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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 관한 시
2020-10-28 16:14:48
간이역 1
완행열차가 서지 않는다고 슬퍼 말아라
정적이 끊겼다고 울지 말아라
산협을 휘돌아가는
열차의 긴 꽁무니를 따라가며
유령처럼 손 흔드는 누런 들풀들
가슴속에 묻어둔 그리움이
얼마만큼 절절하다는 것이냐
거친 비바람 속에서 헉헉대는 열차는 이미 늙어
백발 연기를 하염없이 뿜는다
쇠바퀴도 틀니처럼 삐걱거리고
기적소린 흰연기처럼 새어 나온다
몸은 늙어가도
아직도 그때의 그리움 절절하구나
간이역 2
한낮에도 고라니 부부가 내려왔다
검은 그림자 숨바꼭질 하며 뛰어다니고
그들이 사라진 뒤로 노을이 황혼처럼 붉어간다
노을 속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들어 있는지
역 앞에 핀 백일홍도 노을 빛이다
머리에 붉은 꽃잎 붙이고 달려오는 완행 열차는
묵묵히 제 길만을 향해 달려가고
그때 힘차게 내뿜었던 기적소리는
내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타올랐다
기차
아직도 철로변에 사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부짖는 기적소리에
지칠 만도 하겠지만
그 사람은 이곳을 명당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 줄줄이 낳은 것도 기차 덕분이라
기적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고 한다
큰아들 역무원 된 것도 자랑스럽고
가끔 흔드는 흰 깃발만 바라봐도 뿌듯한데
기차가 지나가면
오두막집에 살던 옛날 생각에 사무쳐
아랫도리가 떨린다고 한다
지금은 책임지지 못할 사랑을 해 놓고
남편은 멀리 떠나갔지만
구질거리는 오두막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혹시라도 도망갔던 남편이 돌아올까 하는 믿음 때문이다
황간역
백년이란 인연을 잊지 못해 낮달이 뜬다
잃어버린 역을 찾다찾다 지쳐 버린 낮달이 속으로 운다
목 쉰 기적소리에 잠을 깨어 갈래머리 소녀와
역을 향해 달릴 때 잘그락 차오르던 자전거의 소음
고목 등걸에 자전거를 소처럼 메어 놓을 때
낮달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금테 모자 역장이 표 검사를 하며
야윈 손 흔들 때마다 긴 가방끈이 남루하게 흔들렸다
가방끈 길다고 무조건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이
열차는 날 외진 도시에 내려놓고 구슬프게 울었다
기적소리 그리워 내려왔지만 그 때의 역은 간곳없고
폐차가 된 열차는 코스모스 무리 속에 들어앉아
녹슨 세월을 갉아먹고 있었다
간절
간절한 사랑 때문에 그 여자 집을 나갔네
달빛 밟고 밤기차에 올라 흐느끼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달려갔네
달도 가슴 시린지 가끔은 먹구름에 얼굴 묻었네
나만치 간절한 사랑 해본
사람들 있으면 나와 보라고
밤기차는 흐느끼며 쏟아지는 달빛 속을 달려가네
강둑의 왕버들도 흑단 머리칼 풀어 물에 헹구네
물에 뛰어든 달 건지려다
그만 힘 빠져 손목을 놓아버렸네
기차
승객들을 내려주고
기차는 쌀쌀맞게 떠나가지만
내일이면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에 안심을 한다
오랫동안 승객들과 정이 들다 보니
열차는 그 마음 잊을수 없다는 듯
내지르는 기적소리는 쾌활하다
저 기적소리에 목맨 자 있었으니
얼마나 그리움이 크다는 것이냐
한때는 서울로 떠나간 옛 애인을 기다리는 설움에
훌쩍거리는 일 많았지만
이제는 지난 것들 다 용서하라며
열차가 기분 좋게 기적소리를 내 뿜는다
열차 속에서
완행열차가 고향 들녘을 지나간다
가을이 내려앉은 들판은 일몰 빛으로 넘치고
광주리를 인 아낙들 종종걸음으로 들길을 간다
낫질 하던 농부가
허리를 일으켜 열차를 본다
열차는 반갑다며 소리를 지르고
그 소리에 화답하듯 농부가 손을 흔든다
마주치는 농부의 얼굴에서
내 젊은 날의 모습을 본다
도회로 떠나고 싶어 아버지에게
애걸복걸하던 지난날의 투정이
열차의 기적소리에 묻어난다
난 그 농부가 고향 들판을 지키기를 바란다
도회에 산다는 것은 아귀다툼을 벌이는 일
먹고 사는 일이 고달프지 않다면
금빛 물결 출렁이는 들녘이 백 번 낫지
아암, 백 번 천 번 낫지
낡은 역
완행열차는 낡은 역을 좋아하더라
찻집 닮은 역사 앞 배롱나무
노인의 뼈대처럼 툭툭 불거져 있고
늙은 역무원 철길에 나와
흰 그리움 흔들던 곳
금테모자 역장이 괜히 부러워서
릉금흘금 쳐다보며 지나치던 곳
역장은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듯
몇 번이나 시계를 들여다보고
아는 승객들에게 힐끗 눈인사를 건네던 곳
쉼없이 오고가던 완행도
역무원처럼 늙어 오지 않고
배롱나무만 꽃잎 떨구며
오지 않는 완행열차를 기다리더라
황간역 2
벌써 백년이다
백년이라면 강산이 열 번이나 바뀌었을 지금
폐역이 되지 않기 위해 질주만을 꿈꿨지만
아쉽게도 간이역으로 남았다
빠른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완행은 벌써 사라졌지만
무궁화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이
그래도 눈물겹게 살갑지 않더냐
늙은 역무원의 흰 깃발 그리우면
햇살 쏟아지는 황간역 철길에 나가 보아라
흰 깃발 향해 풀뱀처럼 달려오는
비둘기호의 순정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라
철길
무작정의 질주가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정신없이 달려와 보니 생의 끝자락
앞으로 무엇을 더 할 것인가
여기까지 달려 온 것만 해도 감사한 일
달려 오는 동안 칡넝쿨들이 다리를 걸었지만
그것들 걷어 내고
철길 위에 선 것만 해도 다행이다
승객들을 태우고 내리는 일이 의무지만
사람들이 귓속말로 나누는 비밀 따위야 묻어두자
기적소리를 지르면서
그 비밀을 발설한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이제 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걸 용서하기로 한다
완행열차
열차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 소리에 놀라 잠깬 적이 많았지만
이제는 한물간 추억이 되어 가슴이 저릿하다
철로변 아이들한테는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래야 뛰놀던 걸음 멈추고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꽁무니에 눈길을 멈추고
잠깐이나마 꿈을 키울 것이다
지금 수신호를 하는 역무원도
그때 그 아이들처럼 꿈을 키웠고
가차의 꽁무니를 향해 흔들던 흰 깃발의 여운이
가슴속에서 나부껴 눈물이 시큰거린다
이제 열차는 울음을 멈췄다
질주하는 세월 속에서
성대조차 병들어
그것을 보상하듯 쇠바퀴만 힘차게 굴러간다
기차를 타라
고독이 너무 쓰거든 기차를 타라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을 가보라
기차는 오로지 외길이라
내가 원하는 곳을
맘 편히 실어다 주진 못하지만
자작나무 울창한 산협을
휘돌아갈 때의 설렘이 있지 않더냐
가차가 닿는 역은
쓸쓸한 내 생의 끝자락이다
그곳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의 쇠바퀴는 우렁찬데
그곳에 가 닿으면
쓰라린 고독은 말끔히 풀어질 게다
질주하는 기차처럼
철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다
옛날엔 질주하는 기차처럼 으르렁거렸다
열차의 머리통에서 휘날리는
매캐한 연기처럼
눈물 글썽이며 싸우다가도
진달래 꽃무덤이 보이면
꽃처럼 살자살자 등을 두드렸다
으르렁거리면 정만 떨어졌다
양지 바른 무덤처럼
납작 엎드려
으르렁거리지 말고 어울렁더울렁 살자
서로 얼굴 보면 화가 나도
기차가 닿는 역을 생각하면
설핏 웃음이 핀다
찻집 열차
저수지 둑방에 방치되어 있는 낡은 열차 한량
어지럽게 풀덤불을 이고 있다
벗겨진 살갗에 우중충한 검버섯
쇠바퀴는 달아나 소처럼 엎어져 있다
어차피 질주를 포기한 열차는 찻집이 되었고
낚시꾼들 서너 명 들어 앉아 차를 마신다
모두가 열차에 올라탄듯 창밖을 내다본다
기관사는 없지만
열차는 마음속으로 질주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둑방에 엎어져 있는 것도 따분하여
물 위에 떨어지는 버들잎을
바라보는 일이 유일한 낙이다
열차 속에서 통기타를 튕기며
깔깔거리던 지난날의 회상이
시퍼런 물 위로 출렁거린다
야간열차
간절한 사랑 못 이겨 집을 나온 거라며
야간열차가 툴툴거린다
강물도 철썩철썩 따귀를 때리며 뻗어나가고
보름달은 잠도 설쳐 우윳빛이다
산골짝은 사연이 깊어
구성진 색소폰 소리에도 메아리로 슬피 우는데
야간열차 머리통에 달빛 휘감고 철교 위를 달려간다
쇠바퀴는 천근만근 달려온 여정 힘들다고 투덜대지만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네
간절한 사랑 못 잊어 여기까지 왔노라고
야간열차 수없이 기적을 울리며 어둠을 뚫고 달아난다
저녁 열차
완행열차가 고함을 지르며 산협을 돌고 있다
문득 들판을 박아대는 재봉틀 소리가 난다
수없이 박음질했을 들판자락이
휘황찬란한 조각보처럼 어지럽다
산그늘 먹물처럼 번져가고
들판 자락에 넘치는 금빛 나락이 여물어간다
완행열차 몇 번 지나가면 겨울이다
내 나이도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다
가출한 누이를 기다리던 세월도 지쳐
산그늘처럼 산협을 휘돌아간다
이제는 열차를 기다릴 나이도 지났다
누이가 내 곁을 떠나간 지금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아련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철길
문득 그 옛날을 상상하면
볼이 붉어지곤 했다
열차 속에서 마주 보고 앉아
까먹던 초콜릿처럼 달콤해진 사랑이
내 볼을 붉히곤 했다
그때마다 열차도 가슴이 뛰었던 모양이다
말처럼 길길이 날뛰며 달려가던 길이 외롭지만
외로움의 길이 어디 철길뿐인가
나도 외로워서 여자를 사귀고
여자와 열차에 올라 사랑을 씹을 때
물밀 져 오던 추억을 어쩌란 말인가
열차는 씩씩대며 철교를 밀며 달려가는데도
여자와 초콜릿처럼 씹어 대던
사랑이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황혼녘 민들레
민들레는 녹 쓴 철길에서 늙어간다
급행열차의 쇠바퀴가 철거덕거릴 때마다
민들레는 꽃방석에 앉아 꽃판을 부풀린다
고향집 툇마루에 등을 기대고 졸던 할아버지
꺼칠한 이마에 햇살을 쬐며
고향 떠난 내 새끼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철길 같은 위험한 세상의 길목 어디쯤에서
새끼들은 민들레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철로
철로는 늘 열기로 끓어올랐다
푹푹 찌는 폭염 속을
짓누르고 지나가는 쇠바퀴의 무게 때문이었다
고개 쳐들고 내지르는 기적소리는
철로변 코스모스를 긴장시켰다.
그 바람에 코스모스는 꽃씨들을 풀풀 흩날렸다
날이 갈수록 철로변은 슬픈 기운으로 감돌았다
철로변을 내려덮는 산그늘 때문이었다.
산자락 무너질 듯한 기차의 기적 소리에
철로는 평생 만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안고
산모롱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봄꿈
열차가 구부러지며 모퉁이를 돈다
이제 늙었다는 뜻이겠지
쇠바퀴도 녹슬어 철걱대고
기적소리 노을에 날려 보내면
버릇처럼 눈시울 뜨거워지곤 했지
한물간 추억을 잊지 않으려
일기장에 지난 시절 끼적거릴 때
젖은 눈 속으로 밀물져오는 철로변 아지랑이
열차가 모퉁이를 돌 때 마다
산 너머 달아난 봄꿈을 생각한다
민들레처럼 백발이 되어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무원을 생각한다
기차는 간다
만개한 코스모스 대열 속으로
기차가 간다
재봉틀로 박음질 하듯
철길을 누비며 달려간다
흐릿한 불빛 아래 달콤한 추억을
가슴에 묻으며 간다
달걀 먹고 체하면
뻑뻑 기적소리 내지르고
김밥 먹고 배부르면
간이역에서 쉬었다 간다
코스모스 향기를
바지런히 날라 주는 기차의 일생을
감히 누구에게 비기랴
나는 남에게 꽃향기 같은
손길 전해준 적 있는가
재봉틀로 박음질 하듯
벌판 같은 남의 가슴 누비며
살아 본 적 있는가
쉼 없이 달리고도 지겨움을 모르는 것은
철길에 핀 코스모스 때문이다
꽃향기가 쇠바퀴를 감아 돌 때의 향긋함 때문이다
피곤하다고 덜렁 엎어져 자지 마라
간이역에는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너에게 달려가면 논일 하다 허리 쭉 펴는 엄마가 있다
모두들 꽃 산행 가자 야단인데
녹슨 철길엔 코스모스 꽃무리 한창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엄마
망아지처럼 자는 열차 채찍질로 깨워
꽃바람 싣고 엄마한테 달려갈게요
낡은 역
낡은 역에 열차가 묶여 있다
고향을 가고 싶어도 쇠바퀴 병들어 가지 못한다
병든 세월 속에 엎어져 자다 보니
솨바뀌엔 녹들이 불그죽죽하다
쇠바퀴 철걱대던 그날이 언제였더라
오직 외길로만 뻗어가던 철길은 안녕하신가
철길을 쓰다듬던 뿌연 안개도 잘 있는가
봄바람이 불어와도 꿈쩍 않는 열차의 등에는
백발 같은 이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폐역
한번 폐역이 되면
역은 수명이 끝난다
햇빛 뒹굴던 철로변엔 들풀들이 번져가고
먹구름이 쓸쓸하게 비를 뿌린다
예전의 추억 따위는 생각지도 말자
추억 없는 역이 어디 없겠냐만은
오늘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냥 머릿속은 비워두자
생각 속에 묻혀 밤을 지새다보면
지나간 밤도 그때의 기적소리에
물들었을 것 같아 궁금해지고
낡은 역사 앞 외등은 아직도 불을 밝힌다
그 외등의 불빛이 비쳐주는 거기
몸통 불그죽죽 녹슨 열차 한 량
노새처럼 묶여 옛 추억을 채찍질한다
황간역
배밭 저 멀리 완행열차 달려오네
땡볕 등쌀에 팡팡 터진 배꽃 속으로
완행열차 달려오네
바람처럼 역 스쳐가는가 싶더니
긴 한숨 내뿜으며 멈춰선 열차
해바라기처럼 목 꺾고 졸던 역무원
깜짝 놀라 손깃발 살살 흔들려 뛰어가네
"잘 오셨습니다. 여기가 희망역인 황간역입니다,
종착역이 절망역인줄 모르니
백년쯤 푹 쉬었다 가십시오"
카랑카랑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승객들 녹작지근한 얼굴로 쏟아져 나오고
홑이불 같은 월유봉 노을 덮고
백년쯤 쉬어갈 준비를 하네
황간역 1
KTX 번개처럼 지나가던 곳이다
비둘기호 예전에 사라지고
무궁화호만 씩씩거리며 멈춰서는 곳이다
침목 틈에서 솟아오른 민들레
등 굽은 역무원의 흰 깃발처럼 흔들리는데
비둘기호 여전히 추억 속에 숨어 있는 곳이다
초음속을 꿈꾸는 세월속에서
사라진 비둘기호 추억 떠올릴 때 마다
낡아 가는 간이역 흑백 풍경처럼 머무는 곳이다
새마을호 폭풍처럼 지나가는 곳이다
민들레 꽃대 부푼 왕관 흔들면
씨앗들 뿌옇게 철길따라 흩어지던 곳이다
무궁화호만 거친 숨 팍팍 몰아쉬며
잠시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다
황간역 2
추억 속으로 비둘기호 풀뱀처럼 기어간다
침목 틈에서 흔들리는 민들레 꽃대처럼
늙은 역무원 하염없이 흰 깃발 흔든다
그때마다 환한 햇살로 내려앉는 고요
폐역이 되지 않기 위해 질주만을 꿈꾸지만
빠른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언제까지 간이역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시골역이라고 KTX 비웃듯 지나가도
무궁화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이
그래도 눈물 나게 살갑지 않더냐
늙은 역무원의 흰 깃발 그리우면
햇살 쏟아지는 황간역 그 철길에 나가
술렁설렁 꽃대 흔드는 민들레를 보아라
흰 깃발 향해 풀뱀처럼 달려오는
비둘기호의 순정을 추억 속에서 꺼내보라
황간역 3
추억 속 비둘기호가 머무는 역에
아련히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무원
민들레를 닮아 등이 굽었네
나도 만들레를 닮아가네
무궁호만 쓸쓸히 정차하는 역에
늙은 역무원처럼 흰 깃발 흔들고 싶네
황간역
무궁화호만 잠시잠깐 쉬었다 가는 간이역
녹슨 철길에 호젓이 남아
추억을 불러모은다
햇살 쏟아지는 철로변으로
흰나비 정처 없이 날아와
침목 사이 민들레꽃술 이리저리 찔러본다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던 늙은 역무원
잔주름 섞인 미소만 떠올려도
그렁그렁 눈물 맺히는 곳
무궁화호만 꿈결처럼 멈춰서도 좋아라
팔랑대는 흰나비와 한나절 놀다 가도 좋아라
저녁 열차
완행 열차가 고함을 지르며
모퉁이를 돌고 있다
재봉틀 소리를 내며 들판을 지나갈 때
가을은 수숫빛 노을 내리며 일몰의 시간을 갖는다
분 화장한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허리를 꺾는다
낮달이 하품을 한다
늙은 촌로 논두렁길 밟고 가듯
완행 열차 늘어진 몸통 끌며
흐릿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밤별 속으로
달려가는 열차 속에서 밤별을 본다
덜컹거리는 열차는
내 나이만큼 늙었구나
쇠바퀴는 천식을 앓듯 쌕쌕거리고
중천에 떠오르는 밤별은 눈 깜빡거리며
휘어진 철로를 비쳐준다
무서리 덮여 있는 들판엔
허수아비 둘 헐렁하게 서 있다
허수아비에 놀란 산새들이
흩어지는 황혼 속으로
기적소리 적막하게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