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의 추억
사회 생활을 하면서 숭례문을 떠올린 적은 과연 몇번이나 될까. 50 초반의 나이에 들어서기 까지 숭례문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앗다.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숭례문을 외면한다는 것은 그만큼 숭례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숭례문을 문화적 가치로 여기기보다는 늘 사람들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에 귀중함을 몰랐던 것이다. 이 귀중한 문화재가 곁에 없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 말하자면 귀중한 문화재도 공기나 물 같은 존재다.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공기나 물이 세상이 변혁으로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세상은 아비규환에 휩싸일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에 버금가는 일이 실제로 백주대낮에 일어났다.
지난 토요일 저녁, 어둠이 점점 깊이 내일을 향해 물들어 갈 무렵, 숭례문에 불이 붙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커먼 연기와 뒤섞인 불꽃이 치솟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그 때까지도 숭례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숭례문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지 모르는 천박함을 드러내듯이 채널을 오락물로 돌려 웃고 떠들고 하는 사이, 새벽을 맞았다. 그런데 막상 날이 밝아오고 일상적이 생활로 접어들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엊저녁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고 불꽃이 너울거리던 숭례문이 폭삭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나라를 굳건하게 떠받쳤던 기둥이 무너지고 창공을 향해 날렵하게 휘졌던 추녀가 폭삭 내려앉을 때, 그 때서야 숭례문이 저토록 아름다운 건물이란 걸 처음 알았다. 알록달록 단청빛을 뿜던 서까래며 여인의 코고무신처럼 날렵한 추녀나 약간 휘어진 지붕선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품이었다. 이러한 걸작품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가 아쉽다는 듯 너울거리는 불꽃 속에서 애끓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숭례문을 만든 태종의 고함이었고 숭례문이란 현판을 쓴 양녕대군의 분노였다. 또한 아름드리 조선소나무를 깎고 다듬고 홈을 파서 서까래를 아름답게 걸친 장인과 목공들의 울부짖음이었다. 전란에도 꿈쩍 않던 숭례문이 어이없게도 한 방화범의 불만 섞인 불장난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나라의 주춧돌을 국건히 떠받치며 근 600년을 이어온 숭례문, 그래서 서울의 상징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아이콘이 된 숭례문을 화마로 잃는다는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더욱이 양연대군에게도 더 볼 낯이 없게 되었다. 후세에 이런 화를 예견이라도 하였을까. 관악산의 화기가 옮겨 붙을 것을 생각해 불은 불로서 내려누른다는 뜻으로 세로로 숭례문이란 글씨를 쓴 양녕대군, 그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숭례문은 순식간에 까맣게 내려앉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맛본 것이다. 불타는 숭례문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사람이나 큰절을 올리던 사람들, 그 가슴 아픈 현장을 후대에 남기겠다며 부지런히 카메라를 들이대던 사람들, 하얀 국화꽃 몇 송이로 사라진 숭례문을 애도한 들 어디 막힌 가슴이 뚫리겠는가. 늘 그렇듯이 일을 당하고 나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쇠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또 재발되었다. 숭례문이 건재할 때도 방화에 대해 귀가 아프도록 경각심을 주었지만 몽땅 불타 없어지고 나니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었다. 그동안 내방치하다시피한 동대문도 돌아보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다른 문화재도 방화에 대해 재발방지를 한다고 뒤늦게 대책을 서둘렀다. 보나마나 뻔하다. 발이 아프게 설치면서도 어느 정도 지나면 잠잠해 지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이제는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린 게으른 국민성이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숭례문을 복원하기 하기 위한 노력도 다각도로 펼쳐졌다.
그러나 말이 복원이지 재현이라고 해야 딱 알맞은 표현이다. 조선소나무를 구해오기도 힘들뿐더러 막상 구해 와서 몇 년에 걸려 숭례문을 복원해 놓는다 해도 옛것만 하겠는가. 그 소나무에 장인의 한숨이 목공의 땀방울이 얼마만큼 진정으로 스미겠는가. 그때의 숨결을 느끼고 그 때의 땀방울이 스며들 때만이 비로소 숭례문의 가치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21세기에서 옛날처럼 똑같은 숭례문을 기대한 다는 것은 금물인지 모른다. 비록 그것이 새로 복원돼 주춧돌위에 장엄하게 놓여있다 해도 21세기에 만든 현대건축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이 야단법석이나 떨지 말고 남아있는 문화재라도 애써 돌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존재할 때는 몰랐지만 사라지고 나면 아쉬운 것은 비단 이 숭례문뿐이 아닐 것이다.
물안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