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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존재와 법이 섞여 있다
<잡아함경>은 순일하지 않다.
경을 보다 보면.. 색성향미촉법을 5온으로 다른 곳에서는 5취온으로 사용하듯..
안이비설신의를 설하시는데.. 어떤 곳에서는 존재로, 또 어떤 곳에서는 법으로 설한다. 어떤 암시도 없이.
<잡아함경>을 수집정리할 수준이면 당연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214경>에서 안이비설신의는 마음을 연해 생긴 것[심연생]이라고 하셨는데..
<322. 안내입처경>을 보면..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눈은 곧 내입처(內入處)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눈이 내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내입처로서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인데, 깨끗한 색(色)이어서 볼 수는 없으나 상대가 있는 것이니라. 귀·코·혀·몸의 내입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은 내입처라고 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뜻을 내입처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뜻을 내입처라고 한 것은 마음[心]이나 뜻[意]이나 식(識)은 색(色)이 아니어서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뜻의 내입처라고 하느니라."
다시 물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빛깔은 외입처(外入處)라고 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색이 외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색을 외입처라고 한 것은 색은 4대로 된 것으로써 볼 수도 있고 상대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색을 외입처라고 하느니라."
또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소리를 외입처라고 하시고 자세히 분별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소리가 외입처입니까?"
라고 하여 안내입처를 포함한 10처.. 의와 법입처는 당연히 제외.. 는 지수화풍 물질인 4대 원소가 결합하고 화합하여 있는 물질인 존재로 설하고 있다. 이비설신입처도 마찬가지로 물질인 존재로 설명한다.
만일 <214경>에 나오듯 12처 등 일체를 법이라고 설하실 것이라면 처음 중간 끝이 순일하게 법으로만 설하시면 좋을 것을..
만일 <322경>처럼 12처 등 일체를 존재라고 설하실 거라면 처음 중간 끝 모두에 순일하게 존재로만 설하시면 지금처럼 헷갈리지 않을 터인데..
법으로 설하는 것과 존재로 설하는 게 섞여 있어 학인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앞에 나오는 <320경. 일체유경>과 <321. 일체법경>은 섞어서 수록한 정점이라 하겠다.
그러니 학인들이 맘 편히 존재와 법은 다른 게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정말 <잡(雜)아함경> 답다.
* '잡(雜)'의 의미는 작다, 짧다는 뜻이 있다. <잡아함경>은 대부분 짧은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잡아함경>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순일하지 않은 섞여 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주장이다.
그러나 법이 존재와 다른 게 아니라면 왜 세존께서는 존재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이란 말을 따로 만들었을까?
더군다니 법 Dharma이란 말은 진리라는 뜻이 있는 언어인데..
진리인 법과 일체를 가리키는 법의 의미 차이는 무엇이고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런 <잡아함경>을 보면 그대로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색을 볼 때.. 때로는 법으로, 때로는 존재로 본다.. 내 삶이 순간순간이 그냥 자연스럽게 법과 존재가 섞여있다.
<잡아함경>이 순일하지 않은 건.. 석가부처님의 상대 수준에 맞추어 설하시는 대기설법 때문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을 찾아와 배우려는 자들의 수준은 각기 다른데.. 거의 동시에 왔지만 한 사람은 존재 수준이고 또 다른 자는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라면.. 그에 맞게 설했을 것이니 그 옆에 있던 자들은 헷갈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 문외한이나 초심자에게 12처는 6근6경과 같은 존재로 위에 올린 <잡.322경>이 있고,
중간 정도 수준에 오른 자에게는 <잡. 214경>에서 마음인 법이 어떻게 존재화가 일어나는 지를 보여주고,
최고 수준에 오른 자에게는 이 자리에서 무명이 있으면 존재로, 무명이 없으면 법인 자리를 설하셨고..
그것을 이해한 제자들은 "이번 생 이후에는 새로 태어날 자아가 없음을 스스로 안다"는 아라한게를 읊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최고 수준 법문은 12연기법으로
'무명이 있으면'으로 시작하는 존재 세계가 드러나는 유전문과
'무명을 멸하면'으로 시작하는 법으로 귀환하는 환멸문 설법이 그것이다.
그러면 나와 세계는 어떻게 존재화가 일어나는가?.
12연기법의 유전문은 마음이 법으로 시작한 것이 어떻게 존재화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214경>을 다시 보면..
2. "두 가지 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3.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4.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느낌 뒤의 의도[思], 의도 뒤의 생각[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觸]·생각[想]·의도[思]이다.
5.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리고 <214경>에서 눈에 띄는 곳은..
안과 색 등 2법6쌍이 생기고 ---> 12처
2법에 의해 6식이 생겨 욕탐이 있는 안과 색과 안식의 화합작용[3사화합]이 일어난다. ---> 18계 생김
3사화합작용인 촉이 생기면 이어서 수, 상, 사[행]이 생긴다 ---> 5온 생김
지금껏 우리는 5온에 의해 12처가 생기고 18계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214경>에서는 마음에 생긴 12처에서 18계가, 18계에서 5온이 생기는 순으로 되어 있고..
그때 5온 역시 마음에 의해 생긴 게 된다."
라고 했다.
이때 드러나는 12처, 18계, 5온 모두는 <214경>에 있듯인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 인데.. 12연기법에서
(3사화합)촉을 연해 수가 생기고, 수를 연해 애가 생기고, 애를 연해 취가 생기고, 취를 연해 유가 생긴다고 하듯..
촉을 일으키는 안과 색과 안식은 안계, 색계, 안식계라 불리고..
18계는 식별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 애, 취를 연해
5온은 존재화가 일어난다.
사진으로 보는 나무와 직접 접촉하여 느껴지는 나무는 차이가 있고
사진 속의 나무는 법이라 할 수 있고, 접촉하여 느끼는 나무는 존재가 되는데..
사진 속 나무인 법이 어떻게 접촉하여 느끼는 나무가 될 수 있는지는
마음에 일어난 18계가 지,수,화,풍,식,공인 존재 6계로 느껴지고 접촉되는 과정을 알아야만 하지만..
관심 있는 이들이 스스로 알아보기를 권합니다.().
존재화가 일어난 이후에 12연기는 존재화된 12연기로 존재 세계 법인 3세양중인과설이 되는 것이다.
존재화가 된 세계에서 완전한 열반은 살아서는 불가능하므로 기독교에서 천국 가는 일은 죽어야만 가능하듯..
구경열반은 죽은 후에 간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살아서 완전한 열반을 얻어 부처님이 되었듯이.. 살아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려면..
존재화된 6근6경에 위해 드러난 세계가 사실은 일체유심조라 하여 마음인 2법6쌍에서 생긴 것임을 깨달아..
일체를 생기게 하는 근본인 마음에 일어난 2법6쌍을 멸함으로써
살아서 구경열반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마음에 일어난 2법은 멸해야만 하는 것인가?.
디지털 세계에서는 끊고 자르는 게 명확하다.
가속 단속 카메라인 CCTV는 정해진 속도에서 조금만 더 빠르면 무조건 카메라에 찍힌다.
그러나 경찰은 상황을 보며 비록 과속이라 해도 차를 세워 주의를 줄 뿐 티켓을 끊지 않는 경우가 있다.
기계는 디지털, 사람은 아날로그 세계인 것이다.
아날로그란 선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 하여.. 우리는 일곱 색깔의 크레용으로 그리지만..
실제 무지개를 보면 빨강과 주황의 경계를 정확히 그을 수 없다.
본래 무지개는 디지털인 일곱 칼라가 아니라 이어지는 무수한 칼라로 아날로그로 보인다.
외부에 있는 사과가 빛의 반사로 눈의 망막에 맺힌 후 뉴런을 통해 뇌에 전달되어 사과라는 인식이 생겼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색입처이며, 또 어디까지가 색계이고, 어디서 부터 색 인식인지.. 디지탈처럼 끊어지는 건지?.
얼음이 녹기 시작해 물이 되었다가 수증기가 되었으면.. 어디까지 고체이며 어디까지 액체이고 어디서 부터 수증기라고 분명히 끊을 수 있는 건지.. 섭씨 0도, 100도는 인간이 멋대로 정한 포인트일 뿐..
H2O는 0도, 100도가 없는 아날로그이다.
12연기를 보면 2법인 12처가 18계를 거쳐 존재로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 세계는 그렇게 단계 단계를 분명히 보여주며 법에서 존재로 되는 게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일어난 세계를 법 세계라 하고, 그것이 존재화가 되면 존재 세계라 하지만
법 세계와 존재 세계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아니 법세계는 말만 있을 뿐 이해도 잘 안된다.
결국 남는 건 존재 세계뿐이다.
해서 내가 눈으로 색을 본다고 한다.
306. 인경(人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어떤 비구가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思惟)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법을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사유한 뒤에 선정에서 일어나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사유하다가 '비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법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 그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두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眼)과 색(色), 이것이 그 두 가지이다.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이며, 촉과 함께 하여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무색음(無色陰)과 안과 색 등, 이러한 법을 사람[人]이라고 하며, 이러한 법에 대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어 중생(衆生)이라고 하느니라.
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눈으로 색을 보고, 나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코로 냄새를 맡고, 나는 혀로 맛을 보며, 나는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나는 뜻으로 법을 분별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이름은 이러하고 이렇게 태어났으며, 성(姓)은 이러하고 이렇게 먹으며, 이렇게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고 이렇게 오래 살며, 이렇게 오래 머무르고 이렇게 목숨을 마쳤다.'
비구들아, 이것을 곧 생각이라고 하고, 이것을 곧 마음의 기록이라고 하며, 이것을 곧 말이라고 한다.
이 모든 법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 생각과 원(願)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만일 무상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 생각과 원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또 그
괴로움은 생겨나고 또 괴로움은 머무르며, 또 괴로움은 소멸하고 또 괴로움은 자꾸 생겨서 일체가 다 괴로움뿐이다.
만일 다시 그 괴로움을 남김 없이 끊고 토해 버리며, 탐욕을 여의고 쉬며 사라지게 한다면,
다른 괴로움이 다시는 서로 잇따르지 않고 생겨나지 않나니,
이것이 곧 적멸(寂滅)이요 이것이 곧 승묘(勝妙)이니라.
이를 일러 남아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의 애욕이 다하며 탐욕이 없고 완전히 소멸한 열반(涅槃)이라고 하느니라..
본다는 것은 안과 색, 안식인 18계가 3사화합촉이 되어 보는 것이지만.. 우리는
내가 눈[안근]으로 색[색경]을 본다고 안다.
이때 나는 아트만이요, 이 몸과 생각의 주인으로 이 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석가세존께서 12처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그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고, 그것이 존재가 되면 6근6경이라 한다.
우리가 아트만이라 하는 이 몸과 생각의 주인은 실은 12처에서 생긴 것이기에 아트만은 항상하는 게 아닐 뿐 아니라
수행을 하면 12처를 멸할 수 있으니 그리되면
자신의 주인으로 알고 있던.. 존재하는 것으로 알던 아트만 역시 사라진다고 하신다.
임제스님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하셨는데.. 주인이 참으로 존재하는가..
석가세존께서는 45년 동안 항상 당신의 주인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부처님은 아트만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자 그런 아트만이 없어 괴로움이 머무는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임제 스님의 주인공(主人空)처럼 부처님 당신의 주인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니다.().
이해가 되시는지?.
나의 거울인 <잡아함경>은 내가 원하면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부처님 같은 <잡아함경>.().
고마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