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가 이어지면서 해외여행은 국내 여행으로, 국내 여행은 다시 주변 나들이로 행동반경이 줄어들게 되었다. 처음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음에 슬퍼했지만, 점차 주변에도 볼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도 정말 가볼 곳이 많았다. 그동안 멀리 떠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여행을 가려고 했기 때문에 몰랐던 사실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미술관,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며 아기자기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우리 부부에게 그런 의미로 북촌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 주변인 삼청동, 안국동은 정말 많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발길이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과감히 이곳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북촌 나들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랜만에 눈과 입, 마음이 모두 흡족한 '여행'이었다.
전통적인 동네에서 즐기는 문화 탐방


북촌 주변에는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공예박물관 등 전통과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산재해있다. 그중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으로 유명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늘 사람들이 붐비며 문화 예술의 핫플레이스로 인정받는 곳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이건희 특별전 예약에는 실패했다. 아이돌 콘서트 예약만큼이나 예약하기 어려운, 인기가 높은 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그 밖에도 흥미로운 전시들이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본관, 덕수궁관, 청주관, 그리고 서울관이 있다. 서울관은 2013년 개관 이래 다양한 현대미술을 다루는 전시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이곳이 원래 국군기무사령부 일대였기 때문이었다. 이 버려진 공간은 무형의 미술관, 군도형 미술관, 열린 미술관의 세 가지 주제의 '도심 속 미술관'으로 설계되었다. 미술관 뒤편에는 정독도서관 부지로 옮겨졌었던 조선시대 종친부의 유적이 복원되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술관 뒷마당에서 보는 인왕산의 모습은 이곳을 더욱 매력적으로 부각시킨다.




서울관 내부에는 예술영화, 실험영화, 국제영화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MMCA필름앤비디오 (MMCA Flim and Video)'와 더불어 전시, 퍼포먼스, 교육 등 다채로운 문화 예술 행사가 열리는 멀티 프로젝트 홀과 같은 문화시설이 있어 다양한 현대미술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또한 미술관에서 운영되는 전시, 교육 등과 연계된 다양한 아트 상품을 판매하는 '아트존 (ART ZONE)', 각종 전시 도록을 포함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출판물과 더불어 국내외 다양한 예술서적을 만날 수 있는 '미술책방 (Art Book)', 복합 차 문화공간 '티하우스 오설록', 다양한 한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 '두레', 테라로사 커피가 운영하는 카페테리아와 같은 부대시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문화 예술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곳에서 현재 예술계를 반영하는 현대 미술 전시를 보며 가슴속에 답답한 무언가가 풀려나가는 듯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작가들의 독특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곳이 서울이 아니라 해외 어딘가의 미술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시에 감탄하는 동시에 이전에 해외여행에서 들른 미술관, 박물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며 한국 미술관들의 전시는 언제쯤 이 정도 수준으로 올라올까 아쉬워했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이제 다른 나라의 미술관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나라의 미술관들의 수준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전시 관람을 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위치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운영시간 10:00-18:00 / 수요일, 토요일 야간개장 10:00-21:00
1월 1일, 설날, 추석 휴관
입장료 통합관람권(기획전) 4,000원
수, 토 야간개장 시 무료 관람(오후 6시~9시)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무료 관람
https://www.mmca.go.kr/
한지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곳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충만한 전시를 맛본 후, 들른 곳은 '한지문화산업센터'였다. 처음부터 이곳에 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북촌길을 걷다 보니 눈에 띄는 건물이 있었고, 건물 안에 무언가 재밌는 게 보여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성향과 어울리는 문화공간이 있었다. 우연히 찾아낸 문화 공간의 감성에 감탄하며, 북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한국공예재단과 디자인문화진흥원이 운영하는 기관으로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그 쓰임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전국 20여 개 전통 한지 공방을 토대로 종합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하고 있으며, 한지 분야 관련자들과 협력망을 구축해 한지의 생산 활성화 및 유통지원과 더불어 국내외 전시, 박람회, 세미나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지의 아름다움과 쓰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 한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이 공간에는 순수하게 한지만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들로 꾸며져 있다. '한지'를 생각하면 단순히 미묘한 느낌이 나는 흰색의 종이만 떠올렸던 우리들에게 이곳은 한지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아름답고 독특한 패턴들이 프린트되어 포장지, 박스, 모빌 등으로 이용되는 한지들을 보니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이렇게 다양한 쓰임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지였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느꼈던 벅찬 감동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일정상 이곳에서 짧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점이 아쉽다. 그래서 다시 찾아갈 예정이다.
한지문화산업센터
위치 서울 종로구 북촌로 31-9
운영시간 매일 10:00-19:00 / 월요일 휴무
http://hanjicenter.kr/hanji
한국 전통문화와 커피가 만나는 곳

전시를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커피계의 애플'이라 불리는 '블루 보틀'이었다. 블루 보틀은 압구정, 삼청동, 성수동, 제주도 등에 지점을 내며 한국의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고 있다. 블루 보틀의 특징은 커피의 퀄리티에 신경 쓰며 '스페셜티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며 그 지역에 특화된 건축물과 인테리어를 선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블루 보틀 삼청 카페'는 블루 보틀의 기존 건물과 유사하게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 깔끔함을 느끼게 했다. 이곳에서 커피 한 잔도 좋지만,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서 운영하는 '페어링'을 맛보기 위함이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이곳이 아닌 '블루 보틀 삼청 한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블루 보틀 삼청 한옥은 한옥이 즐비한 북촌 주변의 특성을 고려하여 한옥에 만들어진 카페다. 100%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커피와 어울리는 디저트를 선보이고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카페 뒤에 있는 10평 남짓한 한옥에 마련된 공간에서 커피와 전통, 자연, 예술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페어링은 커피 및 커피가 가진 맛과 향에서 영감을 얻은 특별한 음료와 디저트를 함께 맛볼 수 있어 독특함을 선사했다. 직원이 안내해 준 순서에 따라 음료를 마시고 디저트를 맛보자, 입안 가득 예상치 못했지만 조화로운 맛이 가득 차올랐다. 입안에 차오르는 전통적이면서 이국적인 맛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한옥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들어온다. 디저트와 음료를 담은 도자기 또한 백제 토기에서 영감을 얻은 도예가의 작품이라 한다. 전시에 이어 다채로운 경험을 누릴 수 있어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블루 보틀 삼청 한옥
위치 서울 종로구 삼청로2길 40-3
운영시간 매일 12:00-19:30 / 구정, 추석 당일 휴무
예약 https://app.catchtable.co.kr/ct/shop/bluebottlesamcheonghanok
페이스트리 페어링 / 한과 페어링 28,000원



이 밖에도 북촌의 장점을 꼽자면, 산책하기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전시를 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붐비는 맛집을 자연스레 찾기도 한다. 그도 아니라면 그저 동네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재미있다. 그냥 걷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재밌을 수 있을까? 데이트 코스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함께 하면서도 은근하게 현재의 트렌드가 은은하게 흐르는 곳, 그곳이 바로 북촌이다. 그 매력을 꽤나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자주 가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