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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인 아기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저는 오늘을 ‘5월의 크리스마스’라 하고 싶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록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한겨울 성탄시즌에만 들었던 말씀을 만물이 생동하는 푸르른 봄에 전하는 저도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까지 오신 성탄의 은혜는 비단 추운 겨울에만 묵상할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365일 묵상하고 누려야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 나심의 큰 기쁨과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늘 새롭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Ⅰ.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 (1-7)
누가는 예수님 탄생 기사를 쓰면서 먼저 시대적 배경을 말합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1)” 당시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호령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시저’의 양아들로 본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원로원에 의해 제국의 초대황제로 추대됐습니다. 당시 로마는 북으로는 영국, 남으로는 아프리카, 서로는 지중해, 동으로는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70개 군단이나 되는 군대를 두었습니다. 이 같은 군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는 세금을 걷기 위해 천하에 호적명령을 내립니다. 그의 권세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호적명령이 떨어지자 천하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호적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생업을 다 제쳐두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 이는 식민지 유대 땅의 산골 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고 있던 요셉도 예외일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호적하러 어디로 갔나요?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4,5).” 요셉도 다윗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갔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44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대략 진주에서 광주까지 거리입니다. 차로도 2시간이 족히 걸리는 먼 거리를 당시에는 걸어갔기 때문에 4일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길도 평탄하게 포장된 아스팔트길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만삭인 임산부를 데리고 여행하기에는 너무나 멀고도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된 여정이었을까요?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까이 왔을 때 더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가까워 산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이 허둥지둥댑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아내가 아이를 낳으려고 해요. 도와주세요. 빈방 없나요?” 이때 누군가가 나타나서 “네, 빈방 있어요.” 이렇게 대답해 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어느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사람이 아무리 못 살아도 아이를 낳을 때는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를 준비합니다. 산모를 위해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가지들을 준비합니다. 정성껏 미역국을 끓이고 아이에게 입힐 베넷저고리도 준비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는 곳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습니다. 귀한 맏아들을 어디에 뉘었나요? 베들레헴 세븐스타 일류호텔의 깨끗하고 아늑하고 따뜻한 Suite Room 침대에 뉘었습니까? 아닙니다. 베들레헴 한 여관의 구유에 뉘었습니다. 구유가 어떤 곳입니까? 가축의 밥통 즉 여물통입니다. 불결하고 누추한 곳입니다. 쇠파리들이 윙윙거리는 곳입니다. 동지섣달의 찬 기운이 서리는 곳입니다. 귀한 맏아들을 왜 찬 기운이 서리고 쇠파리들이 윙윙거리는 그렇게 더럽고 누추한 구유에 뉘었습니까?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당시 베들레헴 여관들은 호적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들이 아무리 만원사례라 할지라도 요셉에게 돈이 있고 힘이 있었다면 프리미엄을 얹어서라도 방 한 칸 구할 수가 없었겠습니까?
작년 연말, LA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대한항공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진통이 시작되자 승무원들은 산모와 가족들을 1등석으로 옮겼고 승객 중에 경험 많은 조산원이 있어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았습니다. 산모와 아이는 귀국 후 대한항공사장으로부터 축하와 금일봉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산모는 어딜 가나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으로 본래 인심이 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로마의 압제와 헤롯왕의 폭정 가운데 살면서 인심이 메마른 것 같습니다. 또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다윗의 후손들로서 먼 친척입니다. 그들은 자기 가문에 속한 여인이 산통을 호소하는데도 방을 양보해주지 않고 모른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건만(빌2:6,7)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전박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슬픈 현실을 요한복음 1장 10,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다보다 못한 당나귀들이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 하면서 자기의 밥통을 내어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깨닫지 못했습니다(사1:3). 예수님은 이렇게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Ⅱ. 큰 기쁨의 좋은 소식 (8-20)
그러면 사람들에게 버린바 되어 구유에 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에 예언된 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가 드디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소식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나요?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8,9).” 그 지역 모든 베들레헴 고을은 다들 잠들어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깨어 밤새도록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도 채택되지 않을 만큼 비천한 신분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양치는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시나 늑대가 캄캄한 밤을 틈타 양들을 헤치진 않을까 두 눈 초롱초롱 뜨고 깨어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구주탄생소식을 전하는 주의 천사는 바로 이런 목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잘 나고 똑똑한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 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는 그들에게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관방에서 배부르고 등 따뜻함에 취해 퍼져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언제나 심령이 가난하고 깨어 있으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어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지요? 저는 지난 밤 깊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 자유함과 여유를 핑계 삼아 안일과 방종으로 변질되고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삼고 있진 않은가? 이미 지나버린 것에 대해 자학하기보다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자유함을 갖되 우리는 앞으로 더욱 깨어 주의 일에 충성해야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부유해지고 안일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의 기쁜 소식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목자들은 주의 천사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이때 천사가 전해준 소식이 무엇인가요?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주의 천사는 목자들을 무섭게 해놓고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세상에는 슬프고 어두운 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기업과 산업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꽃다운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자살한 카이스트 학생들의 소식이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둡고 슬픈 소식들로 가득 찬 세상에 가끔씩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들도 있습니다. 테러의 상징으로 불리던 오사마 빈 라덴이 잡혀 사살됐다는 소식은 미국민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큰 손 워런 버핏이 대구를 방문해 20조를 투자하겠다고 사인을 해 대구가 축제의 도가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기쁜 소식은 상대적입니다. 진주시민들은 LH 전체가 진주로 오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진주시민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이와 반대로 경쟁하던 전주시민들에게는 별로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이런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온 백성에게 두루두루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이 뭔가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그러면 구주의 나심이 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하나님의 슬픈 메시지를 듣게 됐습니다. 죽고 난 후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래도 그렇게 크게 슬퍼할 정도는 아닐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질 법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하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주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찬란한 저 천성 보좌를 떠나 세상의 비천한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허물진 죄인들을 머리 둘 곳 없이 바쁘게 섬기시다가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인들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며칠 전에는 경북 문경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흉내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나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흉내낸다고 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까지 오신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그 아기가 구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세상의 구주라고 자처하던 로마황제는 백마를 타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얼마 전 있었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은 침체에 빠진 영국경제를 고려해 최대한 검소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무려 1,40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왕들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얼마든지 좋은 곳에서 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영광스런 가이사 황제의 보좌를 택해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특권과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갓난아기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황금요람이 아닌 냄새나고 누추한 구유에 나셨습니다. 그 크고 높으신 분이, 그토록 영광스러운 분이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이는 실로 엄청난 자기 비움이요 자기 비하이며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죄로 죽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그 역사는 바로 이 구유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구유에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부담 없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예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병든 사람도, 죄수도, 심지어는 매국노 세리레위 같은 사람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니고데모같이 당대 최고의 지성인도, 잘난 사람도 물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잘났든 못났든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구유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높이셨고 주님이 비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구유가 구원받고 생명이 살아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지만 솔직히 우리 마음은 낮아지기를 싫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 시대 코드가 무엇입니까? 많은 돈과 높은 지위입니다. 많은 물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 위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입니다. 또 좋은 직장을 잡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뽀대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낮아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낮은 데로 간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무시를 받으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 쥐꼬리만한 자존심 때문에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쥐뿔도 없어도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깊이 회개했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구유정신을 가르치면서 정작 저는 낮아지기 싫었습니다. 정치기사를 읽으며 나도 저렇게 권력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에 매이지 않고 어깨를 활짝 피고 떵떵거리며 살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속에는 더러움이 싹터 많은 돈을 모아 좋은 집을 사고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대접하며 그들이 내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세상의 코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인턴목자시절, 혼자서 뒤치다꺼리를 하며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성도들을 위해 예배 때 의자를 펴주는 등 섬기는 일들을 기쁨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종이야, 뭐야’하면서 짜증이 나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인간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를 뒤치다꺼리하기 위해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낮아짐을 생각할 때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비천한 구유까지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낮아져 봐야 인간입니다. 인간에서 벌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그것도 연약한 갓난아기로, 그것도 모자라서 구유로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내 아들의 이 아픔과 희생을 너희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구유에 태어나는 것이 존심 상해 하늘보좌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구원역사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존심을 버리고 비천한 구유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구원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워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체면과 존심을 꺾어 구유정신을 회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교회에 생명구원의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난 후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여기서 구주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매 세상의 구주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수천 년간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영광이 됐습니다. 또한 구주 탄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됐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후 세상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전쟁으로 한시도 평화로울 때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없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구주께서 오셔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주 탄생 소식은 우리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간 후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빨리 베들레헴 마을 안으로 달려갔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구유를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경배합니다. 천사들이 자기에게 말한 것들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 전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15-20).
결론합니다. 여러분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구유에 뉘어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방긋방긋 웃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 옆에서는 당나귀들이 기뻐 찬송을 부르는 성탄카드의 목가적인 분위기가 생각나나요? 아니면 그냥 하찮고 천하게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은 인류구원역사를 위해 구유에 누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뜨일 때 우리는 이 구주의 표적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높아지고 부유해진 마음, 체면과 존심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유정신을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까지 간직하며 낮아짐으로 우리 가운데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