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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골과 등뼈를 넣고 푹 고아낸 국물에 토란 줄기와 시래기, 그리고 무와 파를 넣고 끓인 해장국을 따로국밥이라고 한다. 국밥이라고 하면 문자 그대로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는 음식을 말한다. 지금은 어디에서 국밥을 주문해도 대부분 국과 밥이 따로 나오지만 예전 시장이나 해장국집에서 국밥을 주문하면 국물에다 밥을 말아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로국밥’은 국에다 미리 밥을 말아서 내오는 보통 국밥과 달리 ‘밥 따로, 국 따로’ 나온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따로국밥이라는 이름까지 생겨난 것을 보면 밥 따로 국 따로 먹는 것이 상당히 독특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따로국밥은 우리나라 양반 문화와 식사 습관, 그리고 식사 예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음식이다.
우리나라 밥상은 밥과 국이 기본이다. 예전에는 밥을 가운데 놓고 오른쪽에는 국, 왼쪽에는 떡을 놓는데 떡이 없을 경우에는 밥이 왼쪽, 국이 오른쪽이 된다. 보통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어디까지나 밥 따로 국 따로 먹을 때의 일이다. 양반들은 국에다 밥을 통째로 말아서 후루룩거리며 먹는 것을 상스럽다고 여겼다.
조선 후기인 철종과 고종 때 벼슬을 한 이유원의 문집인 《임하필기》에 옛날 양반들이 국에다 밥을 말아서 후루룩거리며 먹는 것을 얼마나 상스럽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이유원의 친척 할아버지가 암행어사를 나갔을 때 어느 산골 마을에 묵게 됐다. 마침 주인 여자가 밤에 갑자기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외출하고 없어 할 수 없이 손님으로 머물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밥과 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가 밥과 미역을 함께 넣고 끓여서 미역국을 주었더니 주인 여자가 할아버지를 함부로 대했다. 때마침 남편이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 까닭을 묻고는 자초지종을 알고 난 후에 할아버지한테 “암행어사께 시골 여자가 무례를 범했다”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임하필기》에 나오는 이 내용은 암행어사의 신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쓴 글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산골의 아낙네라지만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미역국에다 처음부터 밥을 말아서 끓이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치부했음을 알 수 있다.
국에다 미리 밥을 말아서 내놓는 국밥은 장터에서 ‘상사람’들이 먹는 음식이고, 장사꾼들이 먹는 음식이었지 양반들의 식사법은 아니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양반들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갈 때면 주막집에 들러 밥을 먹는데 이때는 할 수 없이 처음부터 국에다 밥을 말아서 국밥을 먹었다. 양반만을 상대하는 숙박 업소가 따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터에서도 밥과 국이 따로따로 나오는 따로국밥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대구는 전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북적대던 도시였다. 피난민들은 시장 바닥에서 국밥을 사 먹으며 한 끼를 때웠는데, 아무리 피난길이었다고는 하지만 교양 있는 양반집 출신과 여자들은 국에다 밥을 말아 함께 퍼먹는 것을 상스럽다고 느낀 모양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음식이 아니었을테니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국 따로, 밥 따로 담아달라고 주문해서 먹은 것이 따로국밥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따로국밥의 옛날식 이름은 대구탕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대구로 끓인 생선 매운탕과는 다른 음식이다. 특별한 음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육개장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발달한 육개장이라서 현지 지명을 붙여 대구탕(大邱湯)이라고 불렀다. 근대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서는 팔도 명물 음식 중 하나로 꼽았으니 꽤 유명했던 모양이다. 쇠고기를 넣고 보신탕처럼 만든 음식으로 1929년 무렵에는 본토인 대구에서 벗어나 서울까지 진출했다고 소개해놓았다.
이렇게 발달한 대구의 육개장이 한국전쟁 무렵에는 장터에서 해장국으로 인기를 모았고, 피난민들이 장터에서 밥 따로, 국 따로 먹으며 따로국밥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해졌다. 따로국밥 하나에 우리 음식 문화의 변화와 식사 예절 변천사가 담겨 있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