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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이게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몰라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 6절까지 이렇게 끊었습니다. 1절에 보면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인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1절을 읽으면 좀 의문이 생겨요. 어떤 이유에서 무엇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이런 행동들을 어리석다고 할까 이런 행동이 어떤 거예요? 자기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거죠. 10장 11장, 12 13장까지 계속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내용이라고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자기는 사도예요. 자기는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예요. 그런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변화하는 것, 자기를 변화하는 것 자체가 되게 안 좋게 말하면 해괴망측한 일이고 되게 우스운 일인 거죠.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너희에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희가 이해하길 좀 이해했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도 나의 이런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설립자인 바울이 사도인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사도인 것을 변호하고 자기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변화한다는 그 자체가 웃긴 일이다. 그래서 ‘너희가 좀 이런 나의 모습을 이해해 줘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스스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냐 하면 고린도 교회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떠나고 그다음부터 계속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교회를 공격해서 이들의 공격 앞에 교회가 혼란스럽게 되고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겁니다. 이 거짓 교사들이 한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의 위치가 서거든요.
원래 위치라는 건 상대방의 위치를 무너뜨려야 내 것이 서요. 이게 세상의 이치잖아요. 누군가의 권력을 무너뜨려야 내가 권력을 갖는 것처럼 사도바울의 권력을 무너뜨려야 고린도교회에 대한 주도권을 이 거짓 교사들이 가지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런 일을 하게 됐던 겁니다.
에픽하이라는 힙합 그룹이 있는데 이 힙합 그룹의 멤버 중에 하나가 이 타블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탠퍼드 대학을 실제로 졸업을 했어요. 근데 어떤 사람들이 이 타블로의 학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라는 다른 말로 하면 타진요라는 카페를 만들어서 집요하게 타블로의 졸업을 의혹을 캐물었어요.
문제는 여러 차례 이 스탠포드 대학이 이 학생이 이 사람이 우리 학교를 졸업한 게 맞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던 거예요. 심지어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그렇게 했던 사람 멤버들 중에 여러 명은 여전히 타블로가 스탠퍼드를 나오지 않았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타블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같이 다녔던 친구도 있고 같이 공부 가르쳤던 교수도 있고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이건 마치 이런 것과 같아요. 저의 경우로 든다면 우리 교회 있는 성도들 몇 명이 제가 총신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같아요. 목사님이 총신대를 나올 리가 없다 등등 외모를 봐서 그 수준이 아니다 등등 좀 제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아니 88 동기 모임도 있죠. 군목들 군사 훈련받은 자료도 다 있죠. 아니 모든 게 넘쳐나는데 저보고 총신대학을 나왔다고 물으면 의혹을 제기하면 제가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어요? 바울이 그랬던 거예요.
아니 고린도교회를 설립하고 또 자기는 사도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고 또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 교회를 정말 힘 있게 권세 있게 잘 다스렸던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고 사도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자신을 변호하는 게 되게 어리석다고 봤던 거죠.
저도 그럴 것 같아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에게 의심을 하고 제가 막 강단에서 졸업장도 보여주고 사진도 보여주고 동영상도 보여주고 친구들이 찍어서 남일출 목사는 내 친구가 맞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 자체가 제가 광고 시간에 한다면 제가 얼마나 창피하고 제가 부끄럽고 억울하겠어요. 내가 왜 이래 미친 짓을 하지라고 분명히 제가 그렇게 했을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좀 이해해 달라라고 변호하는 거에 대해서 이해해달라고 말을 하면서 자기가 정말 얼마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스라엘을 돌봤던 것처럼 자기도 그런 열심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겼다는 거예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서게 하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교육하고 그들을 봉사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가 됐을 때 한 명도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 못한 사람이 없도록 신부로 단정하도록 그들을 양육하고 교육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기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의심하니까 사도권을 의심하니까 바울이 좀 억울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변호하는 자기의 행동이 어리석어 보여서 나의 어리석음을 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했냐 하면 질투하는 사랑으로 표현했어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돼 있잖아요. 이 열심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질투라는 의미도 있어요.
질투 질투 일단 열심보다는 질투의 의미가 훨씬 더 강해요. 근데 어떻든 번역은 열심으로 이렇게 해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 어떠냐 하면 질투하는 사랑인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도 딴 데 눈을 팔면 안 되는 누군가 조금을 더 사랑하면 안 되는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봤던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질투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양육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이 마음이 이해돼요. 여러분이 조금 한눈 팔잖아요. 정말 제 속에 그런 마음이 생겨나요? 제가 여러분과 막 교제하고 이런 건 아니지만 제 마음에 여러분이 한 눈 팔고 있으면 막 속에 천물이 나기도 하고요. 진짜 그래서 이 사도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돼요. 목자가 안 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죠.
여러분들은 부모니까 이 마음 이해하잖아요. 엄마로서도 다 이해되잖아요. 저도 목회자로서 이 바울의 이 마음이 이해가 돼요. 하나님이 질투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나도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질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고린도 교회를 잘 너희들을 잘 돌봤지 않느냐 근데 왜 너희가 나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또 너희가 거짓 교사들에게 너무 미혹에 넘어가서 지금 나를 반대한 일을 하고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지금 마침 하와가 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 것에 사로잡혔다는 거예요.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나 그 마음이 어디에 머물렀어요? 선악과에 머물렀잖아요.
그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마음이 하나님께 떠나서 거짓 교사들에게 마음이 다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 상태가 되게 불안했던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마음에 오염이 생길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자기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의 사도권이 무너지면 성도들의 마음이 완전히 이 거짓 교사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또 철저하게 자기의 사도 됨을 계속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거예요. 어떤 내용인지 10부터 13장까지 상세하게 나오지는 않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좀 싸우더라고요. 이건 이런 내용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싸웠다. 근데 명확하게 이 문제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이 사도 바울에 대한 사도권에 대한 공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냐 하면 거짓 선생들이 전하는 바울의 전하는 예수와 바울의 일행이 전하는 예수와 예수가 달랐어요.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가 아니라 거짓 교사가 전하는 예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였어요. 그러니까 다른 예수도 받아들이고 다른 예수를 전하는 사람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성령이 아닌 다른 영도 받아들이고 여러분 교회 안에는 성령이 아닌 다른 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근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봤더니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을 지금 받아들이고 그 다른 영을 성령처럼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자기의 사도권 변호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의 사도직을 변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받지 않은 다른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퍼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경고해야 고린도 교회가 다시 거짓 교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을 따르고 자기가 전한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목회자가 견고히 서면 교회는 잘못돼요. 그렇지만 바른 목회자가 견고히 서면 교회는 바르게 돼요. 가정도 똑같아요. 바른 부모가 바르게 쓰면 교회 가정은 바르게 되고, 잘못된 믿음을 가진 부모가 정말 그 가정을 이렇게 잡게 되면 가정은 잘못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요. 이런 일로부터 고린도교회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의 사도직이 확고히 서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정말 많은 분량을 차지해서 나는 정말 하나님께 부름받은 참 사도다. 그리고 내가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다 설립자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질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진짜 이스라엘 백성을 돌봤던 것처럼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양육하고 키웠다고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말하냐고요? 잘못 가고 있는 길에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길에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바울이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언변은 가지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갖고 있다고 본인이 확신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만났잖아요. 바울은 예수를 만났어요. 그래서 예수에 대한 지식이 정확해요. 그러니까 자기보다 예수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더 정확한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비록 마지막 사도이긴 하지만 자기보다 더 예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그가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다미색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2명의 사도는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바울은 그렇지는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권을 주장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정확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 따르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틀렸다는 거죠. 잘못됐다는 거죠. 난 예수 그리스를 만난 사람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내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는 참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6절까지만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위를 세우는 것 거짓 교사로부터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가정은 아버지가 아버지 자리에 서면 가정이 건강해져요. 엄마가 엄마의 자리에 서면 가정은 건강해지는 거예요.
엄마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엄마 역할을 해도 요즘은 뭐 그런 가정을 세상에서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잖아요. 하지만 성경적으로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기능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을 제대로 해야 좋은 가정이 되고 그 가정에서 좋은 자녀들이 자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의 위치가 견고할수록 교회는 튼튼해져가요. 물론 잘못되어서 이단이 되거나 아니면 마치 맹신하는 분위기가 생겨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요즘은 그런 건 없습니다. 교인들이 알 거 다 알고 해서 요즘은 맹신 자체는 없어 여러분 우리 교회에 맹신이 있나요? 있었으면 좋겠어요.
맹신이 없잖아요 요즘은 없어요. 아무리 가르쳐도 맹신이 맹신하잖아요. 이제는 심지어 막 기적이 일어나도 잠깐 맹신하지 시간 지나면 없어질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까 이 지도자들의 자리가 견고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제가 요즘 부교육자를 계속 뽑잖아요. 청년분일 때 오기로 하고 장로님과 대화를 다 나눠서 이제 이번 주부터 청년부 지도자가 오게 될 거예요. 그 이전에 이제 면접을 이렇게 계속 봤어요. 감사하게도 올려도 한 6-7장 이렇게 이력이 들어왔더라고요. 만나고도 보고 대화도 하고 어떤 느낌이 제가 그분들을 볼 때 있었냐 하면 자교가 목사라는 자긍심이 없어요. 목사는 목사여야 하거든요. 목사라는 자긍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역이 계속 흔들리는 거예요.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세웠다는 확신이 없어요.
사도바울의 교회가 그가 섬기는 교회가 왜 다 튼튼했을까요? 사도바울은 자기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가 섬겼던 교회들이 튼튼했어요. 성도들이 목회자들에게 해야 될 일이 뭘까요? 목사를 목사로 세우는 거예요. 물론 경제적으로 잘 돌보고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사역을 잘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목회자를 목회 자리에 세워놓는 거예요. 그 교회는 튼튼해져요.
여러분이 목회의 자리를 흔들잖아요. 교회는 점점 흔들리고 어느 순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도 요즘은 없어요. 또 이렇게 설교하면 듣지도 않아요. 만약에 제가 아니라 조금 유명한 목사님이 들으면 여러분들이 귀담아 듣겠지 담임이 제가 하는 말을 들어 하면 아마 대부분 깊게 듣지도 않을 거예요.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만큼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마음으로 제 지금의 설교를 듣는다면 이미 우리 교회는 무너지고 있는 거죠. 어딘가에는 제 리더십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 교회도 무너져요.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가 맹신하라는 의미가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여러분 저는 그렇게 하지도 못해요. 제 성향상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그런 DNA가 내재돼 있지 않아요. 어떻게 어쩌면 더 섬길까 이런 고민을 하지 내가 뭔가를 더 취하고 그걸 이익을 얻을까 경제 나도 아버지니까 부모니까 살아야 되니까 그런 말을 하고 장로님들과 이야기도 하고 대화를 하긴 하겠지만 그게 저를 중심에 이끌어가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왜 자기의 사도 이렇게 변화할까요? 고린도교회를 세우려면 자기의 사도권이 서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의 긴 분량을 할애해서 지금 자기의 사도권을 계속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을 잘못 보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사도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저렇게 하는구나 자기의 사도직이 지금 무너지니까 자기가 불편하니까 저렇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용을 보면 사도는 그렇지 않아요.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다시 고린도 교회를 세울까 거짓 교사에서 무너진 고린도교회를 다시 세울까라는 그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고린도교회를 세우려면 무너진 게 자기의 사도권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강력하게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우려면 수입이 더 많아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아버지 됨이 서고 어머니의 어머니 됨이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되는 거예요.
교회가 잘 서려면 목회자가 목회 자리에 있어야 하고 성도들은 또한 인정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든 교회든 서지 않아요. 여러분 회사도 회사도 회사도 사장이나 이 CEO의 리더십이 무너지면 그 회사가 무너져요. 그래서 CEO가 바뀌면 회사가 망하기도 하잖아요.
왜요? 리더십이 무너져서 그런 거예요. 결국 리더십을 세우는 건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일에 많은 분량을 쏟아부어가면서 지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계속 들어야 돼 왜요? 허드볼도 계속 이야기할 거니까 그런 관점에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말씀은 한 번 더 잘못 선포된 적은 없다. 새벽에 전도사님들이 설교를 해도 그 말씀은 한 번도 잘못되게 선포되지 않는다. 하나님 꼭 필요한 말씀을 개인과 교회에게 줘요. 단 우리가 못 보고 못 깨달르고 모를 뿐인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교회가 리더십에 대한 좀 확고한 어떤 자리가 자리매김이 지금은 있어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했던 것처럼 사도바울도 그런 사랑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울려 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좀 이해가 돼야 돼요. 교회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막 세우려고 해요. 근데 그 중심에는 자기를 세우는 게 있었어요. 자기의 사도권을 변화하는 것이 그래서 그런 열심으로 고린도 교회를 돌아보고 이렇게 돌아보고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보고 있는데 봤더니 가장 무너진 게 그거였어요. 막 파가 나누어지고 난리였잖아요. 그래서 다시 이것을 세우려고 하고 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가정에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에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에 자녀는 자녀의 자리에 우리 목장 교회도 마찬가지로 목사는 목사의 자리에 성도는 성도의 자리에 가끔 한두 번 자리가 바뀌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계속 바뀌는 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말씀을 잘 우리가 새기고 이 교회 안에 여러 종류의 리더십 어쨌든 선생님이 성성님으로 높여지지 않으면 아이들이 그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잖아요. 선생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교사가 교사로 세워져야 아이들이 그 선생님 말씀을 들어요. 리더십의 회복이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