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사이 지우는 짧은 꿈을 하나 꿨다. 꿈속에서 지우는 제 앞의 빈 종이를 한참 응시했다. 지우는 뭔가 고민하다 손에 4B연필을 쥐었다. 그러곤 오랜 시간 공들여 새를 그렸다. 어깨 힘을 이용해 대범하게 새의 윤곽을 잡고, 섬세하게 깃털 결을 살리고, 작고 까만 눈에 물기를 줬다. 언젠가 조류도감에서 본 솔새였다. 그런데 얼마 뒤 한 남자가 다가 와 그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기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개를 참 잘 그렸네. (8쪽)
-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요.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요.
상상 속 어른은 잠시 침묵하다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남기는 어렵다'고 했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그러곤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
그 말에 지우는 왠지 반발심이 들어, '생존'에 비위가 상해 뭐라 대꾸하려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다시 귀기울였다. (10쪽)
- 옛날 옛날에
세상에 자비도 없고 희망도 없고 노래도 없던 때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그 밤을 덮고 자느라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편해서. (12쪽)
- 타성과 다정이 섞인 담임 목소리도, (13쪽)
- 주은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 불량함을 과장한다. (38쪽)
-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그런가?
응. (66쪽)
- 채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날 일을 떠올렸다. 속으로 '또 시작이다' 중얼거렸던 날. '하지만 이건 매번 시작되는 시작이라 시작이 아니다'라며 괴로워한 밤을. (76쪽)
-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재능은 있되 그게 압도적인 재능은 아님을 깨달아서였다. (129쪽)
- 채운은 접속사만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여러 선택을 떠올렸다. (162쪽)
-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182쪽)
- '그런데도 나는 왜 그토록 엄마가 열렬히 삶을 원한다고 단정했을까? 어째서 삶이 누구나 먹고 싶어하는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되는 양 굴었을까? 내가 원했으니까? 매일 아침 엄마가 또렷이 보이길 누구보다 바랐으니까?' (194쪽)
-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용식을 볼 때면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202쪽)
-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