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살아있다
김 두 녀
「상황문학」은 2002년도에 창립하였다. 발기인으로 이성장, 강대식, 유자효, 김재황, 윤성호, 김상문을 비롯해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국내외 문인 28명이 모여 만든 동인 단체다. 창립 이듬해인 2003년에 창간호 출간을 시작으로 2023년에는 제 21집이 발간된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출간된 「상황문학」에 자부심마저 생긴다.
상황문학의 시작은 이성장 고문님한테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국내 문인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회원들까지 전 인맥을 동원하여 회원 유치에 열정을 다하셨다. 여자회원을 영입하며 두 번 세 번 전화를 할 때는 공연한 오해도 받았다하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내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회장 김재황 선생님의 3집 원고청탁에 응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그 당시 상황에는 문학지 「시와 산문」에서 뵌 적이 있던 윤성호 박사님과 한국시인협회에서 만난 전순영 선생님, 시 퍼포먼스로 유명한 시조시인 최언진 선생님, 조선일보에서 주관한 논픽션 대상 수상자인 이완주 박사님을 비롯해 품이 넉넉한 선생님들이 많아 참 편안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문학기행이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유래 깊은 곳도 많이 찾아 다녔지만 배를 타고 선유도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섬 전체를 우리가 전세 낸 것처럼 활보하며 다녔다. 밤길에 가곡을 부르며 찾은 백사장에서는 닭싸움을 벌였는데 민망한 일도 생겼었다. 오붓한 여행은 회원들 간에 우정이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늦가을 이 무렵 낙엽이 우수수 날릴 때 가을 산에 들어앉아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를 지어 현장에서 낭송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동인지를 만들 때는 편집회의에 열심히 참여하며 주간이던 윤성호 박사님을 도와 작은 힘을 보탰다. 11집부터는 몇몇 회원이 빠져나가고 기존에 있던 선생님들마저 글이 안 써진다는 이유로 원고를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여서 주간님을 애태우기도 했다. 어느 해는 책이 나올 때가 되어 주간님께 전화를 해 보면 원고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때마다 내 주변에 있던 시인과 수필가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급히 조달했다. 그 당시 책값 15만원이 부담이 돼 몇몇 친구들은 원고만 내고 회원 등록은 못했다.
중단된 그림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8집 표지화에 내 그림이 쓰였다. 원고를 내고 난 후 기존 작품이 마땅치 않을 때는 급히 그림을 그려 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회원들 대부분이 자연 친화적이어서 회원인 내 꽃그림을 채택한 것 같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저렴한 비용으로 책을 내는 게 우선인지라 표지화 색이 어둡게 나오기 일쑤였지만 불만을 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발행인이 되어 만든 책 14집부터는 원화 그대로 표지색이 나왔으나 20집 표지화는 색상은 물론 세로그림을 잘라서 가로그림으로 만들어버린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 시건 그림이건 작품은 작가 그 자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훼손 된 시나 훼손 된 그림은 작가 정신과 몸을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싶다.
13집을 간신히 내고 난 2015년 12월은 악몽의 달이다. 상황문학을 돌이켜보면 주간으로 13년을 애써온 윤성호 박사님은 과부하가 걸리고, 회장이신 김재황 선생님께서는 글쓰기에 바빠 외부활동을 거의 안하시니 회원을 늘릴 수도 상황을 이끌고 갈 여력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즈음엔 문학기행도 몇 사람만 참여하더니 그해에는 그조차도 없어졌다. 급기야 그만 둔 회원과 빠지겠다는 회원이 생겼다. 12월 출판기념회에 모인 몇 안 되는 회원 중 이완주 박사님은 윤 박사님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나를 총무로 하여 임원을 바꿔보자고 나섰지만 윤 박사님의 손 사레에 무산 되었다. 결국 1월 정기회에서 의논하자며 헤어졌다.
2015년 12월 24일 밤 이메일을 보고 감짝 놀랐다. 회장 김재황 선생님은 그럴듯한 이유도 설명도 없이 상황문학을 해체한다고 했다. 이튼 날 두 분(김재황 윤성호)은 전화를 안 받았다. 다른 몇 분들에게도 어쩐 일이냐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며 나와 한 목소리를 냈지만 나중에는 그분들마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황문학에 몰두해온 나로서는 시골에 사는 부지깽이 농투성이도 이러지는 않겠다며 흥분했다. 병석에 누워 계시던 고문 이성장 선생님께서는 내게 울먹이며 회장 직을 맡아 달라 하소연했다. 속이 상한 나는 몇 사람을 설득하고 의기투합하여 주간과 총무는 김재권 시인이 맡기로 하고 집집마다 전화를 걸었다. 연세가 많은 선생님은 시가 안 써진다고 이참에 빠지겠다는 말에 전에 빠지겠다던 동인한테는 전화를 아예 걸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윤성호 박사님이 주간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 김재황 선생님한테 상황문학을 깨자는 말을 먼저 하셨다고 했다. 수년이 지난 후 윤박사님 말씀이다. “그때 상황은 끝난 줄 알았어요.”
본인들이 아니면 아무도 못할 거라는 판단 미스를 한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는 짓이, 하는 일이 똑같을 수는 없어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좀 못해도 시행착오가 있어도 뜻이 같으면 여럿이서 할 수 없는 일이 뭐가 있으랴.
회원은 물론 이성장 고문님한테까지 의견을 묻지 않고 해체라는 말 한마디로 14년 쌓아온 탑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동안 존경하며 따르던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남은 회원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무렵 고문님은 병상에 누워 애써 만든 문학회가 물거품이 되다니 눈물로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
지난날의 상황문학은 다른 문학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문단정치를 한다고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었고 만나면 늘 편안해서 친정식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동인회에서도 활동해 보고 큰 단체에도 들어가 문학 활동에 열성을 다한 적도 있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한테 실망을 할 때는 더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곤 했다. 그동안 편안한 상황문학에 들어와 좋은 분들과 어울리며 시를 썼기에 오늘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 편안함이 다 좋은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라질 번한 상황문학 2기에 이르러 책을 내려니 회원 확보가 문제였다. 처음 들어온 회원 중에는 식대는 물론 책값을 못 내는 회원도 있었다. 부담을 안으며 두 해나 붙잡고 있다가 다른 까닭이 있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듬해는 설상가상으로 김재권 선생님이 혈압으로 큰일 날 뻔 했고 그해 여름엔 최정희 선생님이 무릎을 다쳐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상황에 우환이 덮친 것이다. 주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의 부재로 난감해졌지만 김명실 선생님과 최옥선 선생님이 합류를 하고 이어서 새 식구들이 늘어나 책만큼은 빠짐없이 만들게 되었다. 내 지출을 일일이 말할 수는 없지만 전주 한옥마을 청사초롱 동생 댁한테 광고비를 못 받고 말았다.
지난해 「상황문학」20집을 만들 때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대 상홤문학 1집에서 19집까지의 표지를 칼라로 넣겠다는 일을 두고 비용이 많이 들어 안 된다고 말리다가 노트북을 뒤엎는 총무의 무례함에 혈압이 올랐던 일이다. 안 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내게 책이 다 있는 것도 아니고, 표지화가 원화대로 잘 나오지 않았을 뿐만 서재에서 책을 찾아내어 사진을 찍는 일을 바쁜 내가 도맡아 함이 마땅치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3차 편집회인데 교정지도 없이 노트북만 덜렁 들고 와서, 몇 가지 토론에 의견이 분분했지만 고성이 오고간 것도 아니고 차분히 말이 오고가던 중에 벌떡 일어나 한 행동이다. 회장은 아무런 말이 없다가 나더러 ‘고집이 세지요’가 전부였다. 총무 감쌀 줄만 알지 사건을 진화할 줄은 몰랐다. 바쁘다고 가는 총무한테 악수까지 해 보낸 후 겨우 화를 억누르고 식당까지 갔지만 화를 달래기는커녕 부축이는 통에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전주 문학기행에서 주간을 하겠냐고 물었을 때 본인이 한다고 자청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갓 등단한 사람의 능력을 과신한 게 잘못이었다.
처음 편집회의를 하자고 일산갤러리에 날 불렀을 때도 나는 초대시인한테 원고청탁을 메일로 정중히 하라고 시인협회 수첩을 들고 나갔건만 없어도 된다하더니 결국 내가 다 했다.
그날 편집회의 때는 동인지를 비롯해서 문예지 대여섯 권을 무겁게 싸들고 가 참고하며 차례를 정하자고 했다. 둘 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와서 회장 뜻이 관철 안 된다고 그런 행동을 해놓고 총무 안한다고 이집 저집 전화를 해 나를 곤욕스럽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단톡방에서는 대놓고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간다고 하더니 지가 나갔다. 그동안 책을 만드느라 돈이 모자라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못된 사람을 만났을 때는 같이 떠들어댈 수도 없고 방법이 없었다. 선배시인이 한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이 되고 시인이 되라’
무사히 하루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만 아픈 동인들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좋아졌다지만 재활중임에도 빠짐없이 동참하는 김재권 선생님이나 일주일에 투석을 세 번씩이나 하면서도 상황문학 걱정이 하늘을 닿는 이성장 고문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쓰럽고 고맙다.
잠시 나이 듦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살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후회를 하듯이 젊다고 우쭐대서도 안 되고 늙었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경험과 지혜를 농축 시키고 있음이니까. 여기서 나이는 사회적 나이뿐만 아니라 문단 나이를 염두에 둔 포괄적 나이를 말한다. 서로 존중하며 회원의 소리를 경청하는 조화로운 만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너그러움과 인간애가 깔려 있어야 한다. 나를 포함해 회원마다 칭찬할 줄 아는 여유를 좀 부렸으면 좋겠다.
짧은 시간이지만 회원들이 들고 나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으나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만난 친구들이다. 회원들의 순수문학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한 상황문학은 발전하고 계승되리라 믿는다. 또한 동분서주하시는 회장님을 도와 상황문학의 본모습을 되찾기를 바라며 이 글을 통해 어려운 가운데 여태 함께 해온 동인들께 무한한 고마움과 감사를 전한다.
아직 인사는 못 나누었지만 새 회원들과도 상황문학이라는 마당에서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 (2023.11.14.)
첫댓글 고문님의 상황문학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갑니다.
들꽃나영님 고마워요
동인활동 중에 동인지를 내면서 활동하는 일은 대단한 겁니다.우리 힘 내요!
*고생하셨습니다..
상황 문학에 큰 발자취로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