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돌아오시던 날이었다. 대낮에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 때문에 옥순이는 마루를 닦느라 바쁘고 부엌아줌마도 걸어 놓은 대구포를 먹기 좋게 찢어 술안주로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아버지는 축음기(유성기)를 사가지고 오셨다. 축음기판에 바늘을 얹고 노래가 흘러나오자 아버지는 콧노래로 흥얼거리셨다. 조용하신 아버지가 그날은 안방이 아니라 대청마루로 술상을 차려 오라고 했다. 마루로 나온 엄마의 등에 손을 두르시고 엄마의 손을 아빠의 어깨에 얹고 댄스를 하셨다. 넓은 마루에서 발을 맞춰 왔다 갔다 하며 춤을 추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다섯 살배기 어린 나는 부끄러워서 문 뒤에 서서 한쪽 눈으로만 보았다. 우리 집 대청마루가 넓고 평소에도 빤짝거렸지만 그날은 마루가 더욱 빤짝였다. 축음기를 사오신 후로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자주 엄마랑 춤을 추셨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던 우리 아버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쉰 목을 갖게 되었다. 목소리가 약간 쉰 듯하여도 박자와 음정은 정확해서 같이 살던 노래 잘하는 막내이모가 "형부는 노래를 잘 부르시네요" 하며 아버지의 노래를 즐겨 들어주었다. 외삼촌도 가요를 자주 부르시던 걸 셍각하면 외가는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대문 밖에서 들으면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이모가 부르는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이모는 노래를 잘 불렀다. ‘그네’와 ‘바위고개’ ‘동심초’ 이런 가곡을 들을 때면 이모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 속에 살아있다. 68년 전 이야기지만 이모는 동네 근처 결혼식장에 결혼식이 있으면 불려 다녔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모에게 축가를 부탁하려고 결혼식장 주인이 학교로 찾아올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축가를 불러주면 용돈을 받아와서 이모는 ‘모리나가’ 우유통에 항상 저금을 하였다. 불행하게도 이모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늑막염을 심히 앓게 되어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래도 소망을 가지고 무섭고 징그러운 지네를 한약에 섞어 약탕관에 달여서 열심히 먹었지만 병세는 나아지질 않았다. 이모는 음악대학을 꼭 가고 싶어했지만 결국 진학하지 못해 늘 슬퍼했었다. 나는 요즘 가요무대를 시청하면 옛날 노래는 거의 다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라 나 스스로 놀란다. 어릴 적부터 축음기를 통해 듣던 노래는 나도 모르게 은연중 머릿속에 저장되었나 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水適穿石·수적천석)더니 아주 오래전 들었던 옛 가요와 가곡이 세월이 지나도 기억이 살아난다. 아버지와 이모가 노래 부르시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5/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