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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읽어 보길 권하고 싶은 책.
뜻밖의 좋은 일 / 정혜윤
12쪽-13쪽
내 생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빛나는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신뢰, 믿음, 너그러움, 이런 것들은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빛이 된다. 그들은 안을 때 서로의 장점뿐 아니라 무한한 신뢰, 믿음, 너그러움도 함께 안는다. 사랑하는 무엇인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빛이 날뿐만 아니라 힘도 세어진다. 우리가 힘을 내는 방식이 그렇다. 우리는 세상과 나 사이의 연결고리에 의지해서 힘을 낸다. 연결고리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의 삶도 좋은 것이다. 연결고리가 강력한 것이면 우리의 힘도 그만큼 세어진다.
14쪽
그런 일이 생길 재료는 이미 우리에게 풍부하다. 빠스깔 끼냐르의 말을 빌리자면 고독 없이, 시간의 시련 없이, 침묵에 대한 열정 없이, 두려움에 떨며 비틀거려본 적 없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엇 안에서 방황해본 적 없이, 우울함 없이, 우울해서 외톨이가 된 느낌 없이 기쁨이란 없다.
23쪽
“꿈 때문에 고생하는 것. 해볼 만하지 않아? 찰스 부코스키가 실연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 나쁠 것도 없지 않아?‘라고 했더라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 많은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으면서도 얼마나 피할 수 없었던지……”
26쪽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뜻밖의 좋은 일’이라는 것도 실은 마음속으로 수많은 날 기다리던 것이란 걸.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그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33쪽
우리의 삶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은 거지요? 우리의 삶은 수동적으로 참아야 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것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면서 나아가는 거지요?
위기상황은 이것을 가장 깊게 느끼는 상태이기도 한 거지요?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되면 깊은 무력감, 깊은 수동성,
타인의 처분에 맡겨진 듯한 나를 느끼지만 어떻게든 정신력과 능력으로 상황을 극복하려고 투혼을 발휘하고 분투하니까요. 그래서 위기상황은 삶의 신비로운 충동이 제일 잘 보이는 순간이기도 한 거지요?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더 이상 우연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연히 본 풍경 역시 더 이상 우연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연히 생긴 일 역시 에피소드나 해프닝으로 머물지 않고 길조이거나 흉조가 되고, 하늘에 새 한마리가 날아오르는 것, 봄에 꽃망울이 터지는 것, 달이 구름을 뚫고 자태를 드러내는 것, 다 전조고기미고 징후고 예언이고 힘을 내라는 암시처럼 느껴지니까 말이에요. 전에는 무심코 넘겼던 많은 일들도 다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요. 그래서 마르께스는 상처 입은 사람의 눈에는 별이 두배로 보인다고 한 것이겠지요? 위기의 순간이 오면 자신만만함도 안정감도 사라지지만 다른 것이 찾아오기도 하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어요. 지난날 철석같이 믿었던 삶이 오류로 가득한 것이었다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약간의 힘이라도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련이 자기실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인 듯 여겨지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거지요?
38쪽
그러나 다른 한편, 명예를 아는 인간으로서 준비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치누아 아체베는 가만히 앉아서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일이 잘 풀리기 위해서 각자 해야 할일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라고 말했는데 내생각도 같다.
41쪽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 우리가 취하는 모든 동작은 의도하지 않은 자서전의 조각이고 이 모든 것은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이에 가장 자세하게글로 쓴 삶의 이야기만큼 진실한 것이라고 했는데, 경험상 이 말은 진리다. 나에 관한 진실은 내가 입으로 뭘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무심코 하는 말, 무의식적으로 하는 동작에 담겨 있다.
42쪽
쿤데라는 흐라발을 읽을 수 있는 세상과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했는데 흐라발은 어떤 목소리를 냈기에 그런 놀라운 평가를 받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서글프면서도 괴로운 심정으로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4쪽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종 초인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을 견뎌야 한다. 삶은 상상만큼 빛나지 않는다. 이렇게 편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노동을 하고 아침을 맞고 바쁘게 일상을 유지하고 살아내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할 때도 있다. 삶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힘을 내는 인간들이 신비롭다.
44쪽
삶이 쉬운 것이었다면 기술도 무기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배운 급훈대로 착하게 살아라! 존중하라! 친절해라! 등을 실천하고 살면 그나마 최선이겠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몸에 사리가 생길 것만 같다. 게다가존중할 수 없는 생각은 넘쳐나고 친절이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맹렬히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우리 인생 중간에는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당혹감을 처리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더 큰 문제는 세상은 나만큼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란스럽기는커녕 질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그 질서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현실은 부당할수록 어쩐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46쪽
내 꿈은 간단했다. 내게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알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꼭 필요한 곳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사는 것이었다.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의 무거움과의 싸움이고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느낌, 그것이 삶의 가벼움이라고 생각했다.
50쪽
오오에 켄자부로오가 아이를 살리고 다가올 일을 어떻게든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생각한 문장이 바로 ‘지옥은 내가 간다.’ 였다. 그런 선택을 한번 하고 끝낸 것이 아니다. 오오에 켄자부로 오는 인생에서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더 힘든 쪽‘을 선택해버리고는 ‘지옥은 내가 간다.’를 되뇌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갔고 그것이 삶에 일관성, 혹은 방향성을 줬다고 말했는데 나는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이 생각에 참으로 큰 충격을 받고 말았던 것이다.
51쪽
것은 다른 것이었다. 즉, 누군가 책의 문장을 되뇌면서 인생의 방향성을 정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그렇게 되면 미래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미래일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행동은 하지 않으려 할지,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살지는 알 수 있는 미래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어떤 일이 벌어지든 휘둘리고 있지만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삶을 우연의 연속으로만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는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53쪽
그래서 책은 세계와 내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우리를 돕는다. 나의 부족한 점을 타인의 진실한 마음에서 찾아 채울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꿈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54쪽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기억하자.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9쪽-60쪽
좋은 책은 그 글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세상이 달라보이게 한다. 좋은 책은 인간은 비탄, 슬픔, 고통에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뭔가 - 비탄, 슬픔, 고통을 다른 일로 바꾸는 일, 이를테면 시 또는 한편의 글 - 를 만들고 있는 중이란 것을 알려준다. 좋은 책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확대, 반복,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해서 말하려고 애쓴다. 좋은 책은 어디선가 진실은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만든다. 좋은 책은 문제와 사태를 다루는 데 있어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사태를 보는 다른 눈, 제3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나를 돕는다. 좋은 책은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장차 내 생각이 될 것을 찾아내고 다른 것을 느끼도록 자극하고 다른 일을 해보도록 격려한다. 좋은 책은 누군가 이미 용기를 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좋은 책과 만나는 어떤 특별한 순간, 서러운 마음도자아도 사라지고 ‘이건 진짜다, 진짜 멋지다.’ 라는 마음과 가벼운 한숨, 벅찬 가슴만 남는다.
66쪽
결국, 내게 가장 부족했던 삶의 기술 중 한 가지는 구별 능력이었다. 충동과 선택은 다르고 딴죽걸기와 비판적 사고는 다르고 트집과 저항은 다르고 실망과 절망은 다르고 억압과 자기절제는 다른 것이다. 둔감함을 초연함이라 하고 어떤 갈등도 피하느라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착하고 성격이 좋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저 그렇게 산 것을 평화로운 삶이라 부르고 게으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라고 부르고 가졌던 꿈을 포기하는 것을 철들었다고 부르면 곤란하다. 나르시시즘과 자기발견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만족과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도 곤란하다.
67쪽
에이드리언 리치는 유연함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했지만 또 다른 지옥도 있다. 구별 능력이 없는 지옥이다.
우리의 평범함이 과도하게 칭찬을 받고,
나태함이 금욕으로 읽히고,
헤픈 생각이 직관으로 치장되고,
모든 실수가 용서되는 것을요, 우리가 지은 죄라면
그저 너무 대담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거나
그 틀을 완전히 깨부수려고 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에이드리언 리치 「며느리의 스냅사진들」중에서
68쪽
안다는 것은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까다롭게 차이점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를 비롯해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중요하거나 지나치게 하찮아진 세상에서 구별 능력을 갖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번 잘못말해보고 잘못 봤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계기가 된다.
68쪽
모든 변화는 그동안 잘못 봤고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시행착오를 겪고 실수하고 만회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정확해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이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야! 마음의 평화와 안도감이 밀려온다.
69쪽
언어는 마치 돈과 같은 속성이 있다. 언제나 다른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꿔치기할 수 있고, 그런 세계에서는 가해자를 희생자로 희생자를 가해자로 바꿔치기할 수도 있다. 문제를 불필요하게 꼬아놓을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죽기 살기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세상에서는 말이 칼이 된다.
70쪽
내가 나를 보는 시선도 상대방에게 투사된다. 자신이 진실하지 않으면 타인도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돈과 이해관계만 믿는 사람들은 다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말을 하게 마련이다.
그뿐이 아니다. 말을 바꿔치기하면서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세상을 왜곡한다. 보르헤스식 표현대로 하면 이런 사람들의 신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것이 비본질주의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이 쏠리게 되면 상황을 낫게 바꿀 수도 있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진다.
73쪽
질문이 없다면 대답도 없고, 질문이 있다면 더 나은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이 조금 더 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공허할수록 내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74쪽
현실이 그래. 그게 세상의 이치야. 그러나 그때는 현실의 이름으로 무엇을 없애버리려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75쪽
사람 다 똑같지 뭐, 별 수 있나? 사상 최악의 평준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른 인간도 끌어내리는 말, 말한 사람이 아무런 구별 능력이 없다는 자백으로서만 쓸모 있는 말. 차라리 이에 비해선 ‘사람 다 저마다 다르지‘가 관대한 말.
75쪽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선택의 자유로부터 퇴행하고 싶은 마음.
76쪽
세상은 다 썩었어. 현대 생활의 모든 편리함을 누리고 있으면서, 특히 다른 사람의 고독과 투혼으로 이룬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 쉽게 해버릴 말은 아니다. 썩어빠진 수많은 것이 있을 뿐이다.
78쪽
착하게 살아라. 착취는 기본인 세상에서는 위험한 말. 착하게 살되 이기적일 수 있어야 한다. 이기적이되 자기중심적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79쪽
알고 보니 실망스럽더라고. 타인도 진실도 순백색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타인과 진실은 미세먼지와 황사가 많은 공기, 정화시키고 증류시킬 필요가 있는 공기, 불순물을 걸러내고 마셔야 하는 물과도 같은 것.
82쪽
개인의 취향인데 뭐…아무리 중요한 일도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하면 나와는 관계없는 문제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된다.
88쪽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는 수세기 동안위력을 떨친 지옥의 언어를 말한다. ‘젊은이 자네도 나이 들어 봐, 별 수 없을 걸, 세상은 변하지 않고 사람이 변하는 거야. 어느 시대나 세상물정의 이름으로, 그 많은 지식과 경험을 거론하면서 타인의 힘과 희망을 꺾는 일이 고작 다인 사람들은 흔하디흔하다.
92쪽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06년 아테나이에 여름정원을 구입한다. 그는 그곳에서 남은 삶을 살았고 동료들과 산책을 하고 우정을 나눴다. 죽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알려진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며 가장 아름다운 날이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면 영혼의 기쁨을 느낀다. 에피쿠로스는 삶은 불행하므로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다.
93쪽
후세 사람들은 에피쿠로스를 가리켜 고통 속에서 간간이 맛보았던 소중한 기쁨을 삶과 윤리의 토대로 삼을 줄 알았다고 평했다. 나는 이 말에 크게 놀랐다. 나에게도 영혼의 기쁨을 느끼던 순간이 있었지만 내가 그것을 삶의 토대로 삼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냥 한때 좋았던 기억인줄 알았기 때문에.
100쪽
지 알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냉혹함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인데, 그를 관찰해보면서 오히려 냉혹함이 왜 생기는지 알게 되었다. 즉, 무슨 일이든 책임지지 않는 것, 귀찮거나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는 것, 책잡히지 않는 것, 지적받지 않는 것, 덜 일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남들에게 처음에는 무관심했다가 결국은 냉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