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菩提야 汝勿謂如來가 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법이 있다’고 이르지 마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지니
圭峰 谷中無人이나 能作音聲이니라 二는 釋所以라 규봉 골짜기에는 사람이 없으나 能히 音聲을 내느니라.
何以故요 若人이 言如來가 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 능히 내가 說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說誼 佛說一切法이 湛然常寂滅하시니 但信佛無言이면 可稱爲子期니라
설의 부처님이 설하신 일체법은 담연湛然하여 항상 적멸하시니 다만 부처님가 말이 없음을 믿으면 가히 種子期(知音者)라고 이를 만하도다.
圭峰 世尊이 達諸法空하사 畢竟無執이시니 今言有說이면 是謗佛執法也니라
규봉 세존께서 모든 법이 空함을 통달하시어 필경엔 집착이 없으시니 지금 설함이 있다고 말하면 이는 부처님이 법에 집착했다고 비방함이 되느니라.
冶父 是則是나 大藏小藏은 從甚處得來오
說誼 佛無所說이 是則固是나 頓漸偏圓의 大小乘藏이 充樑溢宇하야 如今天下에 無在不在하니 若都無說인댄 如是法門은 其誰說來오
야부 옳기는 옳으나 大藏經 小藏經들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설의 부처님이 說한 바 없음은 眞實로 옳으나 頓敎, 漸敎,偏敎, 圓敎의 大乘 小乘 藏經들이 들보에 가득차고 집에 넘쳐서 지금 천하에는 없는 곳이 없도다. 만약 그 모두가 설함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와 같은 법문은 그 누가 설한 것인가.
冶父 有說이라도 皆成謗이요 無言이라도 亦不容이라 爲君通一線하노니 日向嶺東紅이니라
說誼 有說無說이 二俱擔板漢이라 無念說示가 同谷響이요 亦如日輪이 照無心이로다
야부 說함이 있다 해도 더 비방을 이루고, 말이 없다 해도 또한 용납하지 못하도다. 그대를 위하여 한가닥 線을 通하노니 해가 嶺東에서 붉게 떠오르리라.
설의 설이 있음과 설이 없음을 둘 다 모두 擔板漢(한쪽만 보인다는 뜻)이로다. 無念으로 설하여 보이신 것이 골짜기의 메아리 같고, 또한 해가 비추되 無心히 비춤과 같도다.
圭峰 三은 示正見이라
규봉 ㉵三. 正見을 보임이라.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을 是名說法이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說誼 法身은 本無說이라 報化方有說이니 有說은 非眞說이요 無說이 是眞說이니라 十方佛土中에 唯有一乘法하니 離此一乘法하고 更無可說底라 故로 云無法可說이요 只以一乘法으로 開示諸衆生일새 故로 云是名說法이니 若是一乘法인댄 直是無開口處로다 然이나 亦不離衆生日用이니라
설의 法身은 본래 說함이 없는지라. 보신 화신이라야 설함이 있으니 설함이 있음은 참다운 설이 아니고 설함 없음이 참다운 설이니라.
시방의 佛土 가운데는 오직 一乘法이 있으니 一乘法을 떠나서는 다시 가히 '설할 것'이 없도다.
그러므로 이르되 법 가히 설할 게 없다 한 것이요, 다만 일승법으로써 모든 중생에게 열어보이셨으므로 이름을 설법이라 한 것이니 만약 이 일승법이라면 바로 입 열 곳이 없음이로다. 그러나 또한 중생의 日用을 떠난 것도 아니니라.
圭峰 偈에 云如佛法亦然하니 所說二差別이 不離於法界라 說法無自相이라하며 大雲이 云若言無說인댄 是眞說法이어니와 若云有說인댄 不名說法이니 是謗佛故라하다
규봉 偈에 이르되 부처와 같이 法 또한 그러하니 설한 바 두 가지 차별이 법계를 떠나지 않아서 설법에는 스스로 相이 없다고 하며, 大雲이 이르되 만약 설함이 없다 하면 이는 참다운 설법이거니와 만약 설함이 있다 하면 설법이라 할 수 없으니 이는 부처님을 비방한 연고라 하다.
六祖 凡夫說法은 心有所得이라 故로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來說法은 心無所得이니 凡夫는 作能解心說이어니와 如來는 語黙이 皆如하야 所發言辭가 如響應聲이라
任運無心하야 不同凡夫의 生滅心說이니 若言如來說法이 心有生滅者인댄 卽爲謗佛이라하시니라
維摩經에 云夫說法者는 無說無示며 聽法者는 無聞無得이라하시니 了萬法空寂하야 一切名言이 皆是假立이라 於自空性中에 熾然建立一切言辭하야 演說諸法호대 無相無爲하야 開導迷人하야 令見本性하야 修證無上菩提를 是名說法이니라
육조 범부들의 설법은 마음에 얻은 바가 있음이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如來의 설법은 마음에 얻은 바가 없음이니라.
범부는 능히 아는 마음을 지어서 설하거니와 여래는 말과 침묵이 모두 같고 發하는 言辭는 메아리가 소리에 응함과 같으며,
운용에 맡겨 무심하여서 범부의 생멸심으로 설함과 같지 않으니, 만약 여래의 설법이 마음에 생멸함이 있다고 하면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 된다 하시니라.
유마경에 이르되 대저 說法이란 說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聽法이란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하시니 만법이 본래 공적함을 요달하여 일체의 名, 言이 다 거짓으로 세운 것이라.
스스로 空한 性品 가운데 치연히 일체의 언사를 건립하여 모든 법을 연설하되 相도 없고 함도 없이 미혹한 사람을 깨우고 지도하여서, 이로 하여금 本性을 보게 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닦고 증득하게 함을 說法이라 이름하느니라.
冶父 兎角杖龜毛拂이로다
說誼 古人이 道호대 四十九年積累功이여 龜毛兎角이 滿虛空이라 一冬臘雪이 垂垂下하야 落在烘爐烈焰中이라하시니 則許多年을 露胸跣足하고 拖泥帶水하사 拔濟沈淪하신 如是功能이 如夢相似하야 無一毫許可與相許로다
雖然如是나 畢竟作麽生道오 拈起兎角杖하야 拈開一路涅槃門이요 竪起龜毛拂하야 拂盡三千空假中이로다
야부 토끼뿔로 만든 지팡이요 거북털로 만든 拂子(털이개)로다.
설의 옛사람이 이르되 四十九년간 많은 功을 쌓음이여. 거북털과 토끼뿔이 허공에 가득함이라. 한겨울 섣달 눈이 계속 내려서 붉은 화로의 불꽃 속으로 떨어진다 하시니라.
곧 허다한 세월을 가슴 드러내고 맨발로 진흙을 묻히고 물에 젖으며 고해에 빠져 있는 중생을 건져 제도하신 이와 같은 功能이 꿈과 같이 相似하여 한터럭 만큼도 가히 더불어 서로 허락할 게 없도다.
비록 이 같으나 필경 어떻게 말할 것인가. 토기뿔 지팡이를 잡아 일으켜서 한길의 열반문을 열어주고 거북털의 털이개를 일으켜 세워서 三千大千世界의 空, 假, 中을 다 털어 없애버리도다.
冶父 多年石馬가 放毫光하니 鐵牛哮吼入長江이로다 虛空一喝이 無蹤迹하야 不覺潛身北斗藏이로다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說誼 寂滅場中에 不曾擡步하고 生死海裏에 橫身而入하사 許多年을 以石馬而放毫光하사 致令盲者로 得見하며 以鐵牛而作哮吼하사 致令聾者로 得聞케하시고 且喝得虛空하사 令北斗裏藏身케하시니 且道하라
是說法가 不是說法가 若道是說인댄 爭奈石馬鐵牛어니 有甚閑情이며 有甚閑氣리오 若道不說인댄 爭奈放光哮吼하야 解喝虛空가
又須信四十九年說이 石馬放光鐵牛吼니 石馬鐵牛가 竟無力이요 虛空一喝이 便無蹤이라 伊麽則虛空一喝이 大烘焰裏요 放光哮吼가 一冬片雪이로다
야부 나이 많은 石馬가 백호광명을 놓으니 鐵牛가 포효하며 長江으로 들어가도다. 허공의 一喝 종적이 없이 몰란결에 몸을 숨겨 北斗에 감추도다. 또 일러라. 이것이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설의 적멸의 도량 가운데서 일찍이 걸음을 옮기지 않고, 생사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들어가서 허다한 세월 동안 石馬로써 백호광명을 놓아서 눈 어두운 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鐵牛로써 사자후獅子吼를 하여서 귀먹은 자로 하여금 다 듣게 하시며, 또한 허공에 대고 할(喝)을 하시어 北斗로 하여금 몸을 감추게 하시니 또 일러라.
이는 설법인가 설법이 아닌가. 만약 설법이라 하면 이는 石馬와 철우가 같거니 무슨 부질없는 생각이 있을 것이며 무슨 부질없는 氣가 있으리오.
만약 설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방광하고 포효하여 허공에 대고 할(喝)할 줄 어찌 알겠는가. 또한 모름지기 四十九년 설함은 석마가 방광하고 철우가 부르짖음인 줄 믿을지니 석마가 철우가 마침내 힘이 없음이요, 허공의 一喝이 문득 자취가 없음이로다.
이런즉 허공의 一喝이 큰 불구덩이 속이요, 방광과 포효가 한겨울의 조각눈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