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욱(고려대 연구교수)
Ⅰ. 서 론
천태종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이라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태종의 개조는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이다. 제2조는 관정(灌頂, 561~632)이고, 제3조는 지위(智威, ?~680)이며, 제4조는 혜위(慧威, 634~713)이고, 제5조는 좌계현랑(左溪玄朗, 673~754)이다. 이 현랑의 제자가 바로 형계담연이다.
담연의 생애는 4시기로 나누어서 접근할 수 있다. 제1기는 탄생부터 17세 때 절동(浙東: 浙江省 金華로 추정)으로 도(道)를 물으러 가기 이전까지인데, 담연은 진릉(晉陵)의 형계(荊溪)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원래부터 유가(儒家)이어서 어려서부터 유학을 익혔다고 한다.
제2기는 17세 때부터 45세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의 초본(初本)을 완성하기이전까지이다. 담연은 17세 때 절동(浙東)으로 도(道)를 물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금화방암(金華芳巖)화상을 만나서 천태교문(天台敎門)을 배우고, 또한 『마하지관(摩訶止觀)』등을 받았다. 그리고 730년 그의 나이 20세 때에 담연은 좌계현랑(左溪玄朗)에게 배웠다.
제3기는 45세에『지관보행전홍결』의 초본(初本)을 저술한 때부터 55세에 『지관보행전홍결』을 완성하기 이전까지이다.이 시기에 등장한 담연의 저작은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 『지관의례(止觀義例)』, 『법화현의석첨(法華玄義釋籤)』 ,『지관대의(止觀大意)』, 『유마경약소(維摩經略疏)』이다.
제4기는 55세에 『지관보행전홍결』을 완성한 이래로 72세로 입적할 때까지이다. 이 시기의 저술에는 『지관보행수요기(止觀輔行搜要記)』, 『법화오백문론(法華五百問論)』,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유마경소기(維摩經疏記)』, 『금강비론(金剛錍論)』등이 있다. 이 5가지 저술이외에도 다른 저술도 이 시기에 작성되었겠지만, 현재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소개한 5가지 저술이다. 이 글에서는 담연의 저술 가운데서도 『십불이문(十不二門)』에 국한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십불이문』은『법화현의석첨』에서 따로 유행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법화현의』의 적십묘(迹十妙)을 풀이하고, 본십묘(本十妙)을 풀이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십불이문’이 설명되었다고 한다. 『법화현의』는 『묘법연화경』의 제목과 핵심내용을 풀이한 것인데, ‘묘법연화경’에서 ‘묘(妙)’를 ‘적(迹)’과 ‘본(本)’으로 나누고 각각 10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일본학계에서 코시로 타마키(玉城康四郞)는 『십불이문』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관념화’의 경향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은 이체(理體: 이치의 근본)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구체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코시로 타마키(玉城康四郞)의 주장에는 담연의 사상에 대한 부정적 가치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부정적 평가를 배제하고 다시 바라본다면, 『십불이문』에는 화엄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형이상학적 관념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화엄의 영향을 받아서 더욱 견고한 이론체계를 세우려고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편, 한국학계에서도 담연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참조하면서 필자는 『십불이문』에 나타난 담연사상의 특징을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아 더욱 정교한 이론체계를 세우려는 데 있다고 보고, 천태사상과 화엄사상이 결합한 구체적 모습을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이는 코시로 타마키의 연구를 수용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가려는 시도이다. 글의 전개과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면, 2장에서는 담연의 사상에 대해서 간단한 윤곽을 그리고, 3장에서 『십불이문』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Ⅱ. 담연사상의 일반적 성격
담연은 당나라시대에 천태종을 다시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화엄종과 선종에 대항해서 천태종의 이론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담연은 천태종의 독자성을 먼저 확보하고자 하였고, 그 다음에는 화엄종과 선종의 장점에 대해서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담연의 천태사상의 특징을 다음의 5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법화경』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이 중심경전에 속하는 것이어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서 담연은 한 걸음 더 나간다.천태종의 교판론에는 화의사교(化儀四敎: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4가지로 나눈 것)와 화법사교(化法四敎: 가르침의 내용을 4가지로 질적 구분을 한 것)의 구분이 있고, 『법화경』은 화법사교의 원교(圓敎)에 포함되는 것인데, 담연은 『법화경』이 화의사교와 화법사교를 뛰어넘는 경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법화경』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종파와 대항하여 천태종의 위상을 높게 하려는 데 있다.
둘째, 성구설(性具說)을 정립하였다. 성구설은 사람의 성품에 모든 가능성이 간직되어 있어서, 사람이 부처도 될 수 있지만, 지옥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악설(性惡說)의 의미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는 천태종을 처음 세운 천태지의에게서 발견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천태종의 중요교의로 자리 매김한 사람이 바로 담연이다. 성구설을 통해서 천태종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 담연의 의도이다.
셋째, 화엄종의 영향을 입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대승기신론』에서 제시하는 진여(眞如)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방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는 화엄종의 장점을 수용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점과 아울러서 담연의 저술에는 ‘상입(相入)’이라는 용어가 32번이나 나온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천태지의 저술에서는 ‘상입’이라는 용어가 3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여기에 덧붙일 점은 담연이 무정물(無情物)에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화엄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다. 화엄의 입장에서는 무정물에는 정인불성(正因佛性: 본래의 진여)이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법성(法性)’이라고 하고, 지혜성(智慧性)으로서 불성[了因佛性]은 없다고 한다. 아마도 담연은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다시 무정물도 불성[了因佛性]이 있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천태지의가 제시한 수행법인 10승관법(十乘觀法)을 사람의 소질과 능력을 의미하는 근기(根機)에 따라 구분하였다. 상근기의 사람은 10승관법의 첫 번째 항목만 닦으면 되고, 중근기의 사람은 7번째 항목까지 닦으면 되고, 하근기의 사람은 10가지 항목을 모두 닦아야 한다고 구분하였다. 이는 실천수행의 측면을 보다 명확히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담연이 이렇게 구분한 것은 실천적인 종파인 선종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이관(理觀)과 사관(事觀)의 구분이다. ‘이관’은 일념심(一念心)을 관조하여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원융삼제(圓融三諦)의 이치를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관’은 분석의 도구를 통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원융삼제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담연의 이러한 이관과 사관의 구분은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의 논쟁을 일으켰다. 산외파 중에서 경소(慶昭)와 지원(智圓) 등의 전(前)산외파는 안의 마음을 관조하는 것이 ‘이관’이고, 바깥의 물질을 관조하는 것이 ‘사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後)산외파인 신지종의(神智從義)는 4종삼매를 통해서 ‘이관’과 ‘사관’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정통파인 산가파에서는 4종삼매 중에서 상좌(常坐)삼매와 상행(常行)삼매와 반행반좌(半行半坐)삼매는 순수한 ‘이관’이고, 비행비좌삼매 중에서 선(善)과 악(惡)과 무기(無記: 선도 악도 아닌 것)를 관조하는 것만이 ‘사관’이라고 보았다.
Ⅲ.『십불이문』에 나타난 담연사상의 특징
이 장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담연 사상의 일반적 성격으로 거론되는 5가지 점에서 ‘화엄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십불이문』을 분석하고자 한다. 『십불이문』은 10가지 항목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저술인데, 가장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이고, 나머지는 이것의 내용을 좀더 부연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0가지 항목 중에서 앞의 항목은 뒤의 항목을 생기게 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색심불이문(色心不二門)은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이 생기게 하는 근거가 된다.
1. 『십불이문』의 기본적 성격: 천태와 화엄사상의 결합
『십불이문』에서는 10가지 불이(不二)를 말하고 있지만, 그 요점은 두 번째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에 있다고 생각되므로, 그 내용을 정확히 안다면 『십불이문』의 특징을 판단할 수 있다. 외부의 대상을 관조하면 그것이 마음과 하나되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內]과 밖[外]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내외불이문’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두 번째 안[內]와 밖[外]이 둘이 아닌 문(門)이다. 경계를 관조한다는 것은 안과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바깥[外]은 저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물질과 마음이 그대로 공(空)․가(假)․중(中)이라는 사실에 의탁하는 것이다. 공(空)․가(假)․중(中)의 묘(妙)함 때문에 물질과 마음의 근본[體]이 끊어지고, 그리고 하나의 실성(實性)이므로 공․가․중이 없다. 물질과 마음이 분명하므로 진실하고 깨끗한 것과 활연히 같아지고, 다시 중생의 7가지 방편의 다름[異]도 없다. [따라서 이 경지에서는] 국토의 깨끗함과 더러움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의보와 정보가 마침내 밝아질 것이다. 이른바 안[內]은 바깥의 물질과 마음이 일념(一念)이면서 무념(無念)임을 먼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삼천 가지가 공․가․중임을 안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내(內)와 외(外)가 둘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관조할 경계는 안[內]과 밖[外]으로 구분되는데, ‘바깥’은 바깥 대상이 그대로 공(空)․가(假)․중(中)임을 관조하는 것이고 동시에 공․가․중(中)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실성(實性)에서는 공․가․중도 없으므로 모든 물질과 마음을 초월하고, 또한 동시에 공․가․중이므로 물질과 마음이 진실되고 청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깥의 관조대상은 물질과 마음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또한 물질과 마음이 분명히 나타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안’은 바깥 대상이 일념(一念)이면서도 무념(無念)임을 아는 것이다. ‘일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무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깥의 대상은 ‘일념’의 관점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무념’의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관조하면 내부의 마음과 외부의 대상세계가 하나가 되는 경지가 열린다. 이 점에서 ‘안’과 ‘밖’은 서로 만난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부분은 ‘제석천의 그물’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화엄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를 표현하는 비유적인 말인데, 이것을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사상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십불이문』은 화엄의 영향을 받아서, 그것에 기초해서 천태사상을 정교하게 전개하려는 담연의 의지가 나타난 작품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상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외(外)의 두 경우 공(空)․가(假)․중(中) →물질과 마음을 초월한다. 물질과 마음이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관계로 나타난다. 공․가․중(中)의 이치도 없다. →물질과 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內)의 두 경우 일념(一念) →물질과 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삼천 가지가 공․가․중임을 아는 것이다. 무념(無念) →물질과 마음을 초월한다.
2. 『십불이문』의 구체적 전개
앞에서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을 살펴보았다. 이제 나머지 8가지 불이(不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8가지 불이(不二)의 항목 전부는 아니지만, 5가지 불이(不二)의 항목에서 화엄사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① 담연은 닦음[修]과 성품[性]이 둘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닦음으로 인해서 본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본래의 성품이 있어야 닦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이 둘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닦음[修]과 성품[性]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대목에서도 화엄사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닦음[修]과 성품[性]이 없고 다만 하나의 묘한 승[妙乘]임을 안다면 분별할 것도 없고 법계가 분명해 질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분별을 할 것도 없고 법계가 분명해 질 것이다”는 표현은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법계’는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천태종의 ‘십법계’에서 말하는 법계는 일반적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축생법계는 동물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② 담연은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에 3궤(三軌: 眞性軌․觀照軌․資成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因]이고, 이 원인을 토대로 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3열반(三涅槃: 性淨涅槃․圓淨涅槃․方便淨涅槃)이라고 하면서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원인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면, 원인이면 충분할 것이고 결과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원인이 전부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미혹된 성품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사실은 원인에 모든 것이 갖추고 있다. 이 원인을 오래 연마하면 거기에 해당하는 결과가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③ 더러움[染]과 청정함[淨]이 둘이 아니라고 담연은 말한다. 우선 더러움[染]과 청정함[淨]에 대해 담연은 정의를 내린다. 담연은 무명(無明)과 법성(法性)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 기초해서, 법성과 무명이 모든 번뇌[法]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더러움[染]이고, 무명과 법성이 모든 인연에 두루 응하는 것을 청정함[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무명과 법성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번뇌가 생기는데, 이것이 더러움[染]이고, 무명과 법성의 관계를 제대로 보고 그 지혜에 근거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청정함[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담연은 청정해지는 과정을 ‘일념삼천설’과 ‘공(空)․중(中)’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삼천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공(空)․중(中)으로 수행을 완성해 나간다. 이 둘을 겸비할 필요가 있다고 담연은 강조한다. 그리고 더러움과 청정함이 둘이 아니라는 대목에서도 화엄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삼천의 인과를 모두 연기(緣起)라고 이름한다. 미혹과 깨달음의 과정[緣起]은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찰나의 성품은 항상하고, 연기의 이치는 하나이다. 하나의 이치 안에서 정(淨)과 예(濊)가 나누어진다.
위 인용문에서 삼천의 인과를 모두 연기라고 한다는 것은 일념삼천설을 ‘연기’의 입장, 곧 ‘화엄종의 법계연기’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화엄종을 열은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는 인(因)과 과(果)가 같은 근본[體]이므로 하나의 연기를 이루는 것이 일승의 의미라고 주장하는데, 이 점이 위의 인용문의 내용, 곧 ‘삼천의 인과를 연기’라고 하고 ‘연기는 하나의 이치’라고 하는 것이 화엄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④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둘이 아님을 담연은 말한다. ‘의보’는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환경을 의미하고, ‘정보’는 중생의 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념삼천설에서 3가지 국토를 말하고 있는데, 담연은 중생세간과 오음세간은 ‘정보’에 속하고 국토세간은 ‘의보’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 ‘의보’와 ‘정보’가 모두 일심 안에 있으므로 ‘의보’와 ‘정보’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여섯째, ‘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니라는 문(門)이다. 이미 비로자나불이 한 몸이고 둘이 아님을 증득하였는데, [이는] 시작 없는[無始] 일념삼천(一念三千)이기 때문이다. 삼천 가지 중에서 중생세간과 오음세간의 2천 가지가 ‘정보’이고, 국토세간의 일천 가지가 ‘의보’이다. ‘의보’와 ‘정보’가 이미 일심에 있으니, 어찌 일심에다 주관[能]과 객관[所]을 나누겠는가? 비록 주관과 객관은 없지만, ‘의보’와 ‘정보’는 분명하다.
위 인용문에서 ‘의보’와 ‘정보’가 일심(一心)에 있다는 표현은 화엄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천태의 일념삼천설에서 ‘일념’은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그렇지만 ‘의보’와 ‘정보’가 일심에 있는데 이 일심이 주관과 객관을 뛰어넘은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는 청정한 마음이 되고, 따라서 일념삼천설에서 말하는 망념(妄念)이 아니다. 나아가 다음의 인용문에서는 화엄사상의 영향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하나 하나의 티끌 같은 찰토(刹土: 국토)가 전체의 찰토(刹土)이고, 하나 하나의 티끌 같은 몸[身]이 전체의 몸[身]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보자면] 넓고 좁고 뛰어나고 못난 것을 구분하기 어렵고, 깨끗하고 더러운 장소[方所]가 끝이 없다. 만약 일념삼천설과 공․가․중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자재한 용(用)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입장에 설 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이것과 저것, 사(事)와 이(理)가 서로 거두어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하나 하나의 찰토(刹土)가 전체의 찰토(刹土)이고 하나 하나의 몸이 전체의 몸”이라고 말한 것은 화엄의 일즉일체(一卽一切)와 같은 내용으로 생각된다. 이 입장에 설 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한 경지, 그리고 이것과 저것,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거두어들이는 경지가 열린다. 나아가 이러한 경지는 일념삼천설과 공․가․중의 이치에 근거한다. 이는 담연이 천태사상에 화엄사상을 결합시켰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이다.
⑤ 자기의 수행[自]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他]이 둘이 아님을 담연은 말한다. 자기의 수행이 가능한 것은 자기 마음에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이 점에 기초해서 수행이 무르녹으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 이 점에서 보면 자기의 수행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의 수행은 공(空)과 중(中)에 있고, 다른 사람은 돕는 것에는 삼천 가지가 있다. 담연은 중생의 근기가 여러 종류이지만, 삼천 가지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또한 중생이 교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중생의 마음에 삼천 가지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고, 부처가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은 삼천 가지의 이치가 가득 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담연은 주장한다.
⑥ 삼업(三業)이 둘이 아님을 담연은 말한다. 이번에는 담연은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몸․입․마음을 활용해야 한다. 우선, 마음으로 교화할 중생의 근기를 헤아리고, 그 근기에 맞추어서 몸과 입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다시 말해서, 몸으로 중생을 위해 봉사하고, 입으로 중생을 위해서 가르침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는 것과 몸․입으로 하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 나아가 이 입장을 더욱 밀고 나가면, 진신(眞身)과 응신(應身)이 다르지 않고, 방편의 가르침과 진실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내용이 다른 것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제시한 것이지 실제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은 아니고, 진신(眞身)과 응신(應身)도 중생의 차원에서 보자면 다른 것이겠지만 그 몸을 나타내는 쪽에서 보자면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업(三業)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대목에서 화엄사상의 영향이 보인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마음과 대상세계[色]는 하나이어서 도모하지 않아도 교화된다. 그리고 지극한 이치에 항상 부합하여 중생의 근기[物]에 따라 행위한다[施爲]. 그러니 어찌 백계가 일심이 아니겠는가? 계(界)와 계(界)가 삼업이 아님이 없다. 계(界)도 오히려 일념(一念)인데 어찌 삼업이 다르겠는가?
위 인용문에서 “백계가 일심(一心)”이라는 표현은 일심을 강조하는 화엄사상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음과 대상세계가 하나[心色一如]라는 표현도 화엄사상의 영향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⑦ 권(權)과 실(實)이 둘이 아님을 담연은 말한다. 십법계를 방편[權]과 진실[實]로 구분하자면, 불법계(佛法界)는 진실이고 나머지 9가지 법계는 방편이다. 그렇지만 십법계가 십법계를 다시 포함한다는 천태의 십계호구설(十界互具說)의 관점에서 보면, 불법계에 나머지 9가지 법계가 들어 있고, 9가지 법계에도 불법계가 들어 있으므로 불법계와 9가지 법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천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백법계는 일념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의 하나의 이치에서 보자면 방편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지만 현상에서는 방편[權]도 존재하고 진실[實]도 존재한다.
⑧ 은택을 받음[受潤]이 둘이 아님을 담연은 말한다. 중생은 방편의 가르침도 받아들이고 진실의 가르침도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이것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중생의 마음 속에 이미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중생이 가르침을 받을 때[熏習]에 그 내용이 방편이나 혹은 진실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이치로 보자면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을 구분할 수 없고, 이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은 평등하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도 화엄사상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중생[物]의 근기와 [부처의] 응(應)함이 부합하고, 몸[身]과 국토에 치우침이 없다. [따라서 모두] 동일한 상적광토(常寂光土: 법신이 머무는 국토, 곧 진리의 세계)가 되고, [이는] 법계(法界)가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삼천 가지가 동일하게 마음자리에 있고, 부처의 마음자리와 삼천 가지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위 인용문의 내용은 중생의 근기에 부합하게 부처가 가르침을 주게 되면,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 곧 ‘상적광토’가 되고 이 때 진리의 세계인 법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계’라는 표현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화엄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Ⅳ. 결 론
먼저 『십불이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 그 특징을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십불이문』에 묘사된 것은 10가지 불이(不二)이지만 첫 번째 불이(不二)의 내용은 두 번째 불이(不二)의 내용에 포함되므로 9가지 불이(不二)에 대해 살펴보았다. ①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에서는 안과 밖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외부 대상을 관조하면 마음과 하나 되는 경지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 점에 근거해서 안[마음]과 밖[외부 대상]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이 설명 속에 물질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색심불이문(色心不二門)’의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② 수성불이문(修性不二門)에서는 닦음[修]과 성품[性]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닦음이 있어야 본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또한 본래의 성품이 있어야 닦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③ 인과불이문(因果不二門)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생의 마음에 3궤(三軌)를 간직하고 있고, 이것에 기초해서 ‘결과’인 3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④ 염정불이문(染淨不二門)에서는 더러움[染]과 청정함[淨]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더러움과 청정함은 하나의 ‘연기’에서 갈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기’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번뇌에 물들게 되고, 이 ‘연기’의 관계를 제대로 본다면 지혜를 얻게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길로 나아간다. 이 점에서 더러움과 청정함은 둘이 아니다.
⑤ 의정불이문(依正不二門)에서는 ‘의보’와 ‘정보’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일심 속에 ‘의보’와 ‘정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서 담연은 ‘일념삼천설’을 제시한다. 삼천의 숫자를 이루는 요소 중에 3가지 국토가 있는데, 여기서 중생세간과 오음세간은 ‘정보’에 속하고, 국토세간은 ‘의보’에 속한다는 것이다.
⑥ 자타불이문(自他不二門)에서는 자기의 수행[自]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他]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수행이 가능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 그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 근거해서 수행이 완성되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가능성에 기초해서 자신의 수행도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⑦ 삼업불이문(三業不二門)에서는 세 가지 업(業)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교화할 때 몸․입․마음을 활용하는데, 마음으로 중생의 능력을 헤아리고 거기에 맞추어서 가르침과 봉사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업과 ‘입’․‘몸’의 업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⑧ 권실불이문(權實不二門)에서는 방편[權]과 진실[實]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천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십법계는 십법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의 불법계(佛法界)에 방편의 9법계가 포함되고, 방편의 9법계에 진실의 불법계가 포함된다. 이 점에서 보면 방편과 진실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⑨ 수윤불이문(受潤不二門)에서는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受潤]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둘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속에 방편과 진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십불이문』에 나타난 담연 사상의 특징을 알아본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태사상과 화엄사상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십불이문』의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에서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나타난다. 안[內]의 경지는 삼천 가지가 공․가․중(中)임을 아는 것으로 연결되고, 밖[外]의 경지는 물질과 마음이 화엄종에서 말하는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관계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볼 때, 천태의 실상론(일념삼천설과 일심삼관)과 화엄의 중중무진(重重無盡: 제석천의 그물로 비유됨)의 세계관이 결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십불이문』의 다른 항목에서도 발견된다. ‘의정불이문(依正不二門)’에서는 하나 하나의 찰토(刹土)가 전체의 찰토이고 하나 하나의 몸이 전체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도 일즉일체(一卽一切)를 말하는 화엄의 중중무진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의정불이문’에서 “의보와 정보가 일심(一心)에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표현도 화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화엄의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심[一] 속에 의보와 정보[一切]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천태에서 ‘일심’은 청정한 마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망념(妄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의정불이문’에서 사용된 ‘일심’은 청정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업불이문(三業不二門)’에서도 “백계가 일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의정불이문’의 경우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또한 『십불이문』에서는 다른 측면에서도 천태사상과 화엄사상의 결합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법계(法界)라는 말을 천태의 의미가 아니라 화엄의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화엄종에서는 ‘법계’라는 말이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고, 천태에서는 ‘일반적 세계’를 뜻한다. 예를 들어, 천태의 십법계 가운데 ‘축생법계’라고 한다면 ‘동물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처럼 ‘법계’를 화엄의 맥락으로 사용하는 예가 ‘수성불이문(修性不二門)’과 ‘수윤불이문(受潤不二門)’에서 발견된다.
그 다음으로, 연기(緣起)라는 말을 화엄의 맥락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염정불이문(染淨不二門)에서 “삼천의 인과(因果)를 연기”라고 말하고 이러한 “연기의 이치는 하나”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도 “인(因)과 과(果)가 같은 근본이므로 하나의 연기를 이루는 것이 일승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담연이 ‘염정불이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인과(因果)가 같은 것이고 이것이 하나의 연기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담연은 ‘연기’의 개념을 화엄에서 빌려와서 자신의 사상에서 활용하였다.
이처럼, 『십불이문』에서는 화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관 곧 ‘일즉일체’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있고, 이는 ‘일심’을 청정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법계’라는 말도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연기’의 의미도 화엄의 맥락으로 사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담연이 『십불이문』에서 천태와 화엄을 결합하여 천태교학을 더 풍요롭게 하고자 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한계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천태와 화엄은 전혀 다른 사상 내용이라는 가정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천태의 사상에서 일부가 화엄에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화엄이 성립했다고 한다면, 논의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천태지의가 화엄에 영향을 준 것을 가려내야 할 것이고, 담연이 화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천태의 영향을 받은 것을 제외한 화엄만의 독창적인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는 훗날을 기약하고자 한다.
주제어 내외불이문(內外不二門) nei-wai pu-er men, 일즉일체(一卽一切) i-chi i-qie, 법계 fa-jie, 연기 yüan-ch'i, 일심 i-hsin, 천태와 화엄의 결합 the combination of T'ien-t'ai and Hua-yen
Chan-jan'thoughts in "Shi-pu er-men"(十不二門)
Lee, Byung-Wook
In this paper I will show the characteristic of Chan-jan`thoughts in "Shi-pu er-men"(十不二門). It is the combination of T'ien-t'ai and Hua-yen. It is divided three point. First, T'ien-t'ai of shi-hsiang lun(實相論) and Hua-yen of i-chi i-qie(一卽一切) are combined. In nei-wai pu-er men(內外不二門) of "Shi-pu er-men"(十不二門), shi-hsiang lun(實相論) belongs to nei(內) and i-chi i-qie(一卽一切) belongs to wai(外). Second, Chan-jan uses fa-jie(法界) of Hua-yen in "Shi-pu er-men"(十不二門). Fa-jie(法界) of Hua-yen means the truth of world whereas fa-jie(法界) of T'ien-t'ai means general world. Third, Chan-jan uses yüan-ch'i(緣起) of Hua-yen in "Shi-pu er-men"(十不二門). Hua-yen says that the law of yüan-ch'i(緣起) is one and Chan-jan says that the law of yüan-ch'i(緣起) i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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