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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오순절? / 싱클레어 퍼거슨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강림은 기독론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 성령론적 중요성 또한 그러한 빛 가운데서 드러나야만 한다. 이 때에도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과연 오순절은 교회의 생명력을 위해서 영속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는가?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특별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귀(참고. 롬6:1 이하; 갈2:20; 골2:11-3:4)의 사건에 실존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성령을 부어 주신 획기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12:13). 이것은 오순절을 언급하는 다른 곳에서(눅3:16과 병행구들; 행1:5; 11:16) 사용된 언어도 똑같다.
바울 사도의 선언은 포괄적이요 계획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추측컨대 고린도인들에게 진실이던 것은, 모든 믿는 자 개개인에게도(우리는 성령 세례로 인하여 모든 믿는 자가 속한 한 몸에 연결된다) 그리고 모든 범주의 신자들에게도(유대인, 헬라인, 자유자, 노예) 진실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 교회가 체험의 신학을 추구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들과 더불어, 몇 가지 중요한(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논쟁점이 제기된다.
(1) 오순절은 제자들이 그 이전에 경험한 성령의 체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2) 오순절은 사마리아와(행8:4-25) 고넬료의 집(행10:1 이하) 그리고 에베소에서(행19:1-7) 일어났던 성령 체험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령의 오심이 회심 이후에 뒤따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마리아와 에베소의 경우에 그것은 별개의 두 번째 체험으로 여겨지는가?
(3)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에서 말하는 바 성령세례와 오순절의 관계는 무엇인가?
(4) 과연 오순절의 어떤 요소는 단회적이며, 어떤 요소는 반복적인 것으로 더욱이 교회의 체험에서 규범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오순절과 제자들
예수님의 부활 후에 함께 모인 제자들은 진정한 신앙인들이었다(참고. 마16:15-20). 그들은 이미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요15:1-11). 이것은 함축적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되었던(행1:5) 성령 세례를 아직 받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성령 체험은 성격상 점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로부터 제자들의 체험이 교회를 위한 규범이 된다고 결론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하게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변화 시기를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험한 것은 시대의 전환이며, 그것은 전형적이거나 규범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이 성령의 사역의 충만한 분량에 들어가는 일이 필연적으로, 연속성(동일한 성령)과 비연속성(오순절에서만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자격과 역할로 오심)의 유형을 반영하여 두 단계로 일어난 것이다. 이 유형은 옛 시대를 벗어나서 새 시대가 출현한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체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체험도 단회성(singularity)을 지닌 것이었다.
가이사랴, 사마리아, 에베소
그러면 사마리아와(행8:9-25) 고넬료의 집(행10:44-48) 그리고 에베소에서(행19:1-7) 성령이 강림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러한 사건은 가장 먼저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고, 오순절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강림과 똑같은 단어들, 즉 부어 주심(행2:17-18, 33; 10:45), 세례(행1:5; 11:16), 선물(행2:38; 11:17) 등이 사용되었다. 다른 언어를 말하는 현상도 반복되었다(행2:4; 10:6). 더욱이 베드로는 이 사건들 사이의 유비를 목격하였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행11:15-17).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사도행전 1:8의 계획에 의거하여 이방 세계에 복음 전파가 시작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 확정되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11:18). 그 사건은 전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획기적인 것이요 의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베소인들의 성령 체험은 구별되는 두 번째 단계처럼 보인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할 때 믿고 세례를 받았으나, 베드로와 요한이 찾아와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2, 15-17)고 나타난다.
그 후에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이야기의 후반부에 속한 이 시점에서 그들이 한 대답은 매우 의외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설교한 후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1-7).
사도들의 오순절 체험과 사마리아인들과 에베소인들의 경우를 볼 때, 누가복음-사도행전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복의 충만함으로 들어가는 두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양하게 설명되는 이 단계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성령에 의한 중생(회심-시작함)
(2) 성령 세례
따라서 복음서들이 기록하고 있는 기간의 어떤 시점에서 사도들은 중생하였다. 그 후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체험하였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으며, 그들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증거로 다른 방언들을 말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령의 두 단계의 모델로 혹은 적어도 두 가지 차원의 새로운 언약 사역을 보게 되었다고 주장된다.
이런 관점을 지지해 주듯이 사마리아에서와 에베소에서 믿는 자들(즉,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이 등장한다. 이 두 번째 단계는 개념적으로 또한 이 경우들에는 연대적으로 중생과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이미 사도들의 체험이 특성상 두 단계임을 의심할 수 없지만 그것이 본질상 전형적인 것은 아님을 고찰한 바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후반에 나타나는 두 단계의 유형은 그러한 유형이 교회에서 전형적인 혹은 적어도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지 않는가?
성령의 사역을 두 단계로 보는 견해는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반(半)육체적인 사도직의 계승이라는 맥락에서 손을 얹는 행위를 통해 성령과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확정된다(참고. 행8:17; 19:6).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의 경우,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을 동반하는 성령 세례는 회심으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된(반드시 시기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더 깊은 단계의 영적 체험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논의한 바와 같이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오순절은 구속사적 사건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실존적으로나 성령론적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본질상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 사건(예수님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과 같이 영단번의 결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행전'이다.(행1:1-4이 암시하는 바는, 1:5에서 약속된 사건은 전적으로 예수님이 친히 승귀하신 주님으로서 가르치시고 행하실 바로 그 새로운 시대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자체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러한 틀 속에서 해석된다면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사도행전 1:8에서 요약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는 세 가지 결정적인 발전 과정에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단계를 특징 짓는 것이다.
(1) 복음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래한다.
(2) 복음이 사마리아에 도래한다. 사도행전 8장에 나타나는 빌립의 사역을 통한 놀라운 부흥에 대한 설명과,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와 요한의 방문(행8:14), 그리고 이어지는 성령의 부어짐은 예수님에 의해서 약속된 사도적 복음의 특별한 확장 단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3) 복음이 가이사랴 즉 이방 세계를 대표하는 곳에 도래한다('세상의 끝', 행1:8; 참고. 특별히 11:18). 사도행전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분량은(66절에 걸쳐서) 누가가 부여한 바 그 사건의 결정적인 계획상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즉 모든 시대를 위한 전형으로서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도행전 1:8의 전체 선교 계획에서 특수하고도 전략적인 발전인 것이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동일한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어떤 제자들'이라고 기술되어(행19:1), 의도적으로 특이하고 부정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누가는 자신이 이 사람들을 신약 성경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는 일련의 신호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1) 이 사건은 아볼로의 초기 사역을 특징 짓는, 복음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라는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누가는 "그가...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5)는 사실을 언급한다.
(2) 요한의 세례만 아는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별도의 그룹을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곳에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가정하에, 그들은 '어떤 제자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누가는 분명히 그 그룹이 열두 사람쯤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이 '제자들'이라고 불린다면, 이 용어가 다른 곳에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말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반드시 신자들이라고 여겨져야만 한다는 것은 판에 박힌 주장이다. 사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모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것 같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훗날 그들이 기독교적 세례와 안수를 받으매 비로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행19:6) 했다. 새로운 언약의 시작에 대한 표시가 비로소 확증된 것이다. 오순절의 첫 사도들처럼 요한의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 중 이 열두 명은 기대의 시대에서 성취의 시대로 변환하는 가운데 있었다.
두 단계의 교리에 반대하여 우리는 열왕기서에서 교리를 추출해서는 안 되듯이 사도행전에서 교리를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해석 원칙이라고 하는 주장 역시 있어 왔다. 역사적인 이야기 속에 예시된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이미 정립된 교리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가치 있는 원리다. 기독교 신학의 구조는 성경 안에서의 신학적인 해설과 규범에 뿌리를 두어야만 하고,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사실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규범적이지는 않으며, 그 자체가 더 깊은 신학적인 해석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로부터 도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그 스스로 격렬한 반대를 겪은) 원리는 이 논쟁에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도행전의 구조와 신학적인 흐름이 지적하는 바는, 이들 사건이 전형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자체의 맥락상 유일무이한 것으로(as sui generis)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겪은 바 두 단계의 체험을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변증은 이 사실을 잘 밝혀 주고 있다. 그는 고넬료 집안의 체험을 사도들의 오순절 체험과 분명하게 동일시하고(행11:15,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이런 말들로 풀이하였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행동의 개시를 좀더 강조하는 표현으로는 '우리가 믿었을 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다"(행11:17). 오순절 이전에도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를 믿었다. 그들의 신앙에서 새롭고도 구별되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이다. 그 전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비하의 시절에 관계된 것이라면, 이제 그들의 신앙은 메시아적인 약속에 따라서 승귀하신 주님, 곧 새로운 신분으로 임하신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다(시110:1).
사도들이 필연적으로 두 단계로 이루어진 체험을 한 것은 구속 역시의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이유 때문인데, 이제는 훗날의 성도들의 체험 속에서는 하나의 통합된 실재가 되었다. 이제 구원 얻는 믿음은 절대적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믿는다는 것은 오순절에 첫 제자들이 받았던 것처럼, 동일한 선물 즉 성령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도행전 10:46; 19:6과 아마도 8:17에서 나타난 방언들과 예언은 두 번째이자 규범적으로 구별되는 실존적 체험의 증거들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더 중요한 새로운 언약 시대로 진입하는 구속 역사적 시작을 알리는 징표들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관점은, 오순절이(혹은 사도행전 전체가) 우리에게 개인적인 성령 체험에서 두 단계로 된 전형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시발점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 주심의 효과 속에 참여함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성령 체험의 차이를 비교하며 그 이후의 성령의 부어 주심을 풀이하고자 도식적인 유비를 제시한다. 이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오순절과 그 다음에 발생한 사건들이 정확히 해석되려면 거기에 맞는 적합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시민들 자기 집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먹던 한 도시에서 공동 저수장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공사가 끝나자 물은 송수관을 통해서 각각의 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또 이 도시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 있고, 양쪽 모두 같은 저수장에서 물이 공급되어야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급수는 한 차례만 이루어졌고, 급수시설의 공식적인 개방도 단 한 차례만 있을 수 있었다. 위쪽 도시의 물 배급은, 비록 특별하긴 하지만, 앞선 사건의 잔존 효과를 통해서 주어지고 있다...오순절에 그는(성령은) 몸 안으로 부어지는데, 단지 일부 사람들 예컨대 유대인의 목을 축여 주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기원적인 부어 주심이요, 이방인에게는 가이사랴에서 추가적으로 부어졌다. 둘 다 같은 본질이지만, 각기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들 외에도 사도들이 손을 얹음으로써 수반되는, 성령의 별도의 간헐적인 부어 주심이 상당수 있었다....때때로 개개의 집과 도시의 저수장 사이에 새로운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몸의 새로운 일부가 교회에 추가되고, 새로운 회원에게도 성령이 그 몸으로부터 부어졌다.
사마리아의 고넬료의 집과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초대교회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정황이라는 측면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듯이, 오순절 역시 '반복'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 안으로 부어지는 방식으로 그 안에 참여한다(참고. 롬5:5). 따라서 각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고전12:13).
우리가 오순절을 동떨어진 성령의 사건이라거나 첨가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측면으로 볼 때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오순절)은 즉위식의 가시적 표현이다.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님으로 높여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가 되시고 성령에 대한 그분의 메시아적 요청이 허락되었다고 하는 감추어진 실재의 공개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이미 일부 고찰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 2:33에 있는 베드로의 선언은 시편 2:6-8("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의 메시아적 약속 성취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이 요청, 즉 단계별로 이루어질 약속 성취를 위해 성령의 오심을 간구하시는 것이다(참고. 갈3:13-14; 렘31:31 이하; 요14:16). 그리스도의 요청은 허락되었다. 즉위식의 모든 가시적 표현처럼, 오순절은 바로 그 본질의 면에서 독특한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이나 부활 그리고 즉으심 등의 사건들처럼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 역사의 한 사건이요, 구원의 적용의 눈금으로 짜맞춰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부활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로서(롬4:24) 유효화되는 증거이듯이,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즉위하심의 증거다. 이것은 오순절에 실존적인 차원이 없다거나 오늘날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요단 강, 광야, 겟세마네 혹은 골고다를 체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오순절'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오순절에 참여한다는 식의 표현은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순절 자체는 십자가에 달리심이나 빈 무덤 혹은 승천과 같이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중세 미사의 '오순절 식' 형태를 만들어 내려는 것과 같이 반복될 수 없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참된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약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른 성령 세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 세례와 고린도전서 12:13에 바울에 의해서 기록된 성령 세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 부활 그리고 승천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의 현재의 체험과 의미심장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원리를 매우 강조한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 부활과 통치하심(롬6:1 이하; 갈2:20; 골2:9-3:4)과 같은 모든 구속사적인 사건들에 함축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오순절은 그 성격상 모든 세대를 통틀어 단회적인 것이면서도, 그 날에 일어난 성령 세례에 함축된 의미는 그 날의 강둑을 넘어 모든 시대에 걸쳐 흘러 넘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종족, 언어, 백성, 나라(계5:9)의 백성을 깨끗하게 씻어 내듯이, 성령 역시 오순절에 이르러 찟겨진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넘쳐흐르고, 그 곳에서 유대를 통과하여 사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도달한다(행1:8).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된 모든 사람은 제자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선물을 받는다. 따라서 성도들이 오순절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과 연루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3).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성령 세례는 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 예언되고 오순절에 체험된 성령 세례와 구별되는 것이라고 종종 주장되어 왔다. 후자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세례를 베푸시는 자요 성령은 그 요소인 반면에, (바울이 말하는) 세례에서는 성령이 세례를 베푸는 자요,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세례를 받아서 들어가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임스 던은 그것을 이와같이 설명한다.
신약 성경에서 '안에'는 전치사가 '세례를 주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일 경우 그 전치사가 세례를 주는 자를 수식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이와 반대로 그 단어는 전체 구절의 일부일 때를 제외하고는...언제나 그 안으로 세례 받는 자들이 침수하게 되는(혹은 그것으로 부음을 입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가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묘사하는 말들(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시기적으로 다른 체험을 의미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유의 체험을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과 배치됨을 뜻한다. 오캄의 면도날은 때로 중세 철학에서 그러하듯이 성경신학에서도 타당하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물을 마셨다고 지적한다. 오순절 사건의 요소들은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오순절의 구속사적( 영 단번의) 측면을 실존적이며 반복되는 측면들로부터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오순절의 몇 가지 요소는 분명히 영단번의 사건으로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제자들의 기다림이 이 범주에 속하는데, 불의 혀같이 갈라지고 강하고 급한 바람소리가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요소들은 심지어 사도행전 내에서도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언이 터진 것은 고낼료의 집에서(행10:46) 그리고 에베소에서(행19:6) 반복되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사마리아에서의 성령의 임재가 가시적 특징을 지닌 것(행8:17-18)으로 보아 방언의 증거도 거기서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반복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설펴본 바와 같이, 이 세가지의 경우는 사도행전에서만 있는 특유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예를 들어, 에디오피아 국고 내시, 다소의 사울, 루디아, 빌립보의 간수) 그런 현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반복은 그것들이 발생한 각 사건의 독특한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마리아와 가이사랴는 사도행전 1:8의 계획이 진척되어 가면서 거치는 단계들 이었다. 에베소는 옛 언약의 세계와 요한의 세례로부터 새 언약의 세계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 세례로의 전환점에 대한 표식이다. 사도행전 자체에서 볼 때(신약 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이떠하든 간에), 오순절의 방언은 후대의 성도들의 초기 체험에서 통상적으로 반복되는 요소로 생각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다른 측면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이 권능을 가져올 것을 약속하셨고, 그 결과로 그들이 이 땅 전체를 통해서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9; 행1:8).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였고' 그 결과로 방언을 하게 되었다. 방언의 반복이 사도행전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반면, 성령이 개인들을 충만하게 채워 권능을 주는 일은 많은 경우에 반복되고 있다.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는 성령으로 채워졌다거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지속적인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떄로 개인의 독특한 충만의 체험을 묘사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플레로'(pleroo)라는 계통의 단어가 쓰였다(예를 들어, 눅4:1; 행6:3; 참고. 엡5:18). 후자의 경우에는 동사 '핌플레미'(pimplemi)가 사용되었다(예를 들어, 눅1:41, 67; 행2:4; 4:8, 31; 9:17). 전자의 의미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압도적으로 성령의 주권 아래서 사는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엡5:18).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기 위한 특별한 능력과 권능의 유입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8이 지칭하는 바요, 사도행전 2:4에서 증거된 것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의 설교와 항상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권능'을 받는다.
오순절에서 권능의 부여와 성령의 충만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갖지만,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하나의 동떨어진 현상이 아니며 1:8의 특별한 계획에 관계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것의 반복은 그 같은 유형을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의 이러한 측면은 반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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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우리는 오순절에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을 주목하여 왔다. 곧 구속사적인 차원과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이다. 전자는 단회적으로서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후자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측면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은 타락한 창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로 만들어 졌다. 이 세상을 통해서 그분은 자신의 불가시적인 본성의 완전성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주신다. 특별히 그분의 형상인 사람들 안에는 그분의 영광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였다(롬1:21).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야 할 자신의 몸을 더럽혔고(롬1:28)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23).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히1:3) 그 영광이 회복되었다.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육체를 입으심으로, 그분은 이제 영광 가운데서 우리와 같은 육체 안에서 높아지셨다. 창조의 종말적인 목표는 첫 열매 되신 그분 안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는 그분이 우리 안에 영광을 회복하실, 그분의 성육신의 전 기간 동안 긴밀히 동행하신, 자신의 영을 보내신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성령이 주어진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의 재건에 있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이런 지속적인 사역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음
신약 성경은 성령과의 교제를 두 가지 기본적인 시발점, 즉 하나님이 보내시고 사람이 영접하는 관점을 기술하고 있다. 성령은 성부에 의해서 보내졌다(눅11:13). 그는 또한 개인에 의해서 영접되어야만 한다(요7:39; 행19:2; 롬8:15; 갈3:2).
바울은 이러한 영접과 관련된 심리학적 상태에 대해 묵상하는 맥락에서, 그것은 '율법을 준수해서'가 아니라 이와 정반대로 '네가 들은 바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갈3:2, 5). 성령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상황에서 주어진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 세계가 성령을 체험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시작으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입문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과 그분의 내주하심을 실제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의 영접 그리고 내주하심과 동일한 실재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동거하시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8:8-9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령의 임재를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분명히 밝히는 바와 같이, 두 실재는 경륜적으로 하나요 각 개인에게 동일한것으로 체험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 외에 성령을 받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것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그 안에 무엇이 함축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장들을 통해 제시될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의 제4장 '오늘날의 오순절?'中에서 발췌(91-10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