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하라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예수님이 웃으시니,
온 우주는 옛 기쁨과 새 희망의 노래로
춤을 추며 웃었다’는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분명히 이 땅에서 웃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얼마나 자주 웃으셨을까?
1980년대에 샘터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헤세를 위시한
세계적인 문호들의 짧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주님 곁으로>의 영어 제목은
<The Laughing Christ>이며,
표지에는 예수께서 파안대소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2001년도에는 얼 팔머(Earl Palmer, 1924~2008) 목사가
<예수님의 유머>라는 책도 출판했다.
예수님은 그분의 지상 생애에서
많이 웃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웃으셨을까?
잠잠히 웃으셨을까?
파안대소하셨을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일이
웃을 수 있는 일일까?
죄인과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자들 틈에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일까?
잔치 상에서도 그를 죽이려는 자들과
논쟁을 하셔야 하는 예수께서 기쁘셨을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막 8:2) 하며
무리를 먹이신 예수께서 웃으셨을까?
예수님에게 조용한 기쁨은 있었겠지만,
그분께서 파안대소하는 웃음을 웃으셨을까?
인간의 삶을 사신 예수께서
껄껄거리시며 웃으실 일이 어디 한두 번 뿐이었겠는가?
인간은 자식을 잃어 눈물을 흘리다가도
즐거운 일이 있으면 웃는 동물이다.
문제는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그분의 생애를 대변(代辯)하는 표정이
어떤 표정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시간 예술인 음악은
작가의 생각을 한 두 시간에 걸려 표현한다.
그러나 공간 예술인 그림은
순간의 표정으로 일생을 담아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웃을 일이 왜 없었을까 마는
‘그분은 이런 분이었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한 순간의 표정을 그린다면
과연 그 모습이 파안대소하는 모습일까?
슬픔의 그늘에는 뜻이 있지만,
하늘을 나는 듯 파안대소하는 웃음에는 뜻이 없다.
한자 사전에 비의(悲意)는 있지만,
희의(喜意)는 없다.
뜻을 지닌 기쁨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잠히 있는 것이다.
잔잔한 기쁨은
얼굴을 깨뜨리고(破顔)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출렁이는 것이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요 4:26)고 하실 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요 4:50)고 말씀을 하실 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는 말을 들으셨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시자
무리들이 한 사람씩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올 때(요 11:44),
마리아의 향유를 받으실 때(요 12:3),
어찌 기쁨이 가슴에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얼굴을 깨뜨리며 나오는
파안(破顔)의 웃음이었을까?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생각하기 전에
파안대소하는 예수님의 얼굴을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의 문화 중 하나인 기쁨이
파안대소나 박장대소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기뻐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기뻐한다.
바울이 기뻐하라고 권면했다는 말은
그 자신이 기뻤다는 말이지,
기뻐할 상황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고통 중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조용히 그 기쁨을 가슴에 간직한다.
그리스도인이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기
쁨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합 3:18 새번역)과
‘죽어도 사는’(요 11:25) 생명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그
래서 바울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을 반기지 않는다.
2차 전도 여행길에(행 17:10)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다.
이에 바울의 성공을 시기한 폭도들은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 앞에 끌고 가서
그가 로마의 반역자들을 숨기고 있다고 고소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는 그곳을 떠났다.
얼마 후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으로 가서
디모데를 오라고 지시했다(행 17:11-16).
이런 와중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구조주의란 어떤 무엇의 의미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전체적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상적 경향이다.
현대 철학 사조 중 하나인 구조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미 만들어진 구조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사상에 따른다면
순교자가 죽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은
그가 가진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성경 백성이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집단의 구조에서 나오는 기쁨일까?
요셉의 환난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야기되었다.
사랑을 받는 자는 환난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환란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 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환난의 때에 기뻐한다면
그는 매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에덴동산이 따로 없다.
그 사람 주위가 에덴동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