한 성공회 복음주의 자들로 인해 더욱 분열 양상이 분명해졌다. 이런 분열에 패커도 앞장섰는데 결국 패커는 1979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그러나 패커는 미국에서도 에큐메니컬 운동에 서게 된다. 에큐메니컬 문제는 교회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발생한다. 에큐메니컬운동을 시도한 복음주의 자들은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교회를 교단으로 보는 양상에 있었던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이 교회의 의미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교단간의 연합을 통해 자유주의 자들을 물리치고 세속주의로 물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거라는 정치적 실용주의의 입장으로 나아갔다. 즉 관용이 앞서있는 지나친 포용에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이란 것을 등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 자들도 자유주의의 영향을 따라 실용주의로 타협하면 그들이 변할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과도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톨릭은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성례전이 있다. 그래서 구원얻는 방법은 다양하며 자신들의 공로가 중요했다. 그래서 가톨릭에는 구원의 확신이라는것이 없다. 그러나 개신교는 복음을 듣고 거듭난 성도에겐 분명히 확신을 가지게 되는데 말이다. 이런 극렬한 차이를 이겨낼수 있다고 생각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이 손상되고 성경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오히려 종교개혁운동을 분열을 조장한 무리처럼 보고 말았다. 이것은 진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놓고 있는 행동이다. 신학교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복음주의 신학계가 세상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더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려하는것이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입장이되었다. 이 입장은 미국에서는 풀러신학교에서 나오는데, 이런 영향들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일의 학제와 자유주의 신학적인 요소들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학문의 연구가 중요시되고 복음을 지키고 교회를 세우는 신학은 중요시 되지 않으며 가르치는것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F.F.Bruce)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발생한다. 학문적인 요구를 위해서 자유주의와도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성경의 무오설을 부인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열린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에 동참자는 맥그래스, 마크놀, 베빙턴등이 있다. 브루스는 그것의 시초라고 이안머리는 말한다. 성경무오설을 거부하면서 성경이 어느부분이 진리이고 어느부분이 그릇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비평학의 입장들에 맞추어서 성경은 난도질 당하게 된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모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걸까? 이런것을 추진한 사람들도 그들의 열심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주의의 관점으로 더 좋은 기회와 방향이 생겨난다고 여겼다. 결과는 오히려 복음주의가 손해를 보았다는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헤아려 보질못했다. 우리도 이런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는 이미 침투해 들어온 현대성의 영향은 복음을 말하기 보단 다른 관점들을 진행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을 의지해 현재를 이해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기보단 다른것들이 더 중요해지거나 부차적인 것들이 핵심이 된 모습은 아닐까? 교회는 무엇인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곳이 아닌가? 맹목적인 전도에 급급한 입장에서 자신의 할일은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자의 모습은 내 주변에도 tv에도 안타갑게 나오고 있다. 복음을 바르게 아는것이 시급하다. 교회는 이것을 놓아서는 안된다. 현대성에 물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더 분명하게 표현해야 하고 거짓것으로 덮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8.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 저서는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가 사용한 20세기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방대한 인용문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신학의 관문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게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서는 결코 우리가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해 답을 주고 있다. 그는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말과 글들을 이 책에 기록해 놓음으로 인 해 생생한 증거자료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며 그리하여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알려주고 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회복과 참 교회의 정체성의 회복”이다. “성경이 말하는 참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성경적 교회관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그 문제로 인해 어떻게 복음이 분열되어 왔는지를 말해준다. 이안머리는 20세기 후반 교계나 학계 지도자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문제점’, ‘성경의 무오성 논쟁’, ‘복음주의와 카톨릭의 연합 문제로 인한 분열’ 등을 이 책에 다루며 복음주의가 왜 분열될 수밖에 없었는지의 이유와 과정과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슐라이 마이허의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종교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 직관, 경험의 문제라고 주장,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많은 교회가 이성주의 포로가 되었다. 그에게 종교는 잘 정리된 논리와 경건의 경험을 의미했다. 자유신학을 반대한 메이첸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 ‘순수 장로 교단’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정통 장로 교단이다. 그러나 메이첸을 따르던 구 장로교 신학은 신종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근본주의 문화 사이의 간격으로 또 한 번의 교단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방향에 만족하지 못한 오켄가와 카넬은 같은 비젼을 가지고 플러 신학교를 세우게 되고, 이곳에서 제시된 새로운 비젼이 ‘신복음주의’이다. 플러 신학교는 근본주의자들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보다 포용적이다.오켄가와 카넬은 새로운 복음주의 문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이 ‘신 복음주의’로 인해 새롭게 탄생하는 인물이 ‘빌리 그레이엄’ 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초기 사역에는 자유주의 신학과의 협력을 거부했지만, 주류 교단 지도층과 전도 집회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논리를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고, 1957년 ‘뉴욕 전도 집회’ 때 자유주의자와 협력하게 된다, 그레이엄을 더 포용적이 되도록 이끈 집회는 1954년 런던 전도 집회로 그를 세계무대에 알리는 기회가 된다. 런던 집회는 복음주의 연맹이었고 성공회와 모든 주요교단에서 후원을 거부했지만 다수의 목사들과 기성 교단들이 상상도 못했던 전도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을 보면서 그레이엄은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경계하던 주류 교회도 성경적 기독교에 끌려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성공적인 집회는 성경의 원칙을 대신하는 실용주의적 전도방식으로 흐르게 된다. 군중 동원을 크게 의존했고, 참석자의 수를 유지하고 증가시키기 위해 유명인사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게 되고, 정치 지도자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극단에 빠지고 말았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레이엄의 생각은 옳았지만 그가 보여준 포용주의와 관용은 동시에 큰 약점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신학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우선주의가 만든 비극은 ‘종교적 성공을 위한 광신적인 노력’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하여 유일하게 반대의 입을 연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다. 로이드 존스는 성경관이 다른 기존 교단과의 관계보다는 같은 교리에 근거한 연합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이 정의하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반박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적 연합을 우선순위로 주장하며, 복음주의가 원래 자리를 지키려면, 무엇보다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는 연합부터 추구해야 한다며 교제보다는 교리를 강조한다. 로이드 존스가 에큐메니컬 신학에 가장 거부감을 느꼈던 부분은 교단간의 연합니다. 교단들이 교회와 합쳐진다고 해서 교회 연합은 아니다. ‘교단’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같은 뜻이 아니다. 교단은 성경적 진리의 특징 요소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조직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우리를 진리와 소금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가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은 ‘교회’가 더 크게 하나 될수록,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잇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회는 포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봐도, 단순한 숫자적인 연합은 세상을 변화시킨 적이 없다. 이안 머리는 분열의 또 다른 원인으로 ‘성경의 무오성 논쟁’을 든다. 오켄가가 성경관은 보수 신학과 자유신학을 나누는 가장 핵심적인 잣대라고 말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을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잣대는 성경관 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을 믿던 복음주의 학자들이 성경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가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을 충분히 인정함으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은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상황은 복음주의의 심각한 방향 전환을 의미했다. 성경에서 신적 계시의 특징을 강조하지 않고 ‘인간적인 면’을 다룰 수 있다는 기대가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 말씀 안에서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는 따로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결합되어 있다.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을 뒤로 미루고 인간적인 요소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심각한 분열이 일어난다. 모두가 더 큰 학문적 혹은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한 자유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전적 무오성 포기의 결과로 성경이해에 있어서 전문 학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신실한 믿음도 포기하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신학교의 신학교육은 목회자의 신앙을 더 풍성히 세우기보다는 다른 학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안 머리는 분열의 원인으로 ‘복음주의 가톨릭의 연합문제’를 말한다. 1970년대 종교계에서는 가톨릭교회와의 연합 논의가 가장 인기 있는 주제였고, 실제로 연합 활동이 늘면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1977년 노팅험에서 열린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 선언문에서 “가톨릭 교인도 같은 그리스도인임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지금 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듯이 행동했던 과거의 모습을 회개한다. 우리는 이제 두 교회 사이의 온전한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복음주의자도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실제적인 연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가톨릭이 진짜 기독교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옛 복음주의 특유의 불신과 불편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취급됐다. 이러한 입장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신 복음주의적인 신념 때문에 가능했다. 1970년대 이래로 수많은 가톨릭-개신교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이들 교회간의 신학적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가톨릭은 주로 세례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선행을 통해 이 은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에는 믿음, 고해성사, 회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가르치는 성례를 통한 은혜, “그리스도가 성례에 실제로 함께하는 것을 담보하는” 제사장적인 성직자관, 무오성을 보장하는 사도적 계승 같은 중요한 핵심들은 가톨릭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전혀 손댈 수 없는 문제다. 여기에 타협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가톨릭 신학은 인본주의를 만들어낸 인간 이성에 의지하는 신학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로마 교회는 지금 이 사회의 문제의 원인이 된 사상을 공유한 집단으로 여러 형태의 불신앙과 결합하므로 성경을 붙들어야 할 시점에서 전체 방향을 흐리는 역할을 해왔다. 로마 가톨릭과 자유주의는 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경을 대적하는 면에서 같은 편이다. 로마 가톨릭과 손을 잡으려는 복음주의자들도 같은 오해에서 출발한다. 한 복음주의 성공회 지도자의 말이다. “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 성공회 가톨릭과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들이 주장하는 성례주의와 예식주의에 맞서는 전쟁을 시작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읽고 짧게 요약정리 하였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짧게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하려니 저자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많이 묘사하지 못한 듯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부분이 저에게 낯설고 어렵게 다가왔지만, 인내하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참 성경적 교회관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질서한 실용주의와 포용성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사람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대로 바른 교리를 세우며 복음을 회복하는데 열심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벼운 여럿의 멘토를 구하기보다 한 복음주의자의 저서는 우리를 바른길로 안내하기에 성경 다음으로 충분합니다. 탁월한 전기 작가이자 부흥역사가인 이안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를 만나게 된 것은 저에게 또 하나의 소명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요즘‘ 예수님의 공의가 과연 무엇일까?’, ‘공의’라는 단어로 고심하는 저에게 이안머리의 이 저서는 저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위해 복음의 진리를 가볍게 했던 일들을 회개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을 열정을 보며, 결코 복음은 가볍지 않고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또 한 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평신도로서 조금 읽기가 힘들 수 있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
우현****
2009-02-22 12:00
8.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역사를 배우고자하는 이유이다. 지금의 현상과 문제들의 저변에는 배경과 이유, 원인이 주어지며, 그것을 역사라 부르는 것도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나의 작은 열정이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열된 복음주의의 진단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언급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안 머리는 우선 1900년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많은 움직임을 추적한다. 1장에서 5장까지가 이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장점으로 백금산 목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방대한 일차자료의 인용으로 추적의 장면들이 구체적이면서 객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이 책의 논의의 바탕을 구성한다. 당시 영국의 성공회와 빌리 그레이엄의 연합 운동, 존 스토트와 로이드존스, 그리고 패커의 초기와 변화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어 6장에서부터 마지막 11장까지는 1장에서 5장까지 다루어진 분열과 연합, 그것을 추진했던 중심인물들 사이에 주어진 다양한 문제들의 핵심과 저자의 생각들을 언급한다. 즉, 이 책의 핵심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 맴돌 던 생각은, 분열과 연합이다. 지금의 식견과 눈으로 보았을 때, 연합이라는 것은 과거의 우리의 극단적 편협함을 극복하는 행동으로서 시대의 다양함과 상대적 가치의 존중을 인정하는 진일보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에 반해 분열을 추구하는 이들은 역시나 시대에 뒤쳐진 무언가를 따르는 고리타분한 무엇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그 결과가 우리에게 악한 것이 된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갖던 막연한 기대감이 우리를 타락의 길로 가게 되었던 행동과 같다면, 분열이 늘 그렇듯이 구약에 등장하는 소수의 불꽃과 같은 순수함과 순결을 지키고자한 거룩한 움직임이었다면, 이런 막연한 생각-연합은 진일보한 우리의 발걸음이란 기대감-에서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본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미 주어진 많은 연합들의 성격은 교회, 교단간의 연합으로 서로 간에 마땅히 논의되고 언급되어야할 많은 부분들을 생략하고 진행되고 있었다. 이안 머리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정의, 교회관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찾고 있다. 동감하는 부분으로서 연합과 하나됨에는 막연한 기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이 연합을 추구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을 기반으로 서있는 우리의 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며, 서로의 주어진 다양한 신학적 문제와 교회의 모습에 그 어떤 분명한 기준과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지 않고서 주어진 연합에 동참한다는 것은 자아의 상실과 존재의 상실에서 더 나아가 우리를 잃어버리는 행동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연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첫 단추를 잘못 끼어놓고 마지막 단추가 잘 끼워지길 기대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분열에는 그에 따르는 이유가 있다. 이안머리는 그것을 본질에 대한 이해 차이로 언급한다. 그리스도인, 성경, 교회, 연합등에 대한 인물들의 식견과 견해 차이가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당연히 참된 연합에 동반되어야 할 요소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틴로이드 존스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진리 안에서의 참된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준비의 과정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힘든 과정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우리는 진정한 연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본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한다. 이안머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적인 삶과 가르침을 우선을 둔 복음의 회복을 그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관용과 화합을 추구하는 것, 근본된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앞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연합을 기대함, 이 책의 결론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 복음주의,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미래를 생각하는 이들에겐 더 없는 귀한 가르침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분열에 따른 많은 핵심적 요소들, 그리고 연합을 추구했던 많은 움직임 속에 등장하는 유사한 형태의 맹점들, 이러한 역사의 가르침을 배워 앞으로 주어지는 시대와 세대들에게 나아가야할 길을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아깝지 않는 독서의 시간을 제공할 것이라고 본다. 책을 다 읽은지 얼마되지 않는 나에게도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그리고 항상 근본이 무엇이며 시대의 조류에 타협하지 않고, 진리가 무엇인지 늘 알고자하는 나에겐 아직 부족하지만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으며 멀리 주어진 푯대를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제공해준 이안머리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이다. 짧은 글, 좋은 기회와 여건을 마련해준 출판사와 나의 미래의 동역자들에게 도움 되고자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글을 남겨봅니다. 그리고 분열의 아픔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와 책에서 등장하는 분열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내용을 바로 파악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본질의 중요성을 다시금 언급하며 역사의 가르침 앞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정치와 교단간의 참된 논의를 배제한 연합이 아닌 본질의 문제에 대화성을 갖고 추구할 수 있는 연합에 대한 배움을 기대하는 독자에겐 한국교회의 현실과 상황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과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저에게 주어진 다음 고민과제이기도 하구요 ^^*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ㅋ
강영****
2009-02-21 12:00
9. 나는 “분열된 복음주의”를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안 머리의 메시지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의 문제제기와 더불어 그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한다. 이안 머리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성경의 무오성 문제, 그리고 복음주의와 가톨릭 연합 문제로 일어난 분열을 성경적, 16세기 종교개혁자들, 18세기 대각성 운동 지지자들의 사상을 끌어다가 자신의 입장을 논증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논함에 있어 이안 머리는 빌리 그레이엄을 비중있게 다룬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은 “초기만 해도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된 기성 교단과의 협력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57년 뉴욕 맨해튼에서의 집회는 비복음주의자들의 후원을 처음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신학을 가졌다 해도, 함께 전도 집회를 통해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기 원한다면 모두 환영한다.”고 말하였다. 그레이엄을 더 포용적이 되도록 이끈 가장 큰 원인은 1954년 런던 전도 집회 사건이었다. 그는 런던 전도 집회를 통해 비복음주의적인 목사들로부터 상상도 못했던 전도에 대한 관심이 터져나온 것을 보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경계하던 주류 교회도 성경적 기독교에 끌려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성공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비복음적인 교단들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가 결국 복음주의 교리를 훼손하게 만들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이들을 과연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바울의 복음을 전혀 따르지 않는 자들과의 협력이 마땅한가? 로이드 존스는 “신앙의 핵심에 대해 180도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한 교회를 이룰 수”없다고 말한다. “성경은 성공으로 진리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쉐퍼의 말대로 “순결한 삶과 바른 신학으로 인도하지 않는 전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걱정하며 다가가지 않는 굳은 정통주의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것으로 무오하며, 모든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믿고 고백한다. 오켄가는 성경관이 “보수 신학과 자유 신학을 나누는 ‘분수령’”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성경의 무오성을 믿던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성경 우상주의’에 빠졌다는 비판, 성경의 무오성은 학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크 놀은 “성경무오설의 교리를 너무 고집하는 태도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포기해야만 사고의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 할 기회가 생긴다.”고 하였으며, 알리스터 맥그래스 역시 “성경무오설에 대해 입장을 바꾸면, ‘학계 안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고, 이에 걸맞은 위상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복음주의는 오늘날 지식인들도 진지하게 대할 만한 학적 수준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성경이 무오하다는 믿음이 학문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무오성을 믿어도 본문을 이해하고 바른 해석을 위해 “성경 외의 자료를 사용하고, 배경을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안 머리는 “성경이 일부만 영감으로 적혔고, 일부만 신뢰할 수 있다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한다. 확실한 구분선이 가능할까? 학자들이 그어 놓은 구분선은 계속해서 변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유일한 대안은 성경 전체를 진리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전체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구프린스턴 신학자 워필드는 “온전한 축자영감설과 영감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 사이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안 머리는 워필드의 견해를 인정함과 동시에 “성경의 완벽한 영감을 믿지 않으면 당연히 신실한 믿음도 포기된다.”고 말한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점점 흐릇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을 신뢰하도록 강조한다.” 이안 머리는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한 이유를 현대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적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성경을 다루는데 있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다. “죄에 빠진 세상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조셉 하트는 “신성한 그 한 장 한 장을 경외하라. 그 중 한 부분이라도 손상을 입히는 것은 눈이 멀고 어리석은 격정의 마음,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는 일이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복음주의와 가톨릭 연합 문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가톨릭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의 노선을 취해야 할까?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진리에 벗어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관과 구원관이 다른 가톨릭과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잘못된 신학을 노골적인 불신앙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용납하지 않았다. 호레이셔스 보나는 “신앙과 불신앙 간의 교제는 조만간 신앙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성령께서 같이하지 않는 교제는 신앙을 반드시 약화”시킨다. 이안 머리는 “성경적 원리를 우선으로 하지 않는 연합 활동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만들고, 영적 빈곤 상태로 몰아간다”고 말하였다. 본서는 평신도들이 읽기에는 부담스럽다.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신복음주의,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과의 신학적 차이를 논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훈련이 적을 수밖에 없는 평신도들에게는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독서를 점점 힘들게 만들 것이며, 지루함과의 싸움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나는 이안 머리의 책을 통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종교개혁자들처럼 확고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틈이 결국 근본적인 문제까지 뒤틀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작은 구멍이 전부를 무너트린다.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키며,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싸워야 한다. 성령께서 같이하지 않는 교제는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만들고, 영적 빈곤 상태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협력하며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자!
이태****
2009-02-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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