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을 곱게 두른 붉은치마가 그리워라
단풍이 흐드러진 적상산을 본적이 있는가. 붉은 치마를 곱게 걸치고 산객들을 불러 모으던 산, 스산한 바람결을 타고 미친 듯 붉은 치마를 펄럭이다가 제 풀에 지쳐 능선 골골마다 제 부끄러움을 숨기고 산객들을 불러 모으던 산,
술집 작부처럼 경박하지도 않고 헤픈 웃음 짓지 않으면서 가지런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다소곳이 앉은 양반 댁 처녀처럼 그 산은 늘 그렇게 가을을 기다려왔다.
적상산은 단풍으로 유명한 산이다. 붉은 치마를 걸친 것 같다고 하여 이름마저 그렇게 지었다. 아직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의 명성에 가려 그 이름 값을 다하지 못하지만 울긋불긋한 적상산의 단풍에 취해 본 사람이면 다시 찾게 되는 산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천일폭포
그러나 일행은 우연히 적상산을 찾게 되었다. 무주의 금강 마실 길을 걸으려는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어쩔 수 없이 적상산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한경 100경에 드는 적상산은 생각보다 볼 것이 많다. 산 전체를 통틀어 눈을 압도하는 절경은 단연 만추의 단풍이지만 산속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명소들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천일폭포와 적상산성, 적상호, 안국사 등은 제 각각의 빛깔과 사연을 않고 산 속 깊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웅장한 폭포 아래서 먹는 밥은 맛도 좋구나
맨 먼저 일행들을 쏟아놓은 곳이 적상산 아래 천일폭포 주차장이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받치고 들어서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천일 폭포가 웅장함을 드러낸다. 주차장에서 천일폭포까지의 길은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뒹굴고 있다. 무성한 숲이 깔아주는 그늘로 무더위를 식히며 거의 3백여 미터쯤 올라갔을까. 둠벙만한 소를 향해 가는 물줄기를 내려 쏟는 천길 벼랑이 눈앞을 압도했다. 이곳이 천일폭포다. 병풍을 똑바로 세운 듯 깎아지른 벼랑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분무를 하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줄기와 벼랑을 감싼 짙푸른 녹음의 조화는 왜 폭포가 세상에 유일하다고 하는 것인지 그 유명세를 실감 나게 한다.
적상산 아래의 무주호
폭포 아래 차려놓은 자연의 밥상
그러나 긴 가뭄 끝이라 물줄기는 보잘 것 없이 허약하다. 장마철에 왔더라면 폭포수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을 거라는 상상에 아쉬움만 더해간다.
일행들은 폭포 아래서 도시락을 풀었다. 물줄기에 묻혀온 냉기가 온 몸을 감싼다. 바깥과는 완전 딴 세상이다. 밖은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지만 천일 폭포는 온종일 서늘한 공기를 감싸 않은 채 산객들의 휴식처 노릇을 하고 있다.
야생화와 눈 맞추며 걷는 길
천일폭포 주차장에서 힘겹게 구불구불한 도로를 타고 오른다. 그렇게 힘이 좋던 엔진도 비탈진 도로 앞에서는 힘이 빠져 목쉰 소리를 낸다. 한참을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마치 적상호가 일행들을 환영하듯 물비늘 반짝이며 박수를 친다.
몇 해 전 가을, 아내와 함께 갔을 때도 적상호는 제 부끄러운 가슴속에 단풍 물든 산자락을 숨기고 우리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호수가 도로에 앉아 찬 이슬 터는 풀벌레 울음을 듣다가 목에 메어 눈물 글썽이는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한순간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추억 속에 잠기다보니 고공의 전망대다.
적상산과 주변 산을 조망할수 있는 적상호 전망대
전망대 아래의 식당 굴뚝이 아름답다
전망대 속에는 양수발전 설비를 갖춘 조압수조가 설치되어 잇다. 조압수조는 발전기가 급정지했을 때 수로내의 압력이 급상승하는 것을 완화시켜주는 안전장치다
달팽이 계단을 밟고 전망대에 올라가 적상산의 풍광을 조망한다.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상호의 물결 따라 굵게 주름 잡힌 산세들이 아련히 산그리메 속에 잠긴다. 하늘이 심술이 도져 산의 속살을 보여주기 싫었을까. 덕유산과 향적봉, 멀리는 거칠봉이 희미하게나마 눈 속에 잡힌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호반 길을 돌아 안국사로 향한다. 안국사는 금산사의 말사로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중창 하였고 조선 광혜군 6년(1614년) 조성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려고 증축한 절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적상호
주차장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안국사에 닿는다
안국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받쳐 놓는다. 잠시 차량에 의지했던 육신의 편함을 벗고 안국사까지 구불구불 뻗은 산길에 발길을 내려놓는다. 숲이 뿜어주는 향기에 숨이 막힌다. 길가에는 한껏 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야생화들이 손을 흔든다. 드문드문 고개를 내민 조록싸리꽃의 행렬도 볼만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노란 꽃을 다복이 펼친 돈나물꽃도 볼만하다. 꽃향기에 취한 나비들도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 일행들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투명 날개를 팔랑거리며 따라온다.
그러나 오디를 듬성듬성 매단 뽕나무는 안쓰럽기 그지없다. 긴 가뭄 때문에 단물조차 뻐져 나가 크기는 보리알만하다.
그래도 벌들은 오디에 달라붙어 자리를 뜰 줄 모른다. 꽃과 벌나비의 밀월을 보며 얼마쯤 올라갔을까.
극락전 부처님은 얼마나 심심하실까
“적상산 안국사”라는 현판을 붙인 일주문이 길을 막아선다. 일주문 안으로는 호국사 쪽으로 환한 길이 뚫려 있고 좌우로는 무너진 적상산성과 담쟁이넝쿨을 뒤덮은 돌담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적산산성은 최영 장군이 탐라를 정벌한 후 산의 형세가 요새임을 알고 왕에게 건의하여 쌓았다는 성이다.
조선 인조 6년에 다시 개축을 하였는데 둘레의 길이만 해도 자그마치 8,000여 미터에 육박한다. 벼랑 위로 구불구불 연결된 산성은 덧없는 세월을 알려주듯 군데군데 무너진 돌무더기가 뒹굴고 있다. 길 끝에는 호국사가 있다.
돈나물꽃
조록싸리꽃
호국사 마당은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벌, 나비들이 떼거리로 날아와 화창한 봄날의 열애를 즐기고 있다. 한참동안 그들의 어지러운 운무에 넋을 잃고 있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수행중” 출입금지 표시를 한 나무담장을 옆 눈으로 스치며 한적한 숲길로 들어선다. 조금 오르자 이정표가 나타난다.
왼쪽이 안렴대 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향로봉 쪽이다. 이정표 옆에는 철책을 두른 암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미끄러지며 굽이치는 산자락이 내려다보이고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희뿌연 운무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없어 안렴대 쪽으로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고려 때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을 때 삼도 안렴사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피신한 곳이다. 삼도 안렴도는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명을 받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행정과 군사 부문을 시찰하는 직책이다.
향로봉 오르는 길도 높낮이가 없는 평탄한 길이다. 흙길이라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야생화와 눈을 맞추며 안국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무성한 숲 사이로 안국사가 희끗희끗 모습을 드러낸다.
안국사 일주문
돌담위에 피어잇는 기린꽃
청하루 아래를 통과해 절 마당으로 올라선다. 극락전, 천불전, 명부전, 지장전, 요사채, 범종각이 눈길을 맞추고 있는 마당은 가을이 아닌데도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바람마저 자고 있으니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나그네가 무심한 마음으로 마당을 서성이는데도 일행들은 청하루 아래 쉼터에 앉아 목이 아프게 종알거린다.
마당에서는 늙은 아낙이 퍼질러 앉아 분주하게 풀포기를 뽑고 있다. 행색이 이 절의 보살 같아 “절이 너무 조용하네요” 하자 “ 반야심경 틀어드릴까요 ”하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절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어차피 내려갈 길 틀면 뭐하나 싶어 고개를 가로젓는다.
문득 나그네의 행동이 궁금했던지 활짝 문이 열린 극락전 안에서 부처님들이 빠끔히 바깥을 내다본다. 쓸쓸함이 묻어나는 마당이 자꾸만 궁금했던 모양이다. 마당에 낙엽 몇 장 구르는 것을 봐도 가슴이 저미는데 한평생 극락전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부처님들은 얼마나 세월이 따분할까.
양수발전소 홍보관에서 양수발전의 원리를 보다
안국사를 빠져나와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대전으로 돌아가기 너무 이른 탓에 다른 한군데 둘러보면 딱 좋을 시간이다. 송대 폭포와 머루 와인동굴이 보고 싶었지만 적상산과 연관이 있는 무주 양수발전소 홍보관을 찾았다.
홍보관에서 보니 적상산 전망대가 아련히 눈에 잡힌다. 그 아래로는 야외 공원을 품에 앉고 무더위에 졸고 있는 무주호가 펼쳐진다. 이 무주호가 적상호까지 물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심야 시간에는 모터를 돌려 적상호에 물을 퍼 올리고 전력 수요가 많은 시간대는 무주호로 물을 낙하시켜 발전하는 방식이다.
안국사 경내로 들어가는 축대밑에 피어있는 야생화
극락전 처마끝의 풍경, 바람이 자는 탓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극락전, 안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적상호에 물을 가두기 위해 지하 발전소를 만들고 적상산까지 거대한 수로를 연결한 기술력에 입이 딱 벌어진다.
홍보관에 들러 안내원에게 양수 발전 원리를 설명 듣고, 오재미를 던져 탄산가스 때려잡기 게임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홍보관 도로 건너편 야외 공원에 들어가 무주호를 바라본다. 적상산을 올려다보며 잠들어 있는 호수가 방금 구름 속에서 빠져나온 햇살을 껴않고 반짝반짝 물비늘을 풀어내고 있다. 불현듯 단풍 물에 젖은 적상산이 그립다. 열두 폭 치마를 뒤집어쓰고 무주호 속으로 풍덩 떨어지는 장엄한 단풍의 대열이 아슴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