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창고 관리 더불어 종교적 면모도 엿보여
쌀 바치는 사장 곁엔 스님들 있어…한 범주일 가능성도 셈하는 능력 갖춘 사람들은 불교 교단 안팎에 다수 존재 사창 제도 확대되자 사장 수 증가하면서 종교 활동 활발
사장이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연화활동을 전개한 사례는 이후에도 낙산사 건축불사 등을 배경으로 계속됐다. 낙산사 전경. [법보신문DB]
지난 글에서 사장(社長)이라는 존재를 소개하며 그 성격의 모호함에 대해 언급하였다.
세종 30년(1448)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 용어가 6개월가량의 간격을 두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언급된다는 것이 모호함의 핵심이었다.
이해 5월 거론된 사장이란 대구 지역에서 처음 시범 운영된 사창의 관리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당시 대구 지역에는 15곳의 사창에 각 1명씩 사장이 존재했으며, 사창의 운영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세조 때의 일이다.
한편 세종 30년 12월 한양 불당의 낙성식에 사장들이 외승(外僧)들과 함께 공궤에 초대받았는데, 초대받은 이의 수는 사장과 외승을 합하여 700~800명이라고 하였다.
이 두 부류의 사장을 같은 존재로 보기에는 각각의 기록이 처한 맥락이 너무 다르다. 대구의 사장들은 곡식 창고의 경영인이라는 직능적 성격을 지니지만,
불당 낙성식의 사장들은 외승과 함께 종교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분히 종교인적인 면모를 보인다. 인원수로 헤아려도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산술적으로 세종 30년 사창 관리자인 사장은 전국에 15명이 존재했을 뿐이지만, 그해 겨울 한양에 모인 사장과 외승은 합쳐서 수백을 헤아리는 수였다.
두 부류 사장의 이질성에 힘을 싣는 이러한 판단에 대해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한양 불당에서 공궤 받은 이는 사장과 외승이 합쳐서 수백이므로 그 중 사장이 몇 명이나 참석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대구의 사창 관리자 15명이 모종의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아 한양까지 먼 길을 나섰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종교행사에 초청받았던 그 모종의 이유란 무엇일까.
사장은 곡물을 관리한다. 또 곡물창고의 경영인에게 읽고 셈하는 능력은 필수이다. 세종 30년으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뒤의 일이긴 하지만 세조 10년(1464)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가(御駕)가 청주에 이르렀다. 사장 40여명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다. 또 승려한 명이 목탁[鐸]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세조실록’ 32권, 10년 2월23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사장은 임금의 행차를 축하하여 향안과 함께 쌀 70말을 바치고 있다. 향안이란 왕실과 국가의 행사에 빈번하게 수반되던 지물이므로 이를 특별히 불교와 연관지을 것까지는 없다. 다만 이들이 쌀을 바쳤다는 데에는 눈길이 머문다. 사창의 관리자가 바로 쌀 등의 곡물을 다루는 사람이 아닌가.
물론 전근대 사회에서 쌀은 포목(布木)과 함께 대표적인 교환수단이었지만, ‘실록’에 처음 기록된 사장이 바로 사창의 관리자 즉, 곡물을 다루는 존재였기에 기사의 내용이 심상하게 생각되지는 않는 것이다. 게다가 청주에서 사장들이 쌀을 바칠 때 그 곁에서는 스님이 목탁을 치고 있었다.
이는 앞서 한양 불당의 낙성식에서 사장과 외승이 함께 했었다는 사실과 맞물리며, 세조 10년 청주의 사장이 바로 세종 30년에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던 두 부류의 사장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한편 세조 11년(1465)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사장이 원각사의 연화를 사칭하여 본사(本寺) 조성제조(造成提調)의 명문(明文)과 인신(印信)을 만들어보시라고 속여 말하고,
납부하는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천민을 양인(良人)이 되게 하여 주고 사거인(徙居人)은 놓아 보내며 혹 햇수를 한정하여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준다고 하면서, 촌락을 황행하며 재물과 뇌물을 수렴하는 자가 있다 하니,… 승려[僧]와 속인(俗人)을 논하지 말고 잡아 가두어서 아뢰게 하라.”(‘세조실록’ 36권, 11년(1465) 8월13일)
일전에 살펴본 바 있듯이 연화란 시주들의 보시를 받아 불사를 실제로 경영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일은 대체로 스님의 소임이었지만 일반인이 그 역할을 맡은 예가 과거로부터 없지 않았다. 가령 고려 현종 1~2년(1010~1011) 충남 예천 개심사에서 석탑을 조성했을 때 지역의 토착 유력자가 동량을 맡았던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이태진, 「醴泉 開心寺石塔記의 分析」, ‘역사학보’ 53·54, 1972.)
그런데 세조 때에 이르러 “승려와 속인을 가릴 것 없이” 사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연화를 주도하며, 심지어 면천(免賤), 사면(赦免), 복호(復戶) 등과 같은 공적 업무를 자신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이 기사에서의 사장이 읽고 셈하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공무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사창의 관리자쯤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장이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연화활동을 전개한 사례는 이후에도 낙산사 건축불사 등을 배경으로 계속되었다.(‘세조실록’ 46권, 14년(1468) 5월4일 ; ‘세조실록’ 46권, 14년(1468) 5월6일) 사정이 이렇다면 사장의 출현과 그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첫째, 세종 30년 사창 관리자 신분으로 모집 임용된 사장은 그 직임에 걸맞게 읽고 셈하는 능력과 일정 정도 이상의 행정능력이 요구되었다.
둘째, 그런데 당시에는 그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불교 교단 안팎에 다수 존재하였다. 이들은 스님이거나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불교 신행에 대단히 익숙한 인물들로서 대중에게는 스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상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셋째, 따라서 그중 많은 이들이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불당 낙성식과 같은 종교 행사에 사장의 신분으로 스님들과 함께 초대될 수 있었다.
넷째, 세조 대에 이르러 사창 제도가 전국으로 확대되자 사장의 숫자도 증가하면서 사창 관리 뿐 아니라 종교적인 활동도 더욱 활발히 하게 되었다.
이 추정에는 근거가 충분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향후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폐기되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장과 관련한 몇 안 되는 조선의 기록들에서 바로 그 사장들에게 빈번하게 사창 관리인과 종교인의 모습이 혼재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하나의 가설로 남겨둘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세조 대에 들어서며 종교인으로서의 면모가 한층 두드러지게 된 사장은 성종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종교 활동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다.
지난 글에서 인용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 속 박중연(朴仲延), 김치경(金致敬), 윤동(尹同) 등 3인의 사장은 그 단적인 예이다. 각설하고,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지면을 내어 사장의 종교 활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