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은 원론이 있다. 집합론이 있다. 수학적 체계에 대한 고민이 있다. 지식의 출발점을 찍는 문제다. 지식의 원론이 있어야 한다. 온고지신, 술이부작, 원형이정, 이유극강 그리고 연기법이 원론을 구성한다. 온고지신은 지식이 원형으로부터 복제된다는 원칙이다. 원형은 옛것이지만 옛것이 모두 원형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술이부작은 존재가 먼저 인간에게로 다가온다는 원칙이다. 관객의 욕망이 작가의 의도를 침범하면 안 된다. 원형이정은 변화 내부에 엔진이 갖추어져 있다는 원칙이다. 외부는 내부를 칠 수 없다. 이유극강은 내부에 숨은 변화가 밖으로 드러난다는 원칙이다. 안정은 어떤 경우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연기법은 모두 한 줄에 꿰어진다는 원칙이다. 배우가 많아도 한 명의 감독에게 지시를 받는다. 규칙은 정해졌다. 비로소 우주를 설계할 수 있다.
온고지신 - 지식은 원형을 복제한다.
술이부작 - 복제본이 원본을 칠 수 없다.
원형이정 - 원본에는 자체 엔진이 있다.
이유극강 - 변화가 균형을 낳는다.
연기법 - 둘의 연결고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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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어는 있는데 주어가 없다면 이상하다. 인류에게 세계관은 있는데 세계상은 없다.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는데 세상이 어떻게 내게로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근원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상이다.
공자의 술이부작과 같다. 세계관은 개인의 주관이 개입하므로 작作을 피할 수 없다. 술述에 충실하려면 세상이 스스로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야 한다. 세상이 스스로 다가오려면 자체엔진을 갖추어야 한다. 자체 동력을 자기고 변화가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
불경의 여시아문과 같다. 불교 경전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한다. 작作의 세계관에서 술述의 세계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다. 천동설은 인간의 희망사항을 반영한다. 그것은 작作이다. 패러다임의 교체가 아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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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인류가 생각한 첫 번째 세계상이다. 세상은 근원으로부터 복제된다. 세계가 먼저 당신을 불러냈다. 우리가 인간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세계중심적 사고로 바꿔야 한다.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의 입장을 버리고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연출자의 입장에 주목하면 진실이 보인다.
기승전결은 원형이정을 복제한 것이다. 인의예지도 마찬가지다. 변화로 변화를 복제하는 방법으로만 세상이 당신을 호출할 수 있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원형의 복제다. 원형을 복제하여 세상을 연출하는 엔진이 있다. 자연에서는 에너지가 되고 사회에서는 권력이 된다.
우리는 객체가 먼저 있고 외부 작용에 의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변화가 먼저다. 바람이 불기 전에 기압골이 형성되어 있었고 비가 내리기 전에 먹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강체가 움직이기 전에 유체가 압박했다. 이유극강이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변화가 격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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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이 외부의 작용을 받으면 불균형을 일으키지만 부드러운 것은 내부에서 스스로 균형을 만들어낸다. 변화의 자궁은 유체다. 유가 강을 낳는다. 변화는 자궁 안에서 일어난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격발된다. 인류는 닫힌계 내부를 보지 않았다. 변화의 자궁을 찾지 못했다.
당구공이 굴라가는 방향은 외부에서 결정된다. 화장실 가는 시점은 위장 내부에서 결정된다. 강체의 변화는 외부에서 결정되고 유체의 변화는 내부에서 결정된다. 인류는 그동안 외부를 봤을 뿐이다. 내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체를 쪼개면 내부가 사라지므로 쪼갤 수 없다.
대칭을 통해 내부를 볼 수 있다. 대칭은 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왼쪽의 반대가 오른쪽인 것은 아는데 주변의 반대가 중심인 것은 모른다. 인류가 수평의 대칭은 아는데 수직의 대칭을 모른다. 매개를 모르고 차원을 모르고 층위를 모른다. 내부를 보려면 특별한 도구를 써야 한다.
세계상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봐야 한다. 구조는 둘의 만남이다. 우리는 신체의 감각을 단서를 삼아 구조에 맞는 짝을 찾아서 사건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구조는 공유된다. 엄마와 아기가 자궁을 공유하므로 아기는 엄마를 찾을 수 있다.
구조는 둘이 맞물려서 접점을 공유한다. 공유가 지식의 궁극적인 근거다. 인간이 모르는 것은 에너지의 공유다. 활과 화살은 에너지를 공유한다. 기관차와 객차는 동력원을 공유한다. 공유를 매개로 삼아 에너지 전달경로를 추적하고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지식은 구조다. 안다는 것은 구조를 안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구조를 모른다는 것이다. 구조가 공유를 통해 뻗어가고 망라하는 방법을 모른다. 서로가 공유하는 매개를 모르고, 차원을 모르고, 층위를 모르고, 시스템을 모른다.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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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구조다. 구조는 공유한다. 공유하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다. 주는 자에게는 받는 자에게 없는 것이 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매개다. 매개는 붙잡는다. 총은 총알을 붙잡는다. 그것은 층위다. 활과 화살은 같은 층위에서 에너지를 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차원이다. 같은 차원에서는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 없으므로 의사결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는 자는 권력이 있다. 의사결정할 수 있다. 받는 자는 권력이 없다. 의사결정할 수 없다. 주는 자를 주목해야 한다. 주는 자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받는 자를 주목하는 실패를 저지른다. 주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보려고 하지 않으므로 보지 못한다. 보는 방법이 틀렸다.
총은 주고 총알은 받으며 함께 에너지를 전달한다. 인간은 숨어서 쏘는 총은 보지 못하고 과녁에 박힌 총알에 집착한다. 세상은 총알의 집합이 아니라 총의 무한복제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홀려서 피해자의 상처에 집착하다가 가해자의 흉기를 놓치는 실패를 저지른다.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총알에 집착하는 태도는 원자론의 관점이다. 원형론의 관점으로 갈아타야 한다.
세계관
인간의 생각은 자연을 본뜬 것이다. 세계상은 자연의 원형이고 세계관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세계상이 세계관을 복제한다. 동양적 사고의 원형은 주역의 원형이정 세계상이다. 모든 아이디어를 복제하는 사유의 원본 모형이 된다. 기승전결로 복제되고 인의예지로 확장된다.
원형이정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도달하고, 멈춘다. 그것은 변화 중심적 사유다. 유교에서는 변화 속에서 균형을 찾는 중용의 세계관으로 발전하고 도교에서는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이유극강의 세계관으로 발전한다.
원형이정의 정貞은 안정이니 기승전결의 결結과 같다. 변화가 사건을 격발하고 안정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원형이정에 동력원을 추가하면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된다. 세상을 변화 속의 균형으로 보는 동양적 세계관과 불변의 원자로 보는 서구적 세계관은 사유의 방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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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유柔다. 안정은 강剛이다. 세상을 유柔로 볼 것인가, 강剛으로 볼 것인가? 유는 움직이고 강은 머무른다. 유는 길이고 강은 집이다. 집이 먼저 있었는데 집과 집을 연결하여 길이 되었는가, 아니면 길이 먼저 있었고 그 길이 끝나는 곳이 집이 되는가?
길이 먼저다. 유가 먼저고 변화가 먼저다. 세상을 변화의 속도조절로 이해하는 관점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길은 움직인다. 길은 액션이다. 액션이 먼저다. 길이 막혀서 액션이 방향을 바꾸면 집이다. 집은 길의 말단부다. 강은 유가 교착되어 나란한 것이다.
우리는 존재가 먼저 있고 변화는 존재에 딸려온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변화가 먼저고 변화가 얽힌 것이 존재다. 우주는 그 자체로 거대한 하나의 액션이다. 문제는 그 액션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데 있다. 액션을 정지해야 관측이 되는 모순 때문이다.
변화 다음에 안정인데 인간은 변화를 놓치고 안정을 관측한다. 원형이정의 정 단계, 기승전결의 결 단계만 관측한다. 생선을 자르려면 붙잡아야 한다. 붙잡으면 액션을 잃는다. 존재는 액션인데 관측하려고 액션을 멈추게 되니 모든 관측은 왜곡된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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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는가, 부는 것이 바람인가? 부는 것이 먼저다. 인간이 그것을 보고 바람이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바람+불다로 알지만 천만에. 바람이 갑자기 불어올 리가 없다. 자연은 기압>바람>불다 순서다. 인간이 개입하여 관측>바람>불다로 왜곡된다.
언어는 주어+동사다. 동사는 주어에 딸려 있다. 용언은 체언에 딸려 있다. 길이 집에 딸려 있다. 틀렸다. 관측자 중심으로 보는 인간의 언어가 잘못된 데서 꼬였다. 바람이 불기 전에 기압골이 만들어져 있었다. 비가 내리기 전에 구름이 만들어져 있었다.
진실 = 액션 + 주어 + 술어
거짓 = 관측 + 주어 + 술어
자연의 진실 - 기압 > 바람 > 불다
인간의 착각 - 관측 > 바람 > 불다
우리는 강체가 운동한다고 믿지만 유체 + 강체 + 운동이다. 부는 그것 + 바람 + 불다가 된다. 부는 그것은 기압이다. 기압은 유체다. 바람은 강체다. 세상은 존재 + 운동이 아니라 유체 + 강체 + 운동이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그것에 앞선다.
우리는 사람과 행동으로 이해하지만 권력과 사람과 행동이다. 유체 중심, 변화 중심, 에너지 중심의 사고를 얻어야 한다. 유체는 계를 이루고 계 내부에 압력을 형성하며 압력의 균형이 강체다. 닫힌계를 중심으로 보는 원형이정의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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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 논증이다. 안타깝게도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인류 중에 없다. 무언가를 느낀 사람은 있다. 그것은 직관이다. 직관과 논리 사이에 연결고리가 빠져 있다. 어색하다. 뇌가 가렵다. 사유가 격발된다.
왜 이 말이 유명해졌을까? 내가 느낀 것을 당신도 느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의심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틀렸다. 과학은 직관의 산물이다. 무언가를 느낀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의심이다. 의심은 추론인데 직관이 추론에 앞선다.
의심은 거짓을 찾는다. 직관은 참을 찾는다. 무언가를 느꼈으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찾지 못한다. 생각하는 것은 주체다. 의심되는 것은 객체다. 존재는 객체다. 객체는 나와 분리된다. 주체와 단절되어 맞은편에 있다.
생각하는 내가 주체이면 존재하는 나는 객체다. 내가 생각할 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주체 속의 객체다. 객체는 나의 밖에 있지만 몸뚱이 밖이 아니라 자아의 밖이다. 생각하는 존재는 자아 안에 있다. 내 속에 내가 있다. 주체 나 속에서 객체 내가 복제된다.
뒤따르는 것은 선행하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진술은 전제를 의심할 수 없다. 아기는 엄마를 의심할 수 없다. 엄마는 자궁 속의 아기를 의심할 수 없다. 활 속의 화살을 의심할 수 없다. 총 속의 총알은 의심할 수 없다. 증명한다는 것은 곧 복제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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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복제된 존재이므로 우리는 추론하여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추론은 복제의 원형을 찾아가는 절차일 뿐 그 자체로는 지식이 아니다. 지식의 근거는 복제다. 코기토 논증은 하나의 액션이 관측자에 의해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졌을 때 추론하여 이를 복원하는 방법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지식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엄마와 아기로 나누어졌을 때 둘이 공유하는 출산에 의해 아기는 증명된다. 출산은 액션이고 액션은 에너지가 이동하는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명된다. 주체가 먼저다. 에너지는 주체에서 객체로 간다. 기관차에서 객차로 간다. 활에서 화살로 간다. 총에서 총알로 간다. 에너지가 그 역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
주체 - 주는 사람, 원형, 결정, 능동, 전략, 유체, 권력, 문제, 민주, 사건, 동動, 에너지, 마이너스
객체 - 받는 사람, 원자, 전달, 수동, 전술, 강체, 신분, 답안, 독재, 사물, 정靜, 물질, 플러스
에너지의 유무에 따른 층위가 있다. 공유에 따른 차원이 있다. 둘을 붙잡아주는 매개가 있다. 둘 중에 선행하는 메타가 있다.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에너지가 있다. 객체적 사고를 버리고 주체적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주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주는 사람이 결정하고 받는 사람은 전달한다. 에너지를 주는 쪽이 주체다.
원형은 존재 내부의 고유한 액션이고 원자는 외부에 있는 인간에게 관측된 정보다. 인간의 개입에 의해 왜곡된다. 관측했다는 것은 액션을 정지시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차원의 공유를 깨고 둘을 붙잡는 매개를 버리고 선후를 알수 없게 만들었다. 원자론의 사유를 버리고 원형론의 사유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