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밀양여고 교지 난초10집에서
기획특집
생활 속 시인을 찾아서
- 청도면 신은립 시인
취재 : 김윤지, 김다정, 박은영 기자
정리 : 김다정 기자
밀양시 청도면 고법 농장, 여느 어머니, 여느 이웃과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신 아주머니 (실은 학부모이자 여고 선배이기도 하죠) 시인 신은립 님을 만나고 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교과서에서 수많은 시들을 읽고 또 외우면서 시인이라면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흔히 생각해 왔다. 물론 나도 습작을 하는 입장으로서 글을 쓴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구석이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자신의 이름을 건 시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뭔가 다른 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40여분, 내리자마자 산이 있고, 당산나무가 있고, 논도 있고, 비닐하우스도 있고, 다방과 반점도 보였다. 신기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밀양에서 조금만 걷다 보면 논밭에 비닐하우스가 안 보이는 데가 어디 있는가
어쨌던 거기서 전화해서 아주머니가 트럭을 갖고 데리러 오셨다. 시집 앞에 나와 있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아름다우셨다. 자신의 이름을 건 시집을 가진 시인이란 이미지보다 이웃집 아주머니 같다고 할까. 첫인상이 무척 편하고 좋은 분인 것 같았다.
흰 트럭 뒤에 올라타서 시골길(?)을 달리니 참 기분이 좋았다. 덜컹거리는 느낌, 와 닿는 찬 바람, 쇠똥 냄새가 날 것 같아 보이는 풍경까지도. 아주머니가 사는 마을에 내려서자 역시 당산나무가 보였다. 마을을 수호해 주는 의미가 있다던가. 장정 두 사람이 손으로 끌어안아도 모자랄 듯한 큰 나무. 산이 펼쳐지고 논이 있고 팔방못으로 물이 보이고, 가방을 내려 놓으려고 들어선 아주머니의 집에는 돼지와 개, 고양이까지 있었다. 꼭 이런 곳이라야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를 쓰기엔 최적의 환경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아주머니가 우리를 인도한 곳은 저수지가 훤히 보이는 명당. 아주머니는 이곳이 산책로라 하셨다. 나란히 앉아서 잔뜩 호기심에 찬 질문들을 퍼붓는데도 하나하나 자상하게 대답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시인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는 방향이나, 깊이나..
일하는 것이 바쁘셔서 시를 쓰는 것이나 책을 읽는 것은 거의 새벽에 하신다고 하신다.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그 시간 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신다. 좋아하는 시인도 시집도 너무 많아서 대답할 수 없다는 말씀과 함께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아주머니는 돼지를 수백 마리나 치고 계시는데, 그 분의 시 중에는 돼지와 관련된 내용도 담겨 있다. 시를 일상과 떼놓지 않는 것이다.
어떨 때 시상(詩想)이 떠오르냐는 질문에 역시 그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떠오른단다. 사실 아주머니의 시는 일단 읽기가 편하고 친근감이 있다. 그러나 역시 다시 읽다 보면 뭔가 느낌이 다르다. 그 점을 물으니 그저 웃어 보인다. 일상에 생각을 담는 것은 역시 시라는 언어의 마술일까.
아주머니는 예전에는 공책에 손으로 시를 썼는데. 요즘은 컴퓨터 앞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쓰신다고 한다. 한글97을 켜놓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랑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아주머니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생활의 한 부분일 뿐.
스리슬쩍 시를 잘 쓰는 방법이 있느냐고 여쭸더니 의외로 있다고 말하면서 웃으신다. 아니 보통은 그런 건 없으니까 그저 열심히 쓰라고 하는 것이 상투적이지 않나? 있어도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인데. 대체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거지? 은근히 그 노하우를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대뜸 하시는 말, 사랑에 빠져야 해요. 우리들은 순간 멍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사랑에 빠져 있으면 확실히 시가 나오겠단 생각이 스쳤지만, 아주머니가 쓰는 시는 사실 그런 시가 아닌데..? 〝 꼭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건 아니예요. 그러니까.. 시를 쓰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죠. 꽃에 대해 시를 쓸 때는 꽃을 사랑하고.. 할머니에 대해 시를 쓰려고 하는데, 할머니에 대해 사랑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시를 쓸 수가 없다는 거죠.〃
아아! 역시 그저 평범한 아주머니처럼 보이는데도 정말 다르구나.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래서 제목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무엇에 대해서 쓸 것인가를 정하고,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제목! 이건 시쓰는 사람들의 공공연한 비밀인데 내용이 구체적이면 제목이 추상적이고, 내용이 추상적이면 제목이 구체적이라야 한단다. 제목이 알맹이나 다름없다고. 사실 글 다 써놓고 제목을 붙이는 나는 내심 뜨끔했다.
농사일에 대해 쓴 시가 많은데, 그럼 농사일을 다 사랑하냐는 물음에는 조금 머뭇거리신다. 그러나 이내 대답을 하시는데,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단다. 하긴, 정말로 사랑한다면 애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인터뷰 중에 하늘을 올려다 봤더니 정말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새파랬다. 우리 학교도 높은 곳이라 하늘이 다른 곳보다 푸르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에 감탄하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약간의 자랑을 늘어놓으신다. 좋은 곳이라고. 그러나 요즘 갈수록 자연이 오염되고, 반딧불이도 보이지 않고.. 점점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심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밀양은 아름다운 곳이며 밀양에 대해 멋진 시를 쓰고 싶다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런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정말 멋진 시를 쓰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를 쓰는 대상에 대해 사랑을 해야 하고, 제목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만큼 숙제 때문이나 백일장 때문에 써 내는 시에 대해서는 염려가 많으신 듯 했다. 시를 쓰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억지로 쓰게 되면 절대 좋은 시를 쓸 수 없고, 자신이 쓰고 싶은 시를 써야 즐겁고, 제대로 된 시가 나온다고.. 특히 백일장에 내기 위해 써 내는 시는 그저 모범 답안을 써 내는 시험지나 다름없다고 하신 점이 정말 와 닿았다.
시를 쓰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자 확실히 힘들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를 썼지만, 본격적으로 시집을 내려고 시인선생님들께 배워가며 쓴 건 최근 5년 밖에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멋모르고 시를 쓸 때가 사실 더 편하고 좋았다면서 웃으신다. 그때는 그저 좋아서 시를 썼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름이 걸린 시집이 나와 있는 만큼 부담이 된다며 아마추어 때가 확실히 편하다고 웃으신다. 지금도 프로라고는 할 수 없다는 단서를 붙이는 겸손을 보여주셨지만, 이름이 걸린 시집을 이미 내놓은 마당에 비슷한 스타일의 시를 또 써서 낼 수는 없다고 하시는 아주머니는 이미 프로라고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시인으로 힘든 것은 역시 평론가들의 악평일까. 사실 아주머니께서도 시집을 낸 뒤 악평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것에 그렇게 신경을 쓰시지는 않는다고. 시인이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 스타일이 흐트러지고, 비위만 맞추려고 해서는 절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고.. 〝평론가들과 시인은 영원히 앙숙일 수밖에 없는 걸까〃라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아주머니에게는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참 멋이 있었다.
시에 대한 흥미는 예전부터 가져왔었지만, 시를 쓰고 책을 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난초 1집에 실린 시구 중 `새 교사는 바람만 불면 미친년 치맛자락처럼 휘날리더라.` 라는 시구가 그렇게 좋았다며 당시의 교지를 보여주셨다. 그 시구를 말하시며 웃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정말로 시에 대한 애정을 볼 수가 있었다.
고이 간직해오던 열정을 불타오르게 한 것은, 뜻밖에도 고재종 시인의 강의에서였다고 한다. 활동하고 계시던 문학회(경남농어촌주부문학회)에서 1박2일로 시인의 집에 묵었던 적이 있으셨단다. 그런데 뜻밖에도 존경하던 시인의 입에서, 아줌마들은 시를 쓰기는 어려우니 수필을 써라`했다는 것. 그 때부터 의욕에 불타(?) 수필을 때려치우고 시를 섰다고 하신다^^;. 이번에 서울에서 그 분의 강의가 있었는데 자신의 시집을 당당하게 내밀었더니 `좋네요` 라고 어물쩍 말씀하셨다는 그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입가에는 자신감 있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은 성취욕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제 일을 한 뒤 촛불 시위(효순이 미선이 추모)에 가야한다는 아주머니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이겠냐고. 아주머니는 별다른 주저 없이 조용히 말했다.
〝시는 삶이다〝
평소부터 생각을 해 오셨는지, 담담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 정말 멋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시가 왜 삶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그 삶 속에서 시를 이끌어내고 있는 모습의 정말 훌륭한 시인이 이렇게 말하는 데.
마지막으로, 신은립 시인의 시 한편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내 멋대로 고른 거지만, 시집 한 권에 열편도 `건져내기` 어렵다는 요즘 시집의 물결에서, 나름대로 내 감성에 자극을 받은 시라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시는 삶이니까.^^
새끼 돼지 거세하고
새끼 돼지 거세하네
태어난 지 일주일쯤 해야 하는 걸
장마 때문에 못하고
설사병 때문에 못하고
이리저리 미루다보니
두 달이 훌쩍 가버려네
더 크면 버둥이는 힘
감당하기 힘들 터
뒷다리를 꼭 잡고
배 위에 걸터앉아
꼼짝 못하게 누르면
남편은 수술칼로
실하게 자란
불알 두 쪽 잘라내네
더 크면 버둥이는 힘
감당하기 힘들 터
뒷다리를 꼭 잡고
배 위에 걸터앉아
꼼짝 못하게 누르면
남편은 수술칼로
실하게 자란
불알 두 쪽 잘라내네
피 묻은 손으로 시를 쓰네
질펀한 속울음 감추고 시를 쓰니
나는 사기꾼이네.
-시집 「늦게 핀 꽃」 신은립 시인-
난초는 밀양여고 교지
첫댓글 고재종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필 쓰라는 말씀 덕분에 시인이 되었고 밀양문학회 일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