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130,부산명소·영도다리·태종대
KBS 라디오 13년 11월 30일 방송
·부산명소·영도다리·태종대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1. 영도대교 개통복원식이 2013년 11월 27일 열렸죠? 저도 TV 중계를 통해서 봤는데, 참 감회가 새롭더군요.
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 매립지에서 열렸다. 개통식과 함께 다리 상판이 47년만에 다시 들어 올려졌다.
영도대교 사업은 한 기업체가 부산 향토기업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업비 1100억원을 기부채납 방식으로 전액 부담해 이루어졌다.
이날 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 매립지에서 열린 도개 기능을 회복한 영도대교 개통식에는 시민 1만 명이 참석했다. 도개기능이 복원된 영도대교는 정오에 한번 75도 각도로 세워져 부산의 새로운 명소가 될 전망이다.
2. 영도라고 하니까 그 곳이 섬인 것 같은데, 영도 하면 우선 영도대교를 떠올리게 되죠?
이 영도다리는 영도의 명물로 군림해 왔다.
다리를 놓기 전에는 도선을 이용하여 왕래하였으나 뒤에 교통이 복잡해져 불편을 해소하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3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3년여에 걸쳐 완공하였다. 총 길이는 약 215m이며, 그 중 육지쪽의 31m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도개교(跳開橋)로 하여 큰 배들을 통과할 수 있게 하였다. 공사 전에는 이 다리가 과연 들어올려질지에 대해서 신문에까지 여론화되었었다. 폭은 18m로 보도가 양측으로 각각 약 3m, 차도가 13m쯤으로 건설되었다.
개통 당시의 공식 이름은 '부산대교'였다.
공사 시작부터 한국인들의 수난이 점철되었다.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남항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다리 공사 때에도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펴졌다. 1934년 11월에 개통식 때 부산의 최고령자를 초청하였는데, 이 날 하늘을 향해 치솟는 신기한 다리를 보기 위해 부산을 비롯한 인근 김해, 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 명, 영도에는 5만여 명이 살았다고 하니 상상하지도 못할 인파였다.
이 마법의 다리는 하루 2번씩 하늘로 치솟으면서 영도의 발전을 가속시켰다. 들어올려질 때 고속일 때는 1분 30초, 저속일 때는 4분이 걸렸단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이 헤어진 가족을 만나려고 영도다리를 찾으면서 '우리나라 1호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영도다리는 피란민의 애환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 눈물이 넘쳐흐른 시대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산가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도다리 밑의 점집 골목을 찾기도 했다.
1·4후퇴 후 부산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넘쳐났다. 부산역 앞과 부두.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은 날품을 팔려는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남녀노소가 없었다. 기약없던 피란시절 영도다리는 용두산과 더불어 때론 위안을, 때론 절망을 안겨 준 만남과 흩어짐의 장소였다. 다리 주변은 피란민촌으로 변했다.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연 속에도 다리를 거닐며 사랑을 속삭였던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단다. 영도다리가 추억의 장소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한 실향민은 얼마 전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날 때면 영도다리와 용두산 공원을 찾았다”고 말했다. 실향민에겐 지금까지 이산의 아픔이 살아 숨쉬는 다리다.
3. 이 다리에선 유난히 자살자가 많았다고 하던데...
이 다리는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애환을 심어 주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여기서 투신자살을 했고, 해방 후 한국전쟁 때는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한 많은 인생을 마치기도 했다. 자살자가 속출하자 영도대교에는 ‘잠깐만’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고, 경찰관이 배치돼 감시를 하기도 했다.
교통량이 늘어나자 1966년 9월 1일부터 다리를 고정시키고 현재의 부산대교가 1980년 1월 30일 개통되면서 이름도 '영도대교'로 바뀌었다. 당시 피난민들은 이 다리 난간 위에 비친 초생달을 보며 하염없는 망향의 눈물을 쏟았으며, 이 때 현인 가수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대중가요가 유행하여 임시수도 부산시민의 심금을 울렸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 고향꿈 도 그리워진다 / 영도다리 난간 위엔 / 초승달만 외로이 떴네'
일제의 학정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본 영도대교는 전설같은 옛 얘기만 남겨두고, 영도의 급수난 해결을 위한 상수도관 연결과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인해 지난 1966년 9월 1일 영원히 나래를 접었다.
2010년 철거냐 보존이냐의 문제로 논란을 빚던 영도다리는 많은 시민의 노력으로 복원공사를 시작. 길이 215m, 너비 25m, 6차로 규모로 1100억 원의 공사비로 3년이 흐른 2013년 11월 27일 47년 만에 도개 기능을 회복했다.
4. 영도다리라는 이름을 낳은 영도라는 섬이름은 어떤 뜻일까요?
영도로 들어가려면 영도다리와 대교다리를 이용한다. 대교다리는 밤에 야경이 멋지고 빨간색을 띄는 다리이다.
영도(影島)라는 섬은 북서에서 남동으로 바다 위에 길게 드리워졌고, 대부분 산지와 비탈로 이루어져 있다. 봉래산(蓬萊山. 395m)과 태종산(太宗山. 250m)이 각각 북쪽과 남쪽에 솟아 있다.
영도는 굽은 도로가 많아 버스를 탔을 때는 손잡이를 꼭 잡아야 한다. 이 길은 영선동을 통해 영도여상과 목장원을 지나 도개공아파트를 지난다.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 영도 바닷가가 길 옆으로 펼쳐져 있어 전망이 좋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송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에는 포장마차가 많아서 경치도 구경하고 술맛도 즐기고 일석이조,
영도는 예로부터 말 목장으로 유명하여 목도(牧島)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말 목장이었을 때 이곳의 말들이 너무 빨리 달려 그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는 뜻에서 절영도(絶影島)라 했는데, 이의 줄인말이 영도(影島)이다.
절영도(絶影島)란 명칭은 <삼국사기>에 보면, 절영도 또는 절영산(絶影産)이다. 예부터 명마의 산지로서 후백제 왕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절영마 한 필을 보냈다가 그 말을 왕건에게 주면 후백제가 망한다는 어느 술사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도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동국여지승람>(1481) 김해부 인물조에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 관한 기록이 있다. 중추절에 왕이 월성봉두에 올라 달을 구경하며 술잔을 나누던 중 윤중을 불러오라는 어명을 내렸다. 성덕왕 때 대아찬 벼슬일 지낸 김윤중을 가까이 앉혀 술을 권하며 오늘날 ‘과인과 경들이 무사태평한 것은 모두 윤중의 조부덕이라’ 하고 밤늦게 돌아갈 때 절영산(絶影産) 말 한 필을 하사하여 군신들의 결망(서운하게 여기는 뜻)을 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효종조 기록을 보면, 제주도말 12필에 목자 한 사람을 둔데 대해 절영도 말은 4필에 목자 한 사람을 두었다는데, 이를 보더라도 절영도 말의 가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절영도는 삼한시대부터 말의 명산지로서 목장이 있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말이 당시 절영도에서 사육되었던 말로, 절영도에서 사육한 말이 빠르고 총명하여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데서 생긴 명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5. 근처에 태종대가 있죠? 왜 태종대라 했는지?
산과 나무의 경치와 바다의 경치가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난 관광지 태종대는 해안선과 기암절벽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도심 속의 쾌적한 시민 휴식공간으로 각광받는다.
태종대라는 지명은 신라 29대 임금인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후 전국의 명승지를 탐방하던 중 이곳에 들러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 절경에 심취해 잠시 소일하며 활을 쏜 곳이라 하여 이름지어졌단다. 또 가뭄이 있을 때에는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음력 5월 초 열흘날에 오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는 것은 태종대 및 태종대왕과의 관련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영도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고 해발 250m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기암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청명한 날이면 멀리 일본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서 예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역사적인 자료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태종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4월 22일 건설부에서 유원지로 고시하였고, 1969년 1월 21일에는 당시의 교통부로부터 관광지로 지정되면서부터 개발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70년 12월부터 전장 4.3㎞의 태종대 순환도로를 개설하여 3년만에 완공, 1974년 재정비하였다. 이 기간 중 태종대유원지 개발계획이 확정되어 본격적인 개발을 착수하여 전국적인 관광지로 면모가 갖추어짐으로써 1976년 3월 1일부터 입장료와 사용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6. 근처에서서 돌아볼 만한 곳이 있다면?
-자살바위와 자유랜드 /
모자상이 있는 곳에는 자살바위가 있다. 그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말도 있다.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오시면 놀이동산 자유랜드가 있다.
-조도
태종대로 가기 조금 전에 조도가 있다. 조도에는 해양대학교가 있다. 버스에서 내려 해양대학교로 걸어가려면 걸어서 30분 정도. 태종대 입구에는 싱싱한 물고기들이 많다. 태종대 일주도로를 돌아보는 맛도 좋다.
-태종대 등대(영도등대) /
태종대의 절경중 하나인 등대는 북위 35¡Æ32' 9", 동경 129¡Æ05' 7"에 위치하며, 해발 54m에 기초부분이 높이 9.8m로써 태종대유원지내 최남단 기암절벽 위에?자리잡고 있다. 이 등대는 1906년 12월 1일부터 석유 백열등으로 점등하기 시작하였고 1957년 8월 22일 섬광등 백광으로 바꾸어 청명한 날이면 약 20마일까지 반짝이는 50만촉광의 빛을 매 18초 간격으로 비추고, 안개 낀 날이면 싸이렌을 울려 항해 선박의 안전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등대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절벽 비탈길이 있는데 10m쯤 더 가면 바다쪽의 암석이 비바람에 깎이고 낮아져 반반한 넓은 자리로 된 대(臺)가 있다. 이곳이 바로 신선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신선대이며, 태종무열왕이 쉬어 갔던 곳이란다. 태종대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이유란다.
대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닷물이 굽돌다가 절벽에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돌다리가 있다는 것은 인공으로 만든 돌다리가 아니라 절벽에서 굴러내린 바위가 절벽과 대 사이에 끼어 있는 다리이다.?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대 위엔 망부석(ØÐÜýà´)이 외따로 서 있는데, 왜구에 끌려간 지아비를 부인이 이 선선대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오랜 날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망대, 모자상 /
불과 3¡40년 전만 해도 뭇사람들이 애닲은 사연을 안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곤 했던 속칭 자살바위. 이곳에 1976년에 전망대가 세워졌으나, 낡고 안전상 문제가 있어 1999년 3월에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단장한 전망대가 완공되어 새로운 명물로 등장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시원한 바다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씨에는 멀리 대마도까지도 육안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 이곳에는 모자상이 있다.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두 팔에 안고 앉아 있는 이 모자상은 높이 2m, 무게 2.5톤의 화강암으로 조각된 것으로, 자살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을 느껴서 마음을 고쳐잡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란 뜻으로 1976년 1월 14일에 세웠다.
-곤포의 집 /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이 좌우를 감싸고 있는 이곳은 바닷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다시마의 일종인 곤피가 많이 채집되었던 곳으로 유명하여 이 이름을 따서 곤포의 집이라 정했다 한다.
대연회장을 갖춘 음식점과 인공해수풀장, 그리고 관광유람선을 운영하고 있다.? 인공해수풀장은 곤포의 집을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가로 50m, 세로 25m의 성인용 풀장과 어린이용 풀장이 구분되어 있으며, 길이 40m의 6열 미끄럼대가 설치되어 있어 매년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약수터 태종대유원지내의 순환도로변 곳곳에는 울창한 숲과 바위틈 사이로 맑고 깨끗한 물이 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어 관광을 즐기다가 언제든지 목을 축이고 땀을 씻어낼 수 있다. 약수터는 5군데로 돌로 다듬은 용, 물개, 두꺼비, 복어, 거북이의 입에서 물을 뿜어 아래에 있는 돌그릇에 고이게 되어 있다.
-자갈마당 /
곤포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면 시원하고 깨끗한 바다와 함께 수 많은 자갈들이 해안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자갈마당이다. 이곳에도 좌판으로 된 횟집이 있으며 관광유람선 선착장이 있어 배를 타고 태종대 해안의 기암절벽들을 관광할 수 있다.
-자유랜드 /
자유랜드는 태종대유원지 입구에 있는 유희 시설로써 1988년 5월 1일에 개장되었다.
이곳에는 13종의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태종대 관광과 더불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놀이시설 종류로는 바이킹, 타가다, 우주전투기, 다람쥐통, 공중자건거, 청룡열차, 회전목마, 범퍼카, 공중전망차, 아폴로, 베이스볼, 파도타기, 스페이스루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