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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의존교회110408a (할례와 십자가 )-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2장6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골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골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주인이었는데 이제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동안 내가 주인이 되었을 때는 세상을 살 때 내가 계획하고 내가 희망하고 내가 기대했고 내가 계획했던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해서든 달성을 해야 하는 그런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로 받아 버리면 예수님이 그냥 맹탕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고 나름대로의 미래가 있으시고 나름대로의 조치가 있으니까 내가 따로 내 계획 내조치를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을 주로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되느냐 하면 물론 오늘 읽었던 본문 마지막에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 했는데 이것을 제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두려워 말라’ 무엇에 대해서? 주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할 것은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사람, 그리고 늘 감사함으로 넘치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되겠죠. ‘집사님, 집사님은 어떻게 감사가 넘칩니까? 집사님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세상 것에 대해서 안 부러워하는 아주 희한한 사람이 되어 사네요.’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받는 사람들의 서로 소통하는 공통성, 연대감이 연대성이 형성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은 사람은 자기 계획, 자기 입장, 자기 처지 그것은 홀라당 날라 갔어요. 예수님이 마련해 준 자기가 내 자리고 예수님이 하신 계획이 나의 미래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로 받은 사람은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엇만 좋다는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셔서 이끄시는 그 점이 나는 그렇게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성경에 나와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세상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 그전에는 세상 것을 끄집어내어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상 것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다는 그 점이 그렇게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자랑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섬기게 된 달라진 모습이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말씀 자체가 감사하며 부러워하지 말라, 그저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렇게 되는데 감사하자 이럴 때 여러분, 2장 7절에 보면 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아서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감사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믿음에 굳게 서라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 예수님께 받은 교훈 위에 세웠습니다. 믿음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의지 하면서 예수님을 주로 섬기면서 모든 일에 감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되지 않는 다는 말은 어디서 벗어났다는 말이냐 하면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에서 벌써 이탈했다는 뜻입니다. 탈선을 한 거죠.
보통 옛날 사람들이 이랬습니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저는 가로지르기 또는 길이 아닌 길은 가지 마라는 것이 어릴 때는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어요. 여름에 밭을 보면 벼가 자라서 그 속으로 못 가니까 논두렁 가로 가면 되는데 겨울에는 추수를 해서 전부 운동장같이 넓잖아요. 그러면 길로 가기보다는 가로 질러가면 빠르잖아요. 가로지르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고 가로 지르지 말고 새치기 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이제 도시에 사니까 그게 이해되는 거예요. 만약에 도시에 살면서 행단 보도가 아니고 차를 몰 때 자기 맘대로 길이 아닌 곳에 차를 몰고 가면 약속에 의해서 내가 길이 아닌 길을 위반해 버리면 저쪽은 약속을 지켰는데 이쪽에서 안 지키면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충돌이 일어나죠. 교차로에서 나는 직진을 하면 안 되는데 직진을 했고 저쪽에서 직진을 해 버리면 4차선 한 가운데서 박치기를 하게 되죠. 길이라는 것은 내 편한 데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길이 있는 곳에 가라는 말은 우리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길을 만든 거예요. 그게 바로 교훈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게 되면 예수님의 교훈을 받는 샘이 되고 예수님의 교훈을 의지하게 되면 그 결과가 감사하게 되고 동시에 주님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다 보니까 세상 불신자들이 어떻게 살던 어떻게 성공했던 거기에 대해서 전혀 부럽지 않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들이 가진 소유입니다. 이 세상에는 ‘너 가진 것 내 놔라, 내가 가진 것 내 놓을게 누가 더 세냐 하는 그 경쟁과 그 게임 속에 전부다 어쩔 수 없이 밀리고 있어요.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가 그거예요.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은 예상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사람으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장사꾼이 장사하면서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잖아요. 반드시 남는 게 있어야 되는데 내가 노력한 것만 건지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물교환입니다. 항상 자본주의라는 것은 내가 노력한 것 말고 더하기, 더 얻어야 되는데 그 더하기는 남이 나보다 모르는 것, 남들이 노력한 것을 내가 그냥 빼어 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자본주의 구조가 정직하게 하면 돈 버는 그런 구조가 아니고 남이 한 눈팔 때 후닥닥 가져오는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 원칙을 제가 쉽게 예를 들게요. 선생님께서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문제 나올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합니다. ‘10페이지, 15페이지, 30페이지 주의해라 문제집 중적으로 나온다.’ 선생님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학생들이 속닥속닥 거리고 노래 이야기하고 어머니 이야기하고 드라마 이야기하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은 10페이지 15페이지 30페이지 나온다고 해서 “야, 시험공부가 쉽게 됐구먼! 이것만 공부하면 돼” 하고 했는데 걔는 떠드냐고 그 이야기를 안 들어 버린 거예요. 안 듣고 시험 칠 때 성적이 떨어지면서 등수가 밀려나는 거예요. 등수가 밀리면 결국은 좋은 대학 못 가는 거예요. 그러면 좋은 대학가고 소위 나라에서 돈 대주는 대학, 세무 대학, 경찰대학, 철도대학……. 이렇게 좋은 대학 간다는 것은 결국은 선생님이 이야기할 때 그 교훈을 정신 바싹 차리고 들었다는 이야기이고 공부가 뒤떨어졌다는 말은 선생님이 이야기할 때 자기는 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죠.
제가 예를 들어서 육군사관학교는 나라에서 돈을 다 대줘요. 옷도 나오고 잠도 재워 주고 끝나고 나면 육군소위는 그냥 따는 거고 대위, 중위, 소위까지는 그냥 진급이 돼요. 국가에서 공급을 받는다 말이죠. 지금 농땡이 하는 학생들은 생각이 뭐냐 하면 내가 공부 안 해도 나라가 좋은 나라라면 모든 학생들 전부다 자기가 원하면 육군사관학교 다 넣어 줘서 육군사관 학교 정원이 150명 200명 되지 말고 265,700명 또는 724,250명으로 해서 무조건 돈 다 대라는 것이고 나라에서는 너희끼리 경쟁하라는 말입니다. 무슨 경쟁? 선생님이 시험 나온다고 할 때 정신 바싹 차리고 공부하는 사람만 뽑겠다는 거예요.
경쟁이라는 것은 누구나 자기 몸 편하고 싶고 시지 치기 싫고 공부하기 싫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공부를 잘하니까 저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웠어요. 라고 하지만....... 그런 공부 잘하는 사람과 시험 치면 골치 아파요. 하지만 아주 악조건, 힘든 조건, 누구나 하기 싫은 것을 해 낼 수 있는 의지를 그런 얘들에게만 다른 얘들이 못하는 일을 제공하는 그것이 정당한 자본주의자의 경쟁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중에 어떤 학생은 육군사관학교를 갔다, 다른 학생은 육군사관학교 못가서 다른 대학에 갔다 나중에 10년 뒤에 만났다 했을 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거예요 너는 군인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졌고 나는 불안정하고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시험 칠 때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시험 못 치잖아요. 이것은 결국 불공평을 드러내는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열중하면 그것조차도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또 불공평이 되는 거예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서빙 하는데 다른 얘들은 쟁반을 흘리지 않으면서 잘 하는데 이 아이는 손에 수전증이 있는지 벌벌 떨어서 아르바이트하는 그 자리를 빼앗겼을 때에 그 아이가 뭐라 하겠습니까? “정말 불공평한 세상이다. 좀 떨어도 넣어 주지 왜 떠는데 안 되는데?” 하는 생각 하겠고 또 접시를 잘 나르는 얘들도 “역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해 주는구먼. 하고 그 자체가 또 불공평의 세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감사하라 부러워하지 말라는 이 긴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이 감사가 자본주의에서 감사는 ‘역시 나는 승리했어. 경쟁에서 이겼어’ 그렇게 온 감사라면 여기의 감사는 일체 인간들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사람에게는 그 사이에는 모든 자본주의의 인간의 능력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전부 다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세상에서는 능력을 농땡이 치지 않고 열심히 해야 겨우 밥 먹고 살 정도로 이 각박한 세상에서 기껏 감사할 것은 남은 이기고 내가 승자가 될 때 감사한데 우리 예수님은 그런 식의 감사가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그냥 주셨다는 점에서 늘 감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감사의 주인이 다르죠. 한 쪽은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모였다는 그것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은 농땡이를 쳐도 육군사관학교를 못가도 선생님이 시험문제 낼 때 떠들어 빵점 맞아도 상관없이 그것이 주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감사가 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사 다른 질의 감사를 성경 골로새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교훈은 다른 게 아니에요. 제발 경쟁해서 이 땅에서 네가 승리자가 되는 것에 마음 두거나 그것을 인생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을 감사라고 애쓰지 마라 하는 그런 교훈들이겠죠. 예수님은 이 땅에서 패배자였으니까 아무리 열심히 착한 일 해도 결국은 마지막은 십자가 못 박혔다는 죄수가 되었다는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그 길을 가겠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분은 하나님이지만 사람의 종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거예요. 감히 하나님도 사람의 종이 되어 십자가 졌는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지고 종 되는 것이 뭐가 그리 서럽고 그게 뭐가 그리 짜증날 일이고 그게 뭐가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일이냐 이 말입니다. 우리를 만든 하나님이 기피하는 십자가를 졌는데 하물며 우리가 십자가 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그것을 마치 안 져야 될 십자가를 마치 억지로 지는 것처럼 그렇게 뻗대면 그렇게 잘났으면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예수님은 뭐가 못나서 십자가 졌어요? 어감이 괜히 지금 나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이것은 평생 우리 자신이 우리보고 나물할 문제입니다. 남한테 졌다는 것, 내가 쟤보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거예요. 만날 감사해야 할 것도 쓰레기로 갖다 버리고 감사 안하는 쪽으로 마음가짐을 아예 굳혔어요.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짜증낼까 아예 마음 계획을 그렇게 잡아요. 주님 주신 게 뭐가 있는데요? 뭐가 잘났다고 주님입니까? 내가 보니까 저 사람보다 못하고 절에 다니는 사람보다 못하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더 못한데 실컷 교회 다녀도 나에게 돌아오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예 짜증을 낼 만발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훈아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울긴 왜 울어’ 예수님께서 우신 적은 못 박을 때 아파서 우신 게 아닙니다. 하도 예수 믿는다는 작자들이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존경했어요. 훌륭하십니다. 앞으로 좋은 관계 유지 합시다. 주님하고 좋은 관계 유지해서 자기한테 돌아오는 게 뭐가 있는데? 아무 것도 없는데 자기 오빠 죽었다고 통곡하고 주님의 교훈은 뭐겠습니까?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것이 예수님의 교훈이잖아요. 이 교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게 주안에서 감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감사의 꺼리 감사의 내용을 미리 정해 놨어요. 저 사람보다 이겨야 되고 내가 저사람 추격해야 되고 내 몸은 내가 어떻게 되고....... 자기가 다 정해 놓고 주님께서 나한테 해 줄게 뭐가 있습니까? 감사할 것을 따로 꼬불쳐 두고 그것을 무조건 해 내라는 거예요. 우리가 정한 감사는 자기가 하나님 인양 여길 때 철딱서니 없는 만들어 낸 감사이고 십자가 지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는데서 나온 감사이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는 감을 사지도 배를 사지도 못합니다. 그냥 짜증의 다른 모습입니다.
얼마나 짜증났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와요? 감사하면 좋아서 입이 씰룩씰룩 웃지 ‘앞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너 지금 화내고 있지?’ ‘아닙니다. 감사하겠습니다.’ ‘말소리 내가 보니 화내고 있는데?’ ‘아닙니다. 앞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화나면 화난다고 솔직히 이야기해’ ‘주님 믿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이건 뭐 오기도 아니고 데모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가 감사입니까? 씩씩되는 것이죠. 하여튼 우리는 교회 나와도 나올 때부터 씩씩대고 나와도 씩씩대고 들어가고 씩씩대고 우리는 씩씩대기를 평생을 주님 앞에 짜증내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예수님을 주로 받은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 정도가 아니고 감사가 넘쳐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감사가 넘친다고 했어요.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맞이할 때 그렇습니다. 자 묻습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이 예수님이 어깨에 날개 달고 올 때 주가 됐습니까? 구름 타고 올 때 주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이 지상의 모습, 지상의 흔적은 뭐였습니까? 십자가 이지요. 십자가였습니다. 어떤 백부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보고 ‘저분이다. 내가 기다리던 메시야는 저분이다.’ 라고 알아차렸어요. 십자가 지고 부활할 때 저분이다가 아닙니다. 아직 부활되지도 않았어요.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지도 않았는데 십자가 지신 것보고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나온 음성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이야기 듣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이 되었어요. 재림이 된 게 아니고 구원이 되었어요. 아니 다 같은 십자가 인데 십자가 본 군중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왜 그 많은 사람들은 아 예수님 지 까불다가 죽는 구나라고 해석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 백부장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순간 저분이야 말로 메시야라는 것을 어떻게 눈치 챘느냐 말입니다. 그게 눈치 챌 문제입니까? 어째서 그랬느냐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옆에 있던 강도는 어째서 자기와 같이 마지막 가고 있는 예수님보고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저를 생각해 달라 어째서 예수님에게 나를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알아챘습니까? 그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과 일치시킬 때만 그렇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앞서서 보여 준거라고 본겁니다. 그분이 아버지께 저주를 받는 저주의 모습은 사실은 나라는 존재가 미래에 들이닥칠 저주의 모습을 앞당겨 보여준 거예요. 내 미래상, 내 모습을 미리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나의 미래의 계획이었습니다. 나의 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어야 되는 것도 내모 습이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역시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의 열매이고 우리가 그렇게 될 겁니다. 땅에 속한 형상은 사라져도 땅에 속한 형상이 사라진다는 조건하에 하늘의 형상을 입을 겁니다. 감사의 이유가 들어 났죠. 그것은 바로 내가 죽어야 될 자인 것을 비로소 제가 매사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에 감사 하죠. 그전까지는 내가 저 사람 이겨야지, 저것을 나도 가져야지 내가 원하는 것에 충족될 때 감사했는데 이제는 지금껏 이런 것 없어도 그런 것 가질 자격도 못되는 지금 당장 하늘의 부합되는 것보다 더 심한 게 방사능이거든요 지금 당장 방사능을 쐐서 온몸이 하얗게 백혈병처럼 죽어 가더라도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비하면 그건 호강한 것이라고 느껴지는 그 심정, 그것이 내 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모습, 그런 상황…….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저 십자가를 알게 하기 위한 조치라는 차원에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조치가 왜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는가! 이게 나하고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너에게 일어날 일을 내가 먼저 앞당겨서 당하고 있는 거야라고 일러주는 그 음성을 듣는 계기가, 사건들이 앞으로 우리가 평생 살면서 그 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과 관련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그 뒤에 말씀이 상당히 어려워요. 미리 이야기하면 구약에 할례를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시킵니다. 그것을 풀어내는 게 힘들어요. 아주 어려워요. 할례는 껍질 벗긴다. 껍질 벗는 것을 예수님은 육의 몸을 벗는 것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연관시키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게 나옵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들은 십자가로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로 승리했다, 부활이 승리한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율법 조항을 찢어 버린 거잖아요 없앴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해석이 나왔냐는 겁니다. 이런 어려운 것이 있기 때문에 먼저 제가 준비 단계를 하면서 바로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거예요 만약에 세상을 두려워하는 그 순간 감사함은 우리에게 소멸됩니다. 여러분 재산이 갑자기 100억 200억 늘어나면 감사가 될 줄 알죠. 순간적으로 감사가 되지만 나중에는 200억 딱 챙기면서 하는 말이 ‘주님 이거 다시 뺏어 가기만 해 봐라 나 화낼 거야’ 감사가 아니고 일단 내 손에 들어 왔으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것으로 족하다는 거예요. 가져가신 자도……. 그것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가져가신 하나님은 안 믿겠다는 거예요 주신 자만 하나님이요, 주신 자만 하나님이요 또 주신 자만 하나님이요, 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게 우상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주님은 주십니다. 주실 때 주님이 자기한테 자기가 준 거예요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니에요 십자가 오는 순간 내가 받을 자리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폭파되고 없습니다. 내 자리는 누가 차지하느냐 하면 주님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어제 가락 교회에서 강의 하면서 어떤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 몸이 영혼이 우리의 집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의 집은 예수님이 우리의 집이에요. 우리 영혼이 아니고 내 것에 내 집이 되면 곤란합니다. 내 몸이 내 영혼의 집이 되면 안 돼요 우리는 영혼, 육체라고 하는데 영혼 육체 합쳐서 몸이에요. 그 몸은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는데 그것을 두자로 “성전"이죠. 성령이 거하는 집이 성전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생각합니까? 거룩한 분을 담는 그릇에 위치로 리폼 돼요 형을 바꿔야 돼요 형태를 바꿔야 돼요 마징가에서 바뀌는 것처럼 또 얼마 전에 스필버그 영화에 나왔죠. 트랜스포먼 이죠. 주님께서는 강제로 우리 형태를 바꿔서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형태를 주님이 바꾸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는 부담을 느낍니다. 왜 부담을 느끼느냐 하면 자꾸 주님이 바꿔 버리면 나는 어디서 찾습니까? 지금의 나는 내 년 되면 다른 나로 다른 모습의 나로 또 주께서 손 데면 바뀌어요. 내가 알아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주변 상황이 나로 하여금 다른 나로 바뀌게 하는 겁니다. 그것도 감사하시기 바롭니다. 20대의 내가 계속 있으면 그것은 자칫 하면 미친 사람 돼요 몸은 70인데 마음은 20대라 간격이 너무 벌어졌어요. 황혼 이혼, 80돼서 이혼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것이 뭐냐 20대부터 계속해서 아내를 구박했던 그 버릇이 자기는 아직도 젊은 청춘이라는 거예요 젊었을 때 했던 행동을 그대로 하는 거예요 자기 아내를 종 부리듯이 하녀 부리듯이 부리는 거예요 그런데도 이 할머니는 50년 동안 견디지를 못하고 결국은 나가는 겁니다. “이혼해 줘” 그럼 남자는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너를 아는데 아무리 이혼해 달라고 해도 한두 번도 아니고 결국 이러다 만다, 내가 너를 안다니까 너는 뭘 해도 내기에 눌리게 되어 있어” 할머니가 오기가 나서 눌리는지 해 보자 이혼하니까 그 많은 재산 반 이상 할머니한테 다 날아갔어요. 이게 안 바뀌어서 그래요 늘 바뀔 생각하지 말고 바뀌게 되어 있는 것을 바뀌게 하실 때 늘 바뀐다고 마음 정리를 하세요. 본인이 바뀌게 되면 바뀐 본인이 또 자기가 되는 거예요 꼭 자기 마음에 드는 걸로 바뀝니다.
갑자기 키가 커진다든지 쌍꺼풀이 없는 게 있다든지 자꾸 자기의 구미, 입맛에 맞게 바꿔요 주님은 우리 입맛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입맛에 바뀌어서 트랜스포먼처럼 바뀌어져야 그 현장에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자기가 자기한테만 일해요 우리하고는 이야기 안 합니다. 창세전에 우리가 선택된 뒤 이미 미리 아신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부르실 때는 미리 아신다는 조건하서 우리를 미리 아신 자의 조건을 전달하는 용도로서 불러 주지 우리 구원하려고 불러 주지 않습니다. 창세전에 미리 알았다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협약한 것 계약한 것 그것을 위해서 불러 주지 나를 불러 주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 구원하려고 의롭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미리 아신 자를 구원하는 거죠. 그런 관계에 있어요. 불쑥 중간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미리 아신 자에 한에서 불러 주고 불러 주신 자안에서만 해당되지 아무나 의인된 다고 온다고 의인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으로부터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설교할 때 국도 하고 고속도로 이야기했잖아요. 국도하고 여기 철로 다니고 고속도로 있고 이런 길이 경상남도에 있어요. 세 길이 나란히 가요 기차 다니고 국도 다니면 모습이 아주 멋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국도에서 차가 폴짝 뛰어서 고속도로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반드시 고속도로는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하면 톨게이트를 거쳐서 돈 내고 끊어야 고속도로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톨게이트가 뭐냐?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 그것이 톨게이트에요 그런데 창세전에 미리 아신다고 했는데 우리는 창세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창세전에 사건이 여기 걸립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에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너 자신은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판정을 받습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죄인 되게 하신 분의 세계만 있지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시는 분의 세계에 우리가 합류하는 겁니다.
그것이 아들의 나라 그것을 천국이라 하는 거예요 천국은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트랜스포먼처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져요 피조물 만들 때 그 내용물은 우리가 채우는 게 아닙니다. 껍데기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집어넣고 이것은 허수아비나 베게 정도는 몰라도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내용을 채우는 것은 이 죄 많은 아담의 몸에다 내용을 채우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교훈 전부가 우리 안에 하나의 베게 속에 있는 솜처럼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껍데기는 난데 사실은 알맹이는 그리스도가 장착이 되죠.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쉽게 말하면 우리는 만두피인데 만두의 제 맛은 만두피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만두 속이 결정하지요 그 속 전부 누가 만든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만두피가 되고 주님은 우리의 속이 되는 겁니다. 박윤진 성도가 쓴 글을 우리 교회에서 강의를 했었어요. 글이 수십 년 만에 나온 것 같습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그 보다 뛰어난 글을 본적이 없어요. 그것을 요새 유행하는 말로 종결자다 모든 것을 끝내 주는 글입니다.
박윤진 성도님이 이야기한 것은 바로 성도 안팎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성도 안팎이니까 우리는 그 사이에 면피죠. 그냥 얇은 막이죠. 얇은 막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 안에 영혼이 들은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들어오시고 우리밖에 주님이 계십니다. 박윤진 성도의 마지막 그림이 이랬습니다. 네모 그려 놓고 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온천지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골로새서 1장 7절 보세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 영광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보다 더 귀한 것이 너희 안을 자랑하고 있으니 너는 이제부터 목적이 정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로 이미 우리는 종결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던지 아르바이트를 뭘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이런 것으로 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내 하는 직업으로 내 돈으로 내 능력으로 인생 가치를 결정하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해서 일 하시면서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편찬은 분은 아프시면서 감사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한 사람이 얼마나 부럽겠어요. 아픈데 무슨 감사가 나옵니까? 인간적으로 짜증스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막에 불과한데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안양에서 공부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말 수십 년 동안 빌라 살려고 하니까 짜증나는데 언제 넓은 아파트 하나 갖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게 되면 제가 지어냈죠. 주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빌라에도 수십 년 살만하던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본인이 사신 게 아니고 본인 안에 주님이 사시는데 주님이 빌라에서 살만하다고 하시는데 왜 껍데기가 못살겠다고 짜증을 내냐 말이죠. 우리 아이 공부 안 해서 죽을 맛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네 아이가 공부 좀 못해도 살맛이던데 ....... 우리가 얼마나 주를 받아들였다고 입술로 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우리밖에 세워 놓고 따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밖에 세웠다는 것은 주님을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우상시키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사나 죽으나,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얇은 막으로 살다가 만두 터지는 날, 김밥 옆구리 터지는 날 그냥 가면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나의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그것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님 훌륭하신 것 다 알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데 그 와중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는 나는 어디서 찾습니까? 하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8절 봅시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있는데, 4월 24일에 우리 교회에서 들뢰즈와 라캉과 개혁 주의 신학에 대한 강의가 시작됩니다. 들뢰즈와 랑캉은 최첨단 철학이에요. 최첨단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 있는 철학과 무관한 게 아니고 종합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첨단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철학을 하게 되면 앞의 것도 덩달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철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 다른 게 아니에요. 제가 철학의 노림수를 적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철학의 목적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야기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을 인간이 그대로 뺏겨서 자기도 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면 다냐? 나도 하나님처럼 좀 해 보자” 이렇게 나온 거죠.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귀신들이 하나님을 인정해요, 인정 안 해요? 야고보서 2에서 인정하지요 인정한 정도가 아니에요 귀신들이 한 분 인줄 알고 믿고 벌벌 떨지요 그런데 왜 벌벌 떠는 악마들이, 귀신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대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33살 먹은 나사렛예수가 남은 모든 인권과 모든 만물의 주로서 등극하는 것에 대해서 악마가 불만이 많은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죠. 악마처럼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고 누구를 배척해 버립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척해 버려요 당신은 죄만 씻어 주고 꺼져라 이 말입니다. 비켜라 나하고 하나님과 맞상대하겠다는 거예요 삼위일체 하나님과 맞상대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악마가 원래 노리는 거예요
사람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떨면 마치 자기가 유사 하나님이 된 것으로 확증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믿고 떨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면 “에라 지옥이나 가거라. 악마야” 이렇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악마의 특징은 자기 죄를 몰라요 오랜 만에 제가 바른 소리 합니다. 악마는 자기 죄를 몰라요 회개를 몰라요 자기는 피조물로서 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당신만 하나님 되냐 우리같이 하나님 되자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만 하나님 돼야 되고 피조물은 왜 피조물 되는가! 굉장히 불만이 심해요 주둥이가 항상 튀어나와 있어요. 불만이 가득해요 왜 그리 불만이 많으십니까? “나는 나다.” 이러거든요 “나는 나다.” 뭐라고요?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간섭하지 마라.” 이게 엑기스입니다. 모든 불신자들의 공통점입니다. 그게 안 될 때 자살 하죠. 왜, 자살함으로서 나는 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그런 내 목숨의 주관자라는 것을 죽으면서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겁니다.
그만큼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한 시도 본인은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대단한 존재들이에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 속에 인간은 가락 교회 표어가 이겁니다. “인간은 귀신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껍데기에요 안에 악령 들었어요. 하나님은 인정하자 그러나 예수는 인정하지 말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예수 그가 누구인데 우리 같은 피조물인데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데 평범한 청년인데……. 그런데 사도 바울 만난 분이 하나님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만 난줄 알았어요. “주여!” 하죠.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누구십니까?”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이 뭡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기전까지는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님 뭐냐 하면 우리와 같은 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직접 예수님이 주님이 돼서 나타나니까 주님이 바로 우리 메시야 구원자가 바로 모든 심판권이 33살 먹은 나사렛 청년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위임하셨다는 사실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분에 의해서 그분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지금 까지 운영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거죠. 사도 바울이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에요 여호와를 너무 잘 믿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렇잖아요. 하나님을 너무 잘 믿기 때문에 복음 아는 십자가 외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짓밟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목사 면책될 때 이유가 두 가지 밖에 없었어요. 왜 주일 성수, 십일조를 거부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왜 거부하면 안 되는데 하니까 웨스트민스터에 나와 있데요 뭐 웨스트민스터? 그게 어느 동네 이야기입니까? 웨스트민스터가 십자가 입니까? 율법 외의 한 의를 주장하니까 그건 맞데요 그러면 웨스트민스터는 율법에 속하죠. 그러면 웨스트민스터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로 찢어 버려야죠. 찢어도 구원됩니다. 여러분, 몰랐었어요? 찢어도 구원돼요 그들은 찢으면 구원 안 된 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자에요 웨스트민스터를 찢으면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웨스트민스터를 찢는 자에게는 구원을 안 준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복은 십자가 안에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복 받았어요. 저주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것으로 넉넉하지 않습니까? 마귀가 그것을 얼마나 싫어한다고요 마귀가 예수님의 피로 죄 없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들은 마귀의 앞잡이에요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런 현상들이 주변에서 파장이 일어나야 됩니다. 또 일부러 만들지 마시고 만들면 스데반 흉내 내는 거니까 안 되고 일부로 하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습니다. 내가 뭐 때문에 욕 얻어먹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주변에 광기가,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삶인 여기에 어두운 세력, 어두움의 욕조에 우리를 푹 잠긴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만약에 요한계시록을 모르면 우리는 우리 인간들만 까불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을 보면 우리는 욕조 안에 잠겨 있어요. 욕조 안에 잠겨 있는 돌멩이, 왜 제가 돌멩이라고 하느냐 하면 돌멩이는 알아서 기어 나가지를 못하니까 그냥 어항 속에 돌멩이 넣으면 돌멩이가 알아서 밖에 나갑니까? 그건 미친 돌멩이죠. 돌멩이는 그냥 안에 있어요. 못 빠져 나와요 요한계시록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 뭐냐 나는 인간하고 상대 안한다. 왜, 돌멩이기 때문에 백날 몸부림 쳐봐도 악마의 권세를 못 이깁니다. 따라서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귀신, 악마하고 상대해서 너희들을 거기에서 내가 건져낸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이야기입니다. 권세 받은 사람의 특징은 베게 안에 솜이 들어 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졸지에 만두피가 되고 주님 전체가 우리 안에 있어서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어린 양의 것이라 해서 그 속성이 주님과 닮았기 때문에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우리 성도는 졸졸 따라 다니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이미 아신 자에요 이미 아신 자를 불러 줬다고 하면 괜히 감사가 넘치고 그 부르신 자에게 의인이 된 다고 하면 의인된 것에 감사가 넘치고 여하튼 주님이 한 조치로 인하여 감사가 넘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이미 아신바 되지 못하면 감사 꺼리를 자기가 정해 놓고 이것을 해 내야 감사하겠답니다. 감사 헌금까지 준비해 가면서 이거 안하면 감사 국물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교회는 국물도 없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게 많습니다만 사도 바울 서신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 하나가 십자가를 십자가 사건으로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반드시 십자가를 어디에 담가 놓느냐 하면 바로 율법이라는 욕조에 담가서 십자가를 소개 한다는 이 점이 굉장히 어려워요. 인간이 있습니다. 율법 이야기하면 “율법, 예, 지키겠습니다.” 합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 이야기하면 “예, 지키겠습니다.”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율법에 하나 더 덧붙여진 율법이 되어 버려요 율법도 믿고 십자가도 믿고 주는 대로 믿습니다. 다 믿습니다. 뭐든지 다 믿으면 나중에 진짜 심판받으면 어느 하나라도 걸리겠지……. 마치 불신자들이 예수도 믿고 절에도 가면 나중에 진짜 진리가 보면 그 중에 하나라도 걸리면 구원받겠지 하는 식이에요. 어디 주식을 분식 투자 합니까? 이거 올라가면 저거 올라가고 손해를 주리려고 하는 펀드 정책입니까? 여러 군데 뿌려 놓으면 어느 한 곳에 열매 맺어서 손해 보는 것을 보충하려는 계산입니까? 여기서 율법과 십자가를 결합시키는, 연결시키는 행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네 원인이 모든 십자가의 원인이 딴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악마가 네 몸을 가지고 충동질해서 십자가와 다른 쪽으로 ‘나는 나다.’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나는 나다.’가 뭐냐 하면 내 몸을 건드리지 마라 진짜 나는 짜증난다. ‘하나님이든 예수든 여하튼 나만 건드리면 나는 한 성질 한다. 건들지 말고 구원하려면 안건들이고 구원하란 말이야 나를........’
그런데 그런 몸을 구원해 보면 그것은 악마마저도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타고 천국에 입성하는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병균이 우리의 손을 통해서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처럼 악마가 몰래 우리 몸을 타고 천국까지 악마의 나라로 전환시키는 그런 수작을 불린다니까요 그것을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모를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차단하느냐 하면 악마의 방식으로 구원되는 방법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거기에 행할 수 있다는 그 레벨의 율법을 줘 놓고 그 율법을 행할 수 있다는 레벨의 완성을 보여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모멸의 보면서 율법 완성의 진면목은 이거다 봐라 해서 십자가로서 다 이루어 버리죠. 너희들이 몸을 가지고 이루는 율법주의 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루는 율법 말씀과 어느 것을 하나님이 수용하고 천국을 이루는가 한번 보라 이 말이에요. 그것이 이미 구약 때부터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개입이 된 겁니다. 제가 안양 강의에서 했지만 언약의 특징이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언약은 단 한 사람에게 준 다는 것이 특징이에요. 노아도 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브라함도 한 사람, 모세도 한 사람, 예수님도, 새언약도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을 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그 한 사람에게 왔음, 왔다는 것, 축복의 기준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 한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으면 저주를 받는 방식으로 하나님께로 언약이 개입되고 구원을 해 주는 겁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은 마치 피뢰침 같아요. 번개가 쳐도 하나의 계통, 피뢰침을 통해서 땅으로 흡수되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하나를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 아닌 우리의 뭐가 깨집니까?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이러한 나의 구호가 하나님께서 힘이 된다, 안 된다? 힘이 안 돼요 그것은 우리가 괜히 땅에서 해 본 소리지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동의 한 적이 없습니다. 땅에서 하는 모든 인간들의 염원과 집착과 간구와 기도가 뭐냐 하면“주여, 저 알지요? 나는 납니다.” 이 고집이 커지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법을 위반하고 있는 데 이 고집이 커지는 것이 ‘나는 나다.’로 키워 달라는 거예요 그게 마귀가 풍선에 바람 불듯이 불어서 만두피가 커지는 거예요 커져서 이것 그대로 천국에 넣어 달라는 거예요 교회마다 이것 부르짖고 있습니다. 과연 그 결과의 귀추가 주목되지요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10408b (할례와 십자가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철학이라는 초등 학문, 그것이 속임수라고 했는데 철학이 사람을 뭘 속입니까? 돈을 빼내기 위해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속아서 빼낼 것이 있어야 사람을 속이는데 철학과 세상 초등 학문이 무엇이 답답한 것이 있어서 사람을 속여서 빼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무엇을 겨냥한 속임수냐 하면 바로 23절에 보면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것이 헛된 그것이 사람의 돈을 빼먹기 위한 그런 천박한 사기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초등 학문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인간들이 심오한 종교적인 것, 굉장히 경건해 보이고 엄숙하고 진지하고 농담이 아니고 진지하게 신은 누구며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사는 목적이 뭐며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가 뭐냐 하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반대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까? 십자가를 반대하고 십자가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예수님 십자가 그거 그 당시 예수님 죽이는 거 아이고 잘한 조치야, 예수님 죽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지혜의 절정이고 오른 판단이라고 결정 내리게 한다 이 말이죠.
십자가 유대인들에게만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십자가 지는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짓밟히고 ……. 항상 짓밟혀요 그 짓밟혀야 하는 의미, 사고방식이 뭐냐 그것이 바로 세상 철학이고 초등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십자가 초등 학문, 철학은 뭐냐, 개혁 주의 신학이죠. 신학이 바로 철학이고 초등 학문이에요. 거기는 십자가를 박살냅니다. 십자가를 모독하고 해방해요 여기서 사도 바울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말은 십자가 외에 달리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다른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공격한다는 이 말은 십자가 말고도 십자가 아니고서도 우리가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구원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나름대로의 신학을 끄집어내고 철학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게 초등 학문이에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그들의 하는 행동이 자기가 마치 과거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가 주님을 몰랐을 때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을 때 내가 육인 것처럼 같은 동료의 육인 줄 알았을 때 그때 하는 짓거리고 지금은 예수님을 육이 아니고 영으로 해석을 하야 한다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십자가로 승리했는데 십자가 아닌 유사 십자가, 인간을 고양되게 만드는 엉터리 십자가 또는 엉터리 복음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십자가를 못 보게 훼방할 때 사람들이 왜 좋아하느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 이유는 나의 가치가 손상되지 않고서도 구원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나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도 안 다치고 이 가치는 그 정도 유지되어서 죽어서 좋은 천국도 갈 수 있는 그런 관계,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자기가 다치기를 싫어할까요? 그것은 인간은 인간에게 봉사하고 인간에게 인간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면서 투자 하면서 사는 게 돼요 사람의 모든 투자가 결국은 누구 좋으라고 그것은 겁니까? 나 좋아라고 공들이는 겁니다. 애쓰고 공들이고 다듬어 왔고 예쁘게 포장해 왔고 다른 사람은 죽어도 눈 끔쩍 안하지만 내 손가락에 약간 피만 나도 나는 온천지가 노랗게 달라지는 것처럼 일본에 지진이 나서 2만5천명 죽어도 그것은 개죽음이고 우리 집 강아지 죽으면 대성통곡하죠. 우리 집 강아지 한 마리는 일본사람 2만5천보다 더 가치 있는 거예요. 그것은 강아지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강아지 자체가 가치 있는 게 아니에요. 왜, 강아지 죽어도 소용없어요. 산채로 매장해도 그것은 가치 없어요. 그 강아지가 누구 강아지입니까? 내 강아지고, 왜 내 강아지입니까? 내가 신경 썼고 사랑을 베풀었고 애정을 쏟았고 사랑을 쏟았고 침대에서 같이 뒹굴었고 오줌 싸는 것 내가 손수 다 닦아냈거든요, 엄청 강아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강아지한테 인터뷰해 보세요. 강아지야 누구를 사랑 하냐? 물으면 강아지는 주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강아지는 오직 강아지만 사랑합니다. 밥 먹을 때 밥 그릇 뺏으면 물어 버립니다. 그것은 꼭 강아지뿐만 아니라 여러분 옆에 있는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 물어보세요. “너 커서 누구 같은 사람 될래?” “난 아빠 같은 사람 될래” “너는? " ”나는 엄마 같은 사람이 될래.” 커 보세요. 존경하는 인물이 바뀌지요, 동방 신기로 바뀌고 카라로 바뀝니다. 존경하는 인물이 바뀌어 버립니다. 박지성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런 존재로서 태어났는데 이것을 가지고 다윗은 언제 알았냐 하면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자기 손으로 간음을 지었을 때 비로소 내가 주께만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죄의 근본 죄는 사람과 사람을 비교해서 나타날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비로소 드러나는 죄의 일부가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죄인인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영으로 즐거워한다 하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인 것이 그렇게 춤을 추듯이 즐거운 거예요. 그동안 내가 죄인이 아닐 수 있는 것 때문에 얼마나 평생 시달려 왔습니까?
무거운 짐처럼 십자가를 짊어지는 거예요. 나는 건전할 수 있다, 나는 훌륭할 수 있다, 나는 남에게 욕 안 얻어먹을 수 있다, 나는 남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허구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다 보니까 그것이 얼마나 자기를 위선자로 힘든 껍질을 만들어 냈습니까? 그것을 마스크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가면, 결국 우리가 부르는 것은 가면 속의 아리아입니다. 모든 이 세상에서 나오는 몸짓과 태도들이 우리의 모든 것이 그러면 진리가 어디 있느냐? 이 가면 속을 까 보는 것 이 자체가 진리에요. 가면 벗기면 진리가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가면을 벗겨 버리면 우리는 피부가 같이 뜯기기 때문에 아예 내가 없어요. 우리 얼굴 자체가 악마가 준 칼이에요. 우리는 가면 있고 우리 본 모습이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위장하는 것이 내 모습이고 여러분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른 눈을 떠안고 왼눈이 죄를 범해요. 몸 전체, 다가 가면이기 때문에 어디를 자른다고 해서 우리의 본모습이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자르려면 다 잘라야 돼요. 텍사스 전기톱 사건 일어나든지 큰 고목 넘어갈 때 옆에 바로 누워 계시면 윙하고 큰톱이 돌아갈 때 잘게 썰리면 나중에 집에 키우는 강아지 개사료로 들어가죠. 이 이야기가 유명한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것은 주님이 가루가 되었다는 거예요. 가루가 되어서 자기 백성에게 가루탄 음료수로 들어가는 거죠.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여 입자가 되어 피에 섞여서 같이 들어가고 그 살점이 우리와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 온 몸이 주님의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이야기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손으로 손을 델 때가 없어요. 왜? 전체가 가면이니까 가면 벗기면 우리 자체도 날아가 버리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식의 존재를 주께서는 보여도 되는데 그러한 가면 속에 있는 죄밖에 없는 인간을 가지고 주님 자신을 들어낸다는 이 놀라운 사실, 쓰레기는 버리면 되는데 버리지 않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등장하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뭔가 하면 자기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만 범죄 했다고 하잖아요. ‘주 앞에서만 범죄 했습니다.’하는 그 다윗이 어떤 의미에서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준 거예요. 주께만 범죄 했다고 하는 고백이 나오도록 위에서 조치한 것이 아니고 다윗 속에서 하나의 성령으로서 주께서는 역사해 버리죠. 그러면 주께 죄를 범하던 인간에게 죄를 범하던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니까 버림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버림받는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그 장소가 마련돼야 그 장소마저 아버지께 버림받은 게 다소 해소가 된다면 어떤 인간의 죄도 용서가 되는 그런 근거가 마련되죠. 말이 좀 어렵죠.
쉽게 설명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죄 있는 사람의 몸에 다 쓰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디 갔다가 날이 너무 더워서 하나로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산적이 있어요. 아이스크림 이름이 옥동자라는 아이스크림이었어요. 하해서 크림 인줄 알았어요. 깜박 속았어요. 그런데 깨물어 보니까 안에 시커먼 것이 초콜릿 덩어리가 들었어요. 제가 초콜릿을 안 좋아해서 먹다 버렸어요. 반 먹다가 몸에 해롭다고 핑계되고 버렸는데 비싸지도 않고 5백 원 주고 샀습니다. 사람 몸이 자기는 멀쩡하다고 본거예요. 여기에 십자가의 흔적을 딱 내 버려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한 속성이 이 안에서 찢어지는 십자가 안에 새어나가게 되어 있어요. 새어나옵니다.
할례가 뭐냐 하면 사람의 몸에 하나님의 십자가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제가 십자가 흔적 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비약된 것 같아 다른 말로 합시다. 언약의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것이 또 어려운 데요 처음에 노아때 언약의 흔적은 어디 있냐 하면 인간의 몸에 있지 않아요. 어디 있냐?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 궁창에 있어요. 하늘 궁창에 떠 있는 게 뭐죠? 세자로? 영어로 레인 보우, 무지개에요. 무지개가 궁창에 떠 있음으로서 이제부터 모든 자연 세계는 하나의 은혜의 조건하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이 땅에서 악하던지 선하던지 그런 것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거예요. 심지어 악한 김정일에게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사람에게도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흔적이 어디 있다? 공중에 있기 때문에 공중 아래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햇빛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증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은 사람에다 새겨 버려요. 사람에게 새겨 버리면 그렇게 언약이 새겨진 사람만 구원받는 그런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가 할례 받은 것을 곧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보통 묻지요. “제가 구원받은 거 맞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옛날 유대인 같으면 어떻게 대답 하겠어요? 고추 한번 봅시다. 간단해요. 굉장히 간단해요. 고추 한번 봅시다. 어이구, 할례 받았네! 구원됐습니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요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헷갈리지 않고 문신하듯이 하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는 말입니다. 사람 몸에서 죄를 끄집어내는 것은 일부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전체가 사실은 구원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는데 누구에게 드러내느냐 하면 할례 받은 그 민족을 통해서 드러내시죠. 그러면 그 할례 받았다고 자부하는 그 민족은 아브라함의 본 천국의 자손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요. 할례 받은 그 민족은 본 자손이 되지 못하고 할례 받지 못한 백부장이, 원래 천국에 간다고 우기던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다 쫓아내고 백부장, 백부장이 뭐했습니까? 주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나이다. “이리와 내 이 빈자리 차지해”본 자손들은 쫓아내고 진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뭘까요? 바로 이 할례 받은 이 몸 자체는 구원받은 용도로 받은 게 아니고 그들은 착각했어요. 구원받은 흔적이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좋다고 고추 내놓고 다녀요. 구원하는 게 아니라 구원자가 따로 있는데 그 구원자는 바로 인간의 죄를 듬뿍 안고 되는 구원자에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까지 다 품고 있는 그분이 구원자에요. 죄인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를 구원시키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가 자기한테 할례를 행하고 피가 날 때 할례가 피가 나는데 피가 났을 때 이 피는 내가 마땅히 피 흘려서 죽어 마땅한 것으로 이해하다면 그 사람은 바로 자기를 구원자가 자기가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 연관성이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할례 받은 그것이 잘난 내가 할례까지 받았으니까 더 잘난 것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할례의 본래의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할례 본래의 의미가 뭔가 하면 주께서 십자가를 보여주셨어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할례라는 것이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 내거든요. 그것을 성경 본문, 2장에서 벗긴다고 돼 있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벗습니까? 육을 입은 몸을 벗는 거로 보는 거예요. 십자가를 끝만 벗기지 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벗으란 말입니다. 몽땅 다 벗기면 죽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내가 죄지은 것 맞는데 죽어 마땅한 정도가 아닙니다. 버티기 때문에 구원자가 될 수 없어요. “주여 용서하소서!” “왜, 용서해야 되는데?” “저는 아직 죄는 졌지만 그래도 챙길 것이 몇 개 나올 겁니다.”하면 주께서 놀고 있네! 합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구원 받을 사람도 없고 구원자도 아닐 뿐 더러 구원받을 사람도 없어요. 또 구원되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구원은 유일하게 모든 죄를 알고 있는 그분의 손에 일임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원하는 자만 구원하지 구원받고 싶다고 손 내미는 사람이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미리 그런 마음을 주신 구약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나 엘리야 이런 사람은 주께서 변화산에서같이 이야기 하고 “주님 빨리 별세해야 됩니다. 내가 평생 선지자 노릇 하면서 내가 죄로 태어나서 죄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을 거예요. 아마 다윗도 들어갔으면 다윗도 마찬가지로 “나는 죄 중에 모태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성경에 있는 이야기 그대로 했을 거예요 “좀 기다려 봐라 때가 돼야 내가 죽는 거야”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돼요. 우리가 구원된 근거는 내가 아무리 교회 나와 충성을 다해도 그것은 결코 구원되는 근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게 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뭘 해도 우리는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철학과 초등학문에서 십자가가 나옵니까? 십자가가 나오지를 않아요. 왜 십자가가 안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 어떤 경우에 나오느냐 하면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됩니다. 라는 것이 십자가거든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그것을 다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뭘 해도 죄가 됩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은 죕니까? 죄가 아닙니까? 그것도 죄죠. 그러니까 뭘 해도 죄입니다.
설령 뭘 해도 죄입니다. 라고 인정했다고 해서 그게 의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뭘 해도 죄입니다. 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몸을 가지고 아버지한테 이미 몽땅 다 공개 했어요. 다 보여준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할 때 이미 우리는 뭘 해도 이미 죄인인 것이 다 들어 났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초등학문를 요구해도 결국에 마지막에 찢긴 채 남아 있는 것은 이 정도로 깨닫고 이 정도로 성실하고 이 정도로 착하고 이 정도로 연구를 많이 했으면 누가 뭐래도 신이와도 이것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마지막에 놓은 것은 손에 쥐고 놓지를 않아요. 이게 존재의 의미소라고 하는데 마지막 존재, 자기 존재를 놓지를 않는 겁니다. 법은 있다고 하는 사람의 특징은 죄인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내가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건전하잖아 그것은 안 놓고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쥐고 있으면서 나처럼 쥐지 않아야 구원받는 다고 행함을 또 같은 동기생을 찾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했다는 말은 우리도 함께 율법 지켰다고 우기는 모든 인간들이 다 같이 밟았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승리입니까? 예수님 혼자 본인의 승리에요. 본인이 승리했고 구원의 문제는 누구에게 넘어갔습니까? 우리 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손에 넘어갔습니까? 이미 예수님의 손에 넘어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줄로 받는 사람은 죄인이 예수님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넘치는 감사함으로 받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주님을 모실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영화에 보니까 소위 조폭들이 아부할 때 어떻게 합니까? “형님을 형님으로 모시게 돼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하죠. “어떻게 이런 분을 우리 형님으로 모셨습니까? 잘해 누가 나보고 넘버 쓰리야 난 넘버 투야” 이렇게 나오죠. 왜 이것을 주님 앞에 못하냐 말이죠. 만날 주둥이 툭 튀어나와서 하나님이 해 준 게 뭐 있나 불평하지 말고 예수님을 주라고 영광스럽게 볼 수 있는 것이 제가 심히 영광스럽습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감사가 넘쳐 난다는 거예요. 그중에 한 사람,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거예요. 나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만 창세전에 이미 예정 하사 나로 하여금 복음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된 직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얼마나 감사하고 이런 현실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참된 현실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현실 같다는 거예요. 이것을 랑카의 용어로 실제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9절에 봅시다.
골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여기 육체라는 말이 나왔는데 육체는 뭐로 충만한 육체입니까? 신성이니까?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말하죠. 하나님의 모든 성품, 육체가 있지요. 그러면 그 육체는 나의 육체는 아니죠. 주님의 육체잖아요. 주님의 육체가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인간들의 모든 철학과 초등 학문은 누구를 알아듣게 하는 말입니까? 인간이 누구를 위하여? 같은 인간들을 생각하죠. 그러면 여기는 신성이 들어 있습니까? 인간성이 들어 있습니까? 인간성이 들어 있죠. 인간성이 들어 있으니까 여기는 뭐가 빠져 있는 거예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 부분이 없는 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항상 미완료로 남아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접근해도 미완료로 계속 유지된다 이 말이죠. 하지만 충만해 지면 신성이 충만한 육체가 온다면 모든 것은 그분의 신성이 충만한 육체 중심으로 움직이겠죠. 이 자체가 완료가 되고 완료가 다 이루었다 하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된 현실이 이것뿐 이라는 겁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인간들이 계산한 가상현실에 불과 한 겁니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간단한 실험을 해도 알 수 있어요. 우리 이 어린이가 서울에서 살다가 중학교쯤에 미국에 유학을 갔다 합시다. 기분 좋은 이야기해야죠. 돈도 없는데 자기가 천재가 돼서 자기가 공부해서 미국에서 돈을 대서 유학 갔다 합시다. 한 30년 만에 돌아왔다 합시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계속 한국에 산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 골목 전봇대 더 이상 신기한 게 없는데 이 아이가 나이가 30넘어서 40세쯤 돼서 오게 되면 하나하나가 과거 어릴 때 뛰놀던 그 골목 돌아서면 전봇대, 전봇대의 광고지 하나,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 하나……. 그 모든 것이 다 생각이 떠오르겠죠. 그게 환상 아닙니까? 그게 환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억이 있다는 말은 세상을 볼 때 진실 되게 보지 못하고 추억이라는 이런 안경을 통해서 중간에 매체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어릴 때 되게 한 대 얻어맞았던 친척 사촌 누나가 있다 칩시다.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었다 칩시다. 그 친척이 왔다 칩시다. “누나 돈 빌려줘” 그 동생은 자기가 누나 괴롭힌 것은 생각 안하고 지금 사업이 안돼서 돈이 필요한 생각만 하고 왔잖아요. 자기 나름대로 진실 아닙니까? 그런데 누나는 뭘 본다? 어릴 때 추억의 안경으로 보죠. 속으로 ‘나 어릴 때 괴롭혔는데 이제 와서 너 아쉬운 소리 하냐?’ “돈 없다” 하니까 준비된 휘발유 가지고 불 질러서 자기도 죽고 누나는 뛰어내리다 나무에 걸려 살고 손자는 죽고 ……. 왜 사람은 의사소통이 안 됩니까? 항상 추억이 따르기 때문에 그래요. 또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1학년인데 선생님한테 뺨을 너무 맞아서 얼마나 뺨을 맞았는지 앞에서부터 저 끝까지 뺨을 맞았어요. 그때부터 학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학교를 안가고 학교를 뱅뱅 돕니다. 공부하기 싫어요. 기껏 중학교 때 깨달은 것이 기타를 치는 겁니다. 이름이 김태원이라해요. 마약하고 사회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그게 부활의 리더 아닙니까? 그게 본인 마음에 추억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는 잘못한 게 있지만 내가 얻어 죽을 만큼 그렇게 죄인은 아니라고 각자가 자기를 정당화 시킬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추억의 안경을 누가 다 박살내 버립니까?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시켰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나가서 보여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든 죄를 끄집어내고 죽여 버리니까 어떤 인간도 현실을 아는 인간은 한명도 없어요. 진짜 진실은 바로 십자가로 인간의 환상을 벗겨 내는 그 일에 대성공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로 승리한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온 게 율법과 절기, 율법과 절기를 지킬 때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율법과 절기를 지키잖아요. 그 나름대로의 노림수가 뭔가 하면 내가 이것 지키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노림수, 그 노림수가 십자가로 승리했다는 겁니다. 현실이 아니다. 그 율법과 절기와 모든 것들은 네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죄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도말한다는 말은 찢어 버린다, 없앤다, 같은 말입니다.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결국은 십자가가 질근질근 짓밟는 게 뭡니까?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정당성이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모든 법들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의인됐는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율법을 도입해서 율법을 지켜 의인되고자 한다면 무슨 의도가 날아가 버려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히 박살나는 거죠. 결국은 십자가 보다 누가 승리해요? 초등 학문이, 철학이, 우리가 승리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승리한 게 아니고 철학이 승리한 거예요. 철학이 승리하게 되면 소크라테스가 부활해야 됩니다. 부처가 부활해야 돼요. 왜? 승리했다고 하면 자기가 큰소리친다고 우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할 때 그분만이 진정한 마지막 승리자가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돼요? 부처를 의지해야 돼요? 예수 잘 믿는 나를 의지해야 돼요? 십자가 승리하신 주님 앞에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무슨 고백을 합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냐?” “주께서 십자가 증거하라고 그렇게 만들었잖아요.”다윗이 한 이야기에요. 주께서 그렇게 나로 하여금 살릴 수 있고 간음하게 만들었잖아요. 주님이 다 내 십자가 들어내서 내가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즐거워하도록 그렇게 만들었으면서 아이고 모른 척하고 내가 알아 버렸는데 그래서 죄지어 놓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진정한 감사라 하는 것은 자기 소원이 달성될 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해요. 게임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못 보게 하는 계속 자기 환상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람이 도박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도박에서 한번 딴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이거 장땡만 나오면 따는데 장땡이라는 단풍 두 장이 그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단풍 두 장으로 승리한 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장땡으로 승리한 거 포커로 승리한 거 그 환상 속에 자기는 종이 된 거예요 십자가의 종이 되면 현실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꾸며낸 도박이라든지 또는 어떤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상황, 만약에 거기에 환상을 현실로 간주해 버리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술을 왜 먹습니까? 술 먹고 기분 좋았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먹는 겁니다. 평생 동안 술을 먹어본 사람이 저에게 이런 교훈을 해요. 목사님 술에 대해서 모르고 계신 게 많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먹으면 필름이 끊어진다는데 진짜 끊어집니다. 두 번째는 술은 쓰기 때문에 억지로 먹는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먹지만 술을 자주 먹는 사람에게는 술이 달콤합니다. 그 두 가지를 모릅니다! 하는 거예요 제가 아는 것은 그것마저 십자가로 승리했다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술에 다가 자기의 감사함을 얻고 술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자기한테 미련을 갖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 내가 장사하던 사업을 하던 간에 무엇을 하던 간에 그 현장이 주님이 주신 현장이 되는 겁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해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게 하시는 군요. 하고 감사함이 넘치는 겁니다. 지금도 안 놀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신에 것에 대해서 감사함이 넘치는 겁니다.
구득영 목사님이 지금 돈가스 집을 하는데 녹차를 볼 때 마다 생각나는데 녹매교회가 ……. 돈가스 집 그만두고 목회한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일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목회를 하던 뭘 하던 간에 그 일속에서 더욱더 내가 죄인 되게 해서 자꾸 내가 꾸며낸 환상을 깨부술 수 있는 고마운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에요. 뭘 안하고 목회를 하겠다고 뭔 정약을 꾸미면 반드시 정약은 법과 규칙이 들어가요. 목회를 하던 뭘 하던 간에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감사하잖아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주여 내가 일을 해서 이 밥을 먹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하게 하셔서 이 양식이 입에 들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계속해서 예수님의 승리, 십자가의 승리가 된다면 그것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된다는 그 놀라운 현실의 한 틈새에서 감춰 줘서 나오는 빚어진 그 흔적이 바로 거기에 남겨진 거예요 주께서 일하고 있다는 자국이 남기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승리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15절에 보세요.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렸다고 했죠. 정사와 권세가 뭔가 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셨잖아요? 시험받을 때 마귀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게 뭔가? ‘너 지금 죽으면 주의 일을 못해’가 그게 밑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요. ‘일단 밥 먹고 살아야 일이 되지 네가 죽으면 소용없는 거야’ 정사와 권세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그 악마를 가지고 정사와 권세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정치, 더위에 있는 것이 마귀에요. 땅에 있는 정치꾼들은 땅의 질서인데 땅의 질서를 누가 조정합니까? 땅에 숨어 있는 짐승이 땅의 질서를 호령합니다. 그게 허락하신 거예요. 이 지상에는 미카엘에 패배한 악마가 내려와 있어요. 그것은 세상의 임금입니다. 이 세상에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죽었어요. 맞지요? 그런데 죽어야 예수님이 마귀에게 죽어 줘야 그 마귀만 이길 수 있는 부활의 십자가에 효력이 나타날 것 아닙니까? 그 지옥마저 마귀마저 이긴 힘이 지금 여러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법을 지키다가, 질서를 지키다가 거기서 환상이 빠질 만하면 법과 규칙을 이기신 정사와 권세마저 이기신 죽음마저 이기신 그 영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면 주께서 승리하셨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 문득 문득 깨닫게 되는 겁니다. 주여 제가 지금 이거하면 죄가 되지요? 죄지으면 저주 받죠? 저주 받으면 안 되는데 분신 사바사바 분신 사바사바…….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여 이 헌금 천원을 보탤까요? 말까요? 보태면 복 있고 더 하면 아깝고 이거 어떻게 할까요?”분신 사바가 내가 이 법을 떨 때에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어떤 아름다운 미래상의 환상인데 그 환상을 억지로 현실로 만들려고 시도 할 때 법과 규칙을 내가 만들어 낼 때 법과 규칙을 무관하게 승리하신 십자가의 승리가 주어지게 되면 오늘도 주의 노동으로 사는 것을 가지고 괜히 내가 용 써서 내가 살아온 것처럼 또는 내가 환상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자백할 수밖에 없죠.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승리를 들어내는 멋진 순간입니다. 스냅사진 찍어 놔야 돼요 성령이 임한 순간이기 때문에 …….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한 판단 법에 대해서 우리 심판에 대해서 날마다 책망하죠. 꿈에서 깨어나라 승리한 것은 십자가뿐이지 네가 너 나름대로 승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너한테 허락한 적이 없다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안 들어요. 그 뒤에 보세요. 말 안 듣는 이유가 있어요.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23절을 그냥 이야기할게요.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있다 했습니까?
없다 했습니까? 유익이 없다, 다시 말해서 네가 만든 환상을 쫓아내는데 네가 용쓰고 애쓴다고 환상이 너희에게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십자가 앞에 설 때 나는 처음부터 모태의 죄 중에서 태고 났고 내가 살아 있는 모든 것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매개체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모든 환상에서 떠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나름대로 내가 거룩하고 나름대로 헌금하고 나름대로 내 구원 챙기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나의 육에서부터 떨쳐 낼 수 있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먹는 거 마시는 거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징크스처럼 하나의 자기 나름대로의 법과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과 규칙은 반드시 환상을 자아냅니다. 반드시 내 기준이 개입돼요.
여러분 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못 지키면 법을 만들지를 않아요. 사람이 법을 만들 때는 자기가 꼭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나는 병을 딸 때 이렇게 딴다. 이렇게 따니까 재수가 없던데 저렇게 따니까 한번 재수가 좋았다니까 그때부터 이렇게 따기 시작해요 이게 뭡니까? 환상이죠. 좋다 나쁘다는 우리에게 해당이 없어요. 우리는 이미 죄인인데 새삼 뭐가 좋은 게 있습니까? 다만 우리가 죄인인 게 아는 것이 좋지요 그러면 일부로 재수 없는 쪽으로 해 버려요 재수 있는 쪽으로 하지 말고 재수 없는 쪽으로 해서 환상을 한번 깨 보세요. 그러면 그것조차도 재수 없는 쪽으로 하는 그것이 다시 규칙이 될 거예요. 그러면 어떤 경우라도 주님이 도와주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나의 몸에서 생산된 환상을 추방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냥 사세요. 사시다 보면 먹구름 갠날 옵니다. 먹구름 갠날 오면서 내가 환상 속에 평생을 살아가고 있구나! 그 환상을 기준으로 해서 남을 평가했구나! 저 사람은 마음에 드는 사람, 나쁜 사람 마음대로 했구나! 그냥 주변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든 간에 그게 주어진 것도 내가 이렇게 구원될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멋들어진 미리 아신 자에 대해서 의롭게 하기 위해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주관하는 게 아닌데 우리가 권세와 정사를 이긴 게 아닌데 주께서 이기신 분이 우리를 다루셔서 우리가 더 이상 법에 얽매이지 않고 십자가의 효력으로서 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껏 세상에 넉넉하게 자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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